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작고, 좀 더 직접적이며, 좀 더 일상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



문화정책을 비롯해 문화의 다양한 의미체계를 연구하는 문화연구자이지만 공공미술 영역은 미술 전문가들이 논해야 할 분야인 것 같아 공연히 주눅부터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공공미술이란 말 자체가 ‘Public(공공의)’과 ‘Art(미술)’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란 점에서 미술이 아닌 공공성에 강조점을 두고 살펴본다면 논의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에 대해 논의하기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공공미술에 대한 명확한 개념 설정 없이 대형건축물이나 공공장소에 으레 놓이기 마련인 환경조형물이나 거대한 미술장식품으로 혼동되어 버린 현실에 있다.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전시장과 미술관에 갇혀있던 예술작품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흔히 ‘미술장식법’이라 불리는 문화예술진흥법 제3장 11조 「건축물에 대한 미술장식」은 공공미술에 대한 개념을 우리 사회에 처음 도입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미술을 통한 도시환경 개선과 창작 지원이라는 애초의 취지와 달리 미술장식법에 따른 전시작품들은 작품선정과 심의 과정을 둘러싼 로비와 금품 수수 의혹 등 추문에 휩싸였고, 심지어는 도시 미관을 해치는 시각공해의 주범으로 몰리기까지 했다. 좀더 심각한 문제는 공공이 주도하고, 보다 광범위하게 설정되었어야 할 공공미술의 주체와 영역을 건축주와 일부 조각가 사이의 문제로 고착시켜버렸다는 것이다.

본래 공공미술이란 개념은 1967년 영국의 존 윌렛이 『도시 속의 미술(Art in a City)』이란 책에서 소수 전문가 집단 - 아트디렉터, 화상, 큐레이터, 비평가, 수집가 - 에 의해 규정되는 미술, 다시 말해 작품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일부에 의해 규정되는 예술적 향유가 마치 일반 대중의 미적 감각을 대변하는 것처럼 전유(appropriation)되는 것을 비판하여 대중의 정서가 개입하는 미술개념으로 출발했다. 일부에 의해 독점되고 과잉 표상되는 미술을 대중에게 환원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올림픽 이후 한국 사회에서 공공미술은 전통적으로 공공장소(public space)에 유명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래 공공미술에서 상정하는 장소는 단순히 물리적 위치로서의 공공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 문화적 ․ 정치적 소통의 장(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공미술의 본래 개념은 공공미술의 영역을 기존의 전통적인 회화 작품이나 조각에 국한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창조의 주체 역시 지역공동체와 관람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포함하는 영역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년 연말 인천문화재단이 보여준 <인천미술은행 소장작품전>은 인천의 공공미술이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인천문화재단은 지난 2005년부터 추진해온 ‘인천미술은행 기반구축사업’의 의미를 “소장 작품의 활용은 인천의 공공장소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데 소중한 디딤돌”이라고 자평했다. 인천미술은행 사업은 시립미술관조차 없는 인천미술계의 답답한 현실 속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사업이며 인천문화재단이 향후 추진해나갈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아직 시행 초기에 있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더라도 인천문화재단이 생각하고 있는 공공미술의 개념이 아직도 과거의 인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염려를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실제로 미술평론가 민운기는 「미술은행, 그만하거나 제대로 하거나」(황해문화, 2009년 봄호)를 통해 인천미술은행 사업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 - 최근의 다양한 성과물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공모제 중심의 심의 및 선정 방법 등 - 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내용은 앞의 글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되고 있으므로 여기에선 길게 다루지 않겠다. 다만 위의 사업을 통해 노출된 인천문화재단의 공공미술 개념이 지닌 문제점에 대해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첫째는 공공장소의 개념이 여전히 물리적인 장소에 국한되어 있고, 둘째는 공공장소가 예술작품의 대여만으로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발상의 소박함으로 인해 변화해가는 공공미술 개념의 추이를 뒤쫓지 못하고 있으며 셋째는 창조 혹은 전유의 주체로서 지역공동체와 관람객의 참여를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중앙과 지방을 떠나 공공문화정책의 입안자들 혹은 그보다 좀더 상위의 지위를 차지하는 선출직 공무원들은 여전히 크고, 돈 많이 들어간 것이 좋다는 거대주의, 공공건물을 짓거나 전시회, 이벤트를 개최하는 전시성 업적주의, 다른 한 편으론 아카데미, 유명작가, 개인전, 수상실적 같은 권위에는 쉽게 복종하면서도 대중에 대한 공공문화서비스는 일종의 시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삶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추진되어야 할 문화정책은 거대주의, 업적주의, 권위주의를 벗어나 대중을 직접 찾아가는 시민참여(public access)의 문화정책 서비스를 통해 지역문화가 지닌 건강한 일상성을 회복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고, 지역이 중앙에 종속된 매개변수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문화주체로 정립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어야 한다. 좀 더 작고, 좀 더 직접적이며, 좀 더 일상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 말이다.

출처: 계간 <리뷰인천>, 2009년 창간호(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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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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