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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1 김선우 - 목포항 (4)
  2. 2011.04.18 김선우 - 낙화, 첫사랑 (1)
  3. 2011.02.24 김선우 - 시체놀이 (1)
  4. 2011.01.05 김선우 - 이건 누구의 구두 한짝이지?
  5. 2010.11.15 김선우 - 사골국 끓이는 저녁

목포항


-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팎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


시인 김선우. 이름만 들어선 시인이 성별(性別)이 쉽게 구분되지 않지만, 그녀의 시를 한 구절만 읽어봐도 시인이 여성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게 한다. 문학에 있어서 ‘페미니떼'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녀의 시에서 여성성의 시어를 느끼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인은 마치 선언하듯 말한다.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고, 세상엔 무수한 막차가 있다. 나는 막차 떠난 버스 정류장, 막차 떠난 지하철 역, 막차 떠난 기차역 벤치에서 노숙해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목포항에서, 그것도 막배가 떠난 목포항에 있어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이 '막'이란 어휘가 주는 그 막막함만큼은 우리 누구에게도 낯선 경험이 아니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그 막막한 느낌만큼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안쓰럽고, 원초적인 상처가 또 있을까.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은 현관문에 쪼그려 앉은 아이의 막막함으로 시인은 우리에게 막배 떠난 목포항이란 구체적 공간 안으로 불러들인다.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는 다소 선언적이고, 추상적인 호명에서 시인은 구체적인 지명, 목포항으로 우리를 불러들인 뒤 마치 카메라가 서서히 원경으로부터 근경으로 이동해가듯 “막배 떠난 항구”의 풍경 속으로 끌어들인다. 항구의 스산함에 연이어 우리는 시인이 이끄는 대로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에게 시선이 멈춘다. 시인은 다시 필경 노파의 가랑이께 어딘가에 놓인 복숭아에 우리를 이끌고, 다시 복숭아의 짓무른 과육을 클로즈업 해 보여준다.


쪼그려 앉은 노파와 짓무른 복숭아 사이에서 우리는 누구라도 숨겨줄 수 있을 것 같은 할머니의 폭 넓은 치마와 그 치마 속에 숨겨진, 우리 모두를 탄생시켜주었을 비릿한 자궁냄새를 맡을 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의 원초적 발상지인 바다(목포항) ‘떠나간 막배’의 심상(image)은 양수로 가득한 자궁의 심상과 일치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가느다란 탯줄을 끌고 세상으로 나간다. 우리는 어머니 가랑이 사이에 놓인 항구를 탯줄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를 일으키며 떠나는 막배.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넉넉하고 푸근한 안뜰은 그러나 그냥 생긴 것은 아니라서,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은 비릿하다.


그 상처들, 푸른 생애의 안뜰은 "가슴팎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한 바로 그 자리에서 생겨났다. 시인은 비로소 말한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시인은 헤어진 연인일 수도 있고, 떠나간 자식일 수도 있는,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닐 수 있는, 그럼으로 그 모든 것일 수 있는 “떠나간 막배”를 향해 섣불리 아파하며 돌아오라고 외치지 않는다. 시인은 떠나간 막배를 부르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대신 결코 떠나보내지도 않는다. 시인으로 하여금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하게 만든 것은 떠나간 막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쪼그려 앉은 노파의 짓무른 복숭아 때문이다. 시인은 그제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며 심상의 원근법을 통해 원경에서 근경으로 그리고 다시 심경(心景)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순간 우리는 시인의 거대한 흡인력을 통해 "떠나간 막배"가 되어 그녀의 몸속으로 그녀가 펼쳐 논 거대한 사랑의 결계로 들어간다. 아니, 빨려든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희망하는 바다 위의 막배는 항구를 떠날 수는 있어도 결코 바다를 벗어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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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출처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에 있어 '시(詩)'라는 장르만큼 모호함의 명징성에 기대고 있는 장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호함의 명징성'이란 형용모순이다. 동양에서 '포엠(Poem)' 즉, 시(詩)는 '말씀언(言)' 더하기 '절사(侍)'인데 이것은 동양에서의 시가 불교의 정신, 불교의 법어(法語)가 표현되는 방식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법은 가섭존자에서 아난존자로 이어지고 그것이 28대 달마가 동쪽으로 와 혜가에게 이어졌다. 불교에서는 달마를 1조로, 혜가를 2조, 승찬을 3조, 도신, 홍인, 혜능을 6조라 하여 불조(佛祖)의 법맥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3조 승찬 대사가 불자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위해 지은 것이 「신심명(信心銘)」이다. 「신심명」이란 '믿을 신(信), 마음 심(心), 새길 명(銘)'이란 뜻 그대로 '믿음을 마음속에 새기는 글'이란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큰 깨달음은 바로 마음을 믿는데 있다는 말인데, 이를 일깨우고, 마음에 새기도록 하기 위해 불교의 깨달음을 '사언(四言) 이구(二句)' '584자(字)', 73개의 게송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마지막 73번째 게송이 바로 "言語道斷 非去來今(언어도단 비거래금)"이다.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말도 안되는 소리'란 의미로 변질되었지만 이 말은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언어(言語)로 표현될 수 없는 "不立文字(불립문자)"의 경지에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진리란 말이나 문자에 의해 전해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말 자체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한계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신심명」 중 어느 한 구절도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 해석 역시 만 가지 갈래가 있다.

도리(道理)를 밝히려는 불교의 게송이지만 그 해석이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진리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는 뜻일 수도 있으리라. 마찬가지로 시(詩)의 본질에 이르는 길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하고 답하여 왔지만, 이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그 모든 정의가 시의 정의이며 이것은 오류의 역사인 동시에 그 나름 진리의 역사로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르네 웰렉(Rene Welek)과 오스틴 워렌(Austain Warren)은 '시란 무엇인가'는 해명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이를 대신해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로 '운율과 은유'에 주목했다. 그러나 운율과 은유라는 형식에만 주목한다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통칭하여 '시(詩)'라고 말하지만 서구에서 '시(詩)'라는 용어는 '포엠(poem)과 '포에지(poesy)로 구분된다. 불어는 시인이 만들어낸 구체적인 시 작품을 가리키고, 포에지는 포엠이라는 구체적인 작품으로서 완성될 때까지의 '시 정신'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엠과 포에지'는 시를 구성하는 '외연(형식)과 내면(정신)'으로 어느 한 가지도 놓칠 수 없는 요소이다. 언어로서의 형식과 시인의 정신이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중첩되어 완성되는 시는 언어로 직조된 수수께끼이다. 시에서의 '제목(title)'이 갖는 의미는 언어의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미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김선우의 시 "낙화, 첫사랑"은 꽃잎이 지는 광경에 대한 묘사이지만 동시에 '첫사랑'의 심상을 은유하고 있다. 제목을 떼어놓고 보면 그저 흔한 연애시의 한 구절에 불과해 보이던 이 시가 제목 "낙화, 첫사랑"이란 키워드와 함께 놓이면서 의미망이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이 시를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동양에서 '게송(偈頌)'과 '시(詩)'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이자 자매이지만 게송이 진리를 드러내고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반면에 시는 겹겹이 쌓인 언어의 틈새 속으로 숨기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시, 역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예술의 본질 중 하나가 '유희'라는 사실을 잊은 까닭이다. 시인이 언어의 유희를 통해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세속의 독자들에게 '깨달음'이란 '즐거움', 그 뒤의 이야기이다. 즐겁게 읽고 난 뒤 당신을 깨워주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시를 읽는 여분의 무언가를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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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놀이

- 김선우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 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 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리브 잎새라든지
나팔꽃 오이 넝쿨 물새 알 산새 알 같은 게 껍질을 깰 때
내 옆에 있던 기척들이 소곤댈 거라는 걸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출처 : <문학과 사회>, 2009. 여름(통권 86호)

*

김선우 시인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 혹은 우정의 근거 중 상당 부분은 우선 동갑내기라는 점에 기인한다.(그 점에서는 손택수 시인도 매일반이니 내가 별나게, 아름다운 여성 시인에 대해 편애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좀 곤란하겠지만 뭐,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은 없다. 내가 이 두 시인을 별나게 좋아하는 이유는 동갑내기란 것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 느끼는 공감이 우선이지 성별, 동갑은 나중 일이기 때문이다.) 김선우 시인의 시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시인의 시가 지니고 있던 천연덕(天然德)스러운 건강함에 있었다.

김선우 시인의 초기 시작들에서는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상당히 진하게 엿보이는데 읽는 사람의 입장(특히, 남성)에서 그것이 공세적으로 느껴지거나 마녀를 가장한 기이함(그로테스크), 음울한 정조, 피해자로서의 자의식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김선우 시인이 여성으로서의 성정체성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다만 시인의 작품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으로 읽히기 전에 먼저 독자로 하여금 무장해제하게 만든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다가와 언제 찔렸는지 눈치채기 전에 이미 부드럽게 심장을 파고든 비수처럼 시어는 담백하고, 표현은 유연하다.

그런데 이번 시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느껴진다. 과거의 시들이 천연덕스러웠다면 지금의 시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하다는 느낌이다.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고 시인은 말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 부분을 '눙치고 간다'고 읽게 된다. 시어나 구성된 국면들은 천연덕스러움을 넘어 천진난만하여 동시풍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시가 풍기는 향기는 '패랭이꽃'에서 '국화'로 진화해간다. 소녀는 나이를 먹어 아가씨가 되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지만 여성이고, 시인은 여전히 시인이다. 세월이 흐르고 있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이 한 편의 시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시인은 한 발 더 나아가 좀더 깊어진다.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동갑내기 시인은 얼마나 더 깊어질까? 친구처럼 시인의 성숙을 함께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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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누구의 구두 한 짝이지?

- 김선우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이건 작년의 구두 한 짝 이건 재작년에 내다 버렸던 구두 한 짝 이건 재활용 바구니에서 꽃씨나 심을까 하고 살짝 주워온 구두 한 짝, 구두가 원래 두 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氏 빗장을 푸시옵고 두 짝이 실은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 또한 마음 푸시옵고 마음氏 잃어버린 애인의 구두 한 짝을 들고 밤새 광장을 쓸고 다닌 휘파람 애처로이 여기시고 서로 닮고 싶어 안간힘 쓴 오른발과 왼발의 역사도 긍휼히 여기시고 날아라 구두 두 짝아 네가 누군가의 발을 단단하게 덮어줄 때 한 쪽 발이 없는 나는 길모퉁이 쓰레기통 앞에서 울었지 울고 있는 다른 발을 상상하며 울었지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그러니 내가 만든 이 얼음구두 한 짝은 누구에게 선물할까 두 짝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구두 한 짝은

<출처> 김선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통권 142호)

*

시인 김선우의 신작시를 읽고 혼자 가만히 웃었다. 아마 내 친구였다면 전화라도 한 통 걸어 이렇게, “지지배, 외롭구나! 밥이나 먹자”고 했을 거다. 비평적으로야 그리 말해선 안 될 일이란 거 알지만 가끔 나 혼자 친구 같이 느껴지는 시인들이 있다. 네이버 ‘지식IN’은 웬만한 지식인보다 더 유능하고, 더 유명하며, 더 신뢰받는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다. 그 지식인에 “한 짝”이란 말을 검색어로 놓고 검색 엔진을 돌려보니 대뜸 이런 해몽(解夢)이 나온다.

“신발은 본인의 지위나 심리적인 부분에서 의지하고 소속감을 갖게 되는 관계의 조직이나 사람을 의미하며 현실에서는 직장, 회사, 조직, 애인의 형태로 현실화됩니다.
이러한 신발의 짝을 잃는 것은 현재 소속된 직장이나 회사에서의 지위가 흔들리거나 위협받는 일, 또는 회사 자체의 어려움, 또는 애인과의 관계에서 본인의 지위가 흔들리는 상황을 경고하는 꿈입니다.
아는 오빠가 권하는 신발이 맞지 않는 것 역시 주변의 도움, 협조나 애인이나 이성친구의 화해 요구, 노력 등이 본인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직장이나 직업의 경우에는 이곳저곳 이직할 곳은 나타나거나 현재 직장에서의 본인의 자리가 있지만 본인이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들이니 크게 도움 되지 못하는 형국이네요.
평양 감사도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리 좋은 관계, 지위, 자리이지만 본인이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소용이 없는 상황입니다.
회사나 현재 이성친구와의 관계에 대하여 경고의 의미가 있는 꿈이니 꼼꼼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양말이나 신발은 한 짝씩만 없어지는 걸까? 그 까닭은 양말이든 신발이든 두 짝 모두 사라지면 우리는 그것이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깨우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간디가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까닭은 출발하는 열차에 급하게 오르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그가 나머지 신발 한 짝을 찾기 위해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대신 나머지 한 짝마저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면 그 신발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나머지 신발마저 던져버리면 누군가는 온전한 한 짝의 구두를 신을 수 있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이 이야기는 간디의 위대함을 전해주지만 동시에 위대함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준다. 위대하다는 것은 무언가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질 수 있으나 가지지 않는 사람의 덕성이란 사실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람의 구두가 되지 말지어다. 통째로 버림받을 수도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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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골국 끓이는 저녁

- 김선우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나를 향해 눈을 끔뻑이고
그러나 나를 보고 있지는 않다


나를 보고 있는 중에도 나만 보지 않고

내 옆과 뒤를 통째로 보면서(오, 질긴 냄새의 눈동자)
아무것도 안 보는 척 멀뚱한 소 눈


찬바람 일어 사골국 소뼈를 고다가

자기의 뼈로 달인 은하물에서
소가 처음으로 정면의 나를 보았다


한 그릇…… 한 그릇

사골국 은하에 밥 말아 네 눈동자 후루룩 삼키고
내 몸속에 들앉아 속속들이 나를 바라볼
너에게 기꺼이 나를 들키겠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몸속의 소


<아시아>, 2007년 봄호


*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는 내 연애의 대상이었다. 막노동판을 떠돌 때, 나는 최승자의 목을 비틀어 꺾으면 그 목에서는 이차돈의 흰 젖 같은 피 대신 시가 나오지 않을까 내심 상상했었다. 허수경의 거름이 될 수 있었다면 하는 안타까움도 품어 보았다. 이젠 더 이상 시인의 목을 꺽고 싶지도 않고, 거름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때때로 김선우의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는 기분에 젖게 만든다.


언제부터 시를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읽은 첫 인문학 서적은 루소의 『에밀』이었고(우습고
, 촌스럽게도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읽은 첫(그러니까 본격적인) 문학작품은 김성동의 『만다라』였다. 불경하게도 나는 이 책을 막내 고모가 시집가며 버려둔 책장에서 훔쳐보았다. 『에밀』을 읽은 직후의 일이었다. 『만다라』를 읽으며 특정한 대목에서 내 어린 고추가 빳빳하게 성을 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만다라』에서 내 어린 고추를 성내게 했던 대목들과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들을 내 일기장에 비밀스럽게 옮겨 적었다.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동안 커져서 나오지 않는다. 병도 새도 다치지 않고 꺼낼 수 있을까.”


“정거장에만 오면 난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애. 모두들 목적지가 있는데 난 갈 곳이 없어.”


요즘 나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산문적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음과 양이 있고, 남성과 여성이 있다면 문장에는 운문이 있고, 산문이 있다. 나는 산문적 인간이다. 풀어내고, 풀어내고, 풀어내지만 결국 도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말문이 닫히는 것이 산문의 묘미(妙味)다. 운문, 즉 시가 문(門)이라면 산문은 벽(壁)이다. 모든 문은 닫혀있고, 닫힌 문을 열면 그 문 뒤에는 아무것도(空) 혹은 무언가(或)가 있기 마련이다(동양에서의 공이란 전무(全無)가 아니라 전부(全部)일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산문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동쪽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 가욕관(嘉峪關)까지 끝없이 끝도 없이 이어진 거대한 벽이다. 그 거대한 벽이 빙 둘러 가둔 것이 천하(天下)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벽 자체가 세상일지도 모르는 천하. 산문의 세계는 그러하다. 산문의 그릇에 담긴 것은 어쩌면 세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그릇 혹은 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나무를 쪼개 문을 짜고, 작가는 흙으로 그릇을 빚는다. 작은 그릇은 작은 그릇대로, 큰 그릇은 큰 그릇대로 그에 알맞은 세상을 담는다. 만리장성이란 그릇에 담긴 것이 천하라면, 때로 사골국물은 은하가 된다. 김선우, 그녀는 문을 열어 그것을 보여준다. 기꺼이 들켜준다.


자기의 뼈로 달인 은하물에서

소가 처음으로 정면의 나를 보았다


내가 김선우를, 아니 김선우의 시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잘 녹아들어 있는 시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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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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