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 최규석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4



테르미도르와 순정만화

"김혜린!"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왜 저자도 아닌 "김혜린"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만화의 등장을 사람들은 1909년 6월 2일에 창간된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한칸 만화를 꼽는다. 그로부터 한동안 한국엔 만화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여유자적(?)하게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아니, 그것을 출판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어째서 만화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기간의 우리 민족의 모든 예술이 굴절되었듯 만화 역시 굴절 혹은 단절의 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 만화가 다시 일선에 등장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라이파이"의 작가 김용환 선생이 한국 최초의 만화 전문 잡지《만화행진》을 1948년에 발행하면서부터였다. 만약 이것을 기점으로 한다면 한국 만화는 56년 만에 현재의 위치까지 성장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러하듯 비약 혹은 도약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화만큼 남녀간의 취향 분화가 확실한 장르도 드물다. 특히나 일본 만화의 짙은 그늘 속에 있는 한국 만화의 대중적 취향을 고려할 때 이런 남녀간의 취향 분화는 사실 전세계적인 것이라기 보다 한국적 혹은 일본적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한국 사회에서 만화는 그 시대적 한계나 경제적 어려움을 고려해본다면 놀라울 만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길찾기"라는 출판사에 대해 처음 머리 속에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혜린의 "테르미도르"가 이곳에 복간되었다는 기사를 통한 것이었다. 그런 뒤에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 중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라크전과 관련해 먼저 인터넷상으로 주목받았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다시 "길찾기"를 통해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대혁명을 역사적 배경으로 차용한 작품으로 우리 만화사에 기록되어야 할 작품 목록에 분명히 올라가야 할 작품이다. 작품 자체의 질도 질이거니와 이 작품이 처음 수록된 "르네상스"라는 잡지의 역사적 의미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19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지로서 처음 등장한 잡지 창간호부터 수록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김혜린은 당시 김진(바람의 나라) 등과 더불어 그간 순정 만화의 영역을 대하 서사 장르까지 확장시켰다.


한국 만화가 가야하는 머나먼 길

1958년 무렵 미국의 원조 경제에서 갓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만화는 출판 유통망을 떠나 대본소 체제에 진입하게 된다. 만화는 사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보는 전형적인 출판물이 된다. 이것은 대본소용 만화, 무협지를 탄생시켜 만화의 예술성을 극도로 억압하게 된다. 만화의 생명은 대본소의 순환 구조와 맞물리게 되어 점점 짧아지게 되고, 만화 작가들은 작가가 아니라 만화공장의 공장장이 된다. 그들은 대본소에 착취당하면서 동시에 그 밑의 문하생이라 불리는 하도급을 둔 착취자가 되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에 연이어 군사쿠테타로 들어선 1961년 박정희 독재정권은 만화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작한다. 가뜩이나 열악한 한국 만화계를 더욱 짓눌러 온 것은 군사독재정권이 그들 스스로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사회에 대해 벌이는 치졸한 도덕극이 지닌 과장된 무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었고, 어린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이었다.


만화가 대본소 시스템에서 다시 서점으로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주목해보아야 할 상황이다. 대중가요가 사전 검열 철폐를 위해 투쟁한 것처럼 만화 역시 대본소 독점체제를 깨뜨리기 위해 많은 만화가들이 싸웠다. 거기에 가장 강력한 힘을 보태준 이들은 역시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이었고, 그렇게 만화를 사랑하고 고민한 세대가 바로 "공룡둘리에 대한 오마주"를 그린 "최규석" 세대다. 물론 얼마전 이현세 파동 등으로 드러나듯 아직도 우리 만화가 이런 사회적 금기와 편견을 벗어나 가야할 길은 멀고 험난하다. 동시에 만화에 대한 가장 든든한 지지층이자 동시에 어려서는 대본소 만화 보기에 익숙했고, 어느 정도 자라서는 도서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보던, 그리고 자라서는 디지털 스캐닝을 통한 인터넷상의 만화 보기에 익숙한 독자들이 얼마나 만화를 직접 소장하고 보려드는가? 혹은 보게 만드는가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그것은 만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거의 모든 예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마주 - 짧지만 위대한 전통에 대한 경배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접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던 최규석의 이 단편 만화를 보고 놀라운 재능을 지닌 신예작가의 등장에 대해 찬사를 보냈고, 아동물의 전형적인 캐릭터성을 지녔던 둘리란 존재의 확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만화를 보고 나도 역시 그런 점에서 대단히 놀랐고, 여러 면에서 기뻤다. 우선 우리 사회에 드디어 오마주를 바칠 만한 전통 혹은 사회 전반에 두루 알려진 문화적 코드가 생겨났다는 점에서 기뻤고, 패러디물인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대해 이 캐릭터의 원저작권자인 작가 김수정 선생의 반응이 또한 기뻤다. 김수정 선생이 "둘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만화의 다양성을 감안할 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반가워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다시금 그의 작가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마주와 패러디는 사실 기법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 "베낀다"는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끊임없이 알프레드 히치콕을 베낀다. 퀜틴 타란티노는 오우삼을 베낀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예술가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베낀다. 오마주가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면 패러디는 풍자를 위해 베낀다. 선배된 입장에서 후배의 오마주란 것은 말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패러디든, 오마주든 본래 자신이 만들어냈던 작품의 아우라에 변형을 가하는 행위이며 후배로서는 오마주라 하더라도 선배 입장에선 욕보이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비근한 예로 "서태지"를 패러디한 음치 가수의 음반과 비디오물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언제라도 오마주의 대상이자 동시에 패러디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그것이 설령 기분 나쁜 일이라 할지라도 참아줄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본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바로 예술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오마주가 되었든, 패러디가 되었든 표절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그 대상이 된 예술가 혹은 작품이 이미 사회전반적으로 통용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마주는 논외로 하더라도, 패러디의 기본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김수정은 일종의 아동물로 구분되는 "둘리"를 통해 대중적인 만화작가로 널리 알려졌으면서 동시에 둘리 캐릭터를 통해 독자(한국)적인 애니메이션 창작과 캐릭터 산업 분야를 개척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이자 중요한 장인이다. 그에 대해 후배 작가가 보내는 오마주는 짧지만 위대한 우리 만화계의 전통에 대한 경배이기도 하다. 그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인 김수정 선생의 자세를 보면 역시 경배를 보낼 만하다.






최규석 - 슬픈 먹이사슬의 뫼비우스

많은 이들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구입하게 된 동기가 이 단편 만화의 뒷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고길동의 무덤을 베고 누운 둘리가 공룡화된 모습으로 표현된 이 만화의 엔딩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감동적이었던 만큼 후속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엔 그 뒷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작가 최규석의 여러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아쉬워할 것은 없다. 나머지 단편들 역시 놓치면 아쉬울 만큼 뛰어난 수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문화계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문제 중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조로현상이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화계를 대표한 장르가 된 영화 부문은 복합상영관과 대자본의 결합으로 영화 장르의 급격한 산업화와 장르화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창의력이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고, 오랫동안 한국 예술계의 정점에 서 있던 문학은 그 활력을 잃고 있다. 젊은 작가들은 손쉽게 타협하거나 아예 대결할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만화계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시점에서 최규석의 단편 만화들은 비록 때로는 너무 안이하게 해피엔딩으로 종결짓거나 거친 안목을 정제하지 못한 체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젊은 작가의 당연한 권리인 "창조"와 "도전", "비판"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80년대적 향수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익히 드러낸 바 있는 솜씨, 교묘한 비틀기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정신은 2002년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의 극화부문 당선작인 <콜라맨>에서 손쉽게 해피엔딩적인 결말로 다가섰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고, 그의 데뷔작인 <솔잎>에서는 아직 그만의 그림체가 완성되기 이전의 박흥용과 오세영의 그림체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솔잎>에는 이미 작가가 앞으로 걸어가고 싶은 작품 세계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맹아들이 숨겨져 있다. 그는 반전을 즐기는 작가이자 동시에 세상에 대해 진지한 말걸기를 시도하고 싶어한다. 이런 류의 작품에는 우리가 만화에 대해 그간 지녀왔던 적지않은 편견들, 가령 순정만화 vs 활극만화의 구도나 예술만화 vs 대중만화의 경계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깨우쳐 준다. 결국, 예술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다. 그것을 창출해 내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얼마나 철저하게 하였는가? 그의 장인적 기술과 예술가적 재능이 이것을 얼마나 뒷받침해주고 있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다.


최규석은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근래 어느 장르의 예술가들도 지니지 못한 최규석만의 뛰어난 장점이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슬픈 먹이사슬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과거에서 미래로 타임워프한 공룡, 아이들에게는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 원하는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줄 수 있었던 히어로 둘리조차도 나이 40에 이르러 "주민증"도 없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이 땅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원숙해지고 그만의 것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거친 러프 스케치 풍의 연필 데생으로 음영을 주는 그의 그림체도 매력적이지만, 역시 그만의 다양한 실험을 할 것이란 사실을 믿는다. 그의 드라마투르기 역시 지금의 간결하고 힘 있는 구조란 장점을 살리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더욱 많은 사연들을 담아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앞으로 매우 중요해질 한 작가의 초반부를 함께 하고 있다. 그 사실이 앞으로 더욱 기뻐할 수 있는 일이 되길 바랄 뿐이다.




 * 나의 걱정에 아랑곳없이 아니 사실은 이 리뷰를 쓴 것이 이미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최규석은 나의 염려를 한낱 기우로 만들어버린 채 무럭무럭(?) 훌륭한 작가로 자리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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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최종병기 그녀



다카하시 신을 아는 만화 매니아들이 많을 텐데,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약간 우스운 일이 될까? 가끔 남성성, 여성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남성성은 이렇다, 여성성은 이렇다고 거칠게 규정하거나 규정당할 때 약간 마음이 아파질 때도 있다. 가령,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내가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왕따 당하는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 점에서 페미니즘 역시 선택적 사고라는 것은 일견 불행하면서 다행한 일이다. 가령, 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지만 그 대의에 너무나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넘겨두고라도 남성성, 여성성이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글쎄, 최소한 만화책을 고르는 취향에서만큼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취향 분화가 확실히 되는 분야가 있을까? 물론 그 장벽이 남성과 여성의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변화해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만화계의 장벽은 브리티쉬 오픈에서 여성 골프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큼이나 높다. 어제와 그제 머리맡에 놓고 읽은 두 권의 만화책은 나에게 남성을 위한 순정만화도 존재하는구나 하는 편견 아닌 편견, 스테레오 타입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최종병기 그녀』의 작가 ‘다카하시 신’의 초기 단편집 『좋아하게 될 사람』과 『안녕, 파파』 두 권이었다. 『최종병기 그녀』의 첫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다카하시 신이란 작가가 분명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잠시 후 남자일 거라고 생각을 수정했다(실제로도 '남자'였다). 그런 착각을 했던 까닭은 다카하시 신의 독특한 그림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남성적 문체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분명 만화에 존재하는 남성적 그림체보다 명확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에 있어서 남성적 그림체와 여성적 그림체는 확연히 구분될 만큼 달랐다.

그 차이는 고우영 『삼국지』의 그림체와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캔디』의 그림체가 다른 것처럼 확연한 것이다. 물론 국내의 일부 여성 작가들(『테르미도르』의 김혜린 같이)이 프랑스 혁명 과정을 다루는 만화를 그리거나,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이 그간 남성적 주제로 알려져 왔던 역사 속의 권력 투쟁, 혁명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림체에 있어서만큼 전형적인 그림체를 유지하는 편이다. 가령 얼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눈동자, 치렁치렁하는 머리카락,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 등등 말이다. 물론 다카하시 신의 그림체는 기존의 여성 순정만화체 그림과는 또 다르다. 어딘가 비어 있는 듯 남아있는 여백,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흑백 모노톤과 끝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가늘게 이어지는 선, 스크린 톤은 거의 생략하는 등 적게 표현하여 오히려 상큼하고 신선한 느낌이 인상적인, 어딘가에서 본 듯한 정겨움이 묻어난다. 마치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의 눈길을 피해 공책에 몰래 그린 만화의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의 그림체가 남성적인 느낌은 아니다. 물론 등장하는 여성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나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의 근육은 사라지고, 여성적인 선은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작가가 금방 남성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캐릭터 표현에 있어서 숨길 수 없는 남성적 시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신의 대표작 『최종병기 그녀』를 보자. 제목부터 참 과감하다. "최종병기 + 그녀"라니,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평범한(?) 남자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받은 혹은 엄마 몰래 숨겨둔 용돈을 챙겨 가장 먼저 군것질을 하고 조금 지나서는 건프라를 사거나 마크로스, 밀리터리 플라모델들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고, 형, 누나, 혹은 친구네 집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과월호를 읽거나 거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발견하여 그에 대한 설정자료집을 사거나, 복사하고 인터넷으로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이때의 최종병기란 무릇 거대로봇군단이거나 그도 아니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뉴타입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라니 게다가 그녀는 이런 말이나 지껄여대는 소녀다.

"왜 나는 당신에게 상처만 입히는 걸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여자라서 미안해"

주인공 소녀는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유방을 달고 다니며 유사시엔 앞가슴을 미사일처럼 발사하는 아프로다인이나 비너스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여성주의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게 그려지는 만화체에 비해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고, 개조하여 병기화해가는 과정 자체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고 소외당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교실 뒤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가와서 쪽지 한 장을 놓고 수줍게 교실 뒤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소녀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쟤랑 나랑 같은 반이었어? 하고 되묻고 싶을 만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다. 요새 경제 이야기하면서 다들 성장 동력, 성장 동력하는데, 우리 삶에 있어서의 성장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도 한 때는 뭐뭐 했다"는 식의 대사나 후일담을 늘어놓는 나이가 되어간다. 어떤 사람은 군대 시절 이야기를, 어떤 이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선배 뻘 되는 386 세대들(엄밀히 말하면 나도 그 끄트머리쯤 있는지도 모른다. 70년생, 89학번, 30대)이 이제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다니는 지금, 나의 유년 시절은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나는 요새도 밤마다 누군가에 쫓기는 꿈을 꾼다. 대개 이런 꿈의 할머니 식 해몽은 '키 크느라 그런다'는 것이다. 자, 그대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라. 정말 즐거웠는가? 아니면 고통스러웠는가? 누구나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친구들에게는 내 과거는 이랬었지, 이렇게 화려했거나 이렇게 고통스러웠거나 상관없이 과장하게 된다. 말할 때는 금방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지만 돌아서고 나면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를 잘 기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아름다운 유년만이 존재했을까? 『최종병기 그녀』의 두 남녀 주인공(슈이치와 치세)이 만난 세계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고, 결국 치세는 최종병기로 개조된다. 과연 그녀는 나는 아직도 치세 그대로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다카하시 신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SF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는 듯 보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라 할 만큼 설명하지 않는다. 치세가 어떻게 최종병기가 되었는지 실제로 그녀가 최종병기의 위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부분은 죄다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병기 그녀』에서 <에반게리온>이나 기타 SF물들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종종 이런 부류의 SF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만들어 논 가상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그 설정들을 달달 외우는 것을 취미로 한다. 하지만 『최종병기 그녀』는 그런 류의 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남성들을 위한 순정만화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만화의 여주인공 치세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카하시 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개의 여성 캐릭터들은 종종 남성들보다 강인하지만(특히, 성적 접촉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에게는 유달리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자극적이라는 측면에서) 그 외의 경우엔 무척이나 순종적이고, 다소곳하다. 물론 이 부분에 남성 성 판타지를 자극한다고 한 마디 해놓으면 아주 편하지만, 그건 또 너무 쉬운 접근법이다. 다카하시 신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분명 성(sex)의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어린이"와 "어른"을 가르는 구분 근거는 섹스다. 어른이란 말의 어원이 되는 '어르다'란 말 자체에 이미 '섹스하다, 남녀가 교합하다'는 뜻이 있다. 결혼, 즉 공인된 섹스는 성인식의 최종 단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 동력 혹은 넘어서야 할 고개들 중 하나는 분명 '섹스'다. 『최종병기 그녀』는 일종의 성장소설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성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요소들은 군데군데 적절히 깔려 있다. 아무리 십대 청소년들이 까질 대로 까졌다 한들 벌건 대낮에 러브호텔을 당당하게 들락거리는 어른들의 성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입으로는 숱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녀석들의 태반이 실제로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본 경험들 역시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친구들과 '오줌멀리 누기' 경쟁에서조차 지고 싶지 않은 남성들의 괜한 경쟁 심리가 만들어낸 우스운 결과다. 



난 정말 어렸을 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고,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땐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며 그 뒤론 줄곧 어서 시간이 흘러 자연사하게 되길 바라고 있는 중이다. 어른들의 세계, 그곳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모든 것이 부정해보였고, 부조리했다. 학교도 전쟁터였지만 사회는 그보다 더욱 악랄하고 끈질긴 전쟁터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전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람들이 낙오하고 죽어갔다. 이런 남자 아이에게 최종병기는 누구였을까? 그네들이 매달릴 수 있었던 최종적인 지지대는 누구였을까? 친구들과의 우정 아니면 사랑이다. 우리들에게 사랑은 언제나 지독하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혼란일 수밖에 없다. 치세와 슈이치가 왜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가? 왜 치세의 전투경험이 축적되어갈 수록 그녀의 자아는 붕괴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가? 왜 그녀가 사회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느낄까? 불행하게도 그것이 성장이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비평가들이 지난 1980년대의 호러 무비 혹은 슬로터 무비들을 평할 때 십대의 성적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크림>에 등장하는 호러 무비의 원칙처럼
"첫경험을 한 여자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사랑하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갈망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비참한 결과이지만, 마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매우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참호(우리의 성격갑옷) 밖으로 방심하여 고개를 내밀면 순식간에 저격당하고 만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바보취급 밖에 받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전쟁이란 것을 무시해버린다 하더라도 실제 고교생의 생활이 절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중 누가 있는가? 그들의 상황이 혼란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는가? 몸은 이미 성장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공공연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사회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하다. 사랑하면 상처를 주게 된다. 그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혼란이고, 혼돈이다. 관계를 맺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자아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불완전한 자아로서 결핍된 상태에서 만나 사랑한다.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으나 이런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란 매우 어렵다. 이들의 사랑이 혼돈스럽고, 때로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나는 이 만화책을 도서대여점에서 읽었는데, 실제로 고등학생이 빌려가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는 첫사랑의 열병이 지나갔을 법한 나이의 사람들이 도리어 열광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에겐 이들의 관계를 제법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일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길 위의 인생(life on the road)'인 것을, 어차피 길을 가야하는 사람에겐 터널도, 길의 일부이일 수밖에 없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류는 오로지 방황을 통해서만 치유된다." 좋은 성장 소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섣부르게 회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끝내 백조가 될 수 없는 미운 오리 새끼들도 있기 때문에…. 슬프게도 어른이 된다는 건, 백조가 아니란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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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원래 이 리뷰는 다카하시 신의 단편집 『안녕, 파파』와 『좋아하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인데... 방향을 잘못 잡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냥 『최종병기 그녀』를 중심으로 쓴 다카하시 신의 작품론처럼 되어 버렸다. 어쩜 좋냐? 흐흐, 여러모로 우습게 되었다. ^^ 그럭저럭 수준작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최종병기그녀>는 나에게 대단한 감동을 준 만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도 전권 다 가지게 되었고, OVA 애니메이션 DVD도 소장하고 있는데다가 작가인 다카하시 신의 초기단편집들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인연일지 모르겠다. 치세!(흐흐, 게다가 지금 트위터의 아이콘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종병기 그녀>의 상대역이자 나레이터인 '슈'다. 치세의 사랑을 한껏 받은 덕분에 결국 지구멸망의 날까지 살아남은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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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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