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와 문화이론 - 존 스토리 | 박이소 (옮긴이)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1999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문화이론을 개괄하는 입문서이다. 이 방면의 개론서로 이 책을 포함해 김정은의 "대중문화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를 포함해 모두 4종을 읽었고 다른 책들에 대해선 차례차례 서평한 바 있으니 문화이론 입문서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은 대체로 읽은 셈이다. 그러니 혹자는 그렇게 묻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어느 걸 읽는 것이 가장 좋으냔 의문을 품을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엇을 읽든 별상관없을 듯 싶다. 대체로 4종의 책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김정은의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는 난이도면에선 가장 쉽지만 쉬운 만큼 간추린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른 책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물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루카치, 벤야민, 하우저 등의 다른 저작들을 읽은 분이라면 도리어 그것이 굉장한 장점일 수 있다).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앞서 김정은의 책에 비해 심도 있는 접근을 꾀하고, 국내 상황을 함께 다룬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문보다 문장이 난삽하고, 어떤 예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단점을 지닌다. 그에 비해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는 문장이나 기타 한국적 상황들을 다룬 점에서는 원용진의 책보다 뛰어나지만, 해외이론 소개 편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을 가진다. 이에 비해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비록 부분적으로 문장이 어색한 부분은 있지만, 원용진의 것보다 어떤 면에선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문장도 상대적으로 덜 난삽하다. 게다가 한국적 상황이나 예시를 고려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서구의 문화이론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려는 목적으로 읽기엔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4종의 책을 모두 읽을 까닭은 없지만, 어느 한 종만 읽기 보다는 2종 정도를 서로 대비해가며 읽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다.

 

이 책의 원제가  "An Introductory Guide to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인데 영어명이 의미하는 바는 '대중(긍정적 내지는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한 예비(입문)단계의 가이드'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에 대한 입문서'란 뜻이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이 책의 목차는 그대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공부하는데 가장 적절한 커리큘럼이며, 다른 입문서들도 그 순서나 내용 배치면에서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배치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장 대중문화란 무엇인가"에서는 대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대중문화는 "대중+문화"가 합쳐진 말이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알기 위해선 먼저 문화가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윌리엄즌는 문화를 넓은 의미에서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인 과정, 2.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 방식, 3.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 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존 스토리는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이데올로기를 지목하고,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정의와 쓰임새를 소개한다.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단일한 용어로 표기하지만 영어 표기에서 대중문화는 mass와 popular로 구분된다(이에 대해선 전에 다른 서평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이어 "2장 문화와 문명의 전통"에서는 우리에게도 뿌리깊이 고정되어 있는 문화 관념인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충동을 이야기한다. 19세기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 산업화와 도시화로부터 비롯된 대중의 출현은 그동안 고급문화의 생산자이자 주된 소비자였던 사회의 상층계급을 크게 긴장시킨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 출현한 여러 미디어들(당시엔 주로 신문, 잡지였으나 점차 대중교육의 확대, 라디오, TV의 출현 등)로 인해 소위 대중들이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이에 대해 매튜 아놀드 등을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은 대중문화가 문화 전반에 걸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보았고, 이를 분리하거나 대중들을 계몽하여 고급 문화의 향유자로 변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런 논쟁은 매튜 아놀드 이후 리비스주의로 넘어가면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전세계로 널리 전파된다. 이를 통해 문화를 고급문화와 대중(저급)문화로 구분하는 이분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과연 문화의 고급과 저급을 구분하는데 대중이란 잣대가 적당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존 스토리는 영국 출신의 학자인 까닭일까? 우선적으로 문화연구의 여러 경향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영국의 버밍엄대학 현대문화연구센터의 학자들이 일군 "문화주의"를 3장으로 끌어낸다. 마르크스주의를 먼저 끄집어낸 다른 책들과는 약간 다른 점인데, 헤게모니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의 이런 구분은 나름대로 적당해 보인다. 문화주의는 영국 피지배계급의 역사적 경험을 정리하면서 전개된다.1950년대 말엽부터 주로 영국의 이론가들(Richard Hoggart, Edward. P. Thompson, Raymond Williams, Stuart Hall)에서 부각되기 시작한(영국의 문화 연구는 전후 영국의 특수한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자본주의적 산업 생산 양식의 부활, 복지 정책의 수립, 그리고 동구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구 세력의 결집 등으로 인해 변모하는 영국적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전쟁 전의 영국과는 단절된 듯한 변화들, 현대화 및 미국화된 대중문화,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이나 이데올로기가 중류계급과 차별성이 없어지면서) 연구 전통이다. 문화주의의 핵심적인 전통은 문화의 수동적 소비보다 능동적 생산, 즉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대립되는 특징을 가진다.

 

사회변혁의 주체인 노동계급이 즐기는 대중문화가 노동계급 형성 및 유지에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논의하려 했다. 문화주의에 속하는 이들은 대중문화의 주체인 대중을 새롭게 해석하여, 대중이 수동적이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했다. 문화주의자들이 말하는 피지배계급은 단순히 계급적인 축(항상 노동계급 이상의 의미를 지님)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문화라는 영역은 물질적 토대에서 상대적인 독립성을 누릴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물질적 토대에 개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주의는 구조보다는 인간에, 이데올로기보다는 인간의 경험에, 지배계급의 전략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전술에 관심을 갖는다. 문화주의는 대중이 문화적 실천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적 영역을 구축해가는 능동적인 모습을 찾으려 시도한다.

 

4장에서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다루고 있다. 구조주의는 이론이면서 동시에 방법론이기도 한 학문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규칙과 개념을 기초로 다양한 문화분석에 적용되어 많은 성과를 낳았으며, 현재까지도 문화분석 툴로써 여러 비판들이 있으나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구조주의의 이론적 경향을 보여주는 특성은 한 마디로 ‘구조(structure)’라는 말 자체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란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적 현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면서 그 표피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나 행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인 원리나 체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조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어떤 문화적 텍스트나 행위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텍스트나 행위의 내부적 혹은 외부적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즉 구조)에 의해 그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현상이 바로 언어다. 서로 다른 언어의 선택, 서로 다른 방식의 언어 배열은 서로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가 현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구조주의적 입장에서의 문화 분석 1) 문화적 표상이 특정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고 2) 문화적 표상이 의미를 내는 방식 - 의미 체계 -를 분석하고, 3)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즉 주체 형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이 책에서는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와 롤랑 바르트를 소개하면서 구조주의 이론이 어떻게 미국 서부극 장르에 숨겨진 신화를 드러내는가 실례(윌 라이트)를 통해 보여준다.

 

5장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문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은 문화론이라고 명확하게 내세운 하나의 이론 체계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이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이론도 없다. 마르크스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진술을 남기고 있는데, “토대-상부구조의 문제(base and superstructure)”의 문제 - 사회를 이루는 두 요소, 즉 경제적 기초(토대)와 사회적 의식의 모든 형태들인 상부구조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로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에 있어 문화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문제의 핵심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determination)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있다.

 

경제결정론(기계론적 결정론, 속류 마르크스주의) - 상부구조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는 아무런 자율성을 지니지 못하며 단지 토대가 되는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반영이론(reflection theory), 모든 문화는 그것을 생산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일 뿐이다. 대중문화의 의미는 단지 그것을 생산한 경제구조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예술성보다 구호성을 강조했던 프롤렛쿨트(proletkult)같은 교조적인 예술론도 이런 기계적 결정론의 맥락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기능; 권력을 지닌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포장하는 이념이다. 지배계급에 의해서 생산되는 대중문화의 내용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대중들이 계급적 갈등과 불평을 느끼지 못하는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계급이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대중문화를 즐기게 된다. 계급문화론, 이데올로기는 계급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는 역할과 지배방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문화적 텍스트(종교, 법, 도덕, 관습, 책 등)는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반영물이다.

 

여기에 루카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알튀세르의 주요 개념들, 그리고 문화주의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한 데 아우르고, 아우를 수 있는(개인적인 생각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두루 설명하고 있다. 사실 6장에서 다루는 "페미니즘"은 구조주의 직후 내지는 7장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나왔어야 적당할 수 있을 듯 싶다. 페미니즘의 정치학은 몰라도 페미니즘 문화학은 확실히 이들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크다. 페미니즘은 대중문화 속에 숨겨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구조를 분석해낸다. 8장은 문화연구의 전체적인 부분을 다룬다. 여러 이론들엔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며,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 완벽한 분석틀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문화를 옹호하려는 측과 대중문화를 비난하려는 측 사이에 벌어지는 오랜 논쟁의 결과인 듯 싶다. 문화이론를 어떻게 바라보든 문제는 한 가지다. 대중문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전의 장이며, 이 싸움은 계급 혹은 문화적 이질성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거란 사실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그리스로마 신화사전』 - M.그랜트 | 김진욱 옮김 | 범우사


“로고스와 뮈토스는 말의 양면이며, 양자 다같이 정신생활의 기본적 기능이다. 논증으로서의 로고스는 올바르고 논리에 닿을 경우는 진실이지만 뭔가 속임수가 있을 경우는 허위가 된다. 그러나 뮈토스는 오로지 뮈토스 외에 아무 목적도 없다.” - 피에르 그리말

 


▶ 그리스로마신화의 계보도

사실 신화가 우리에게 중요한 무엇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우리 국내의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극히 최근 십여년의 일이다. 80년대말 90년대 초엽까지 우리는 민주화 문제에 전념하고 있던 상황인지라 신화 이야기는 어딘가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쯤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고, 그저 교양의 일부를 이루기 위해 읽어두어야 할 무엇으로 간주되었다. 내가 정확히 그 문맥을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신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역사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이고(이 말은 근대 이성의 시대가 저문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차원에서 신화가 중요한 개념으로 다뤄지고 있는 탓이다.

 

요 얼마동안 깜짝 독서로 신화 관련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읽었는데, 국내 신화 관련 서적들을 모두 통달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한 가지는 이윤기 선생에 대한 불만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럼에도 신화에 관한 책(혹은 기획)은 앞으로 무궁무진하겠단 생각이다. 실제로도 최근 십여년 동안 신화에 대한 출판 종수는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화 읽기는 대중의 트렌드에 그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출판종수는 많지만 적절히 커리큘럼화된 신화 읽기의 틀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신화가 문화적으로 재조명 받게 된데에는 인류학과 언어학의 깊은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문명화되지 않은 원시사회를 방문한 초기 인류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문명화되지 않은 원시사회가 동물, 사람, 식물 그리고 각종 사물들을 분류하는 정교한 체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랑그와 빠롤"이 사회학자 뒤르켐이 간파한 사회문화적 생활 속에 구조화될 수 있는 광범위한 틀로써 "집단적 표상"과 결합하면서 구조주의의 근간을 이루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사회의 신화는 '그 사회가 지니고 있는 해결되지 않는 모순을 상상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고 했다. 신화가 의미있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체제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 체제 혹은 이야기체를 우리는 내러티브(narrtive)라 부른다.

 

신화를 분석하는 이들은 신화의 내러티브(서사)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신화가 담고 있는 의미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려 한다. 롤랑 바르트는 소쉬르의 기표/기의가 합쳐져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방식을 1차적 의미화 과정으로 보고 이를 '외연'이라 불렀다. '외연'이 표상하는 것, 예로 들어 미모의 여배우 '***'라 했을 때, 이 배우의 이름을 듣거나 보면서 '참 예쁘다. 얼굴에 품위가 있어 보인다. 얼마전 재벌 2세와 이혼했다. 나이가 제법 들었는데도 여전히 젊어 보인다' 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그것을 의미의 2차화를 '내포'라 한다. 이를 CF 광고나 영화와 같이 나름의 내러티브 구조를 갖춘 분야에 적용시켜서 그 모델이 권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도록 권하는 것을 의미의 3차화 과정, 즉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믿음이나 가치, 태도 등을 '신화'라 불렀다. 그런 점에서 신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신화를 읽고 분석함으로써 우리 안에 오랜 세월 깃들어 있던 인간의 본성과 아직 문명이 썩트기 전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시대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흐흐, 하지만 뭐 우리야 이런 머리 복잡한 내용까지 알 필요는 없으리라. 범우사는 내 개인적으로 인연이 좀 있다. 중고생 시절 범우사의 독서회원으로 가입해서 인문학 분야의 염가 문고판 시리즈인 사루비아 문고를 비롯한 꽤 여러 종의 책들을 우편주문으로 받아보곤 했다. 특히 인문학 분야의 저서들 가운데 꼭 범우사 것이 결정판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범우사가 앞서 출판했다고 할 수 있는 고전들은 꽤 여러 종된다.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도 범우사 고전선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뒤에 일종의 해설로 글을 쓴 사람이 프랑스의 신화학자 "피에르 그리말"이었다. 그런 범우사에서 M. 그랜트, J.헤이즐 공저의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을 펴냈다. 이 역시 당시로서는 꽤 발빠르게 펴낸 책이라 할 수 있다. 양장본에 금박지에 인쇄한 겉표지를 씌운 매우 고급스러운 장정의 책이었는데, 사전이란 특색에 걸맞도록 동아대백과 전집류에 있을 법한 튼튼한 박스 포장을 별도로 만든 책이었다. 지금의 거의 4만원에 가깝지만 처음 나왔을 때만해도 정가가 3만원이었다. 

 

그런데 열린책들에서 "피에르 그리말"의 "그리스로마신화사전"을 펴냈다. 어느 사전이 더 좋은 지 말하긴 현재 내 입장에선 다소 곤란하다. 열린책들의 "그리스로마신화사전"은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전 같으면 최신판이 당연히 더 좋은 것이겠지만, 이 사전은 이미 오래전에 소멸되어버린 신들에 대한 사전이므로, 최신판이라고 해서 갑자기 출현한 새로운 신의 명단이 들어있을리도 없다. 이럴 경우엔 어느 사전의 표제어가 더 많은가, 설명은 얼마나 충실하게 해두었는가? 그리스.로마신화의 수많은 이설들, 동명이인들은 어떻게 분류해놓았는가가 관건이다. 일단 내가 읽은 범우사판 "그리스로마신화" 사전은 나름대로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당시엔 사전치고 지질이 좀 떨어진단 생각을 했는데, 최신판에선 얼마나 개선했는지 모르겠다. "열린책들"의 "그리스로마신화사전"도 찾아보기만 106페이지에 이른다고 자랑하니 무엇을 보든 상관없겠다.

 

다만, 내가 재미있는 건, 범우사판 "피에르 그리말"의 해설을 나름대로 잘 읽었다는 거다. 어쨌든 피에르 그리말을 먼저 안 건 범우사일 텐데, 그의 책은 "열린책들"에서 나왔다는 게 나의 작은 독서 취미로는 상당히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아참, 신화사전을 한 권쯤 가지고 있는 게 신화 책을 읽어 나가기 위해 반드시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필요하단 말씀을 드렸던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레드 콤플렉스 - 강준만 외 | 삼인(1997)

우리는 어떤 영화배우나, 감독들에 대해 알고 싶을 때 ‘필모그래피(filmography)’란 것을 살핀다. 필모그래피란 ‘특정 배우감독의 작품 리스트; 영화 관계 문헌’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그라피(graphy)’란 말을 동양의 그것으로 바꿔보면 대략 ‘~지(誌), ~기(記)’의 뜻을 갖는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기록을 일대기(一代記)라고 할 때의 그것과 같은 말이다. 어떤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그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궁금해지고,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영화보기, 영화읽기 하는 것은 오늘날 영화에 취미를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해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만큼 대중적인 시도인데, 종종 어떤 배우들은 그에 대해 처음 받았던 인상과 달리 도대체 이런 영화엔 왜 출연했지 하는 의문이 들만큼 형편없는 영화들에 출연한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이것을 영화배우의 것이 아니라 일반인으로 바꿔 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경력(經歷) 혹은 이력, career, record라고 한다. 이것이 곧 ‘a personal history’이고, 한 개인이 삶으로 증명해낸 자신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배우가 연기는 잘할지 몰라도 시나리오를 볼 줄 모른다거나, 배우로서의 자의식은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필모그래피는 영화배우나 감독들이 남기는 인생의 긴 꼬리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꼬리 혹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강준만 교수에 대한 열혈 팬들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역시 그가 만들었던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의 시도가 우리 사회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영화 <넘버3>에서 최민식이 한석규와 한바탕 주먹질을 한 뒤 떠들어대던 이야기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니….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 저지른 사람이 죄지.” 우리 사회는 종종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책임으로부터 면책되어도 이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용인하는 집단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강준만 교수가 시도한 ‘인물비평’이란 그 성격상 지니고 있는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임이 방기되고 무화되어 버리는 우리 사회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을 긁어주는 효자손이자 인물의 사후에 발행되는 평전(評傳)의 전통조차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인물의 생전에 펼쳐지는 평가란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레드 콤플렉스』는 강준만이 추구하던 인물비평에 대한 시도가 일반 출판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것이 지난 1997년의 일이니 과거를 쉽게 잊는 우리네 관행에 따르면 잊힐 법도 하다. 물론 거기엔 인물비평보다는 다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침잠해 있는 듯 보이는 강준만의 발언들이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지 못하는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는 질기고 오래간다. 『레드 콤플렉스』, 일명 적색공포증이라 할 수 있는 이 질긴 광증(狂症)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이다. 그 공포의 핵심은? 이것을 외부적 요인이라 해야 할지, 내부적 요인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북한의 존재’이란 실체적 그림자 혹은 유령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에 의한 적화통일 야욕’이다. 탈북이 홍수를 이뤄 우리 정부도, 이를 부추기거나(?) 돌보고 있는 NGO들조차 뒷감당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자신이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문제를 두고,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잠시 후 대법원에서 이례적인 언사로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강하게 주문하고 나섰다. 이 책은 노무현 정권의 출현 이전에 나온 책이다. 그런 까닭에 손석춘은 이 책의 총론격인 「왜 레드 콤플렉스가 문제인가-적색 공포증 조장에 앞장선 한국 언론」 이란 글을 통해 『레드 콤플렉스』의 질긴 뿌리의 한쪽이 착근해 있는 곳, 이를 다시 널리 유포시키고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제의하고, 대미공조보다 민족공조가 우선할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어떤 의미에서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런 거침없는 언사는 역시 ‘YS’니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그가 이런 언사들을 해준 덕으로 뒤이은 DJ 정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조차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언론에 의한 조문 파동을 겪으며 전면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책이 나온 뒤 우리는 몇 차례에 걸쳐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룩하고 있다.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말하고 이제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확실한 민주주의 체제를 떠올렸다. 매우 더디게 진행되긴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출범 이후 언론개혁의 진전은 최소한 방송사에서만큼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비록 안티조선 운동이 <조선일보>의 수적인 우세를 잠재우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일반인들에게 <조선일보>가 지닌 어떤 폐해(?)들, 그들의 정체성을 실감하게는 해주었다. 물론, 언론에 의한 레드 콤플렉스 유포는 현재에도 여전하며, 그들의 국가안보상업주의 역시 더욱 공고해지면 했지, 덜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현상 하나를 발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가 사실은 얼마나 깊은 뿌리를 지녔고, 깊이 은폐되어 있었는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신시절 유신헌법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변호사시험에 통과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매우 정치적인 수사법이면서 동시에 작금의 상황을 미리 예견한 듯한 언급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나온 지난 1997년은 우리나라 법조계 초유의 법조비리로 몸살을 앓았던 해이기도 하다. 지난 1997년 의정부 법조인들과 1998년 대전 법조인들의 비리와 부패가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이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란 사실을 실감했고, 반대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진일보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5.16 군사쿠테타 이후 군부독재정권은 삼권 분립을 약화시키고, 법조인들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기 위해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철퇴로,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승진을 비롯한 각종 혜택으로 길들여 왔다. 그 결과 1997년 이전까지 우리는 비록 법조계가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더라도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 그것은 정통성 없는 정부가 법조인들의 비리와 부패를 사실상 통제하지 않고 방치한 결과물이었다.

지난 97년 법조비리 사건 이후 우리 사법계는 자정노력과 더불어 구조개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헌법정신을 수호하는 법조계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검찰을 통해 제기된 구속영장이 전직 판사라는 이유로 기각되는 일이 잇따르며 사법계 내부에 온존하고 있는 뿌리 깊은 특권의식이 여전함이 드러났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이라는 반인권적, 반헌법적 법률을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등, 시대정신과 우리 헌법 정신을 과연 온당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책 『레드 콤플렉스』에서는 박홍(전 서강대 총장), 이문열(소설가), 김영삼(전 대통령), 한완상(통일부 총리), 김대중(전 대통령), 리영희(교수), 조정래(소설가), 윤이상(작곡가), 서준식(인권운동가) 등 아홉 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때로 가해자로 혹은 때로 피해자로 이 책에 의해 호명된 이들이다.

작가 조정래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두 통의 유서를 작성했다. 동료작가가 작품 발표를 위해 두 통의 유서를 쓰는 동안 다른 한 명의 작가는 200만부 판매기록을 남기는 대베스트셀러 작가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그런 그가 바뀐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최근 이런 글을 남겼다.

“레비스트로스는 백인도 인디오도 서로에게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상대를 짐승으로 의심했던 쪽보다는 신이 아닌가 의심했던 쪽이 더 인간답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와 같은 태도다. 우리가 빠져 있는 대립과 갈등이 어떠한 것이건,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을 길러보자.”

그는 현재 우리 사회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상호간의 몰이해와 불화 속에 갈등국면을 고조시켜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나는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지난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저런 글을 썼다면 그를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 존경했을 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이들”에 대해 서로 존중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하자는 말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국가정보부의 남산 지하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던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이들”에 대해 그간 이문열이란 작가가 보였던 모습이나, 안전기획부에서 용공조작과 고문으로 심신을 상해 끝내 유명을 달리 해버린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처했던 현실에 비해 지금 과거사 규명과 청산 작업이 결코 더 잔인할 수는 없다. 그때 그들에게 보장되어야만 했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은 바로 그때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누리는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라는 합법적인 힘의 균형 장치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 역시 바로 그러한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런 시기엔 권력의 시녀, 권력의 시종장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영화배우들조차 과거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의 이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정치인, 법관, 학자, 시인이든 현재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과거 그의 걸음걸이를 살피는 일 역시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삼권분립의 보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역시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당신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은 웬일일까. 언젠가 “그 시절, 국보법 폐지를 반대한 법관들”이라는 제명으로 당신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다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눈 덮인 들녘을 지나 갈 때에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지 말라. 오늘 남긴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나는 언젠가 이 책 『레드 콤플렉스』가 더 이상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길 소망해본다. 그러나 오늘 다시 이 책을 펼쳐 읽으며 새삼 마음이 아픈 것은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