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의자 - 에즈라 잭 키츠 | 이진영 옮김 | 시공주니어(1996)




에즈라 잭 키츠가 뉴욕 브룩클린의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앞서 "내친구 루이"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폴란드 그리고 유대인, 이민자... 라는 이 세 단어는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폴란드계 유대인하면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인물은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막스 갈로의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엔 이런 대목이 있다.

 

로자로 하여금 삶을 지탱하도록 해준 것, 시련을 견뎌나가게 해주고, 정면으로 맞서며, 추락할 때마다 다시 튀어오르게 해준 것, 불안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게 해준 것은 유머였다. 아마 그건 자신도 모르게 폴란드계 유대인이라는 출신이 부여한 타고난 유머감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파괴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푸른숲, 382쪽>

 

1492년 스페인은 레콩키스타(정치적 통일)를 완수한 뒤, 스페인 지역 내의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를 실시했고, 이때 스페인의 유태인들가운데 대략 25만 명이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했다. 19세기 초 유럽 전역에는 약 330만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대박해인 "포그롬(pogrom)"이 행해졌는데, 이 무렵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은 폴란드였다. 러시아에서 포그롬이 행해질 무렵 중동부 유럽엔 대략 650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홀로코스트가 일어나던 1939년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은 85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폴란드는 1795년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3국에 의해 분할되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한 '바르샤바 공국시대(1807-1815)'를 제외하고 1795년부터 1918년까지 3국의 지배는 계속되었다. 폴란드의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 에즈라 잭 키츠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막스 갈로의 표현을 빌어 한 단어를 더 추가해야겠다.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파괴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 작가. 에즈라 잭 키츠라고 말이다.

 

그의 작품에는 여러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기 보다 서민적인 일상의 주인공들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한 번 등장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 속 어딘가에서는 주인공 혹은 그에 필적할 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에즈라 잭 키츠가 어떤 사람도 주변부화되는 것, 소외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에즈라 잭 키츠의 "피터의 의자"에서 주인공 피터는 평범한 흑인 서민 가정의 어린이다. 그는 "내가 어린이책을 만드는 목적은 실재에서 환상까지 나의 모든 경험을 아이들과 나누기 위해서이다. 나는 그 아이가 누구든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느끼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고 말한다. 피터에게 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어린 피터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터에게 동생이 생겼다. 피터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야기의 첫 장면은 어린 피터가 혼자, 아니 혼자는 아니다. 화면 우측 하단에 쭈그려 앉아서 피터가 놀고 있는 장면을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강아지(아마도 닥스훈트가 아닐까 싶은데) 윌리가 있다. 피터는 나무토막과 기타등등의 잡동사니를 이용해 이제 막 빌딩 한 채를 완성하려는 찰나다. 그때 윌리가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바람에 피터가 공들여 쌓은 빌딩이 무너지고 말았다. 함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기가 깰지 모르니 조용히 놀라는 말이다. 다음 장면에서 피터와 윌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 이 장면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에즈라 잭 키츠 특유의 콜라쥬 기법이 응용된 화면에서 마치 동화 바닥을 벽삼고, 문삼아 만화처럼 피터와 윌리가 목만 내밀고 있다.(동생 수지의 방 안을 들여다 본다. 수지? 수지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맞았다. 에즈라 잭 키츠의 "내친구 루이"에서 로베르토와 함께 어린 루이에게 인형극을 보여주던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이 또한 수지이다. 이 책 "피터의 의자"가 1967년작이고, 루이가 1975년작이니 그 기간 동안 어린 수지가 성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피터는 자신의 물건을 동생을 위해 분홍색으로 스스로 칠하면서 박탈과 소외의 슬픔을 벗어나 나눔의 즐거움과 행복을 함께 깨달아 간다.

 

어찌되었든 에즈라 잭 키츠는 그림동화작가로서 일러스트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역시 대단하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이는데, 첫번째 에피소드와 연계된 바로 다음 대목에서 이야기 전체의 갈등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잘 암시해주고 있다. 피터가 사용하던 요람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는 피터의 여동생 수지였던 거다. 작가는 어린 피터의 생각 "저건 내 요람인데, 분홍색으로 칠해버렸잖아."를 통해 피터의 박탈감과 그것이 현실 상황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피터의 의자, 즉 파란색 의자가 어떻게 피터의 손에 의해 분홍색으로 덧칠되는가 하는 과정을 통해 잘 녹아든다. 피터는 자신의 요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술 더 떠 피터가 앉았던 식탁 의자까지 분홍색으로 덧칠하려고 한다. 그것도 피터의 손까지 빌어서 말이다. 게다가 피터의 침대 마저 분홍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어린 피터에겐 이 과정이 마치 분홍색의 침공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어린이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느끼게 되는 박탈감과 이를 치유하고, 스스로 성장한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하는 과정을 에즈라 잭 키츠는 색의 변화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제 피터에게 남은 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의자 하나뿐이다. 피터는 의자와 강아지 윌리를 데리고 가출을 시도한다. 그동안 피터에게 더할나위없이 소중하고 아늑했던 공간인 가정에서 분홍색(여동생 수지)은 점점 피터의 자리를 점령해들어오고, 피터는 하나 남은 자기 의자를 가지고 탈출하는 것이다. 자기 의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피터의 모습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된다. 마치 5.16군사쿠데타 이후 시청 앞 광장에 서 있는 박정희 처럼 양 손을 허리께에 짚고는 의자를 내려다 보고 있는 장면이 비장하기 이를 데 없어 웃음이 절로 나는 것이다. 게다가 피터가 집을 나올 때 함께 가지고 나온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웃음은 더욱 커진다. 사진 속의 아기 피터조차 작은 의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에즈라 잭 키츠는 사진 속의 피터를 그려내곤 혼자 씽긋 웃지 않았을까.

 

분홍색의 침공으로부터 탈출한 피터는 많은 일을 했으므로 이제 피터는 조금 피곤하다. 피터의 옷과 신발도 모두 의자와 같은 청색 계열로 묘사되고 있는데 의자에 앉으려던 피터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에즈라 잭 키츠는 이 장면을 마치 영화 속의 줌인처럼 화면 속의 인물들을 좀더 크게 그려내고 있는데, 사진 속의 아기 피터와 피터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흡사하게 묘사되고 있음에 이 작가의 섬세함에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작가는 피터가 벌이는 잠시의 일탈, 아니 일탈이라기 보다는 동생이 생긴 어린이의 반항을 따스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엄마가 창가로 와서 피터를 불렀어.
"피터야,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래?
점심에 아주 맛있는 걸 해 먹을 건데."
피터와 윌리는 엄마의 말을 못 들은 척 했어.
피터에게는 따로 생각이 있었거든. <본문 중에서>

 

엄마의 부름에 딴청 부리는 피터, 이때는 사진 액자에 담긴 아기 피터도 딴청을 부리는 듯 보이고, 피터가 들고 나온 악어 인형도, 개구진 애완견 윌리도 피터와 반대 방향을 쳐다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누구라도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깨닫긴 하지만 겸연쩍은 탓에 이를 인정해보지 못한 경험이 있을 거다. 그 순간의 한 장면을 카메라로 찰칵 담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피터는 엄마 몰래 커튼 뒤에 숨어서 엄마가 자기를 찾아내도록 한다. 물론 커튼 아래로 피터의 파란 신발이 보인다. 엄마가 커튼을 훽 젖히자, 피터는 옆에 숨어 있다가 폴짝 뛰어나와 소리친다. "나 여기 있어요."

 

엄마가 피터를 못 찾은 건지, 일부러 못 찾은 척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피터의 엄마는 피터 자신이 스스로 성장했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피터의 명분을 세워주었고, 피터 역시 이런 사려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답게 스스로 자신의 의자를 분홍색으로 칠해 동생 수지에게 선물할 계획을 말한다. 박탈이 증여로 바뀌는 순간이다. 에즈라 잭 키츠는 어린 피터의 모습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작은 교훈을 가르쳐주는 지도 모르겠다. 우린 누구나 알게 모르게 남의 몫을 조금씩 얻어쓰고, 나눠쓴 덕으로 오늘까지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분홍색(동생)을 침탈로 여겼다면 이젠 함께 하는 연대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치며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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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 네 번째 편지
- 오세영의 시 <나를 지우고>를 읽으며 든 생각들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선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이상하게도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착 가라앉아 버립니다.
마치 내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반성문을 쓰고 있는 듯이...


늙은이에게 젊은이는 더이상 아무 것도 배우려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이 먹은 교수는 그저 나이 먹은 교수일 뿐 그가 평생을 쌓아온 학문적 업적 같은 것은 쇠락해버린 초가에 덩그마니 얹힌 박 같이 허울만 좋은 이름일 뿐 특별한 권위는 바랄 것도 없고, 존경은 더할 말이 없는 시대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쟁력이 으뜸인 시대에 고려장 지낼 날이 멀지 않다는 증빙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너희들도 언젠가 늙을 것이란 말은 충고도, 선언도 아닌 악담인 게지요.



내가 아직 '문학은 나의 힘'이라 외치며 술잔을 높이 들던 시절, 아직 고왔고 아름다운 시인이자 나의 은사에게
"시인은 늙기 전에 죽어야 합니다."라며 호기롭게 떠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인이었던 은사는 여전히 살아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머리가 많이 새었지만 여전히 멋있을 겁니다. 1942년생인 시인 오세영의 시를 읽습니다. 당신의 이 시를 읽노라니 문득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鸂之德)’의 고사가 떠오릅니다.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중국의 어느 왕이 투계를 몹시 좋아하여 기성자란 사람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구해 최고의 투계로 만들도록 합니다. 기성자란 인물은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는데, 왕이 맡긴지 십일이 지나 기성자에게 “닭이 싸우기에 충분한가?”라며 묻습니다. 기성자는 단호히 대답하길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아직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다시 십일이 지나 왕이 또 기성자를 불러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성자는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도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라 했습니다. 왕은 다시 십일이 지나 기성자에게 묻습니다. 기성자는 역시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라 답합니다. 다시 십일이 지나 왕이 또 묻자, 기성자는 그제야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가 되었습니다. 어느 닭이라도 이 모습만 봐도 도망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는 고사입니다.


얼마 전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영화 <미션>을 다시 보았습니다. 오래전 문망의 영화 코너에 글을 올린 적도 있었던 영화입니다. 그 사이 내가 늙어 유순해진 것인지 어렸을 적엔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 신부보다 로드리고(로버트 드니로) 신부가 더 좋고, 더 잘 이해되었었는데 이번엔 가브리엘 신부의 마음도 알 것 같더이다. 누군가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이 있는 곳보다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해 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운명이란 것도 때로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곳보다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루어질 때가 더 많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듯합니다.



시인 오세영은 늙었고, 나는 아직 젊습니다. 그 말은 내가 더 진보적이란 말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뜻이란 걸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이란 걸 알 것 같습니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란 구절에서 나는 나무가 홀로 나무일 때는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지울 때만 비로소 숲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배웁니다.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전부 알 수는 없겠으나 내 나름으로 살아가며 더 깨우칠 일이겠지요.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서야 어찌 밀밭을 이룰 수 있을까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말이 또한 이와 흡사하겠지요. 말 그대로 해석하면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숨어 있다는 뜻이지만 이때의 진(塵)이란 속세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겸손하란 뜻도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자신이 지닌 능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이를 내세우지 말고, 세상의 속된 사람들에게 눈높이 맞추란 뜻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말은 오늘날 고립되어 가는, 위기에 처한 진보, 좌파를 자임하는 (저 같은)사람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구절이란 생각이 듭니다. 리저호우(李澤厚)는 『고별혁명(告別革命)』이란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개량으로 혁명을 대체한다」는 글을 썼습니다.


지난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개량주의자’란 지적을 마음 한 구석에선 치욕처럼 느낍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제 개량주의자였음을 자백하는 고해성사를 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혁명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그와 같은 현실이 슬픈 사람입니다. 리저호우는
“1895년, 갑오해전에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줄곧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사이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전자는 ‘돌변突變’ 즉, 계급투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폭력수단)으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 역사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점변漸變’ 즉, 계급협력의 비폭력 수단으로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을 추구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좌파와 진보를 단순히 민주노동당이나 참여연대, 민주노총 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나마 가장 대표적인 집단인 건 사실이겠지요. 이들 중 누구도 ‘혁명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류 좌파(진보)는 모두 개량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이들 중 누구도 솔직하게 개량주의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여기기에 말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미 수차례 말했는데 저만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의 좌파들, 진보들은 아직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선 개량주의에 대한 혐오와 혁명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 보입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라 하기 좋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저 자신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 끝에 나온 말입니다. 그것이 ‘돌변’이든, ‘점변’이든 추구하는 바를 리저호우의 말에서 빌리면 결국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에 있습니다. 대체로 국가적 자아의 경신에 실패하는 경우, 국가와 지배계급이 택하는 손쉬운 해결책은 역사 이래 전쟁이었던 경우가 많았고, 피지배계급이 택하는 해결책은 폭동이나 혁명이었습니다. 전쟁은 자본가들의 혁명, 우파들의 혁명인 셈이지요. 역사가 한 개인이나 집단의 공과를 심판한다는 믿음을 버리고 났을 때, 역사는 그저 냉정하고 잔인한 기술(記述) 방식의 하나일 뿐입니다.



저는 중국식 유물론의 효시를 관자(管子)로 봅니다. 그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고, 후세 제갈량이 닮고 싶다고 말했던 관중(管仲:?~BC 645)입니다. 관중하면 우선 “관포지교(管鮑之交)”만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관중은 제나라 민중들이 영웅처럼 떠받들던 재상이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마치 일종의 제왕론을 펼친 사람으로만 오해되는 것처럼, 관중 역시 그와 흡사한 사람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관자(管子)』 「목민편(牧民篇)」에 이르길
“광에 먹을 것이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倉凜實則 知禮節, 衣食足則 知榮辱)”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유물론의 본질을 지극히 천한 것으로 끌어내린다는 오해를 감수하고라도 말하자면, 결국 유물론은 인간이 정신만으로 살 수 없다는 현실주의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예수의 말에 반대하는 주의, 주장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가 우선인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급진은 명분이 아니라 개량주의자들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은 아닐런지요. 아니, 명분만 내세운 채 거짓희망을 주느니 차라리 보다 철두철미한 개량의 길로 가는 것이 도리어 급진의 길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비판의 말만 앞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개량의 길로 질질 끌려갈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앞서 성찰하고, 개량하고, 개혁하고, 보수하여 실현가능한 희망, 급진을 실천해내는 것이 좀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까 고민하게 됩니다.


1987년 이후 20년이 흘렀고, 1997년 이후 10년이 흐르고 있습니다. 프란츠 파농은
“민중에 대한 아첨을 경계하라”고 말했는데, 오늘 이 땅의 지식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여전히 민중에 대해 아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1980년대를 휘감았던 민중주의는 역사와 민중을 지혜로운 심판자, 추상적인 진리로 추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때 말하는 민중이란 언제나 결국 각성한 민중으로서의 소수자였을 뿐임을 이제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절차적 민주화라고 현재의 민주주의를 폄하하지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입니다. 지금 돌변의 방식을 택하자고 외치는 진보도, 좌파도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좌파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개량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으며, 도리어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 더 많은 존경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 민주노총에 등을 돌리고 있을까를, 아니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어째서 민중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는가, 지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 교육, 언론 등 수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 모두 타당하다는 사실은 아마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좀더 솔직하게 고백할 때입니다. 1980년대의 분열을 오늘까지도 그대로 끌고 왔으며, 우리들의 현실을 비판하는 일에 능숙한 반면, 현실적인 대안이나 희망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그간 얼마나 서툰 존재들이었는지 말입니다. 거기에 더해 과거 전대협 의장을 비롯한 학생운동권 중 상당수가 결국 아무런 명분도 없이 현실정치에 투항해버렸고, 민주노총은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으며, 시민단체들은 정권교체 이후 하나둘씩 체제내화 되는 과정에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중에게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주지 못한 채, 과거와 같은 방식의 운동, 명분이 옳으니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싸움이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언제는 언론의 지지를 받고 싸운 적이 있냐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교만이고, 자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지우고 나무, 숲, 산이 되는 희생, 싸우지 않고 이기는 나무 닭의 덕,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는 대신 자신을 낮춰 세상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겸손, 관자의 실용주의, 태산과 같은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미FTA 타결 이후 평소 조용하기가 산과 같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허세욱 선생이 분신을 하고, 예천에서는 농민 한 분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에게 공기총을 쏘았습니다. 사는 건 앞으로도 힘이 들겠지요. 하긴 우리 네 사는 세상이 한 번이라도 살기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모레가 더 좋은 세상 만들어보자고 다들 고생하시는 거 압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는 고정된 말씀에 얽매이는 종교가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는 세상에 가장 적절하게 대응해온 철학이기도 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 지루한 고해성사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른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양심의 기억이자, 동시에 패배의 기억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회주의는 우리들의 양심이 늘 손쉽게 욕망에 굴복할 수도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건 어제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불행히 미래에도 그럴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의 희망이 저 멀리, 지금은 비록 그 길이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향하는 길 양 편으로 무수한 무덤들이 실패를 증명하지만, 그 길이 우리의 양심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인 이상 그리로 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 길 위에서 외로운 한 명의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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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생애와 사상 | 파울 프뢸리히 지음 | 정민 옮김 |  책갈피(2000)

1919년 1월 15일 밤 9시경.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빌헬름 피이크와 함께 빌메르스돌프의 만 하더이더 거리에 있는 그들의 마지막 피난처에서 린드너 중위가 지휘하는 일단의 군인들과 그 지역 시참사회 첩자였던 메링이라는 하숙집 주인에게 체포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거짓 이름을 대었으나 그들은 이미 리프크네히트의 얼굴을 알아보고 뒤를 밟은 첩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칼은 먼저 시참사회 본부로 끌려갔다가 이웃의 에덴호텔로 옮겨졌고, 잠시 후 로자와 피이크도 군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 뒤따랐다. 칼이 호텔방으로 끌려들어오자마자 그의 머리통으로 소총 개머리판이 날아들었고,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잠시 뒤에 로자와 피이크는 다른 방으로 끌려 들어가서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쓰러진 칼을 깨워 호텔 밖으로 끌어냈다. 호텔 문 앞에서 칼 리프크네히트는 오토 룽게에 의해 다시 소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두들겨 맞고 쓰러졌다. 그들은 죽은 듯 축 늘어진 칼을 강제로 일으켜 차에 실은 뒤 모아바트 감옥으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척 했다. 칼을 구금한 차가 티에르가르텐 인근의 호수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다시 칼을 차에서 끌어내리고 앞서 걷도록 명령했다. 칼 리프크네히트가 앞으로 몇 걸음을 옮기자, 하인쯔 대위, 리프만 중위, 하르퉁 소위, 폰 뤼트겐, 슈티게슐츠 등 6명은 그의 등 뒤에서 일제 사격을 가했다. 칼은 마치 도주하다 사살된 것처럼 꾸며졌다. 

칼이 끌려나가고 잠시 후 로자는 포겔 소위에 이끌려 호텔 밖으로 나왔다. 문 밖으로 나온 로자의 두개골은 룽게의 개머리판에 두 번이나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축늘어진 채 트럭에 실린 로자는 다시 병사들에 의해 머리가 짖이겨지도록 얻어맞았다. 포겔 소위는 피투성이가 된 로자의 머리통에 한 발의 권총탄환을 박아 넣었다. 시체가 된 로자는 티에르가르텐으로 실려가 포겔의 명령에 따라 리히텐슈타인 다리위에서 란츠베르크 운하 물 속으로 던져졌다. 그녀의 시체는 1919년 5월 31일까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그 결과 세상은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를 잃었고, 독일 노동자 계급은 학살당했으며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구덩이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붉은 로자", "독수리", "피투성이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0를 가리키는 별명은 무척 많다. 폴란드 출생의 유태계 여성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는 역사 속의 여성 중에 내게 단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사회주의자였으나 오랫동안 스탈린주의가 주도하던 사회주의자들에게 무시당해왔던 로자 룩셈부르크. 실제 그녀의 죽음 이후 사회주의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던 소련에서 그녀의 책이 출판되었던 것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그녀의 명성에 비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너무 뒤늦은 시기에 다시 재조명받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 직후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몰락을 일찌감치 예언한 탓이다. 

"친정부 인물만을 위한, 일당의 당원만을 위한 자유는 -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 전혀 자유가 아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도 인정하는 것이 진짜 자유다. '정의'라는 개념에 매료되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는 정의에 입각할 때만이 비로소 온전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어떤 특권이 된다면 자유의 효용성은 없어지고 만다."

그녀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자유도 인정하는 것이 진짜 자유라고 말하면서 소련사회주의가 마치 중세 교황과 교회의 무오류성을 받아들여 소련 공산당의 무오류성을 설파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 이후 실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소련에 의해 조직되고 강화된 코민테른이 저지른 수많은 오류와 반동성을 발견한다. 마르크스, 레닌에 의해 성공한 혁명은 그 이후 스탈린의 통치기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고사되어 갔고, 마르크스주의는 경전이 되어 높은 성벽에 볼모로 갇히게 되었다. 노동자는 고립되었고, 민주주의는 상실되었다. 로자는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노동자의 자기 해방은 이제 명패가 떨어진 채 아무도 줍지 않으려는 팻말이 되고 말았다.

-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모하는 레닌(1920)

현실 속의 사회주의는 그렇게 박제가 되어 죽어갔지만 그녀가 세상을 뜬지 8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 옛 동독지역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에는 여전히 추모객들이 놓고 간 수천 송이의 카네이션이 붉게 수놓고 있다. 그녀는 철저한 사회주의자였고,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을 계승하여 그로부터 한발짝 더욱 진보시킨 인물이었다. 이 책 <로자 룩셈부르크 생애와 사상>은 그녀에 대해 쓰여진 최초의 평전이다. 이 책의 저자 파울 프뢸리히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시대의 인물이자, 그녀의 동지였다. 이 책 자체가 겪은 우여곡절은 그대로 로자의 생애와 사상이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과 흡사했다. 1919년 로자가 죽은 뒤 그녀에 대한 자료들도 역시 조직적인 은폐와 멸실 과정을 거쳐 소멸
(1933년 괴벨스는 그녀의 저서들을 멸실하도록 했다)되었고, 자료의 상당수가 소련으로 옮겨졌으나 소련은 그녀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인색했다. 스탈린주의에 젖은 사회주의자들 역시 로자의 재부각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했다. 그녀는 동지였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두 번 죽었다. 

프뢸리히는 리히텐부르그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프랑스로 망명하여 로자에 대한 저작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938년에서 39년 사이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 저작은 프랑스에서 독일어판으로 출판되었으나 곧이어 전쟁이 터진다. 그는 다시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영문판으로 다시 로자 평전을 출판하게 된다. 1940년의 일이었다. 프뢸리히 자신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1년까지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51년 귀국할 수 있었고, 1953년 3월 16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죽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폴란드에서 태어났고, 여성이었고, 유태인이었으며 어려서 병을 앓아 다리를 절었다. 그녀는 사회적 약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뛰어난 사상가였고, 혁명가였으며, 가슴 따뜻한 동지였다. 그녀는 토론의 자리에 임해서는 누구보다 열렬한 목소리로 개량주의, 수정주의를 비판했고, 동료일지라도 옳지 않으면 가차없이 공격했고, 때로 예의없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서로 입장이 다른 장 조레스와 돈독한 우정을 나눴고, 같은 여성 동지로서 클라라 체트킨("여성의 날"을 제창한 바로 그 사람)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로자는 "무엇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 아시겠어요? 나는 당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해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 상투적이고, 딱딱하고, 진부합니다....다른 시대는 다른 서정시를 갖기를 원합니다."며 고리타분한 주의주장으로 가득한 동료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합법성이라는 것이 단지 "지배계급의 폭력"을 은폐한 결과임을 설파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녔으나 동시에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이 처한 비참한 일 때문에 세계의 비극을 잊는 일도 결코 없었다.

"혁명은 냉혹하면서도 무한한 인간애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사회주의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기존 세계는 타도되어야 하지만 모든 고통과 눈물은 고발되어야 한다. 감정 없이 하찮은 벌레라도 짓밟는 엄청난 행위를 저지르는 인간은 유죄판결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냉혹하면서 동시에 무한한 인간애를 가진 혁명'이란 형용모순이 결합된 아름다운 이상이란 냉혹한 현실과 현실 속 인간에 대한 실천가능한 대안이 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을런지. 그녀의 죽음 앞에 다시금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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