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우장춘 박사 일대기) - 쓰노다 후사코 | 오상현 옮김 | 교문사(1992)





'우장춘 박사'란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머리속에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건 '씨없는 수박'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오랫동안 그렇게 암기되었기 때문이다. 선입견이란 건 그래서 무섭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쓰노다 후사코는 우장춘 박사가 씨없는 수박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수박을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은 일본 교토대학의 기하라(木原均)임에도 불구하고 우장춘 박사라고 한국인들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우장춘 하면 '씨없는 수박', '씨없는 수박'하면 우장춘이라고 하면서, 이 수박은 늘 그와 일체가 되어 거론되고 있다. 일반 대중은 우장춘을 '씨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88년 12월만 부산에 체재하고 있던 나는 어느 신문사의 인터뷰에 응하여 "다음 작품은 우장춘 박사의 전기"라고 밝혔고, 기자의 질문에 취재의 내용을 꽤 상세하게 답변했다. 그것은 사진과 함께 크게 게재되었는데 '씨없는 수박'에 관한 나의 주장은 실리지 않았다. 그 때도 역시 나는 잘못 전해 내려온 우장춘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본문 251쪽>

 

요사이 모 방송에서 지난 시대의 우리 역사 인물들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장기려 박사, 무위당 장일순 선생 등과 같이 현재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근과거의 인물들을 주로 선정해 방송하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점과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이므로 오히려 우리가 잘 몰랐던 이들에 대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시대의 혜택이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굄돌로 내준 덕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우장춘 박사다. 때마침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 전기 작품을 다 읽은 직후라 방송을 보니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방송 프로그램도 그렇고, 요 근래 아동용 전기물로 만들어진 다른 책들도 거의 대부분은 이 책 쓰노다 후사코의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쓰노다 후사코가 우장춘 박사가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일본의 기하라가 만들었다고 이야기한 부분을 읽고, 어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이 틀렸다는 사실 앞에 잠시 의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위에 인용된 부분만 읽노라면 쓰노다 후사코가 악의적인 의도로, 최근 새로운 과학적 우상으로 떠오른 황우석 박사 이전, 한국인들의 과학적 우상이었던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쓰노다 후사코 개인이 아니라 나자신만 하더라도 일본 작가들(소설가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이 쓴 책들에 대해 비교적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대영제국 쇠망사""나카니시 테루마사" 같은 정치학자의 글을 읽노라면 종종 그네들의 시선이 가치중립을 가장한, 보수주의 내지는 국수주의적 시선을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나카니시 테루마사의 경우엔 일본의 대표적 우파 지식인 중 하나란 사실을 최근에 확인하기도 했지만.)

 

우장춘 박사의 일대기인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의 저자 쓰노다 후사코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다. 1914년 도쿄 출생에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수학하고 이후 10년간 프랑스에서 체류하며 1960년부터 일본의 "분게이슌주(文藝春秋)"지로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의 연구자들 특유의 정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군인들의 전기를 많이 집필했다고 하는데, "민비암살"이란 책을 내면서 한일간의 역사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민비암살"은 국내에선 지난 99년 "명성황후 - 최후의 새벽"이란 제명으로 조선일보사에서 나왔으나 현재는 절판이다.) "민비암살"을 읽어보지 못했으나 일본 내의 평가와 한국에서의 평가가 동일하게 나오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하고,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우장춘 박사의 일대기를 읽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무엇보다 쓰노다 후사코 자신의 문장은 비록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쓰노다 후사코의 글쓰기는 문장의 흐름을 탈 줄 아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번역 작가의 공로도 크다고 생각한다). 


▶ 우장춘 박사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 왼편이 아버지 우범선, 우장춘, 어머니 사카이 나카


잘 알려진 대로 우장춘 박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던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 여성인 사카이 나카(酒井仲)의 아들이다. 저자 쓰노다 후사코는 이를 한일최초의 국제결혼이었다고 하는데, 아버지 우범선은 중인 출신으로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을 맡았던 직업 군인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획했던 일본의 미우라 공사는 이를 임오군란처럼 조선 내부의 문제로 조작하기 위해 대원군과 조선 훈련대를 동원했는데 우범선이 이때 전모를 알고 참가했는지, 내용도 모른 체 끌려나왔다가 역적 누명을 쓰게 된 것인지는 역사가 알려줄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듯 싶다. 다만 우범선은 맏아들 우장춘과 둘째를 남겨놓고 조선인 자객에 의해 일본에서 암살당한다. 이때부터 홀로 남겨진 우장춘의 모친 사카이 나카는 어린 두 형제를 훌륭하게 키워낸다. 한 사람은 조선인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일본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우장춘의 모친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쓰노다 후사코에 의해 면밀하게 검증된다. 우장춘 전기인 이 책의 초반부에는 그간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마치 '씨없는 수박' 이야기가 그랬던 것처럼 실제와 달리 크게 부풀려진 이야기인 듯 싶다는 쓰노다 후사코의 추측이 보인다. 그러나 후사코의 추적이 현해탄 너머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우장춘이 생전했던 이야기들을 기억하는 후학들의 증언을 종합해본 결과, 사카이 나카 여사가 우장춘에게 심어주었다는 민족 의식은 전설이 아니라 실화였음이 입증되는데 이 대목이 사뭇 감동적이다. 남편이 암살당한 뒤 나카는 홀로 자립하여 두 아들을 키운다. 그 와중에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린 나카는 아들 우장춘을 고아원을 운영하는 절(동경의 희운사)에 맡기게 되는데, 1년 뒤에 찾으러 갔을 때 우장춘은 거의 영양실조 상태였다고 한다. 나카는 남편 우범선의 묘지를 팔아 자식들의 교육비에 보탰다.

 

예를 들어, 우장춘이 어렸을 때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조선인이라고 모두 나를 구박했다'고 말하자 어머니가 정색을 하며 '그럼, 네가 조선인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조선인에게 조선인이라고 말했는데 왜 우느냐. 그래,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면 되지 않느냐'고 타일렀다고 한다. 조선인이라는 것에 긍지를 가지라는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 속에 자란 우장춘은 일본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해야 할지도 모르는 공학 대신 농학을 전공했고, 훗날 조선이 독립하는 날 자신의 배움이 큰 쓸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조선이 독립했다. 한국에서는 우장춘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 그런데 어째서 일개 농학박사에 불과한 우장춘에 대해 귀국추진위원회까지 결성되었을까.

 

우장춘 박사가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의 명성은 육종학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것이었을 만큼 뛰어난 육종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우리 농업 전반이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농업은 종자 대부분을 일본의 종자회사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농업은 더이상 일본의 종자회사들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종자를 사올 만한 외환도 비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종자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신생독립국 한국의 농업은 당장이라도 파탄날 상황이었다. 농업이 파탄난다는 것은 그대로 굶주림과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초대 농립부장관이던 죽산 조봉암이 나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우장춘 박사의 귀국 문제를 정식으로 건의하게 된다.



- 육종학자로서 우장춘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1950년 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그는 일본의 가족들과 마지막 가족 사진을 촬영하고 한국으로 귀국한다.

 

1950년 3월 8일 드디어 일본에서 우장춘 박사가 귀국한다. 우장춘은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귀국인사를 마쳤다. 당시 우리나라 GNP는 5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때였으나 귀국추진위원회는 일본에 남겨질 우장춘 박사의 가족들을 위해 생활비로 1백만 엔 가량을 송금해주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한국으로 오면서 이 돈을 모두 연구 기자재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일본의 가족은 더욱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년에 병들어 누운 병실엔 그가 한국 땅에서 공들여 키워 낸 가장 훌륭한 묘목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한 번은 벼를 담당하는 양춘배가 서울에 갈 순서가 왔는데, 우장춘 박사는 그에게 잘 와주었다고 격려를 하면서도  "벼는 어떻게 되어 가나.... 가져왔나?" 라고 물었다. 스승의 병환만을 염려한 나머지 그가 벼의 생육에까지 그토록 관심을 기울일 것이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부산으로 연락해 다른 제자가 벼를 가지고 서울에 왔고, 그는 누운 상태에서도 벼의 생육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두었다. 1959년 8월 7일 오전 농림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농림부 장관 이근식이 우장춘의 가슴에 문화포장을 걸쳐주고 짤막한 축사를 낭독하자 우장춘은 눈을 감고,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포장을 쥐고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그리고 8월 10일 오전 세시 십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오늘날 즐기는 김치의 재료인 배추와 무를 비롯한 우리 음식의 여러 필수적인 먹을 거리들, 야채들 거의 대부분은 우장춘 박사와 그의 제자들이 연구한 종자에 의한 것이다. 그가 연구하기 이전의 우리 푸성귀들은 지금과 같은 모양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여러 관점에서 보자면 "과학과 국가권력"의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일이긴 하다. 그러나 우장춘의 생애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감동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부끄러웠던 것은 그가 베풀어준 혜택의 열매를 가장 많이 맛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그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도, 그리고 이 책이 나오고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우장춘에 대한 더 좋은 연구서적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 이 책은 시집 한 권 값에 맞먹을 만큼 저렴하다. 한 권 구입해서 아이들과 함께 읽어보시길... 시중에 아동용으로 나온 우장춘 전기들도 모두 이 책을 참고하고 있으니 부모가 먼저 읽고 아이들과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황우석 박사 전기도 나왔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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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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