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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08 강윤후 - 쓸쓸한 날에 (1)
  2. 2010.12.31 강윤후 -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쓸쓸한 날에

-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 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들려주어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打電하는 것 같기에


<출처> : 강윤후, 다시 쓸쓸한 날에, 문학과 지성사,1995.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에야
비로소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란 사실을 알았다.

문학도, 예술도, 철학도 실연의 상처, 헤어짐의 상처...
그 너덜거리는 불면의 상처를 꿰매어주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노래들이 사나운 가시가 되어 달려들었고,
헤어진 이와 추억이 맺힌 장소를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별한 이가 나 없이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모든 노래가사는 거짓이다.
그럴리가 없다.
나 없이 그대가 행복한 것이 무슨 의미랴.
그건 저주를 삿된 말로 꾸미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작별한 이의 행복을 마음속으로나마 빌어줄 수 있게 된 것은
간신히 그 사람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뒤였다.

사랑이란 ...
그런 것이다.

줄에 묶인 채 처량하게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한 마리 개처럼
왈왈 짖는 것, 자신의 목에 걸린 줄 길이만큼만 달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숨이 막혀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순간까지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일이다.    

고상하게 짖는 법을 가르치는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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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 강윤후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


내가 기거하는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은 바람의 길 옆이라 담배라도 한 대 태우기 위해 그 길 옆에 서면 하루종일 바람소리가 '휘이휘이~'하며 불어댄다. 하늘, 바람, 구름, 돌, 꽃, 나무, 숲, 달, 강, 호수, 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연의 이름들이지만 이중 내가 유독 좋아하는 것은 '바람'.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대기의 흐름이 자아내는 오묘한 기운의 흔적이 바람이다. 내 나이 올해로 마흔, 내년이면 조선 나이로 환산해도 마흔, 시인이 말하는 바대로 나는 불혹(不惑)의 나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이다.


그러나 살갗에 닿는 저 바람은 언제나 나를 길 위로 끌어들이고, 그 길 위의 바람소리는 내 삶의 거죽을 세차게 잡아 당긴다. 삶이여, 삶이여, 나를 더 많이 흔들어다오. 흔들리며 흔들리며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불혹의 나이, 비록 부록처럼 남겨진 삶을 산다해도 나는 여전히 저 바람소리에 현혹당할 것만 같다. 불혹 혹은 부록의 삶을 산다해도 그것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뿌리 내린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내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유혹도 없이 산다는 거, 나는 하나도 반갑지 않다. 그러므로 바람이 날 유혹하는 한 언제까지나 내 삶은 언제까지나 흔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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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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