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 로버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책세상(1998년)



내가 어렸을 때 영화는 흑백영화였고, FBI요원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임을 받았으며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그리는 FBI요원은 대부분 악당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대도시의 경찰 지휘본부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그는 좀더 높은 차원의 내밀한 수사를 한다는 이유로 명백한 정의를 왜곡시키는 방해꾼으로 간주된다.


경찰 역시 악역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매우 노골적인 영화 람보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람보 영화인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를 보면, 베트남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 존 람보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을 걷다가 지방 보안관 브라이언 데니히에게 체포된다. 영화 속의 모든 것이 람보 편을 들고 있으며 보안관은 편협하고 어리석은 가학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보안관이 옳았던 것이 아닌가! 보안관은 람보가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영화가 끝나기 전에 보안관 조수들 중 여러 명이 죽게 되고 그 마을은 도살장이 되어버린다.


람보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는 더욱 노골적이다. 람보는 베트남에서 포로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CIA에게 차출되어 출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임무의 실제 목적은 람보가 실패하는 데 있었기에 생존하는 포로들에 대한 소문은 전혀 들을 수가 없다. 온갖 난관을 이기고 람보가 마침내 포로 몇 명을 찾아내어 그들을 탈출시키려고 할 때 CIA요원들은 그들을 내버려두라고 명령한다. 이 영화에서 실질적인 적은 람보를 죽이려는 북쪽 베트남인이 아니라 바로 CIA 요원이다.


(중략)


70년대에 국가의 권위를 불신했던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시민군인 극우파들이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불신은 정치적인 노선과 관계없이 대중문화의 한 가지 특징이었다. 내가 언급한 영화와 그 외에 대중들에게 친숙한 대중문화에서도 권위에 대한 불신이 하나의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로보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1998년판 서문, 14-17쪽>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이 글을 모 잡지에 발표하는 글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원제명이 "In Defense of Anarchism"이란 것을 생각해볼 때 볼프의 서문은 책의 본문에서 나올 이야기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준다. 이때 볼프가 말하는 '좌익'이란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부인하기 보다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체제로 연착륙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한 말일 것이다. 최소한 미국의 사례에 비춰보았을 때 국가는 정치적 좌파들에 의해 공격받기 보다는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의 주도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알프레드 머라 빌딩에서 일어났던 폭탄 테러 사건처럼 극우파에 의한 것이다. 당시 범인으로 잡힌 티모시 맥베이는 연방정부에 반대하는 극우파 단체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1990년대 초반의 동구에서 발생한 현실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흔히들 좌파의 패배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본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단견이다. 실제로 좌파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국가에서 승리했다. 확실히 초창기의 야만적 체제였던 자본주의 체제를 국가의 경제체제로 채택한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강한 선진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점에만 주목하여 보자면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를 압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영국만 하더라도 모든 의료체계를 사회가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그외에 우리가 선진국이라 생각하는 거의 대부분의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과거 사회주의가 처음 태동할 당시의 주장들을 '사회복지 시스템'이란 이름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국가단위의 사회주의는 패배한 것으로 보이나 정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애초에 소망했던 대부분을 획득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주의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하고 있다. 문제는 야만적 자본주의를 대상으로 투쟁했던 혁명적 사회주의가 그 이후의 사회주의로, 새로운 세상으로 전진해나갈 수 있는 정신적 동력과 대안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비단 사회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모든 정치 이념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서문, 본문, 해설, 찾아보기'의 형태로 되어있지만 전체 페이지가 200쪽이 안 되는 얇은 책이다. 한 권의 작은 논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얄팍한 본문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인 임홍순 선생의 해설이 40쪽 정도 할애되어 별도로 따라 붙는다. 200쪽이 안되는 책에 40여쪽의 해설이 붙는다는 것은 이 책이 읽어내기에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볼프의 이 책이 읽기 어렵고, 난해한 개념들로 가득하다는 뜻은 아니다. 임홍순 선생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이해되지 못하고, 극좌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편견으로 규정된 "무정부주의"를 "아나키즘"으로 제대로 이해받도록 하고 싶다는 뜻에서 해설을 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볼프의 저술이 다루고 있는 부분을 잘 요약하여 해설해주고 있으므로 볼프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다소 어렵다면 해설을 참고하는 것도 이 책을 이해하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이래 "아나키즘"은 하나의 '이상주의'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물론 이 글을 적고 있는 나 역시도 실제 정치적 현실로서의 아나키즘을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나 1880년대 이래 "8시간 노동제"가 환상에 사로잡힌 일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치부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8시간 노동제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아나키즘"에 대해 일종의 도덕적, 정치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평생 '전분'만을 섭취하며 살다가 세상을 등진 것처럼(헬렌 니어링은 소로우가 전분만 섭취하지 않고, 다른 과일이나 곡물도 섭취했더라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때로 아나키즘은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들에 이미 상당수 녹아들어 있다.


소로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크 트웨인이 국가를 상대로 벌였던 전쟁에 반대하는 행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행위들 모두 직접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나키즘"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환경적인 분야에서 이런 아나키즘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우리는 "아나키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된 사회체제에 반대하는 극렬 테러리스트들의 폭탄 세례를 자동연상하지만, 그런 식으로 치자면 "자본주의"는 "아나키즘"이 사제폭발물을 만들 때 공장에서 수없이 많은 아동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살해했다는 오명을 오늘날까지 뒤집어 써야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18세기, 19세기의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달라진 것 이상 오늘날의 "아나키즘"은 환경분야, 정치분야, 철학적인 분야에서 각기 다른 형태를 띄고 있다.


볼프는 이 책에서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국가의 본질을 가장 강력한 통치권력으로 규정하고, 국가 권력에 의한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곧 권력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문제는 국가의 형태가 민주공화정제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이런 지배와 복종의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다는 측면에서는 전제왕정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국가를 문제삼는 것은 이렇듯 최고의 권력을 갖는 국가 권위가 정당성을 지녔는가 하는 것이다. 이때 어떤 형태의 국가도 존재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지니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볼프 역시 어떤 국가의 권위도 정당화될 수 없고,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적 신념은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문제는 논리 이전에 현실적으로 이미 최고의 권력으로 존재하는 국가의 권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볼프는 그 문제의 핵심으로 국가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도덕적 의무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한 개인이 갖는 최고의 의무는 '자율'에 대한 의무이며, '자율'이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스스로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시시각각으로 자율과 복종은 충돌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짧은 독후감으로 그 모든 걸 정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인 볼프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프의 이런 견해는 때때로 국가의 권위를 도덕적 권위와 동일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작은 일상에도 국가의 권위는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는 영원히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잠시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들 모두는 크든 작든 자율적인 개인이란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아나키스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 책이 쉽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은 분명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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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하나


- 황규관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 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출처 : 황해문화. 2001년 여름호(통권31호)



*



“어쩌면 우리는 /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는 황규관 시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했다. 난 삶이 별거 없다고 생각하는, 그야말로 나이브(naive)한 허무주의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보고 열심히 산다고 한다. 일을 좀 줄이라고 한다. 사람에겐 참 다양한 얼굴이 있지만 내게 열심히 산다고 평하는 이들은 아마도 내가 하는 일이 많고, 그 많은 일들을 꽤나 열심히 치르면서 살아내고 있다고 보여서 그러는 모양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허무주의자치곤 겉보기에 열정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기는 하다. 무정부주의도 허무주의 계열의 정치적 계파로 보는 이들도 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열심히 사는 인간처럼 보이는 건 언젠가도 말했지만 나에겐 사는 것이 괴롭고 힘든 일이라서 그걸 잊기 위해 열심히 몰입할 거리를 찾아내려는 내 노력의 소산일 뿐이다.


소멸의 반대말이 불멸이라면 불멸을 꿈꾸는 이들은 당연히 열심당원(Zealot)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열심당원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것을 전혀 소망치 않으니 사이비 열심당원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 말하는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라는 물음은 어쩌면 내가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모든 삶은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길 위의 인생(Life on the Road)’이다. 아무리 거창한 삶에게도, 또 비루한 삶에게도 소멸은 공평하다. 그 사실이 나에게 있어서도 역시 빛나는 희망이다. 내가 지금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불멸을 꿈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소멸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망각하기 위한 것이다. 삶을 모르기에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공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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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권혁범, 삼인(2004)



"무인도를 꿈꾼다"는 말 속에는 단지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은 아닐 게다. 그 말엔 존 레논의 소박한 무정부주의 찬가 "Imagine"의 노랫말처럼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서의 "천국"도, 딛고 올라서야 할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 오는 "지옥"도, 우리를 옭죄는 "국가"도, 탐욕을 부추기는 "소유"도 없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담고 있다. 나 하나쯤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해서 세상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일탈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경우에만 아름답고, 즐거운 상상일 수 있다.

그 누구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공안기관 요원들에게 끌려가 욕조물을 흠씬 들이키다 목이 눌려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박종철). 그 누구도 민주주의와 직선제 개헌을 외치다 날아온 최루탄에 두개골이 함몰되어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끝끝내 숨을 거두고 싶어하지 않는다(이한열). 그 누구도 남편에 의해 홍콩의 작은 아파트에서 목졸려 숨지길 바라지 않는다. 더군다나 죽임 당한 뒤에 북에서 내려보낸 여 간첩으로 몰려 남은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길 바라는 일은 없다(김옥분). 그 누구도 이라크에서 길을 가다 자동소총에 난사당해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간신히 생존해서 귀국한 뒤에도 여전히 걷지 못하는 몸으로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오무전기 노동자들). 그 누구도 피납되어 살려달라는 애절한 호소를 무시당한 채 목이 잘려나가는 고통 속에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김선일).

더군다나 국가라는 추상적인 민족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인 희생이 아닌 타의에 의해 억울하게 맞이하는 죽음 같은 것은 원치 않는다. 죽은 뒤에 아무리 열사가 되고, 애국자가 되고, 순교자가 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의 책임 -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이야기』에서도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로마인에게는 종교도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는데 기독교의 침투로 말미암아 로마의 시민의식이 붕괴되어 로마인의 특성인 실용적인 기풍과 전투 의지를 약화시켜 그 결과 로마가 붕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로마라는 국가 자체를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부인하고 모든 영광을 신의 것으로 돌렸으므로 - 이라는 역사가들의 논리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정의를 빼버리고 크게 보면, 왕국이 범죄집단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범죄집단도 조그만 왕국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범죄 집단은, 한 지도자의 지휘 아래에서, 협약에 따라 약탈품을 나눠 가지는 결사체에 의해 묶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만약 이 악행집단이 부도덕한 무리들로부터 많은 지원자를 획득하여 영토를 획득한 후 거점을 구축하고, 도시들을 탈취하여 사람들을 복속시킨다면, 그 집단은 공개적으로 그 자신을 왕국이라고 사칭하고, 침략의 비난이 아니고 정당성을 획득하여 그 왕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로잡힌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한 재치있고, 사려깊은 대답을 보자. 왕이 그에게 자신에게 대항할 때의 네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해적이 대답하기를 '세상을 정복할 때의 당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배로 그것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와 해적 집단 사이에는 규모의 차이를 제외하고 도덕적인 차이는 없었다. 두 집단 모두 성공을 위해 내적 조화와 조직에 의존하고,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취하고 파괴하는 그들의 능력에 의해 성공여부를 평가받는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체첸을 향한 러시아의, 이라크를 향한 미국의 행위를 보라.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일컬어 국가테러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권혁범의 저서
"국민국가로부터의 탈퇴"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국가주의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땅의 불행한 국민들,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 혹은 이에 저항할 기력을 잃은 지식인들(혹은 중독되어 있는)에게 향하는 적절한 예방백신, 해독제 구실을 한다. 

립셋의 정의에 따르자면, 지식인이란
"문화, 즉 예술, 과학, 종교를 포함하는 상징세계를 창조하고, 배분하고, 적용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물질세계와 구분되는 정신세계의 창조자이자, 전파자이며, 실천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혁범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지적인 저술 행위와 실천으로서의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는 한 ‘비판적’ 지식인이, 우리 사회와 인간에 대해 그 나름의 이해와 소망을 담은 통찰이자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개인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국민적/민족적 정체성"에 의한 것이다. 이런 국민적 정체성, 국민됨으로 사유하기는 다른 모든 정체성을 종종 압도해버린다. 현실정치의 테제인 "국가안보"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이를 위해 국민이라 불리는 집단이면서 동시에 해체해보면 개인일 수 밖에 없는 근대적 개념의 개인이 지닌 기본적 인권을 유보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근대성과 더불어 식민적 요소들, 전근대적 질서들이 혼재해 있다. 국민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기준 속에는 이렇듯 전근대적 가부장제, 혈통주의를 품는다. 국가라는 상상공동체는 종종 국경이 아닌 단일민족 신화와 같이 혈연에 의해 규정된다.

국가주의는 민족주의와 만나고, 민족주의는 보수와 진보라는 양 진영 사이에 다리를 놓고, 이 둘을 묶어주는 최소공약수가 되어준다.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반미민족주의는 종종 국가주의의 우산 아래에서 행복한 밀회를 즐긴다. 친미와 반미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하나의 회로판에서 신호
(사안, 사건)에 따라 서로 도체가 되었다가 부도체가 되는 반도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국익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다른 모든 개별적인 보편을 능가한다. 권혁범의 문제의식은 탁월하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몇몇 요소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단지 이 책의 저자 권혁범만이 풀고 해결해나가야 할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우파 지식인들
(지식인은 결코 하나의 성향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에 대해 쏟아내는 비판과 동일한 강도의 비판을 마음속으로 동의를 보내는 지식인들에게도 보내야 한다. 지식인은 "권력(특히 근대국가), 시장(좁게 보면 지식시장), 여론(공론공간)" 사이의 긴장을 통해 자리매김되기 때문이다. 권혁범의 국가에 대한 비판은 그가 한동안 속해있던 "당대비평"의 문제 제기들 "우리 안의 파시즘"과 연결되어 있다. 권혁범의 비판들에 대해 구구절절이 다 옳다고 외치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허탈하기 쉽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우리가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권혁범의 국가, 권력, 집단에 대한 비판은 본질적으로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도달하게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토피아"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권혁범의 비판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그의 근본주의적 비판은 더욱더 공허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국가주의와 파스즘으로 흐를 수 있는 집단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 있지만 그것을 현실변혁의 동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설령, 현실변혁의 동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이 크롬웰의 신성정치화될 가능성(즉, 또다른 폭력)이 열려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가 빠질 수 있는 공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논리적 프로그램만을 따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UN의 보고에 의하면 1991년 냉전해체 이후 2001년 9.11 이전까지 전세계 약 45개 지역에서 57번의 주요 분쟁이 발생하였다. 분쟁의 결과로 36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이 희생당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시기에 일어난 분쟁의 최대 희생자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고, 이들 민간인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분쟁의 또다른 특징들은 그것이 국가간의 분쟁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해체에 따른 국가권력의 부재상황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적인 국가주의, 국민주의를 회피할 필요는 여전히 인정된다 할지라도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명과 권리,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공동체의 존재의 필요성이란 고전적인 명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권혁범의 비판적인 주장들을 개인적인 차원의 도덕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민족 단위, 국가 단위의 도덕으로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어려운 까닭은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고전적인 명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장 자끄 루소의 고전
"사회계약론" 의 세계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권혁범의 주장이 현실적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근대 국가의 역할 자체를 부인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이 어느 지점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하며 공동체를 재구성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유럽공동체의 출범과 같이 민족에 기반한 근대적 국가개념의 해체와 새로운 물적 토대에 기반한 지역 공동체의 출현은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근대화의 숙제에 우리는 여전히 발목을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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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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