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상, 대중 : 문화에 관한 8개의 탐구 ㅣ 박명진 외 / 한나래 / 1996년 12월




1996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새로운 키워드들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이상 혁명도, 민중도 아닌 문화와 일상, 대중이었다. 현실사회주의라 명명된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단순히 맑스 원전의 번역만 뒤늦은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새로운 트렌드에도 매우 뒤늦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마치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 비행체에 지구의 컴퓨터 바이러스를 심어 일거에 무력화시킨다는 발상처럼 일순간에 대한민국 사회는 포스트모던이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글쎄,
이 책은 내가 앞서 말하고 있는 서론 격의 이야기처럼 그리 거창한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학에서 새로운 문화이론을 고민하고, 가르쳐야 하는 8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진행했고, 그들이 공부했던 서구의 문화이론가들, 학자들의 텍스트를 우리 말로 번역해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처음부터 교과서라는 텍스트의 본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책이고, 나 역시도 그런 텍스트로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피에르 부르디외,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해 아는 이들에게는 그들 못지 않게 유명한 니콜라스 간햄, 존 피스크 그리고 미셀 드 세르토 등의 논문 8편이 번역,수록되었다.


미셀
드 세르토의 이름 앞에 '그리고'를 붙인 까닭은 내가 알기로 세르토의 논문 가운데 우리 말로 번역된 유일한 글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이 책은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크게 보아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 격에 해당하는 박명진 선생의 글 "문화 연구 - 새로운 시각의 모색을 위하여"부터 "문화에서 탈문화로 - 스티븐 크루크, 장 파컬스키, 맬컴 워터스""부르디외: 문화 자본과 아비투스"는 문화 편에 해당하는 것이고, 부르디외의 "예술적 취향과 문화 자본", 니콜라스 간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문화 사회학: 입문", 드 세르토의 "일상 생활의 실천", "도시 속에서 걷기" 등은 일상 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존 피스크의 "팬덤의 문화 경제학", 존 클라크, 스튜어트 홀, 토니 제퍼슨, 브라이언 로버츠의 "하위 문화, 문화, 그리고 계급", 토니 베넷의 "대중성과 대중 문화의 정치학"은 대중 편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고, 내 개인적인 정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내 믿음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 문화연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 구조, 혹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서유럽 좌파의 고민과 모색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바대로 문화인류학적인 방법론과 본인들은 때때로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거기에 덧붙여 문화연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독특한 문학문화(Literacy Culture)와 좌파 역사학의 영향이 합쳐져서 그들만의 독특한 연구 방법론 혹은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사실 문화연구는, 문화라는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그 연구대상의 폭넓음으로 인해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치명적인 악몽이며 기존의 아카데미 시스템 속에서 이미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는 학자들에겐 사기꾼 집단처럼 보일 수 있다.


신문방송학,
비판커뮤니케이션학의 한 분파일 수도 있고, 인문학적으로는 문화인류학, 문화사학의, 또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의 한 지류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화연구는 어쩌면 실제로도 흘러가는 유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한동안 국내 소장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직종 가운데 하나가 다소 뜬금없이 출현한 '문화비평가'란 것이었다. 역사적 뿌리가 없는 비평 행위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반증하기라고 하는 양 1997년 IMF 외환 대란이라는 된서리를 맞고 나서 문화비평가라는 직종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직전에 나와서 현재까지 여러 대학에서 문화연구 혹은 문화이론의 제반 분야들을 공부하는 교재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읽노라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엄청난 문화환경의 변화라는 것이 다각도로 실감난다. 하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예시로 들고 있는 급변하는 문화환경들이 이미 오래전의 급변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의 저자들이 고민하는 문화연구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사실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였다(우습게도 나는 윌리엄스가 부르디외 보다 훨씬 전 세대 사람으로, 느낌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은 영국의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가(문학비평가)로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의 좌파이자 구조주의 문화연구가로 활동한 사람인데,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니콜라스 간햄과 함께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가 어떻게 정치경제학과 문화론적인 연구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통합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들 아는 이야기겠지만 맑스는 고전 경제학과 결별하는 방법으로 경제학에 정치학(혹은 사회학)을 도입한다. 당대 최고의 뛰어난 문화적 교양인이기도 했던 맑스는 그러나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진술(다들 아시다시피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를 제외하고는)을 거의 공백 상태로 남겨놓는다. 그런 점에서 맑스 이후 맑스를 계승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영국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여러 차례 맑스와의 결별을 시도했으나 끝끝내 결별하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그건 지금 우리가 그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흡사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존재하고 있으며, 변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주체성을 밝히는 도구로서도 여전히(낡기는 했으나)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문화연구가 영원히 정치경제학과 결별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문화연구의 본질은 결국 "문화+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진술하지 못한 부분들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전지구적 피라미드의 하부구조가 어떻게 상부구조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의해 통제되는지, 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얼마나 우리의 숨통을 옭죄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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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김정은 지음 / 어진소리(민미디어) / 2003년 5월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어떤 이론이나 사상, 주의를 다이제스트로 읽는 것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작품들, 혹은 예술작품들의 생명력이 훼손되는 까닭은 그것이 체제내로 포섭된다는 문제에서도 발생하지만, 그보다 더큰 이유는 논술시험을 잘 보기 위해 다이제스트(digest)판으로 읽는 고전, 작품을 통해 마치 자신이 그것에 대해 전부를 아는 양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원전을 읽는다고 해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요점만 간단히"라는 다이제스트의 용도가 설명하듯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원전의 많은 것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이제스트의 이런 효용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이제스트의 유용함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는 매우 좋은 사례가 된다. 이 책은 다이제스트 도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이긴 하다. 왜냐하면 책의 목적이나 구성 모두가 대중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공부할 것인가에 합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중문화 이론가들, 비평가들의 이론이 일부 다이제스트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어째서 다이제스트가 필요한가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모두 334쪽의 제법 두툼한 편에 속하지만 책을 펼쳐보면 한 페이지당 여백이 제법 많아서 읽는데 뻑뻑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런 점, 여백이 많은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의 여백은 반갑다.

나는 앞서 다이제스트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했고, 여백이 많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째서 "대중문화읽기와 비평적 글쓰기"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책의 목적과 용도가 대중문화에 대한 공부를 위한 교과서의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저자 김정은 선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책에 나온 약력에 따르면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 대중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대중예술연구소 PAN연구원으로 있다고 한다. 저자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은 대중예술연구소 PAN에서 열렸던 '대중문화 비평일기 워크숍'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워크숍은 10주 과정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책의 구성 역시 전체가 10개의 장, 아니 10개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책은 애초의 목적인 워크숍의 용도로 쓰인 뒤 보강되어 책의 형태로 나온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과 자신의 관점을 공개하고 있다. "애당초 이 워크숍의 목적은 대중문화를 난도질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비평가들에게 속지 않기 위한 자기만의 눈을 가지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비평적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기본적으로 대중문화는 즐기는 문화"라고 규정한다. 이 책이 쓰여진 이유는 대중문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자세와 대중문화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함께 갖출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끝으로 저자는 자신의 존경을 대표적인 좌파 문화이론가인 레이몬드 윌리엄스에게 바친다(물론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저자 자신이 소개하듯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를 함께 고민한 문화이론가이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책의 처음 시작은 문화(culture)의 정의와 대중(mass 혹은 popular)의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결합된 대중문화의 정의로 이어진다. 수학에서 정의(定義, definition)라하면 기호(記號)에 대하여 그 수학적 의미를 규정한 것을 의미한다. 수학적 정의라는 것은 "한 내각의 크기가 직각인 삼각형을 직각삼각형이라 한다"는 식의 똑부러지는 정의가 될 것이지만, 이를 인문학으로 가져오면 정의 자체가 어렵거나 정의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입장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저자는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말을 빌어 "문화를 영어에서 가장 까다로운 말 중 하나"라고 말문을 연다. 그러면서 문화란 특정집단이 지닌 삶의 방식이자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생활 속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문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문화에 대해 흔히 생각하게 되는 문화를 자연과 대립되는 뜻으로 생각하기보단 "나를 가꾸고, 자연을 가꿈으로써 자연적으로 문화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저자의 뜻을 제대로 요약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저자의 바램이 문화를 어려운 어떤 것이 아닌 대중(popular)이  즐기는 것이 되길 원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쓰였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른 대중문화이론들에서 간추려낸 대중문화의 정의를 여섯 가지로 정리해 보여준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화다.
둘째. 고급문화 이외의 것이 대중문화다.
셋째. 대량생산된 상업문화다.
넷째. 민중계층으로부터 스스로 발생한 문화다.
다섯째. 문화적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경쟁결과가 대중문화다.
여섯째. 대중문화의 경계란 없다. <본문 24쪽>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대중문화가 한 눈에 잡히는 것 같은가?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좀 특이한 사람이다. 윤곽이 잡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미로에 빠진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고 앞의 정의들이 피부에 와닿아 감동을 주는 문장은 분명 아닐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뼈만 남은 앙상한 문장은 생기와 온기를 전해주지 못한다.<본문 25쪽>

저자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인데 정작 자기 자신은 그런 문장력밖에 없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저자는 생기와 온기를 겸비한 문장을 구사한다. 그렇게 저자의 글들을 따라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대중문화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된, 아니 그 말은 이 책에 대한 예의는 아닐 성 싶다. 그보다는 자신이 문화이론 내지는 대중문화에 대해 어찌 공부하면 좋을지에 대한 최소한 뼈마디와 길잡이는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은 선생은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일반 대중(혹은 문화비평에 이제 막 입문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품은 이)에게 그 실천방법으로 "비평일기" 쓰기를 권장한다. 비평일기를 잘 쓰기 위해 저자는 "나는 내법을 쓴다(我用我法). 入語有法 出語無法, 모든 것을 강조하면 아무 것도 강조되지 않는다. 몸으로 써라. 즐겨라" 같은 방법을 일러준다. 이 네 가지 방법 가운데 "모든 것을 강조하면 아무 것도 강조되지 않는다"를 제외하면 실제로 가르침은 한 가지로 압축되는데, 그것은 "나의 눈으로 보고, 즐기며, 나의 느낌을 말하라"는 것이 된다. 이 책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대중문화와 이론들은 실제로는 매우 생경하고, 난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글쓰기는 자신이 말한 저 원칙들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독자들도 함께 읽어가며 신나게 대중문화의 세계로 자맥질해 들어갈 수 있다.

강의 하나하나는 나름의 주제와 각각의 문화이론가들의 주장과 개념들이 녹아들도록 꾸며져 있다. 예를 들어 "제2강|소통하는 사람, 소통하는 문화"에서는 발터 벤야민과 마샬 맥루한이 다뤄지는데 흔히 마샬 맥루한하면 바로 "미디어는 메세지"란 이야기를 떠올리면서도 정작 이 말이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잘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이것을 매우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마샬 맥루한이 말했다. '미디어는 메시지' 라고. 조선일보가 북한에 대해 말할 때 보면 맥루한의 이 명제가 얼마나 진리인지를 느낀다. 그러나 이 진리가 증명되는 순간이 어디 조선일보의 경우뿐이겠는가. 관제언론에서 정치를 논할 때, 방송에서 공익성 운운할 때 우리는 맥루한의 통찰력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어디에서 말하는가가 더 중요해져버린 현실에서 매체는 이미 권력이다.<본문 50쪽>

이렇게 마샬 맥루한에 대해 살려보면서 동시에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실제 독자 자신의 경험에 대입시켜 살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구성은 실제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잠시의 상상만으로도 좀더 폭넓은 추체험(追體驗)을 가능케 한다.

같은 대중이라 할지라도 mass냐 popular냐에 따라 대중문화를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별할 수 있는 일차 기준이 될 수 있는데, 앞서 이 책의 저자인 김정은 선생이 존경하는 인물로 레이몬드 윌리엄스를 꼽은 것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이 양자 사이에 적절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 구조주의 문화이론에 대해 일방적인 비판, 찬양과도 모두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물론 저자의 관점이 좌파적인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주장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습득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존재(a learning, creating, communicating being)라면,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 걸맞는 유일한 사회적 체제는 참여민주주의이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 습득하고 소통하고 스스로를 지배한다. 이보다 열등하고 제한적인 체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원천을 소진시켜 버린다."고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장구한 혁명"에서 말한 바 있다.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듯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인간에 대한 낙관, 대중을 해방적 기획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근대의 혹은 근대에 대한 해방적 기획(정치실천)은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이런 해방적 기획의 회복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짓기가 아닌, 고상하고 위대한 선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 사상, 행동, 욕망 등이 종합적으로 조립된 문화에 의한 것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문화는 그들만의 경험을 통해 기존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들의 자발적인 실천은 더욱 강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대중의 자발적인 실천이란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선 더욱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대중문화에 대해 고민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자발적인 실천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무척 권하고 싶다. 이 책의 말미엔 100여쪽이 약간 넘는 분량으로 문화이론의 중요 용어들에 대한 사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또한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쉽게 쓰이는 것이 반드시 천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긴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쓰는 것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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