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11.30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 네 번째 편지
  2. 2010.11.06 염쟁이 유氏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 네 번째 편지
- 오세영의 시 <나를 지우고>를 읽으며 든 생각들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선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이상하게도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착 가라앉아 버립니다.
마치 내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반성문을 쓰고 있는 듯이...


늙은이에게 젊은이는 더이상 아무 것도 배우려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이 먹은 교수는 그저 나이 먹은 교수일 뿐 그가 평생을 쌓아온 학문적 업적 같은 것은 쇠락해버린 초가에 덩그마니 얹힌 박 같이 허울만 좋은 이름일 뿐 특별한 권위는 바랄 것도 없고, 존경은 더할 말이 없는 시대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쟁력이 으뜸인 시대에 고려장 지낼 날이 멀지 않다는 증빙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너희들도 언젠가 늙을 것이란 말은 충고도, 선언도 아닌 악담인 게지요.



내가 아직 '문학은 나의 힘'이라 외치며 술잔을 높이 들던 시절, 아직 고왔고 아름다운 시인이자 나의 은사에게
"시인은 늙기 전에 죽어야 합니다."라며 호기롭게 떠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인이었던 은사는 여전히 살아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머리가 많이 새었지만 여전히 멋있을 겁니다. 1942년생인 시인 오세영의 시를 읽습니다. 당신의 이 시를 읽노라니 문득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鸂之德)’의 고사가 떠오릅니다.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중국의 어느 왕이 투계를 몹시 좋아하여 기성자란 사람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구해 최고의 투계로 만들도록 합니다. 기성자란 인물은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는데, 왕이 맡긴지 십일이 지나 기성자에게 “닭이 싸우기에 충분한가?”라며 묻습니다. 기성자는 단호히 대답하길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아직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다시 십일이 지나 왕이 또 기성자를 불러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성자는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도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라 했습니다. 왕은 다시 십일이 지나 기성자에게 묻습니다. 기성자는 역시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라 답합니다. 다시 십일이 지나 왕이 또 묻자, 기성자는 그제야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가 되었습니다. 어느 닭이라도 이 모습만 봐도 도망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는 고사입니다.


얼마 전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영화 <미션>을 다시 보았습니다. 오래전 문망의 영화 코너에 글을 올린 적도 있었던 영화입니다. 그 사이 내가 늙어 유순해진 것인지 어렸을 적엔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 신부보다 로드리고(로버트 드니로) 신부가 더 좋고, 더 잘 이해되었었는데 이번엔 가브리엘 신부의 마음도 알 것 같더이다. 누군가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이 있는 곳보다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해 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운명이란 것도 때로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곳보다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루어질 때가 더 많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듯합니다.



시인 오세영은 늙었고, 나는 아직 젊습니다. 그 말은 내가 더 진보적이란 말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뜻이란 걸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이란 걸 알 것 같습니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란 구절에서 나는 나무가 홀로 나무일 때는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지울 때만 비로소 숲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배웁니다.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전부 알 수는 없겠으나 내 나름으로 살아가며 더 깨우칠 일이겠지요.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서야 어찌 밀밭을 이룰 수 있을까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말이 또한 이와 흡사하겠지요. 말 그대로 해석하면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숨어 있다는 뜻이지만 이때의 진(塵)이란 속세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겸손하란 뜻도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자신이 지닌 능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이를 내세우지 말고, 세상의 속된 사람들에게 눈높이 맞추란 뜻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말은 오늘날 고립되어 가는, 위기에 처한 진보, 좌파를 자임하는 (저 같은)사람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구절이란 생각이 듭니다. 리저호우(李澤厚)는 『고별혁명(告別革命)』이란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개량으로 혁명을 대체한다」는 글을 썼습니다.


지난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개량주의자’란 지적을 마음 한 구석에선 치욕처럼 느낍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제 개량주의자였음을 자백하는 고해성사를 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혁명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그와 같은 현실이 슬픈 사람입니다. 리저호우는
“1895년, 갑오해전에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줄곧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사이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전자는 ‘돌변突變’ 즉, 계급투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폭력수단)으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 역사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점변漸變’ 즉, 계급협력의 비폭력 수단으로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을 추구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좌파와 진보를 단순히 민주노동당이나 참여연대, 민주노총 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나마 가장 대표적인 집단인 건 사실이겠지요. 이들 중 누구도 ‘혁명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류 좌파(진보)는 모두 개량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이들 중 누구도 솔직하게 개량주의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여기기에 말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미 수차례 말했는데 저만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의 좌파들, 진보들은 아직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선 개량주의에 대한 혐오와 혁명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 보입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라 하기 좋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저 자신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 끝에 나온 말입니다. 그것이 ‘돌변’이든, ‘점변’이든 추구하는 바를 리저호우의 말에서 빌리면 결국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에 있습니다. 대체로 국가적 자아의 경신에 실패하는 경우, 국가와 지배계급이 택하는 손쉬운 해결책은 역사 이래 전쟁이었던 경우가 많았고, 피지배계급이 택하는 해결책은 폭동이나 혁명이었습니다. 전쟁은 자본가들의 혁명, 우파들의 혁명인 셈이지요. 역사가 한 개인이나 집단의 공과를 심판한다는 믿음을 버리고 났을 때, 역사는 그저 냉정하고 잔인한 기술(記述) 방식의 하나일 뿐입니다.



저는 중국식 유물론의 효시를 관자(管子)로 봅니다. 그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고, 후세 제갈량이 닮고 싶다고 말했던 관중(管仲:?~BC 645)입니다. 관중하면 우선 “관포지교(管鮑之交)”만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관중은 제나라 민중들이 영웅처럼 떠받들던 재상이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마치 일종의 제왕론을 펼친 사람으로만 오해되는 것처럼, 관중 역시 그와 흡사한 사람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관자(管子)』 「목민편(牧民篇)」에 이르길
“광에 먹을 것이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倉凜實則 知禮節, 衣食足則 知榮辱)”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유물론의 본질을 지극히 천한 것으로 끌어내린다는 오해를 감수하고라도 말하자면, 결국 유물론은 인간이 정신만으로 살 수 없다는 현실주의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예수의 말에 반대하는 주의, 주장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가 우선인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급진은 명분이 아니라 개량주의자들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은 아닐런지요. 아니, 명분만 내세운 채 거짓희망을 주느니 차라리 보다 철두철미한 개량의 길로 가는 것이 도리어 급진의 길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비판의 말만 앞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개량의 길로 질질 끌려갈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앞서 성찰하고, 개량하고, 개혁하고, 보수하여 실현가능한 희망, 급진을 실천해내는 것이 좀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까 고민하게 됩니다.


1987년 이후 20년이 흘렀고, 1997년 이후 10년이 흐르고 있습니다. 프란츠 파농은
“민중에 대한 아첨을 경계하라”고 말했는데, 오늘 이 땅의 지식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여전히 민중에 대해 아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1980년대를 휘감았던 민중주의는 역사와 민중을 지혜로운 심판자, 추상적인 진리로 추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때 말하는 민중이란 언제나 결국 각성한 민중으로서의 소수자였을 뿐임을 이제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절차적 민주화라고 현재의 민주주의를 폄하하지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입니다. 지금 돌변의 방식을 택하자고 외치는 진보도, 좌파도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좌파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개량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으며, 도리어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 더 많은 존경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 민주노총에 등을 돌리고 있을까를, 아니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어째서 민중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는가, 지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 교육, 언론 등 수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 모두 타당하다는 사실은 아마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좀더 솔직하게 고백할 때입니다. 1980년대의 분열을 오늘까지도 그대로 끌고 왔으며, 우리들의 현실을 비판하는 일에 능숙한 반면, 현실적인 대안이나 희망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그간 얼마나 서툰 존재들이었는지 말입니다. 거기에 더해 과거 전대협 의장을 비롯한 학생운동권 중 상당수가 결국 아무런 명분도 없이 현실정치에 투항해버렸고, 민주노총은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으며, 시민단체들은 정권교체 이후 하나둘씩 체제내화 되는 과정에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중에게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주지 못한 채, 과거와 같은 방식의 운동, 명분이 옳으니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싸움이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언제는 언론의 지지를 받고 싸운 적이 있냐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교만이고, 자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지우고 나무, 숲, 산이 되는 희생, 싸우지 않고 이기는 나무 닭의 덕,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는 대신 자신을 낮춰 세상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겸손, 관자의 실용주의, 태산과 같은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미FTA 타결 이후 평소 조용하기가 산과 같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허세욱 선생이 분신을 하고, 예천에서는 농민 한 분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에게 공기총을 쏘았습니다. 사는 건 앞으로도 힘이 들겠지요. 하긴 우리 네 사는 세상이 한 번이라도 살기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모레가 더 좋은 세상 만들어보자고 다들 고생하시는 거 압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는 고정된 말씀에 얽매이는 종교가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는 세상에 가장 적절하게 대응해온 철학이기도 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 지루한 고해성사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른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양심의 기억이자, 동시에 패배의 기억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회주의는 우리들의 양심이 늘 손쉽게 욕망에 굴복할 수도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건 어제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불행히 미래에도 그럴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의 희망이 저 멀리, 지금은 비록 그 길이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향하는 길 양 편으로 무수한 무덤들이 실패를 증명하지만, 그 길이 우리의 양심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인 이상 그리로 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 길 위에서 외로운 한 명의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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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사회, 문화와 예술 전방위적으로 살펴보고 기획하여 청탁하고,잡지를 만들고, 때때로 글을 쓴다. 그것이 나의 직업이다.  잡지(雜誌)쟁이... 그게 나의 직업이고, 나는 그 직업을 천직으로 여긴다.  

초등학생 때 나는 스파이가 되고 싶었다. 스파이가 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잘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든 관심을 가졌고, 잡학다식하여 초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퀴즈왕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스파이를 꿈꾼 아이가 자라서 퀴즈왕이라니... ^^;;;

스파이도 퀴즈왕도 해본 적이 없지만 대신에 현실적으로 나의 천성과 부합되는 일이 서양에서는 매거진이라 하고, 동양에서는 잡지라 부르는 매체의 편집장이 되었다. 매거진이란 말보다 잡지란 말이 이 매체의 성격을 실천적으로, 내용적으로 잘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이란 말이 '탄창'이란 뜻도 가지고 있는 만큼 그 자체로 공격적인 느낌이 나는 반면 잡지란 말은 수동적이고, 한 편으론 천격(賤格)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나의 미적인 감각에도 어울린다.

어쨌든 나는 문학으로 출발해서, 미술,  음악, 사진, 영화, 만화에 두루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이 중에서 음악을 제외하고, 다른 한편으론 음악을 포함해서 저장되는 매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저장되지 않는 매체에 취약하다. 영화의 경우에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보다는 DVD나 비디오테이프로 보는 것을 좀더 즐기는 편이다. 반복해서 보고,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반복해서 들어야만 한다. 난 한 번도 천재적인 재능에 대해 부러워해본 적이 없으며, 그것을 높이 평가해본 적도 없다. 천재에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나 요구되기 때문이다. 일단 적절한 수명이 필요하고, 때를 잘 만나야 하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죽기 전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다면 천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때를 잘 만나서 다시 재확인되지 못한다면 천재가 남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사랑해주는 누군가 소수의 사람들이 없다면 그가 남긴 것이 어디에 남겨질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죽어버린 천재를 사랑하지만 살아있는 천재를 아끼지 않는 법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읽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이나 무용, 음악회 같이 일회성으로 끝나버리는 예술 장르에 대해서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하지만 한 번 보고도 오래도록 읽어낼 만한 천재적 자질이 없으므로 깊이 천착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어제 거의 몇 년만에 처음으로 연극을 봤다. 김민기의 <지하철1호선>을 몇 해 전에 보고 처음있는 일이다. 표가 생겼고, 표를 물릴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본 것이지만 결론은 매우 재미있었고, 나름대로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업인 염쟁이 일을 평생동안 해온 염쟁이 유씨가 자신의 마지막 전통 염습을 치르는 과정을 연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노드라마였다. '죽음'을 다루기 때문에 무거울 것이란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도입과 전개 과정이 경쾌한 연극이었다.  



내가 연극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와 지근거리에서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사람이 내 앞에서  '정색'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갑자기 다른 인격이 출현하는 사람이 두렵다. 그 사람과 친하면 친할 수록 정색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두렵다. 마치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친근함으로부터 버림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파이가 나의 천직이 아니란 걸 알았다. 만약 내가 일관성 있는 인간으로 남들에게 비춘다면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기대를 먹고 산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 당신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고 누군가 믿어주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보람이다.  

연극 <염쟁이 유씨>는 지난 2008년 연말부터 오는 3월까지 인켈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연극이다. 배우 유순웅 씨가 염쟁이 유씨를 연기하는데 배우의 마스크란 말 그대로 마스크란 생각이 들었다. 눈빛 하나만으로 그는 조폭(조폭 연기 할 때는 선글라스를 착용해서), 사기꾼 장례대행업자, 아들 역할까지 종횡무진 연기해낸다. 모노드라마인 탓에 장면 전환을 어찌할까 생각하며 보았다. 역에 맞는 적절한 분장이 필요할 테니까. 그런데 그런 처리 과정도 깔끔하다. 그리고 분장이 필요없을 만큼 배우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다른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요즘 막장드라마라고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해도 <아내의 유혹>이 인기라는데, 난 이 드라마를 보며 극중 주인공이 같은 얼굴로 나오는데 어떻게 상대가 그녀가 누구인지 몰라볼 수 있는가가 가장 큰 의문이었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내가 '나'이도록 하는 요소는 매우 많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속 주인공이 갈망했던 것처럼 냄새일 수도 있고, 기척일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 성격이나 품성, 기질이니 다양한 말로 사람을 표현하지만 나를 '나'이도록 하는 것은 결국 인격(퍼스낼리티)이라 부르는 것이다. 인격이란 무엇인가? 복잡하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인격이란 정체성(아이덴티티)과 달라서 타인이 기대하고, 바라보는 나란 사람의 페르소나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 때 그 사람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그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사람이 내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정색한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정색이란 말은 '正色', 얼굴빛을 바로 잡다는 뜻이다. 엄정하게 자신의 얼굴을 내비춘단 말인데, 다시 말해 정색, 그것이 본색(本色)이다. 본색은 자신만이 안다.  

<염쟁이 유氏>는 마지막에 가서 정색을 하고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죽음을 치뤄내는 과정에서 유씨는 과장, 부장, 회장이 되려고 힘들게 고생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송장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 뿐이니까.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송장이 될지 그것이 잘 사는 일만큼이나 잘 사는 일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염습하는 과정은 일반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없는 과정이다. 누군가 가까운 지인이 죽었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너무 가까운 사람의 염습과정일수록 우리는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모습. 염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마치 잘 포개놓은 북어같이 메마른 피부, 얼어붙은 동태처럼 꾸덕꾸덕해진 몸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너무나 현실이었기에 비현실을 보는 것 같았고, 초현실적인 상황 같았다. 입관 절차가 끝나고 장지를 향해 발인한 뒤에야 비로소 나는 그 숨막히는 죽음의 현장이 현실이 되었다. 장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터진 눈물이 아닌 울음은 매장 절차가 모두 완료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를 대신했던 분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까지 눈에 생생하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2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며 천하의 사람들이 선함을 아는 것은 선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를 생겨나게 하고, 어렵고 쉬운 것은 서로를 이루며, 장단(長短)은 서로 비교되기 때문에 드러나고, 고하(高下)는 서로 기울어지며, 음성(音聲)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후(前後)는 앞이 있어야 뒤가 따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일부러 하지 않고도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한다. 천지자연은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노고를 사양하지 아니하며 만물을 자라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는다.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그에 머무르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떠나가지 않는다.

누구라도 죽음의 맨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다. 그건 당사자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고, 죽임의 반대말이 살림이다. 죽임이 살림을 파괴하는 시대, 죽음이 삶을 겁박하는 시대에 사는 두려움에 비하면 정색하는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더란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그러나 선과 악이 본래 한 몸에서 비롯되었고, 삶과 이별이 또한 하나이듯 <염쟁이 유씨>를 본 뒤 앞으로는 정색하는 두려움과도 자주 마주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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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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