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Slightly Out of Focus) - 로버트 카파 | 우태정 옮김 | 필맥(2006)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진다. 사진기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키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카파는 대상을 두고 어떻게 보고, 어떻게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전쟁 그 자체를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격정의 끝없는 확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밖에 있는 것을 찍어 그 격정을 표현한다. 그는 한 아이의 얼굴 속에서 그 민중 전체의 공포를 나타낸다.  - 존 스타인벡

 

포토저널리즘의 짧았던 전성기를 열고 닫은 최초의 영웅이자 사실상 마지막 영웅이었던 로버트 카파.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친구 집에서 우연히 라이프 세계사와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사를 본 것이 나로 하여금 로버트 카파의 세계, 포토저널리즘이란 것을 처음으로 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후로 오랫동안 특파원을 꿈꾼 적이 있었다. 이 책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원제는 Sightly Out of Focus, 1947)"는 오랫동안 보도사진계에서 활동해온 민영식 선생의 번역이다. 카파에 대한 책, 혹은 사진가에 대한 책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나온 책이므로 이 책의 군데군데 보이는 번역상의 문제나 오탈자를 시비삼지는 말자. 그런 것쯤 크게 거슬리지도 않을 뿐더러 워낙에 재미있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로버트 카파이고, 내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에서 로버트 카파를 다루는 별도의 글을 쓴 적이 있으므로 그의 생애나 작품 세계를 다루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두절미토록하겠다. 이 책은 로버트 카파 자신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그는 헝가리 출신의 유태계 사회주의자였다. 이 말을 요새 우리 식으로 바꿔보면 '비정규직외국인여성이주불법노동자'쯤 되는 거다) 프랑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서 생활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서 미국이 참전하게 되고 그가 보도사진가로, 전선기자로 활동하게 되는 1942년 여름의 어느 아침으로부터 출발해서 유럽 전선에서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이야기를 스스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일종의 전선취재록인 셈이다. 첫장의 제목이 '운명의 아침 - 1942년 여름'으로 시작해 마지막 장은 '이제 아침이 되어도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다.'로 끝난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긴 했지만 시계조차 없어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나에게는 시간 같은 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돈이래야 고작 25센트 동전 한 닢뿐. 전화벨이라도 울려 누군가가 점심에 불러주던가, 일거리 얘기라도 하던가, 더우기는 돈을 꾸어주겠다는 얘기 같은 게 없는 한 침대를 떠날 이유는 없었다.

 

따분하고 지겨운 가난한 망명자 신분이었던 로버트 카파 앞으로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커리어즈>지의 전선보도사진기자로 채용한다는 내용이었고, 긴급히 특파원으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거금 1,500불을 동봉했으니 카파로서는 고민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당시로서는 적성국인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의 국민이었으므로 당연히 취업을 할 수가 없었고,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갈 수도 없었다. 그는 극적인 행운을 거머쥐고도 오도가도 못할 형편이었다. 다행히도 그를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영국행 여객선을 잡아 탈 수 있었고,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면면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늘 그렇지만 실화는 픽션을 능가하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법이다.

 

이 책에 다루지 않는 내용인, 1942년 이전의 로버트 카파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진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아이젠슈타트의 암실에서 조수로 일하며 사진을 배웠고, 히틀러가 등장하자 독일을 떠나 스페인 시민전쟁에 인민전선 의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사랑 겔다 타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란 사진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후퇴해온 아군 전차에 애인 겔다 타로가 깔려 숨지는 사건을 겪은 뒤 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았다(물론 연애는 많이 했지만).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라이프Life」지에 게재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종종 사진작품의 진위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데 카파의 이 작품도 진짜다, 가짜다 해서 말이 많았다. 어떻게 총탄을 맞는 병사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느냐는 것부터 사진에 다른 병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 등등부터해서 어떤 영국 기자는 그 당시 로버트 카파는 호텔에서 놀고 있었다고 증언을 하면서 이 사진은 가짜라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 사진 속 병사의 이름이 페데리코 보렐 가르시아고, 1936년 9월 5일 세로 무리아노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카파의 사진을 둘러싼 의혹이 드디어 풀리게 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쨌든 스페인 시민전쟁이 인민전선파의 패배로 막을 내리면서 그는 유럽 땅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고, 결국 미국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한 사진, 죽음의 공포와 엄청난 전쟁의 화염으로 인해 그때 카파의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핀트도 맞지 않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욱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이 이 책의 표지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들, 전쟁이 끝난 뒤 로버트 카파는 1945년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947년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매그넘>을 결성한다. 이 무렵 그는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련에 촬영여행을 가고, 1949년과 51년에는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는 잠깐이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였고 1954년 풍물사진 촬영차 일본에 가 있던 중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게 된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의 한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러나 <매그넘> 회원인 친구 잔 모리스가 뉴욕에서 그를 불렀다. <라이프>지에서 베트남 전세가 긴박해지자 카파에게 그곳에 가줄 것을 화급히 간청한 것이다. 카파는 베트남 행을 말리는 친구에게,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는 41살의 젊은 나이에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1954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 자신이 전선기자로서 활동하고자 했던 마음 때문이었겠으나 다른 일면도 존재한다.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미국이 그를 반미활동가로 간주하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카파는 미국을 떠나 있어야 했고,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너무 이르고 극적인 죽음은 그를 전선기자의 신화가 되도록 했다.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앞에 드러내 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라는 카파의 이상, 전선기자들의 이상은 오늘날 거대다국적 기업에 의해 장악된 거대 매스미디어 그룹과 언론통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부 권력에의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전선기자를 꿈꾸는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이 책은 오랫동안 바이블로 남을 것이다. 전선기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때라도 자신을 지배하려드는 매스 미디어와 정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려 들었고, 그것이 바로 카파이즘(Capaism)이었다. 역대 전쟁에서 죽은 종군기자를 보면 제1차 대전에서 2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66명의 종군기자가 사망했고, 한국전쟁에서 17명, 베트남전에서 65명, 1994년 르완다내전, 보스니아 내전, 알제리 내전 등에서 157명, 1999년 발칸, 시에라리온, 콜롬비아 내전 등에서 활동하던 종군기자 중 87명, 2001년 아프간 전쟁, 나이지리아 내전 등에서 취재보조원을 포함해 95명의 기자가 사망했다. 수많은 기자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오늘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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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종군기자란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앞에 드러내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고, 로버트 카파에 대한 전기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연배우로는 앤디 가르시아를 기용하고 싶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에 선악을 판별하기 어려운 눈빛, 일자에 가까운 윗입술과 달리 도톰한 아랫입술에 머금은 미소는 보는 시선에 따라 짓궂은 장난기를 숨기거나, 뭔가 교활한 의도를 가장한 듯 보인다. 이것은 로버트 카파의 외면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1913년 10월22일 앙드레 프리드먼(Andre Friedman, 카파의 본명)은 노름과 거짓말을 즐겁게 오가는 재능을 지닌,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 데죄 프리드만과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 어머니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처 펴지지 않은 그의 한손은 육손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길 바랐지만, 소망과 달리 아들은 아버지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그녀의 아들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평생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어느 여인과도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전쟁터에서 죽었다. 로버트 카파를 다른 종군기자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그가 평생을 두고 늘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동유럽에 몰아닥친 빈곤과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탄압은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인 카파에게 마르크시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좌파 이념에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하게 만들었다. 좌우익간의 유혈테러가 빈발하던 헝가리에서 그는 종종 좌익혁명가들과 어울렸고, 그 결과 17살의 나이로 망명도생(亡命圖生)의 길을 떠나야 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프리드먼은 신생 바이마르공화국의 수도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정치학을 공부하고, 브레히트의 연극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었고, 조국에서 쫓겨난 가난한 젊은이였다. 그는 하숙집 주인의 개먹이를 훔쳐 먹어야 할 만큼 가난했으므로 어떻게든 생계 수단을 찾아야 했다. 그는 카메라를 택했고,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의 첫 번째 촬영대상은 스탈린에게 생명을 위협당하며 쫓기고 있던 트로츠키였다. 망명자가 촬영한 망명자의 모습엔 죽음의 그림자가 맴도는 듯했고, 카파, 아니 아직 프리드먼이었던 그는 자신의 사진을 <슈피겔>에 게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도 그의 안식처가 될 수는 없었다. 거리엔 어느새 갈색셔츠를 입은 무리들이 떼를 지어 활보했고, 1933년 2월 독일제국의회가 불타자 반란자로 의심되는 이들에게 린치가 가해졌다.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파리로 흘러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의 평생 연인 게르다 타로를 만난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타로 역시 파시즘을 피해 파리에 온 망명자였다. 그녀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무렵엔 이미 공산당 조직의 열성 당원이었다. 파리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었던 그는 타로에게 2주 만에 카메라 조작법을 가르쳤고, 타로는 아직 거칠기만 했던 젊은 프리드먼에게 사랑을 가르쳤다. 프리드먼에게 타로는 피터팬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꿰매준 웬디 같은 존재였다. 타로 덕분에 프리두먼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무명의 이방인 사진가였던 그를 프랑스를 방문 중인 돈 많고 유명한 미국 출신 사진가 로버트 카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일반 가격의 세배를 받고 사진을 팔아치웠다.

검열과 금기에 도전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정점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타로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오늘날 로버트 카파란 이름은 포토저널리스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뜨거운 피, 언제나 현장에 가장 근접하고 싶어했던 열정이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 민중과 역사가 가장 극렬하게 부딪치는 현장을 찾아가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1936년 스페인에서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었다. 이 사진을 계기로 그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이토록 놀라운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우연도 작용했다. 돌격 중에 총에 맞는 병사를 촬영하여 오랫동안 조작 여부로 뜨거웠던 이 작품은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때마침 창간된 <라이프>에 게재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로버트 카파는 41년의 짧은 생애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전쟁을 겪었고,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언제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전장을 누비며 그가 밝혀내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언제나 전쟁의 진실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전하고자 했다. 우리가 흔히 전쟁 사진이라 통칭하여 부르지만 전쟁 사진에는 언제나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진실을 전하는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선전하는 사진이다. 사진의 발명 이래 전쟁은 언제나 매스미디어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왔다. 대중은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자신이 죽을 염려만 없다면 인간의 의지가 극한까지 시험받는 전장의 이야기에 매료되어왔다. 지배계급은 이런 대중의 기호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대중을 좀더 효과적으로 통제하여 국가의 전쟁의지에 동원하기 위해 전쟁을 즐겨 영웅담으로 변조해냈다. 호기심과 동원이라는 양자의 이익이 절묘하게 결합된 전쟁 사진은 언제나 많은 수요가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촬영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초기 사진술의 발전 이후에도 전사한 병사, 참혹한 부상병 사진은 게재될 수 없었다.

전투 현장과 야전병원에는 숱한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들이 넘쳐나는 순간에도 언론에 보도되는 사진들은 승리를 찬양하고, 후방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노동자와 민간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전쟁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잔혹 행위나 죽은 이들의 비참한 모습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이 같은 검열과 금기에 도전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정점에 서 있던 이가 바로 로버트 카파였다. 그가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 게재된 뒤 많은 이들이 전쟁의 진실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터를 누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의 품에서 불려나와 이름 모를 언덕과 골짜기에서 숨져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연인이었던 타로마저 작전 중 급하게 후진해온 아군 전차에 깔려 숨지고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이후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것은 영원히 전쟁터를 떠돌게 될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탄생한 최고의 걸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더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었다. 나치를 피해 건너간 미국에선 헝가리 국적으로 인해 도리어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되었고, 카메라조차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를 구한 것도 전쟁이었다. 그는 <콜리어즈>에 채용되면서 전선으로 복귀하는 극적인 행운을 만난다. 카파는 영국을 거쳐 아프리카, 이탈리아를 전전하며 취재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유부녀 핑키와 밀애를 즐겼다.

종군기자는 병사들과 함께 목숨을 걸지만 취재를 마치면 후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글 수도 있었고, 원치 않으면 취재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2만에서 3만명이 전사할 것이란 예측이 나오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로버트 카파는 다시 한번 전선으로 향하는 패에 모든 것을 걸었다. 평소 도박을 즐겨하던 그였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재현되었던 것처럼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마하 해변에서 카파는 죽음의 공포로 떨리는 손을 거머쥐고 35mm 필름을 이용해 전투장면을 촬영했다. 35mm 필름 네통에 담긴 전투장면이었지만 흥분한 조수가 실수하는 바람에 인화할 수 있었던 사진은 고작 11프레임에 불과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기관총 사격과 포격 속에서 촬영된 사진은 흔들렸고, 핀트도 맞지 않았지만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된다.



이때 그의 사진을 인화하며 실수로 필름을 녹여버렸던 조수는, 훗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로버트 카파상을 1963년과 65년에 연거푸 수상한 베트남전 종군사진기자 래리 버로즈다. 그 역시 베트남전 취재 중 헬기 추락으로 로버트 카파의 뒤를 따랐다. 로버트 카파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사진 중 하나는 종전이 임박했던 1945년 4월18일 라이프치히에서 촬영된 병사의 죽음이었다. 이 무렵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친구 중 하나였던 종군기자 어니 파일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 막 평화가 찾아온 유럽에 당시 <카사블랑카>와 <가스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날아왔다. 이 무렵 그녀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카파는 런던으로부터 핑키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만나는 즉시 강하게 끌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배우는 여전히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지만, 종군기자였던 카파에겐 촬영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카파는 할리우드까지 날아가 그녀를 촬영했지만 결코 결혼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잡지사와 사진기자들 사이에 있었던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고자 했다.

진실을 드러내는 행동주의 ‘카파이즘’

카파는 전쟁 사진을 단순히 관찰하는 입장 대신 전쟁을 통해 인간이 처한 극한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말하고자 했다. 비록 자신은 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지만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전쟁의 실상과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그는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곤 했다. 로버트 카파는 객관적인 관찰자이기보다는 언제나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참여자로 행동했고, 그 같은 신념에 따라 사진작가는 자신이 촬영한 작품의 영혼까지 소유해야 했다. 카파는 오랜 동료였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1947년 사진작가들의 협동조합인 ‘매그넘’(Magnum)을 결성한다. 포토저널리즘의 주도권을 잡지사에서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과 주체성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로버트 카파는 작가 스타인 벡과 함께 전후의 소련을 방문해 취재했지만 촬영한 사진들 중 상당수는 검열 때문에 되찾을 수 없었다.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취재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행위에 실망한 나머지 “이렇게 옹졸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기록하지 않겠다”며 매그넘의 다른 사진가들과 함께 취재를 포기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근접해 들어가, 검열과 맞서 싸우며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카파의 행동주의는 훗날 카파이즘(Capaism)이라 불리게 되지만 정작 그는 한국전쟁에 대한 취재를 거절했다. 그 까닭에 대해 카파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자신은 전쟁을 혐오하며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기 때문에 다시 전쟁터로 가야 한다면 권총으로 자살해버릴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머지않은 미래에 베트남전쟁이라 불리게 될 인도차이나 전쟁에 종군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전쟁 이후 냉전이 극성을 부리던 1950년대 중반의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카파는 FBI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고,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았으며 계속해서 감시당했다. 엘리아 카잔 감독 같은 이들조차 반미주의자로 지목되자 주변의 동료를 밀고하여 면죄부를 받았다. 로버트 카파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고, 혐오해 마지않던 마지막 전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54년 5월25일. “전쟁의 마지막 날에도 병사들은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그 모든 것을 잊는다”고 말했던 로버트 카파는 베트남에서 사망한 최초의 미국 특파원이 되었다. 이후 60여명의 종군기자가 베트남에서 죽거나 실종되었다.


출처 : 시네21. No.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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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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