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강 / 1997년 3월


"죽음이란 생을 낭만화하는 원리이다. 생에 로맨틱(낭만적) 차원을 주는 원리이다" - 노발리스


 

희랍어 "아포리아"는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하는 말로 막다른 길이란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논리를 아포리아 상태에 빠뜨리는, 무지의 자각이란 교육법으로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대화에서 로고스의 전개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난관을 일컬어 아포리아라고 말한다. 아포리아란 철학의 막다른 길은 아니지만 말이 끊기는 곳에서 사유가 꽃핀다는 점에서 가장 "끊을 절 + 입구 = 철학"적이다. 


내가 위치한 지점(혹은 입장)을 어느 순간부터 자각하게 되었는가? 그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그것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망명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반도, 이론상으로는 대륙으로도 해양으로도 원하는 어느 방향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음에도 내가 살고 있는 남한, 대한민국은 대륙의, 그리고 해양의 섬이다. 바다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곳에도 이를 수 없다. 그로부터 내 막연한 답답함과 로망이 시작되었다.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대구, 대전, 천안을 거쳐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열차를 터고, 개성, 평양, 신의주 그리고 다시 블라디보스톡과 사할린을 따라 모스크바나 키에프를 거쳐 폴란드 크라코프와 바르샤바를 지나 베를린에 이르는 대륙횡단열차를 타보고 싶다는 열망 말이다. 내가 갇힌 것이 아니라 대륙의 한 끝에 살고 있으며 내 사유의 연장이 휴전선 철책이나 현해탄을 건너야만 다른 세상으로 건네지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분출과 두 발로 디디며 갈 수 있는 무한대의 경험을 나는 꿈꾸었다. 소박하게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막힘없이 한반도를 건너 대륙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통하는 대륙횡단철도를 이용해보는 것이고, 크게는 그 막연한 답답함의 뿌리인 분단과 냉전의 잔재와 금기들로부터 자유롭게 내 사고를 맘껏 풀어버려도 상관없는 시대를 살아보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조선인 가운데 디아스포라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망명을 경험한 이는 과연 누구인가? 작가, 철학자가 자신의 모국어를 버리는 경험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 한 명의 사람이 있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났으나 젊은 시절 모국어인 루마니아말을 버리고 평생을 미혼으로 살아가면서 파리의 어느 다락방에서 짤막하지만 깊숙한 사유를 이어간 사람. 에밀 시오랑. 내가 그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작가세계"를 통해서였다. 작가세계는 국내 작가 1인과 외국 작가 1인을 지정해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기획을 특장점으로 하는 계간지였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에밀 시오랑이었다. 나는 그 잡지를 통해 에밀 시오랑을 처음 접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을 경험했었다.


그리고 때마침 출간된 에밀 시오랑의 이 책 "절망의 끝에서"를 구해 읽을 수 있었다.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철학자? 수필가? 그의 글을 특징짓는 형태는 아포리즘(aphorism)이다. 우리에겐 그저 짤막한 경구 정도로 이해되는 아포리즘은 격언이나 명언, 명구와는 다른 것이다. 이들 사이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작가의 창작 유무이다. 에밀 시오랑은 아포리즘 형태를 빌어 그가 사유한 모든 것들을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옮겨 두었다. 일설에는 지난 세기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한 문장가였다고 하는데, 프랑스와 루마니아는 그리 가까운 나라라 할 수 없다. 모국어를 버린 망명자의 글을 사랑한 프랑스인들과 모국어를 스스럼없이 버린 에밀 시오랑.


그는 1911년 4월8일 루마니아의 라시나리에서 태어나 199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늘 절망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자살을 말했지만 오래 살았다. 그에겐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절망의 시작이자, 그를 절망의 꼭대기로 올리는 일이었다. 부카레스트와 베를린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베르그송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구실로 26세에 파리로 건너간다. 그러나 에밀 시오랑은 논문을 완성하지 않았다. 33세 되던 어느날 에밀 시오랑은 노르망디 해안 도시 디에프의 한 여관 방에서 말라르메의 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모국어에 절망한다.


유럽이란 세계 문화의 수도에서 살았으나 그는 변방인이었다. 그는 늘 철학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글을 썼으나 철학자로 대접받지 못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그의 직업란엔 언제나 대학원생 혹은 번역가, 출판사의 객원편집자로 적혀 있었다. 그의 절망은 짤막한 신음처럼 잠언으로 터져나왔다. 그의 문장들은 푸른 빛이 어린 날카롭고 예리한 비수였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문장은 무엇보다 인생의 비의에 대해 논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절망의 소크라테스였다. 에밀 시오랑은 젊은이들에게 인생에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철학이란 번민과 괴로움을 위장하는 기술"이다. 그것은 번민과 괴로움 속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어쩌면 움이 튼다는 것은 생명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그릇된 생각일지 모른다. 삶이 죽음보다 아름다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만, 나는 살아간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청춘의 어느 연대기에 삶과 죽음이란 극명하게 갈리는 인생의 순간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에밀 시오랑은 인터넷 모 자살사이트처럼 죽음을 포장하거나 도피처로 권하진 않는다.  에밀 시오랑은 ‘죽음이 없다면 생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이 자살을 권장하진 않는다. "절망의 끝에서" 중에서 자살의 의미를 논한 그의 글을 보자.



"자살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느낌은 일시적인 변덕이 아니라 몸서리쳐지는 내적 비극에서 온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삶의 긍정이라고 그래도 우기겠는가? 더욱이 자살의 서열을 정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유의 숭고함이나 천박함에 따라 자살을 분류하고자 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유를 따지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제거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충격적이지 않은가?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을 비웃는 사람들을 나는 아주 경멸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실현될 수 없는 사랑이란 자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욕구는 존재의 분열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내가 경탄해 마지 않는 인간들의 범주는 둘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미칠 수 있는 사람들과 매순간 자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그중에 두 번째 범주의 사람들만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는데, 그들만이 강한 정열과 큰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만족하면서, 순간순간의 확신 속에서 긍정적인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할 수밖에 없다. 이면의 현실과 끊임없는 접촉을 유지하는 사람들만이 내게 진실로 감동을 준다.


왜 나는 자살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내게는 삶만큼 죽음도 혐오스러우니까. 나는 내가 왜 이 지상에 존재하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지금 우주를 놀라게 할 울부짖음을 토하고 싶은 절박한 욕구를 느낀다. 전에 없던 포효가 내 안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그 포효가 터져나와 세상을 뒤덮어버리지 않고, 나를 무 속에 삼켜버리지 않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이 역사 속에 존재했던 가장 끔찍한 존재, 불꽃과 어둠으로 가득 차 넘치는 참담한 짐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한히 수축하고 팽창하며, 죽으면서 동시에 성장하고, 무에 대한 희망과 모든 것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흥분하며, 향기와 독약을 들이켜고, 사랑과 증오로 불타오르며, 빛과 암흑으로 압살된, 그로테스크한 미소를 짓는 야수다. 나를 상징하는 것은 빛의 죽음이며 죽음의 불꽃이다. 내 속의 짧은 번득임은 꺼져 천둥과 번개로 다시 태어난다. 내게서 타오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끝에서』중 '자살의 의미'>


그가 절망의 꼭대기에서 자발적인 추락의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자살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언제라도 자발적인 선택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막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자살은 그에게 열린 가능성(동시에 죽음 역시 혐오스러운 것이었으므로)이었고, 그의 생을 연장시켜 주었다.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므로 살아간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서른의 나이에 프랑스로 귀화한 이 사람은 죽음에 대한 어떤 철학적. 종교적 설명도, 위안도 믿지 않았다. 죽음에는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삶이란 그저 죽음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 있는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장애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생생한 육체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허무를 약속할 따름이다. 말하자면 죽음은 끝이다.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이 치명적인 진실을 뿌리치지 않고 대면하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신이든, 악마든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해낸 뒤 이를 대면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에밀 시오랑을 그런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자살"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있었다. 철 나기 훨씬 전의 일이긴 하지만 나고, 살고, 죽고의 문제를 존재의 문제로 치환해서 고민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체질적으로 그런 류의 고민에는 취약한 의식구조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살을 생각했던 것은 87년을 경험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조차 죽으려는 시도를 절박하게 궁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아주 일찌감치 깨우쳤으므로, 현세의 삶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그냥 이 길의 끝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죽을 것을 미리 앞당길 필요는 없겠단 편리한 생각 덕이다. 죽는 문제가 내게 중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내게는 언제나 사는 문제가 사무쳤기 때문이다.


에밀 시오랑은 있는 그대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의 글들은 비극적이지만, 그와 같은 이유로 희극적이다. 그의 글들이 뿜어내는 염세주의와 허무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당신이 늙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설령 늙었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한 몸이 되어 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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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막스와 모리츠(Max and Moritz)』 - 빌헬름 부쉬 지음, 곰발바닥 옮김 / 한길사(2001)

독서 시간은 10분이지만 생각할 거리는 ...

빌헬름 부쉬(Wilhelm Busch)의 초기작이자 가장 대표작이기도 한 막스와 모리츠 를 읽는데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읽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진한 여운이 남았다. '허, 거참 신기한 일이다.' 읽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다 읽고 이틀 동안 다른 사무 때문에 몹시 바쁘게 보냈는데도 계속 생각이 나다니 드문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는 10분 동안 들었던 주된 생각은 "거 참 장난이 심한 녀석들이네." "헉, 그렇다고 주인공들을 그렇게 죽일 것까지야."란 생각이었다. 문학적으로 볼 때 작가가 주인공을 죽임으로써 뭔가 그럴 듯한 걸 보여주고, 보여줄 수 있던 시대는 호메로스 이래, 셰익스피어를 거쳐 괴테 시대에 이르러 사실상 막을 내렸다(내가 생각하기에 근/현대는 죽음을 소외시킨 시대이다). 그 이후 시대의 작가들 가운데 죽음을 이보다 더 의미있게 보여준 작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죽음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데 치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에서 죽음은 그렇게 서서히 비중 없는 지위로 격하되었고, 문학 기술상으로도 죽음을 다루는 솜씨는 점차 퇴보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지금 햄릿이나 오델로, 리어왕처럼 멋있게 혹은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이 몇이나 되는가를...

하지만 빌헬름 부쉬가 그리고 있는 막스와 모리츠의 죽음은 해도해도 좀 심했다
(혹시 이걸 스포일러라고 비난받지는 않겠지). 책을 읽는 10분간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나는 작품 속 악동들이 볼테 아주머니의 닭들이 나무에 매달려 헐떡이는 광경을 지켜보며 토해냈을 법한 미소를 지었다. 혹자는 이를 "그로테스크(grotesque)"라고 말하는데, 그로테스크란 말은 우리가 무신경하게 종종 사용하는 '매너리즘','댄디즘'과 같이 역사적 연원이 있는 말이다. 그로테스크한 묘사, 그로테스크한 표현, 혹은 미술의 표현 양식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로테스크가 등장하는 시대의 공통점은 사회적인 불안과 불만이 고조되는 시대라고 보면 된다.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출현하는 시대는 고대의 토템이나 페티쉬와 같은 괴이한 조형물로부터 중세의 교회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한 15-16세기, 절대왕정에서 근대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혁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집중된다. 빌헬름 부쉬에게서 그로테스크를 읽었다면 그건 아주 잘 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막스와 모리츠는 장난꾸러기를 넘어선 그야말로 악동이었다. '팜므 파탈'이 치명적인 요부를 의미한다면 이들은
'앙팡 테리블' 을 넘어선 '앙팡 파탈' 이라고 봐야 할까? 과부댁인 볼테 아주머니의 닭들을 교수형시킨 것도 모자라 재봉사 뵈크를 물에 빠뜨리고, 렘펠 선생의 담배 파이프에 화약 가루를 쟁여넣고, 프리츠 삼촌의 침대에는 온갖 벌레들을 잡아 넣어둔다. 결국 농부 메케의 곡식 자루에 구멍을 내는 장난 끝에 방앗간에 탈곡기에 들어가 낟알이 되어 거위들 먹이가 되고 마는데, 누구 하나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태우지 않는다. 그로테스크라 하면 커다란 도끼로 이마를 쪼개거나 전기톱으로 신체를 절단하는 식의 하드 고어 스타일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철 모르는 아이 둘을 방앗간 탈곡기에 집어넣고 낟알을 만든 뒤에 이를 새 먹이로 먹게 한다는 스토리도 충분히 하드 고어 스토리다.  동화책 하면 안데르센의 눈물겨운 성냥팔이 소녀를 자동적으로 연상하는 이들이라면 이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동화란 반드시 교훈(체제순응)적이어야 하는가?
무릇 "동화란 교훈이다."란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이 동화는 모리스 샌닥(Mourice Sendak) 의 동화들과 함께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모리스 샌닥의 대표작이기도 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하마터면 판매금지 처분을 받을 뻔 했다. 이유인즉 소년 맥스가 늑대로 변장하고 놀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자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너무 괴기스럽고, 아이들의 정서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종종 음식점에서 떼 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들을, 그런 엄마에게 대드는 아이들을 본다. 엄마는 아이들을 달래다 지치면 "너 이따 집에 가서 혼날 줄 알아"라고 으름장을 놓거나 좀더 심한 말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의 부아 긁는 소리를 한다. 좀 심하게 말하는 아이들 가운데는 "엄마를 죽여버릴 테야." 와 같이 듣기 끔찍한 소리를 내뱉곤 한다. 아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끔찍하다. 이때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건 근친살해에 대한 뉴스 같은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일본의 걸작 하드 고어 애니메이션 '우르츠기 도지'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제 부모의 시신이 토막쳐진 채 담겨있는)어려서 저 모양이니 크면 어찌될까? 하는 걱정일 수도 있겠다.



과연 빌헬름 부쉬나 모리스 샌닥 같은 작가들의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읽혀야 할까?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결론은 물론 읽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고, 좀더 나아가서 잘 읽도록 도와주고, 널리 권장해야 한다는 거다.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니 좋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권하는 첫 번째 이유다. 물론 더 중요한 이유는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에 있다. 이 책의 저자 빌헬름 부쉬는 아동문학을 전공하거나, 이 분야에 제법 관심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에선 그다지 대중적인 인지도가 없는 편이지만 독일에는 그의 기념관이 있고, "막스와 모리츠"는 독일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가운데서도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선진국에서 널리 읽도록 하고 있으니 우리도 읽도록 하자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빌헬름 부쉬는 1832년 4월 15일 독일 하노버의 작은 마을인 비덴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기계공학자로 살아가길 바랐기에 부쉬는 부친의 뜻에 따라 괴팅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뮌헨에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그들만의 예술활동을 한다. 

사회변혁기에 출현하는 그로테스크와 풍자
앞서 그로테스크란 역사적 격변기에 주로 등장하는 기법이라 말한 바 있는데, 역사적 격변의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그로테스크만은 아니다. 이런 시기엔 '신랄한 풍자' 역시 등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로테스크는 종종 풍자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미국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되고, 10대의 성 문란이 가속화되면서 출현한 피가 낭자한 호러영화들은 풍자이면서 동시에 그로테스크이기도 했다. 호러영화의 모든 공식을 풍자하기로 작심한 "스크림"은 1970-80년대의 '청춘'호러영화의 공식 - 섹스를 하면 죽는다. 처녀가 아니면 죽는다 - 를 비틀고, 그 후에 나온 영화는 '처녀면 죽는다'는 공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로테스크는 이렇게 풍자와 결합한다. 빌헬름 부쉬가 태어나고 살았던 1800년대 초중반의 독일은 어떤 사회였을까?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기념한 곡이었다. 1812년엔 이것말고도 중요한 일들이 또 있었는데, 이 해 영국의 런던에는 세계 최초의 광고 대리점이 창설되었다. 즉, 자본주의가 보다 중요한 지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폴레옹의 패배는 전유럽에 '복고(정통, 보수, 반동)주의'의 바람 '메테르니히 체제' 가져왔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기운은 이미 전유럽 시민사회에 속속들이 스며들었으나 메테르니히 체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회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1848년 맑스,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작성하여 출판한다. 1866년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의 독일에서 자유주의와 시민에 의한 개혁은 발 붙일 자리를 잃었고, 독일 사회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위한 '병영사회'가 되어갔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뒤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독일식으로 바꿔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는 신무기인 후장식 소총의 도입이 아니라 프로이센 교사들의 몽둥이 찜질에 의한 훈육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1866년부터 일반적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모든 면에서 군대식으로 각을 잡은 직각형 인간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직장에서 빈둥거린다거나 공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일탈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고 여겼다. 파시즘은 직각을 사랑한다. 빌헬름 부쉬는 이런 사회 분위기와 관료들을 비롯한 통치 체제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한다. 

막스와 모리츠 - 일탈이 곧 죽음인 사회
그렇게 생각해보니 빌헬름 부쉬의 "막스와 모리츠"도 이해될 수 있었다. 막스와 모리츠의 장난은 다소 심하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장난이 마을의 평온을 잠시 흔든 것이긴 하지만 볼테 아주머니는 닭털을 뽑아 맛 좋은 닭 훈제구이를, 양복쟁이 뵈크는 젖은 옷을 말리면 되었다. 모리츠의 삼촌도 벌레들을 인정사정없이 짓밟아 죽인 뒤에 다시 평온한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평온한 마을은 막스와 모리츠를 용납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탈곡기에 들어간 뒤 고루 획일적인 낟알이 되어 나왔다. 빌헬름 부쉬의 이런 풍자가 나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이 동화책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 소개도 빈약하다. 아동문학평론가 김경연 선생의 미디어 리뷰를 보니 번역에도 다소 문제(번역은 이 작품의 풍자적 성격보다는 막스와 모리츠의 ‘장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 김경연, 국민일보)가 있었던 모양이다. <경향신문>에 게재된 이 책의 옮긴이들이 했다는 말 "어린이책 코디네이터 모임 ‘곰발바닥’은 유익하지는 않아도 실컷 웃을 만한 책”이라고 소개했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건 둘째고, 화가 날 지경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이 지닌 감동이나 생각할 거리의 유익함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 역사적 배경 따위 몰라도 괜찮다.



좋은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를 '기독교 이전의 로마'와 '기독교 이후의 로마'로 구분한다. 기독교의 유일신앙이 기존 로마의 다신교적인 기풍, 즉 자유로움과 융통성을 앗아갔다고 비판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중국을 보면 성리학 이후의 중국에선 여성의 발을 옭죄는 전족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어린이 교육에 있어 창의력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창의력은 자유로운 상상에서 비롯되지만, 내 아이가 태양을 검게 그리면 부모들은 뭔가 우리 아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태양은 붉은 것이란 교육을 받은 부모가 아이들의 창의력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미래의 어른이란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안 아이들의 창의력은 저절로 고갈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동화를 마치
"호랑이와 곶감"에서처럼 울면 '호랑이가 와서 물어간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윽박지르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삼기 위해 만들었고,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동화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 설정 자체가 이 동화를 오해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만약 이 동화에서 우화적인 풍자의 교훈이 아닌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훈육의 의미로서의 풍자로 이해한다면, 이 책이 주는 교훈은 실로 비루한 것이 되고 만다. 독일인들이 빌헬름 부쉬의 동화를 오해한 결과
- 프로이센의 병영같은 학교에서 아이들의 일탈을 강하게 통제하고, 몽둥이 찜질을 가하고, 훌륭한 병사, 국가를 위한 동량으로 길러내 - 가장 민주적인 제도를 갖춘 바이마르 공화국이 가장 폭력적인 나치 독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 결과 막스와 모리츠 같은 사회적 일탈자들은 그들이 탈곡기에서 낟알이 되어 나온 것처럼 강제수용소란 탈곡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고, 파시즘이 원하는 직각형 인간으로 바뀐 '과거의 어린이, 미래의 어른'들은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가장 민주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일지라도 가장 민주적인 시민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민주국가 수립은 요원한 일이 아닐까? 빌헬름 부쉬의 이 책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은 막스와 프리츠와 같은 악동, 사회적 일탈을 꿈꾸는 어린이가 아니라 그들을 탈곡기에 집어 넣고 낟알로 만들고 싶은 우리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우리 사회가 허용하는 자유의 폭이 어느 정도인가 알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타인에게 허용하는 자유의 폭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된다. 당신이 타인에게 허용하는 자유의 폭만큼 당신에게도 그 자유가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광범위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일탈'의 허용범위가 넓고, 그만큼 폭력적인 범죄의 비율이 낮다. 그러나 획일성이 강요되는 사회,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는 사회는 그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정상'의 범위가 협소하고, 자신들과 조금만 다르면 폭력적으로 이를 교정하려 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정상으로 여기고, 이들을 소외시키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으며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식은 결국 폭력적인 해법을 불러들이게 된다.  일탈에 대해, 마이너리티에 대해 관대한 사회는 전체주의, 편견에 가득찬 협소한 정상(?)의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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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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