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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15 김혜순 - 잘 익은 사과
  2. 2010.09.09 김혜순 - 참 오래된 호텔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는 지난 2001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물론 문학상에 대해서야 여러 가지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또한 상이란 앞으로 올 미래에 대한 투자의 의미보다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찬미의 성격이 더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일단 상을 많이 받은 작가나 시인이란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등 신선할 것도 없는 한물간 간고등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혜순은 잘 늙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인의 가장 큰 딜레마이자 동시에 매력일지 모른다. 시인의 나이는 곧 통찰의 깊이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혜순의 통찰은 나이를 먹지만 그녀의 언어는 여전히 탱글탱글하다.

사실 "잘 익은 사과"는 얼핏 읽어보면 동시와 매우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네요, 나네요, 있네요, 잡수시네요"로 끝나는 문장의 종결어미도 그렇지만 연결되는 심상의 감각들도 그러하다.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청각'으로 시작한 첫째 연부터 네 번째까지는 '소리의 심상'이다. '치르르치르르'라는 의성어로 강조되는 소리의 심상들은 이후 겉으로 보면 자칫 심드렁해보일 만큼 차분하고 절제된 묘사들로 이어진다. 4연까지가 '청각'이라면 5연부터 8연까지는 촉각, 9연과 10연은 후각, 11연부터 마지막 연까지는 시각적 묘사로 연결되고 있는데, 시에서의 시청각적 묘사는 자칫 잘못하면 마치 1960년대의 '총천연색 컬러' 영화를 광고하는 포스터처럼 유치해질 수 있다. 하지만 김혜순 시인은 온통 묘사만으로 꾸며진 "잘 익은 사과"에서 이 같은 위험을 거미처럼 현실에서 치밀하게 뽑아낸 국면들을 삽입함으로써 훌륭하게 극복한다.

시인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바라본 일상의 풍경들을 시계의 물레처럼 '치르르치르르' 돌리며 아라크네가 되어 한 여성이 태어나 살아가는 여러 모습들을 직조해나간다. 그 순간 인생은 둥근 자전거 바퀴처럼 둥근 사과 한 알이 된다.  삶의 시간은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이어지고, 사각사각 사과를 깍아내듯 시인의 자전거 바퀴를 따라 함께 돌고 돌아 마침내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의 "큰 사과" -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 잇몸으로 오물오물" - 에서 마무리된다. 인생은 과연 잘 익은 사과 한 알이다. 비록 먹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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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참 오래된 호텔

- 김혜순

참 오래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밖으로 내던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내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텔.


*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추억에 잠긴다. 시 때문에 생긴 추억이 아니라 시인 때문에 생긴 추억들이 내게는 너무도 많다. 아름답고, 고상하고, 멋있는 그래서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채 마녀의 도가니에 들어가는 약재가 되어도 좋다는 미망에 사로잡혔던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있었는가?


이 시는 굉장히 많은 이미지들로 꾸며져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몇 개의 이미지들이 계속되는 변주를 통해 '참 오래된 호텔'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들을 꾸며내고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이 '참 오래된 호텔'이라는 시가 인간의 영혼이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육신을 노래한 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육신은 다만 '고기'로서의 육신이 아니라 밥 먹고, 섹스하고, 잠자고, 그리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는 영혼이 담긴 육신이다.


내가 살아낸 육신은 1992년과 1993년 사이에서 시인을 아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맛보았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호텔방 인근 방에는 시인의 사랑이 머물기도 하고, 자신의 육신은 영혼을 담기도 하고, 영혼이 육신에 머물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피곤하다. 이 시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시라는 것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것인 만큼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정의 같은 것은 필요 없지 않은가? 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시에 푹 빠져들게 하지 않는다. 시인과 독자는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 거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손을 뻗치면 그 '양모같은 주름이 잡힌 강물'에 손가락을 담글 수 있는 정도의 거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에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있다. 지금 당신은…


이 시는 그렇게 당신에게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읽으며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해되고 저절로 보여지는 시. 그게 바로 마녀. 김혜순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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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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