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상, 대중 : 문화에 관한 8개의 탐구 ㅣ 박명진 외 / 한나래 / 1996년 12월




1996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새로운 키워드들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이상 혁명도, 민중도 아닌 문화와 일상, 대중이었다. 현실사회주의라 명명된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단순히 맑스 원전의 번역만 뒤늦은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새로운 트렌드에도 매우 뒤늦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마치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 비행체에 지구의 컴퓨터 바이러스를 심어 일거에 무력화시킨다는 발상처럼 일순간에 대한민국 사회는 포스트모던이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글쎄,
이 책은 내가 앞서 말하고 있는 서론 격의 이야기처럼 그리 거창한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학에서 새로운 문화이론을 고민하고, 가르쳐야 하는 8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진행했고, 그들이 공부했던 서구의 문화이론가들, 학자들의 텍스트를 우리 말로 번역해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처음부터 교과서라는 텍스트의 본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책이고, 나 역시도 그런 텍스트로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피에르 부르디외,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해 아는 이들에게는 그들 못지 않게 유명한 니콜라스 간햄, 존 피스크 그리고 미셀 드 세르토 등의 논문 8편이 번역,수록되었다.


미셀
드 세르토의 이름 앞에 '그리고'를 붙인 까닭은 내가 알기로 세르토의 논문 가운데 우리 말로 번역된 유일한 글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이 책은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크게 보아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 격에 해당하는 박명진 선생의 글 "문화 연구 - 새로운 시각의 모색을 위하여"부터 "문화에서 탈문화로 - 스티븐 크루크, 장 파컬스키, 맬컴 워터스""부르디외: 문화 자본과 아비투스"는 문화 편에 해당하는 것이고, 부르디외의 "예술적 취향과 문화 자본", 니콜라스 간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문화 사회학: 입문", 드 세르토의 "일상 생활의 실천", "도시 속에서 걷기" 등은 일상 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존 피스크의 "팬덤의 문화 경제학", 존 클라크, 스튜어트 홀, 토니 제퍼슨, 브라이언 로버츠의 "하위 문화, 문화, 그리고 계급", 토니 베넷의 "대중성과 대중 문화의 정치학"은 대중 편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고, 내 개인적인 정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내 믿음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 문화연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 구조, 혹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서유럽 좌파의 고민과 모색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바대로 문화인류학적인 방법론과 본인들은 때때로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거기에 덧붙여 문화연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독특한 문학문화(Literacy Culture)와 좌파 역사학의 영향이 합쳐져서 그들만의 독특한 연구 방법론 혹은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사실 문화연구는, 문화라는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그 연구대상의 폭넓음으로 인해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치명적인 악몽이며 기존의 아카데미 시스템 속에서 이미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는 학자들에겐 사기꾼 집단처럼 보일 수 있다.


신문방송학,
비판커뮤니케이션학의 한 분파일 수도 있고, 인문학적으로는 문화인류학, 문화사학의, 또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의 한 지류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화연구는 어쩌면 실제로도 흘러가는 유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한동안 국내 소장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직종 가운데 하나가 다소 뜬금없이 출현한 '문화비평가'란 것이었다. 역사적 뿌리가 없는 비평 행위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반증하기라고 하는 양 1997년 IMF 외환 대란이라는 된서리를 맞고 나서 문화비평가라는 직종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직전에 나와서 현재까지 여러 대학에서 문화연구 혹은 문화이론의 제반 분야들을 공부하는 교재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읽노라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엄청난 문화환경의 변화라는 것이 다각도로 실감난다. 하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예시로 들고 있는 급변하는 문화환경들이 이미 오래전의 급변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의 저자들이 고민하는 문화연구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사실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였다(우습게도 나는 윌리엄스가 부르디외 보다 훨씬 전 세대 사람으로, 느낌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은 영국의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가(문학비평가)로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의 좌파이자 구조주의 문화연구가로 활동한 사람인데,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니콜라스 간햄과 함께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가 어떻게 정치경제학과 문화론적인 연구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통합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들 아는 이야기겠지만 맑스는 고전 경제학과 결별하는 방법으로 경제학에 정치학(혹은 사회학)을 도입한다. 당대 최고의 뛰어난 문화적 교양인이기도 했던 맑스는 그러나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진술(다들 아시다시피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를 제외하고는)을 거의 공백 상태로 남겨놓는다. 그런 점에서 맑스 이후 맑스를 계승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영국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여러 차례 맑스와의 결별을 시도했으나 끝끝내 결별하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그건 지금 우리가 그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흡사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존재하고 있으며, 변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주체성을 밝히는 도구로서도 여전히(낡기는 했으나)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문화연구가 영원히 정치경제학과 결별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문화연구의 본질은 결국 "문화+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진술하지 못한 부분들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전지구적 피라미드의 하부구조가 어떻게 상부구조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의해 통제되는지, 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얼마나 우리의 숨통을 옭죄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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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 문명 -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문명(civilization)은 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키비스(civis)' 와 도시를 뜻하는 '키빌리타스(civilitas)' 에서  유래한 말이다. 문화비평가 김창남은 "문화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뛰어난 정수로 본다면, 여기에는 예술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통한 정신적 완성의 추구라는 열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종종 문화(culture)와 문명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으로 파악되거나 문화의 특수한 한 형태로 파악되어 서로 연결되거나 혼용되어 사용되는 등 실제 사용에 있어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문화가 정신적인 발전 상태(가치)를 의미하는 말이라면, 문명은 물질의 발전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인류학의 영향으로 문화 가운데 도시적인 요소, 고도의 기술, 작업의 분화, 사회 계층 분화를 갖는 복합문화(문화의 복합체)를 큰 단위로 파악한 총체를 문명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권용립 선생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마침 가지고 있던 이 책
"미국의 정치문명"에 저자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와 미국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니, 나의 서재에는 미국 관련 서적들이 책꽂이 두어 칸을 빼곡이 채울 정도가 되었다. 하워드 진, 리처드 O. 보이어, 노암 촘스키, 이냐시오 라모네, 리오 휴버만,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외국 학자들과 국내 학자들의 책들이 그것이다. 책 많다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 같은 책들과 권용립의 이 책은 상당히 다른 책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책들이 미국의 역사, 경제, 사회, 외교 정책 등등에 대한 책이라면 권용립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의 정치 문명에 대해 규명하고, 분석하려 한 책이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1880년대 후반에 촬영된 서울의 미국 공사관 모습(출처.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권용립은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것은 1882년이지만 미국이 한반도의 정치적 운명과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부터다. ...<중략>... 해방 이후의 한국에 엘리트를 공급하고 재생산하는 본거지였으며, 한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아본 사람들이었고 미국과 어떤 종류든 내연의 커넥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미국은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타인의 나라'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피안'이었고 '세계'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본문 29쪽>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에
"이산 가족"이 존재했다면,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인 1970년대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 안에는 "이민 가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민족 공동체인 북한보다 심정적으로 미국이 더 가깝게 여겨지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닌 내연의 깊은 속사정이 있었던 거다.  


▶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대표 신헌과 미국 해군의 로버트 윌슨 슈펠트 제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 1876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에게 고종이 미국의 위치를 묻자 김기수는
“서양의 서쪽, 동양의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두리뭉술하게 답해야할 정도로 잘 알지 못했던 먼 이역의 나라 미국은 그저 오랑캐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받아 온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단박에 뒤집어진다. “예의로 나라를 세웠기에 남의 땅과 백성을 탐하지 않으며, 굳이 정치에 간여하지도 않는다.”는 미국에 대한 일방적 찬사가 가득 담긴 이 책은 러시아의 침략성을 과장되게 표현하면서 이를 막고자 한다면 미국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약소국 편에 서는 정의롭고 공평하며 부강한 나라, 미국의 이미지가 우리 위정자들의 뇌리에 새겨진 건 아닐까?


서유럽과 다른 정치 문명 - 미국


권용립은 책 머리에서 서구적 비전으로 바라볼 때, 대개의 학자들 슈펭글러, 소로킨, 토인비 등의 문명론에서 서유럽과 미국을 동일한 문명권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최근 우리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충돌' 역시 미국을 별도의 문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선 토인비 등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권용립은 미국과 서유럽의 정치 문명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 별도의 문명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미국이 서유럽의 정치 문명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농축된 기억의 유무이다.


역사시대의 긴 세월을 수많은 굴절과 변화 속에서 보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국가를 설계한지 불과 150여년 만에 세계 최강의 공화국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해냈다. 서유럽 국가들이 상상의 공동체든, 아니든 간에 실제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그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국가인데 반해 미국은 먼저 국가와 이념을 설계해놓고 그런 뒤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의 이민을 통해 건설된
(기억을 제조해낸)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국가 설계 과정을 담당한 담론이 미국의 건국 신화가 되고, 이것이 미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즉, 이것이 미국의 이데올로기이고, 미국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현재의 미국 속에서 정치적 응집력을 제공해주는 담론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재의 미국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므로, 이데올로기를 제거할 때 미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


저자는 미국의 역사와 역사학의 계보를 엮어내면서 19세기 미국 애국주의 역사학의 대부 뱅크로프트의 주장을 보여준다. 뱅크로프트는 미국을 전 세계 문명을 융합한 결정판으로 미화하며 미국의 건국 과정을
"이탈리아의 콜럼버스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가 합작한 신대륙 탐험과 발견, 프랑스가 지원한 독립전쟁, 인도에 기원을 둔 영어, 팔레스타인에 그 뿌리를 둔 기독교, 그리스 문명에서 기원한 문화, 로마에서 기원한 법, 영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대의 제도,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연방제 원리와 사상적 관용의 정신"을 하나로 녹여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로 묘사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 가 의미하는 상상이 만약 담론에 의해 구축된 고도의 상징 체계를 의미한다면, 정치적 담론과 정치적 자의식의 산물이란 점에서 미국 국민(American Nation)은 이 정의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전세계의 인권과 자유를 노래한 측면에는 이런 미국인들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즉, 미국의 국가 정체는 인류의 정의를 담보한 가장 보편적인 정치 체제이기 때문에 타자(민족, 국가)들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식 문명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현대 외교사를 살펴보면 비합리적일 정도로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모두 '도덕주의적 외피'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다. 실제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power politics)'를 추구하는 현실주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끊임없이 교의
(doctrine, 이 말은 정치학의 주의, 공식 외교 정책을 뜻하지만 그보다 먼저 종교의 교의(敎義), 교리를 의미한다)를 선포하면서 미국의 외교를 정당화하려 한다. 물론 역사 이래 모든 강대국들이 자국의 힘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써왔고, 이런 선민 의식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계도할 소명을 타고났다는 확신 속에 극단적 개입주의의 함정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대륙의 타락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도덕적 국가로 태어난 미국이야말로 국제 정체 세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도덕을 솔선수범한다고 믿었다. 즉, 다른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자격과 능력을 지녔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이런 자의식은 제국주의 혹은 사회진화론적이다. 거기에 캘빈주의적 소명의식이 곁들여지면서 미국의 강자중심주의는 다시 도덕주의적 절대주의가 된다. 즉, 미국의 외교적 행위
(전쟁을 포함한)는 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부합하는 행위이지만, 미국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국제 정치 행위는 반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구세주의 나라(Redeemer Nation), 해방자로서의 힘, 세계의 십자군"으로 표현된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독립전쟁 직전의 잠시를 제외하곤 봉건성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미국은 태생부터 자유롭게 태어났기에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봉건 잔재와 투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스스로가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역사 - 봉건성과 싸워야 하는 나라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바깥 세계의 소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된 지리적 혜택 등으로 인해 마치 배부른 부자가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절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의 체제를 얼마만큼 모방하는지 그것을 척도로 해서 다른 나라들을 평가하는 경향으로도 알 수 있다.



결어 -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을 버려라!


권용립은 정치 문명으로서 미국의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결국 하나의 지적 구조물(intellectual construction) 즉,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미국 국민 개개인의 개별 정신 영역에 일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다수 미국인들이 믿는 그 무엇, 미국 국민이나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의식에 편승한다고 본다. 그러나 먼저 미국과 같은 방식으로 건국된(설계된 국가)의 정신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설계의 이념을 밝혀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의 얼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미국의 독자적 정치문명을 이해하고 그 집단 정신의 내면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래야만 브레진스키나 헌팅턴
(혹은 조지 W. 부시, 라이스와 같은 네오콘)이 보여주는 너무나 미국적인 사고, 즉 한국을 미국의 파트너가 아닌 외교적 액세서리로 보는 브레진스키의 태도나 미국의 어떤 정책도 한국의 자유를 무조건 신장시킬 것이라는 헌팅턴의 아전인수격 메시지에 충격을 받거나 분노하는 새삼스러운 일도 없어질 것이라 말한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하다가는 다시 배신감을 토로하는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이 사라져야만, 우리는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환멸조차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거울, 기대에 따른 미국의 모습이지 실재하는 미국의 모습이 아니란 것이다.


▶ "자, 소망의 거울이 우리 모두에게 무얼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설명해주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보니까 말이다. 도움이 됐니?"
해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걸 보여줘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구나." 덤블도어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넌 네 가족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네 주위에 그들이 서 있는 걸 보았고, 론 위즐리는 항상 형들에게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형들보다 더 잘되어 혼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본 거지. 그러나 이 거울은 우리에게 지식이나 진실은 보여주지 않는단다. 사람들은 이 거울이 보여주는 게 진짜인지 혹은 심지어 가능한지조차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이 본 것에 넋을 잃거나 미쳐서, 이 거울 앞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냈지.
이 거울은 내일 다른 장소로 옮겨질 예정이란다, 해리. 그러니 이것을 다시는 찾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그리고 만일 이 거울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게다. 꿈에 집착해서 현실을 잃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에는 "소망의 거울"이 등장한다. 주인공 해리 포터는 마법의 학교에서 소망의 거울을 발견하고 그 앞에 선다. 해리가 찾아낸 거울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이 소망하는 행복한 기억들만을 보여주는 거울에 빠져 인생을 허비해버린다. 해리가 거울 앞에서 선지 삼일 째 되는 날 덤블도어 교수가 나타나 말한다. "너도, 앞서 다녀갔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소망의 거울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한 게로구나. 꿈에 집착해서 현실의 삶을 잊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이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 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지금 우리들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 혹은 그 거울에 비춰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혹시 그와 같은 것은 아닐런지....


* 권용립 교수의 "미국의 정치문명"과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은 지금껏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우리나라 학자의 미국학 저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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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20세기의 역사 - 마이클하워드. 로저루이스 외 | 차하순 옮김 | 이산(2000)


이 책은 지난 1998년 영국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20세기의 역사 "The Oxford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를 번역한 책이다.  


이런 류의 책들에 대한 독후감을 하기 위해서는 무척 많은 역량을 필요로 한다. 이유는 일단 책 자체가 다루고 있는 하중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분량 역시 만만치 않은 탓이 크다. 일단 그 묵직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목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목차는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로드맵이자, 그 책의 구조를 보여주는 가장 합리적인 설계도인 셈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중복 출판의 악명이 높은 곳이라면 목차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진다. 만약 같은 책이 중복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서 좀더 좋은 책을 고르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목차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목차가 상세하게 되어있고, 찾아보기가 잘 되어 있는 책일수록 번역의 질이 전반적으로 높은 책일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잡소리가 길었는데, 굳이 그런 이야기를 서두에서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유는 이 책이 그런 점에서 질적으로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크게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20세기의 구조'에서는 20세기를 규정할 수 있는 성격들을 모두 7개 단락으로 나누어 풀고 있다. 물론 그 면면이 20세기의 구조를 밝히는데는 과부족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하나는 이 책이 기술된 시점이 20세기 말엽의 현실사회주의권 몰락의 역사적 결과를 바라보며 기획되어서 나토의 유고공습 시점에 집필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책의 주요기술자들이 영미권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셋째는 이들의 시각이 실증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주된 관점은 영미적인 시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먼저 그런 세가지 사안들을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20세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또 한 권의 주목할 만한 책인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와는 극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대표 저자인 마이클 하워드 (Michael Howard)는 1922년 영국 출생으로 제 2차 시계대전에 참전하였고, 1946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여 이듬해인 1947년부터 1963년까지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1963년부터 1968년에는 전쟁사 석좌교수로 재직하였다(마이클 하워드의 책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이외에도 "평화의 발명" 등이 있다). 그외에도 로저 루이스, 윌리엄 맥닐, 197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 우리에게도 중국사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조너선 스펜스(그의 책은 국내에 번역 출판된 것이 많은 편이다.), 아키라 이리에, 사회학자 랠프 다렌도르프 등이다. 이 책은 단지 저자들이 유명한 것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것을 번역해낸 연구자들 역시 국내의 저명한 학자군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우선 대표 번역자로 서강대 명예교수인 차하순 선생을 비롯해서 경제쪽의 인하대 경제학과의 김진방, 중동분야의 권위자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선생 등등 그들이다. 이외에도 라틴 아메리카 부분을 번역한 서성철 선생 등도 모두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 그룹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도 과연 최고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말했던 이 책의 세 가지 특징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념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실증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미적 시각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이 책에서 구소련과 중국,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르나 아주 다르지는 않다는 식으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대해 쓰여진 현존하는 역사서 중에서 '아직까지는' 이 책을 열 손가락 안에 꼽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들을 비롯해서 근현대사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듯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20세기는 기왕에 종료되었으나 지난 세기인 19세기가 역사적으로는 과연 언제 종료되었는가를 규정짓는데 여러 의견이 있는 것처럼 물리적인 21세기는 시작되었으나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20세기는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고 볼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이 말하고 있는 20세기는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과거의 관점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 의한 해석의 통로들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것은, 사건 자체로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것을 통해 19세기의 물리학자들이 더이상의 과학 발견은 없다고 믿었던 자연상의 발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주었고, 그로부터 새로운 20세기의 물리학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20세기와 아직까지는 너무나 밀접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 20세기를 역사적으로 규정짓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종료된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으로부터 양차 세계대전, 스페인, 러시아 혁명과 대공황, 냉전에서 공산주의의 붕괴 그리고 홍콩의 중국 반환과 동티모르 사태 등 정치적인 사건의 맥락에서 혹은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에서 DNA  복제 문제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세계화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2000년에 나왔다면 틀림없이 1999년의 세계화에 대한 전세계 민중들의 뜨거운 반대 함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99년 시애틀 전투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도 21세기가 20세기보다 희망적일 것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그것은 앞으로 우리들의 삶으로 체현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20세기는 이미 지난 과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세기는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현재 지속형으로서 존재하며 당신과 나, 우리 지역사회와 대한민국, 그리고 나아가 한반도와 동아시아, 세계 문제에 계속되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신의 20세기를 찾아가는 지적인 여행을 펼치는 것은 어떠한가?
이 책의 작은 재미 중 하나는 본문 사이사이에 배치된 120컷에 달하는 컬러와 흑백화보다. 또, 70쪽에 이르는 20세기 연표는 지난 100년의 흐름을 각 분야별로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는데,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제공하고 있는 연표를 만들 때도 참고하였다. 물론 전적으로 참고하지는 않았다.

끝으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고, 그와 더불어 번역에는 제법 문제가 많지만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도 함께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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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 |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 이경덕 옮김 | 까치글방(2000)

어떤 학자들의 이름은, 그리고 어떤 학자의 어떤 책들은 다른 이의 책을 읽다가 숱하게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 맑스의 원전(독어책을 말하는 건 아님)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딘가에서는 맑스가 이런 얘기를 했다더라.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이란 짤막한 논문을 읽지 않았어도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프레이저 역시 그렇게 정작 그의 저작보다는 인용된 문구를 통해 더 많이, 더 자주 만나게 되는 학자다. 종종 고전이나 명저를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의 막막함 속엔 그런 알맹이만 쏙쏙 빼먹고 싶다는, 직행하고 싶다는, 나는 앞서고 싶고,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숨어 있다. 

모든 질문 가운데 가장 어려운 질문은 예를 들면 이런 류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첫학기, 개강 때 교수의 간단한 설명이 끝난 뒤 의례적으로 갖는 질문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예를 들어 철학 시간이라고 하자.
"교수님! 철학이 뭡니까?" 라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같은 것 말이다. 그렇게 쉽게 말로 해서 정의되고, 알 수 있는 내용이라면 그 교수가 무엇때문에 머리가 반백이 되도록 철학이란 화두를 붙잡고 있겠는가? 가장 쉬운 질문인 듯 싶으면서도 그것이 가장 어려운 질문을 그 학생은 겁도 없이 던진 거다. 대개 이런 질문이 터져나온 강의실 분위기는 요샛말로 싸해진다. 

나는 한 인간의 사유가 발전해가는 건 도표의 곡선이 보여주듯 그렇게 우아한 상승 형태를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멀리서 피라밋을 바라볼 때 형태가 마치 사선을 그리며 올라가듯 보이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계단 형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인간의 사유가 발전하는 것이 맞다면, 그리고 그것을 가까이 바라보면 필경 계단을 놓고 하나하나 쌓아 올라가듯 하는 것이지 절대로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상승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독서란 것도 무수한 갈림길과 사잇길을 통한 실패의 미덕이지, 중요한 몇 권의 저서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이 저절로 체득되는 경로를 통하지 않는다. 많이 실패한 자만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자신이 몸소 체험하지 않는 한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는 건, 이 세계만의 미덕은 아닐지라도 이 세계의 확실한 율법이다.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의
"황금가지(The Golden Bough)"는 피해갈 수 없는 입구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출신인 프레이저는 리버풀 대학에서 한 학기동안 사회인류학을 가르친 것을 제외하곤 평생 케임브리지에서 살았다. 그는 E. 타일러, W. 스미스의 영향으로 인해 비교종교학에 관심을 가지고 1890년에서 1915년 사이에 13권에 이르는 "황금가지"를 저술한다.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The Illustrated Golden Bough)"의 서론에서 메리 더글러스(Mary Douglas)는 프레이저의 유년기에 대해 "아버지는 매일 성서의 한 구절을 가족에게 읽어주었지만...<중략>... 이 어릴 때의 체험은 평생 종교심에 대해서 존경의 마음을 잊지는 않았지만...<중략>...틀림없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가 그의 왕성한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프레이저는 인간과 같이 분노하고, 질투하고, 원한을 품고, 싸우는 신화에 감춰진 인간을 닮은 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들은 인간과 닮았으나 결코 인간은 아닌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품는 의도와 삶은 "
논리적이지 않으며 연관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프레이저는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는다. 그 시작이 바로 "황금가지"였다. 황금가지는 이탈리아의 작은 숲에서 시작된다. 디아나(아르테미스)를 모시는 성스러운 숲 가운데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나무 주위에는 핏발선 눈으로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손에는 누군가를 죽인 칼이 쥐어져 있다. 

그는 디아나 여신을 섬기며 나무를 보호하는 운명을 가진 사제였다. 사제의 지위를 갖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이전의 사제를 살해하고, 대신 사제가 되는 길뿐이다. 그 역시 후계자에 의해 살해될 것이다. 그 나무는 참(떡갈)나무로 황금가지는 추측컨데 그 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였을 것이라 한다
.(황금가지는 오비디우스의 시의 한 행에 붙어 있는 이야기라 하는데, 별로 주목하는 사람도 없는 이야기였다.) 프레이저는 "살해되는 신"이라는 테마를 위해 "황금가지"를 골랐고, 이를 연구하기 위해 전세계적인(심지어 우리나라의 사례까지도 포함해서) 사례들을 수집해들였다. 신이 백성을 위해 죽는다. 그것을 모방하여 죽음과 부활을 흉내내는 것이 토템이고, 제의다. 따지고보면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토템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다소 불경하게 들릴지라도)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삼일만에 부활하여 그후로 신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약속(New Testament)가 맺어진다. 미사(mass)의 성찬 의식은 이 약속을 반복적으로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셉 니덤의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 그렇듯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는 모두 13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다. 그런 까닭에 일반인이 이 책에 접근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 모두를 한 권으로 축약한 두 개의 판본이 있는데 하나는 1922년의 맥밀런판이고, 다른 하나는 1994년의 옥스퍼드판이다. 옥스퍼드판은 지난 2003년 한겨레신문사에서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 A Study in Magic and Religion)" 란 제명으로 번역 출간했다. "그림으로 보는 황금 가지"는 영국의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가 세이빈 맥코맥(Sabine McCormack)과 함께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170여 장의 도판을 곁들여 정리한 것이다(책 중간에 16쪽의 컬러도판을 수록하고, 본문에도 여러 도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반인이 읽기엔 가장 무리가 없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는 브라질 원주민들과 직접 생활하면서 지은 책이지만,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현장 연구를 통해 보완되지 않은 그래서 "안락의자의 인류학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어떤 점에서 제국 전성기 말엽의 영국제국이므로 가능했던 일이다. 참고로 칼 맑스가 "자본론"을 처음 펴낸 것은 1867년의 일이다. 두 사람 모두 대영제국 도서관의 덕을 보았다 할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네미의 디아나 신전으로부터 시작해서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 관해 축적된 문헌과 여행기, 지인들의 견문을 통해 "황금가지"라는 대저술을 남긴다. 그러나 프레이저의 연구는 무수한 비판 속에서 아니, 그런 비판들과 함께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이 분야의 살아있는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구는 전세계의 민간에 퍼져있는 전설, 신화, 민담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연구에 이용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 생존 방식을 전해준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비교인류학적인 연구는 칼 구스타프 융의
"집단 무의식"과 결부되면서 20세기 문학연구, 신화연구, 문화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제임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를 통해 인간의 역사는 마(주)술의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종교의 시대로, 그리고 다시 과학의 시대로 발전해갔다고 말한다. 모든 과학자의 원형은 사실 주술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 역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명저란 정답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명저는 더 많은 오솔길을 일러주고, 독자로 하여금 더 많은 자극을 통해 미로의 입구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호기심에 못이겨 뛰어들게 만드는 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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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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