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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21 나희덕 - 상현(上弦)
  2. 2010.10.26 나희덕 - 길 위에서



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


상현(上弦)달을 영어로는 'first quarter'라 부른다.
과학적인 표현일진 몰라도 매가리 없고, 풀 죽는 느낌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달은 언제나 여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원시시대 인류가 사냥과 채집에서 돌아와
동굴 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로의 온기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아이들은 자라고, 새로운 생명은 여인의 품속에 싹텄으므로
밤과 달은 여성에 비유되었다.

남성에게 여성의 신비로움은 언제나 경이로운 일이었으나
늘 함께 지내는 존재였기에 여성의 신비는
한낮의 태양 같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함일 수는 없었다.
달처럼 마주볼 수 있고, 보일듯 잡힐듯 하면서도
여성은 달처럼 달려가면 또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있었다.

밤과 달은 언제나 쌍을 이루어 등장하지만
상현(반)달만큼은 낮과 밤의 경계 사이에 등장하기도 한다.
언덕 위에 살짝 걸친 상현달을 시인은 설레는 가슴으로 훔쳐본다.
잠시 지상에 내려온 여신처럼
그녀의 하얗고 풍만한 궁둥이가 남긴 흔적은 저기 능선 어디쯤 있으리라.
내 가슴속에도 선연하게 새겨진 듯 화끈거리는 환한 상처들이다.

여신이 다녀간 그곳
능선 근처 나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를 가슴에 품었던 나무들은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순결하게 모든 죄악으로부터 정화되었고, 구원을 얻었다.

나도 그녀의 하얗고 풍만한 궁둥이에 입술을 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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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때로 어떤 시인들의 깨달음은 흔하다. 시적인 성취나 문학적 성취에 앞서 소중한 깨달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깨달음은 흔하디 흔하여 구태여 시인이 저런 깨달음에도 일일이 말 걸고, 정 주어야 할까 싶다가도 세상에 아픈 이들 그지 없이 많아 그들이 내 몸뚱이 병들 대신 앓아주지 싶어 고개가 떨어진다.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또 누군가의 길을 헤매이게 했음을 안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는 남는"다. 혹여 나로 인해 길잃은 이들이여! 나역시 누군가로 인해 길잃은 적 있었던 가슴앓이 동업자였음을 부디 그대들은 잊지 마시게나.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냄새와 어지런 발걸음으로 세상의 길들을 흐려놓았느냐.
그리고 아직도 그 길 위에서 헤매고 있더냐. 세상의 모든 길이여, 나에게로 오라. 내 길 위의 창녀로 쓰러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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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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