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1월 17일에 태어나 1997년 5월 29일에 세상을 떠난 뮤지션이 있다. 세상에 수많은 노래가 있듯 세상엔 별 만큼이나 수많은 가수가 있다.  그러니 단 한 장의 정규 앨범을 내고 세상을 떠나버린 30살의 뮤지션이 계속해서 기억에 남으리란 기대는 허망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기 한 명의 가수가 기억에 남는다. 제프 버클리.... 그의 노래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알 수 없다는 형용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그렇다면 우리 그의 목소리를 무책임하다고 해두자.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는 무책임하게 고막을 후벼 판다. 들판을 헤매는 미친 고아 소녀를 그린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있다. 맨발에 헝클어진 머리 카락, 반쯤 벌려진 입, 허공을 가르는 희멀건 눈동자. 제프 버클리의 음성에서는 그런 고아의 느낌이 든다.

 

 

갓 서른에 한 장의 앨범을 내고 미시시피 강에 수영하러 들어갔다가 영원히 떠오르지 못한 젊은 가수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그의 목소리는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무책임한가? 제프 버클리의 아버지는 팀 버클리였다. 그의 아버지 역시 제프 버클리 못지 않은 매니아들의 지지를 받는 가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역시 28살의 나이로 요절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운명이 아들에게서 반복되도다. 헤밍웨이처럼, 이소룡처럼... 그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처럼 남겨진 한 장의 앨범이 "Grace"이다. 그 중에서 6번째 곡 "Hallelujah"는 본래 레오나드 코헨(L.Cohen)의 곡이었다. 이 곡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슈렉"에 삽입되어 국내의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편이기도 하다. 코헨의 노래는 마치 김목경의 "어느 불행한 노부부 이야기"가 김광석에 의해 부활하듯 제프 버클리에 의해 새로운 노래가 되었다.

 

 

"I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라는 "Hallelujah" 첫 소절이 불리워지기 전에 우리는 제프 버클리가 가볍게 내쉬는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슴이 천길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가 미시시피 강에 가라앉은 것은 혹시 그의 영혼이 그토록 무거웠던 탓은 아닐까. "Lilac wine"에서 어쩌면 우리는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Listen to me, why is everything so hazy? Isn't that she, or am I just going crazy, dear? Lilac wine, I feel unready for my love... 내 말을 들어봐요, 왜 모든 것이 희미해져 가는 거죠? 그녀가 아닌가요? 아니면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요? 라일락 와인, 난 아직 내 사랑을 위한 준비를 못했는데..." 그의 보컬은 흔히 이야기되는 위대한 보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김광석도 마찬가지다. 김광석의 고음 처리는 때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태롭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김광석의 노래는 그만의 목소리에서 풍겨나는 맛이 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것이 무엇이든 진실하게 들린다. 제프 버클리의 보컬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 속에 맨홀 같은 깊은 구멍 하나를 파놓고 산다. 그 안에서 누군가 당신을 부른다. "Listen to me, why is everything so hazy?" 혹시 그의 노래를 듣고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건 당신의 맨홀이 너무 얕거나 혹은 귀가 막힌 것이 아니라면 전적으로 당신의 슬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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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김경연  한정숙 옮김 | 까치글방(1999)




천년제국 : 비잔티움 324-1453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역사 공부를 즐기는 편이다. 그간 역사를 공부하면서 내가 깨우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제국은 스스로의 힘을 파악하지 못할 때 가장 강성하고, 경계를 세우는 순간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종말론적인 기독교에서는 종종 천년왕국의 도래를, 불교의 미륵신앙처럼 이야기한다. "천년왕국""신약성서"의 '요한의 묵시록' 제20장에 적힌 문장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1,000년간 통치한 뒤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해석이다. 신앙으로서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 '천년'이란 시간에 주목해보고 싶은데, 이 책 "비잔티움 제국사"엔 굳이 324년으로부터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시간을 명시해두고 있다. 이 때 내가 놀라고, 의문을 품은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비잔티움 제국이 무려 1,129년간 존속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의 건국을 기점으로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330년 5월 11일을 기점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어째서 324년으로 명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문을 푸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즉,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년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 어째서 저자는 324년을 기점으로 잡고 있으며 그것이 유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이 의도하는 목적 - 즉,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것 - 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고백할 것은 올해 목표로 세웠던 "서양중세사 이해"를 위한 나의 독서 계획에 따라 구한 책이긴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중도에 몇 번이고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은 내게 어려웠다. 사실 이 책의 번역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명사 "비잔티움"은 오랫동안 그저 영어의 형용사적 표현인 "비잔틴"이었다. 여기엔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비잔티움 제국이 우리에겐 '잊혀진 제국'이자, 별관련이 없는 제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알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그저 비잔틴 미술의 몇 가지 양식인 이콘(icon) 성화들, 모자이크 양식이나 독특한 문양, 성상숭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서로마교회(가톨릭)와의 논쟁, 동아시아적인 정치술로 폄하되는 매수와 모략, 암살의 정치,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견뎌내게 했다고 전하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 고구려 철갑기병을 연상케 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주축이 되었던 중기병 카타플락타이(Cataphract), 콘스탄티노플의 일곱겹 성벽과 이를 둘러싸고 이슬람제국의 메메드 2세와 벌였던 사투 등등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서로 연결되어 이해되었던 것이 아니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고,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3부작 중 하나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그나마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조금 덜어주었을 뿐이다.

어떤 한 나라, 그것도 천년의 역사를 가진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만, 나에겐 비잔티움 제국의 일곱 겹 성문을 열어젖히기에 아는 게 너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이 태부족하단 것도 비잔티움 제국에 다가서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령 비잔틴 미술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은 미셀 카플란의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79 "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 와 앞서 말한 시오노 나나미의 책, 그리고 예전에 <한국일보, 타임라이프북스>에서 펴냈던 것을 가람기획에서 재출간하고 있는 "타임라이프세계사" 시리즈 정도가 '비잔틴 미술'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읽은 것들도 저 정도다. 그외에는 서양중세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하고 있는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읽기 쉬울 리 없다. 그나마 이 책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 Ostrogorsky)"가 일반 대중들을 위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한 것이라고 하니 숨이 턱턱 막혀 올 밖에...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이 책은 소중하다.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

내가 던졌던 첫 번째 질문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에 대해 저자인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잔티움 발전의 주된 원인은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다. 이 세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외한다면 비잔티움의 본질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구조물은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라는 종교 그리고 로마의 국가형태가 종합되면서 비로소 성립했다. <본문 9쪽>


석학만이 내릴 수 있는 명쾌한 해석이면서, 이 책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학교 세계사 시간에 나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중세가 시작되고, 동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근대가 시작된다고 배웠다. 어찌되었든 오스트로고르스키식 표현을 빌자면 서양이란 역사적 구조물은 로마제국의 국가제도와 기독교 정신, 그리고 동양으로부터 전해져 온 문명에 의한 것이며 이 중 어느 하나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서유럽인들에 의해 무시당해왔고, 이런 그들의 경향은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서유럽인들의 폄하는 역자 후기에도 있지만 "로마 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영국의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로마사 집필에 매진한 역사가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국과 프랑스가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대였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부르조아지들이 성장하고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가 "로마제국 쇠망사" 전 6권을 발간하던 해에 엠마누엘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발간했고, 루이16세는 삼부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그는 그런 시기의 역사가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가들은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역사연구를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도덕성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불변하는 보편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믿었고, 인간의 진보를 믿었다. 그에 따라 과거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미신, 환상, 종교적 신앙 등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맥락상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게다가 에드워드 기번은 16세 때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했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퇴교당한 경험도 있었다. 물론 그가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서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술한 것을 그런 사적인 이유에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신교적인 보편성에 기대고 있던 로마 제국의 기풍이 기독교화로 말미암아 훼손된 것으로 보았고, 그로인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에 이른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기독교적 믿음이 제국 형성의 기초가 되었던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고, 이런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한 국가의 몰락,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던 대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하는 것은 옳을 것이고, 거기엔 이들 역사가들의 해석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기독교화에서만 찾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기번은 동로마 제국 자체를 서양 중세의 암흑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서양 중세를 계몽주의 시대 역사가들처럼 암흑기로 보지도 않을 뿐더러 근대의 중요한 맹아들을 품고 있던 새로운 시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동로마인들은 스스로를 '비잔티움적인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런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비잔틴'이란 말 자체가 후세인들이 그들을 규정하며 붙인 말이었을 뿐, 그들 스스로는 로마인으로 생각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안정을 찾은 과거의 게르마니아 일대를 차지한 서유럽인들은 스스로를 로마의 후예로 생각하고자 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힘의 상징인 로마군단의 독수히 휘장을 제국의 상징으로 삼았고,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 모두 국가 상징을 독수리로 삼았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인 "루마니아"는 국명 자체가 "Rumania"다. 그네들은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혈통 자체가 로마인들과의 혼혈로 이루어졌고, 라틴인에 가까운 언어와 형질을 지녔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로마제국이 서구 문명에 끼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고, 실제 제국 말엽에 이르렀을 때는 과거의 로마제국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되었음에도 그들은 멸망하던 그 순간까지 로마인으로 살다 죽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천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저자의 표현대로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저자가 앞서 강조한 것과 다른 원인 몇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물론 저자 역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인데,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간적으로 이슬람제국과 서유럽제국의 세력 판도가 최전성기를 맞이하기 전이었다는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이들 두 세력의 완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다른 한 가지는 비잔티움 제국의 탁월한 관료제도인데, 익히 잘 알려진대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마치 로마제국의 말기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종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안위 자체가 지켜진데는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웠을 테지만 관료제도 자체가 튼실했던 탓이다. 비슷한 시기의 서유럽 군대의 엘리트 계급이랄 수 있는 기사들이 사실상 문맹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동로마의 군대의 주축을 이룬 귀족들은 최고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비잔티움 제국이 오랫동안 독점해오다시피 한 동방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경제적 성공도 크다. 동로마는 로마제국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체제 아래에서 희생당한 소규모 농민들들의 예속 상황을 완화시키고 이들을 군사력의 주축으로 삼는 건실한 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부한 만큼 정복 전쟁에 나설 수는 없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주변 국가들의 강성함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토지와 지역에 기반한 농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자기 지역을 떠나 정복전쟁에 나서는 일 자체를 꺼려한 탓도 크다 할 것이다.


324-1453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을 330년 5월 11일로 잡지 않고, 324년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렇다면 324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기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부 황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제국을 재통일했다. 이전까지 비잔티움은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에 불과했다. 나는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30년을 기점으로 하지 않고, 324년을 기점으로 잡은 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로마의 진정한 계승자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오고, 유스티니아누스 때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이클레이오스 황제기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 집권 조직과 기독교, 동방적 색채를 두루 갖춘 전제국가가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빠져 있거나 종종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우리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혹은 "고구려사 왜곡"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도대체 동북공정은 무엇이고, 그로인한 고구려사 왜곡은 무엇인가? 중국의 문화권 안에 있던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에겐 "연호(年號)"란 개념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건원(建元)26년이란 말이 역사서에 실려 있다면 이는 B.C.115년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 연호라는 것은 대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제 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이다. 이전까지는 각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 시기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측은 자신들에게 신속된 나라에게 복종의 의미로 자신들의 이런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지요. 고구려에게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강요하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침략한 역사가 있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 태종 때의 일인 것 같다.)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런 고구려도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중국 화친책을 사용하면서 중국의 연호를 받아 사용하게 되는데, 중국은 향후 남북한의 통일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서 문제가 된 것이죠. 간혹 역사기행을 다니다보면 이름있는 옛 선인들의 비석이나 고승들의 부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네들의 비석이나 부도에 새겨진 연호를 확인해보면 대개 '유당(有唐) 신라(新羅)'나 '유명(有明)조선(朝鮮)'이란 글귀를 볼 수 있다. 이는 '당나라에 속한' 혹은 '명나라에 속한' 이란 뜻이 된다. 그와 상관없이 우리들의 민족 감정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는 중국측의 역사 서술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이화 선생이 신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규정하지 않고, 고려를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로 규정하는 것도 어느 정도 그런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만든 고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식이 강했다. 그런 까닭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서경(지금의 평양)을 개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가 실제로 북방 정벌에 나선 일은 적었다 하더라도 그네들의 국명에 나타나듯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은 매우 중요한 국정 지표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신은 다들 잘 아는 것처럼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 개국에 앞장 섰던 삼봉 정도전의 요동 정벌로 이어졌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역시 우리의 고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로마의 계승자, 혹은 로마 그 자체로 여겼고,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사방의 적들에게 포위당해 국경 경비만으로도 막대한 군비를 지불하면서 끊임없이 제국의 외연을 확장하려 들었던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이런 노력이 훗날 중세 서유럽에 로마의 자산을 전수해줄 수 있었던 토양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의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24년을 기점으로 이 책을 출발시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527-565)는 실제로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대원정군을 이끌고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에스파니아를 공격했고, 일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로마 제국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했다 하더라도 세상은 변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옛 로마의 영화를 회복할 만한 사회경제적 토대가 부족했다. 제국 황제들의 정복 사업은 실패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화는 시들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의 옛 영토엔 새로운 주인들이 차지했고, 비잔티움 제국 자신들도 라틴 문화 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젖어들며 급격히 그리스화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8세기 무렵부터는 동지중해 지역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하게 되니 이들이 이슬람 세력이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수장이었던 카를(샤를마뉴) 대제에 의한 비잔티움 제국의 이념적 권위 상실은 심대한 타격이 되었다. 카를 대제는 바이에른, 작센, 롬바르드 왕국 등을 차지하며 기독교 세계 최고의 강국이자 왕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실패한 것을 성취한 카를 대제에게 로마 교회의 신망이 쏠렸고 그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얻어냈다. 우리는 로마교회의 분리가 단순히 성상숭배에 따른 견해 차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해결되고, 성상숭배에 대한 견해차도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로마 교회는 더이상 과거의 "로마" 교회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로마를 단일한 제국이라 생각했으므로 카를 대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부인한 것이 된다. 당시 유럽의 정신적 세계 질서는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종종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낸 것을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만의 공로로 생각하기 쉽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진출에 대한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그 와중에 이슬람 왕국의 속주만도 못한 지경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큰 의의는 역자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고전고대의 문화를 보존하여 이를 서유럽에 전해준 것과 정교의 정신적 유산을 슬라브 세계에 남겨준 것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우리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무엇이며, 유럽의 시작 - 오늘날 아시아를 비롯해 전세계를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유럽 문명권"으로 보이도록 묶어버린 유럽의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뒤이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역사는 더이상 역사가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종종 과학이 그러했듯 그것을 저술하는 이들에 의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분명 비잔티움 제국이 오늘날의 서유럽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잊혀진 것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계가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고구려사 문제로 시끄럽지만 과거 신라지역 출신의 정치 권력과 남북한이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결과 오늘날의 북한 지역인 고구려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애써 축소해왔던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의 역사에서 역사가의 몫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들라크루아, 콘스탄티노플 함락

같은 유럽이라 할지라도 동방에 가까왔던 비잔티움의 역사를 축소함으로써 유럽의 사가들은 빛이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한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의문을 품어 본다. 물론 이 책이 유럽중심주의 역사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담고 있지 않으며, 나 자신도 앞으로는 아시아 중심주의 역사관으로 무장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비잔티움 제국사를 읽으며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의 일부를 교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보다 전지구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 끝으로 이 책의 역자와 출판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 본다. 왜냐하면...
어느 출판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외국어를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면 그 책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떠올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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