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 溫良恭儉讓鎰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금이 자공에게 묻기를 “부자(공자)께서는 어느 나라에 가시든지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대해 듣게 되는데 이는 스스로 구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준 것입니까?” 자공이 답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겸양함으로써 얻으셨으니, 선생님께서 구한 것은 다른 사람이 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공(子貢, BC 520 ?~BC 456 ?)은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출신의 유학자로 공자가 위나라 망명시절에 문하로 들인 제자라고 추정된다. 그는 공문십철(孔門十哲) - 「학이」편 4장 소개 - 중 한 사람으로 재아(宰我)와 함께 언어에 뛰어난 재질을 지녔다고 한다. 성은 단목(端木)이오, 이름 사(賜)였다. 공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안회나 훗날 공자를 계승했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공자 문하에는 늦게 들어온 증자에 비해 자공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편이다.
그러나 『논어』에 등장하는 제자들 중 자공과 자로(子路, BC 543~BC 480)가 없었다면 『논어』가 지금처럼 생생한 재미를 선사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안회는 너무나 이상적인 제자였기 때문에 스승인 공자조차도
“안회는 내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선진」편, 3장>며 재미없어 했다. 자로는 공자보다 9살 아래로 제자 그룹 중에서도 최고 연장자이며 장자가 아쉬워했을 만큼 두각을 나타낸 협객(俠客)이었지만 자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무뢰한(無賴漢)이었으나 공자의 문하로 들어선 뒤부터는 순진한 양처럼 공자의 훈육을 따랐다. 비록 등장하는 횟수는 자로가 자공에 비해 앞서지만(자공이 35회) 두 사람 중 누군가를 주연급 조연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면 단연 자공이다.

가르칠 때는 좀 힘들지 몰라도 가르치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제자는 스승을 공경하면서도 뭔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제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 역시 늘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공에 대해 때로는 적당하게 야단치고, 때로는 자공의 자부심을 부추겨주기도 하면서 제자로서 자공을 사랑했다. 자공은 늘 공자와 대립각을 형성하지만 평생을 두고 공자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거두지 않았으며 공자의 생전에는 언제나 묻고, 또 물어가며 배움의 갈급함을 채워가는 제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에 자공이 빠진다면 시쳇말로
“공자왈 맹자왈”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엄청 재미없는 책이 될 뻔했다.

「학이」 10장에서 자공에 질문하고 있는 자금(子禽)은 『사기열전』에 공자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공의 제자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열전』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자공의 제자일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도 공자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공자 문하에 남아있던 유학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금은 성은 진(陳)이고 이름은 항(亢)으로 자공에게 묻고 있는 질문의 내용을 보면 성품이 자공 못지않게 외향적이며 도발적이었으리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다만 자공이 공자와 나눈 문답의 내용에 비해 자금의 질문은 질이 좋지 않다.

자공의 제자란 추측이 나오는 까닭도 공자의 직접 제자라면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공자가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그 나라 정사에 대해 지분거렸는데 이건 관직이라도 하나 구해보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투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공이 공자 생전에는 외향적인 성품과 이재(理財)에 밝은 탓에 가끔 공자의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공자 사후 3년간 무덤을 지켰고, 다른 제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3년을 더 남아 여묘했던 인물이라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자금과 자공은 격이 다르다. 자공은 생전에 공자는 허명(虛名)뿐이며 실제로는 제자인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자공은 스승 공자를 받드는 일을 한 번도 등한히 해본 적이 없었다.

“자공은 중니(仲尼, 공자)보다 낫다”고 숙손무숙(淑孫武淑)이 이야기하자 자공은 “궁실의 담장에 비유하면 나의 담장은 어깨에 미치므로 집안의 좋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장은 여러 길이므로 그 문을 열어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자가 적으니 그 사람의 말이 또한 당연하지 아니한가?”<「자장」, 23장>

「자장」편에는 숙손무숙이 두 차례, 「학이」 10장에 등장하는 자금(子禽)까지 등장해서
 '솔직히 말해보라며 자공 그대가 실은 공자보다 낫지 않느냐' 고 도합 세 번을 묻는 장면이 있다. 마치 예수가 체포된 직후 베드로가 첫 닭이 울기 전까지 세 차례 예수를 부인할 것이란 『성서』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인데, 자공은 단 한 번도 공자를 부정하거나 자기보다 낮춰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공은 도리어 성을 내며 “공자는 해와 달과 같아서 헐뜯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다”, “선생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계단을 놓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자공은 공자의 문하에 들어설 당시에도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젊을 적을 말고는 별도의 직업(관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요즘 같으면 스승이 제자를 기르는 일도 직업이 될 수 있었으나 춘추시대엔 가르치는 것만을 전담하는 직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지배계급에 속하는 귀족들만의 몫이었고, 귀족들은 실제 통치자였기 때문에 자기 자식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가르칠 여력도, 이유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공자는 최초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자공의 재력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자는
“사(賜)는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재화를 늘렸다. 예측하면 잘 맞았기 때문이다.”<「선진」편, 18장>라고 자공의 재산증식 능력을 평했다. 자공은 뛰어난 상인으로 공자의 유세를 후원했다. 공자가 열국(列國)을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위나라를 중심으로 놓고 그 주변을 순회했다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자공의 경제적 도움이 얼마나 중요했을지 추측해볼 수 있다.

“자공은 사두마차에 올라 기마행렬까지 어마어마하게 이끌게 했다. 비단 꾸러미를 예물로 가지고 다녔으므로 여러 제후들로부터 초빙되었으며 또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가 방문하는 나라의 왕자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대등한 예의를 그에게 베풀어야 했다.”

위에 나오는 내용은 『사기』의 기록이다. 자공은 공자가 열국(列國)을 유세할 때 공자의 물질적 후원자가 되었으며 제후들에게 선물과 같은 선심공세를 펼쳐 스승의 유세를 도왔다. 그렇다고 자공이 단순히 이재에만 밝은 인물은 아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노나라가 제나라로부터 침공의 위기를 겪을 때 자공의 다섯 나라를 돌며 유세한 결과에 대해 기록하고, 자공이 쌓은 부에 대해서는 별도로 「화식열전」에서 다룰 지경이었다.

“자공이 한번 유세를 떠나니, 노나라는 사직을 보존하고(魯國存), 제나라는 엉망되고(齊國亂), 오나라는 멸망하고(吳國亡), 진나라는 강성해지고(晉國强), 월나라는 패자되었다(越國覇).”


공자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은 자공이었다. 만약 공자가 자공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사후 공자 교단이 존속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질문은 반대로 공자의 존재가 없었다면 과연 자공이 기억될 수 있었을까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엄격한 사회였다. 비록 송(宋)대에 이르러 중국의 상인 계급이 급성장하기는 했지만 중국의 지배계급은 상인계급의 성장을 적절하게(?)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도리어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구와 달리 근대화, 자본주의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방해한 것이긴 하지만 봉건질서의 입장에서는 매우 성공적인 통제였다. 

춘추시대가 봉록과 정전제라는 경제 질서의 파괴로 인해 출현한 것이지만 여전히 상인의 지위는 귀족들의 지위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춘추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좌전』에는 이 시대 상인들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는데 귀족과 상인 사이의 맹세의 내용이다.
‘너는 나를 배반하지 말고, 나는 너의 물건을 강제로 사지(강탈하지) 않겠고, 구걸하거나 강탈하지 않겠고, 네가 장사에서 이문을 남겼거나 값진 보화를 소유하더라도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얼핏 보기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을 맹세로 남길 정도라면 실제 상인들의 처지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앞서 공자는 자신만의 학설을 가르치지 않고, 많은 것(六藝)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공자는 단순히 여러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것뿐만 아니라 누구나 차별 없이 가르친(有敎無類)<「위령공」, 38장> 스승이기도 했다. 공자는 스승에 대한 속수(束脩, 육포 열 개를 묶은 것)의 예(禮)만 나타낸다면 위로는 사마우(司馬牛) 같은 대부 출신부터 아래로는 세간의 낮은 평가를 받는 사람까지 가르쳤다. 자공 역시 상인 출신으로 공자가 아니었다면 학문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며, 훗날 제후들과 교류하며 유세가로서 『사기』에 기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공이 공자의 덕을 높이 흠모한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자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다시 다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쯤에서 간단하게 줄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길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고, 부모를 섬기길 온힘이 다하도록 하며, 임금을 섬길 때에는 온몸을 다 바치며, 벗과 사귈 때에는 말에 믿음이 있도록 한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공자의 제자로 공문10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인 자하(子夏, BC 507~BC 420?)는 중국 위(魏, 山西省)나라 출신으로 본명은 복상(卜商)이다. 특히 시(詩)와 예(禮)에 능하였는데, 공자가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다고 한 일화 “회사후소(繪事後素)”<『논어』, 팔일편>가 있었다. 공자의 사후에는 서하(西河)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위나라 문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다. 공자보다 44세 연하였는데, 공자가 제자들을 앞세워 보내는 고통을 겪었던 것처럼 자하 역시 자신보다 먼저 자식을 여의는 고통을 겪었다.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한 나머지 실명(失明)까지 했다고 전해진다<상명지척(傷明之戚)>.


「학이(學而)」 6장에 이어 다시 한 번 덕행(德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학문의 순서는 예(禮)를 배우고 도(道)를 터득하고, 덕(德)을 밝히고 성(性)을 인식하여 마지막으로 천명(天命)을 깨닫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공자는 물론 중국의 사상가들 대부분은 지식 그 자체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지식을 위한 지식’은 무가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식이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직접 인간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경우조차 그것을 행하는 것이 우선이지 공언(空言)으로 토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사가인 풍우란은 명저 『중국철학사』에서 유교적 전통 속에서 지식이 가진 의미를 다음의 한 마디로 정리해내고 있다.

“만약 누가 성인(聖人)이라면 털끝만큼의 지식이 없어도 역시 성인이며, 누가 악인이라면 무한한 지식을 가졌어도 역시 악인이다.”


서양에서의 우주(自然)와 나(我)를 구분하여 줄기(體系)를 세우는(科學)의 길(立言)로 나아갔다면 동양에서의 학문 혹은 과학이 서양에 비해 발달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한 가지는 우주와 나를 분리하지 않은 때문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우주(하늘)의 뜻을 받드는 존재로서 ‘예(禮)를 배우고 도(道)를 터득하고, 덕(德)을 밝히고 성(性)을 인식하여 마지막으로 천명(天命)을 깨닫는’ 것이 학문의 길이었다. 천명을 깨달은 사람이란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그의 몸(身, 실천) 자체가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그의 실천은 배우지 않았어도 그 자체로 예를 행하고, 덕을 밝히는 것이 된다.

『춘추(春秋)』를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이 해석한 『좌전(左傳), 춘추좌씨전』에는 “최상의 일은 덕을 수립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이 주장을 수립하는 것이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라 하여 역시 덕(德)을 강조하고 있다. 『대학(大學)』의 8조목(八條目) 중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내성외왕의 도(內聖外王之道)’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내성’이란 ‘수신제가’ 다시 말해 입덕(立德)에 해당하고, ‘치국평천하’는 외왕에 해당하는 입공(立功)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 역시 이와 같은 내성의 도를 깨우치는 것이었다.

한자는 뜻풀이가 쉽지 않아 여러 이견들이 있는데 ‘賢賢易色’ 역시 주해(註解)를 다는 이들에 따라 갈린다. 하안(何晏)이나 주자(朱子)는 易를 ‘바꾼다’로 해석하고, 色을 여색(女色)으로 보아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꾼다’고 하였는데 고주(古註)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이라 했다. 또 ‘賢賢易色’을 부부관계의 윤리(夫婦之道)로 해석하여 ‘부인을 얻을 때는 어진 덕을 어질게 여기며(賢賢) 미색은 가볍게 여긴다(易色)’로 풀이하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색(色)’이란 단순히 여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보존을 위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자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 중 하나로 공자 스스로도 부정하거나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논어』에서 공자가 색(色)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 것은 「자한(子罕)」 17장과 「계씨(季氏)」 7장 두 군데뿐이다. 그나마도 이것을 부정하기 보다는 절제의 어려움<「자한(子罕)」, 17장>이나 경계하라<「계씨(季氏)」, 7장>는 뜻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정도다.

子曰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공자가 말씀하길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미녀를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자한(子罕)」, 17장>

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典.

공자가 말씀하길 “군자가 경계할 것이 세 가지 있다. 젊었을 때는 아직 혈기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여색을 조심하고, 장년이 되었을 때는 혈기가 굳건하므로 남과 다투는 것을 조심하고,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약해졌으니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계씨(季氏)」, 7장>

비록 공자의 제자인 자하가 배움보다는 덕행을 더욱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배움의 뜻이 본질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지 배움을 등한히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학문을 하지 않고서도 학문이 목적하는 바를 실천한다면 학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의 말  -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자가 으뜸이요 <「계씨(季氏)」, 9장> - 은 공자도 하고 있지만, 공자는 뛰어난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교육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子曰 唯上知與下愚不多.

공자가 말씀하길 “오직 가장 지혜로운 자와 가장 어리석은 자만이 변하게 할 수 없다.” <「양화(陽貨)」, 3장>

공자는 배우지 않고서도 깨우친 자, 타고난 깨달음을 으뜸으로 쳤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본성이 그러하다는 상징적인 의미이지 실제로 공자가 항상 염두에 두고 깨우치려했던 이들은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배우려는 자(困而學之, <「계씨(季氏)」, 9장>)’였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