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그림 여행』 - 스테파노 추피 지음 | 서현주 옮김  | 예경


세계적으로 이름난 출판사란 것이 있다. 프랑스의 갈리마르, 일본의 이와나미 같이 종합출판사로 명성을 얻은 출판사가 있는가 하면 예술관련 서적을 전문적으로 출판하여 명성을 얻는 전문출판사도 존재한다. 프랑스의 라루스, 영국의 파이돈, 독일의 타쉔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명성을 얻은 출판사들이다. 이것을 그대로 한국에 대입해보면 우리의 출판 환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데,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를 대변할 만한 여러 키워드들이 있었지만,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가 뭐래도 "한류(韓流)"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란 말은 그 출처가 어디인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수식하는 말이었다(도대체 이렇게 시끄러운 나라를...그래서 최근엔 '다이나믹 코리아'를 국가이미지로 추구하는 건가) . 영국하면 신사의 나라, 프랑스하면 예술의 나라, 독일하면 철학의 나라, 오스트리아하면 왈츠와 모차르트가 연상되듯 국가에는 국가이미지란 것이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노벨문학상의 향배를 가늠하며 한국 작가들의 수상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만, 문화부 기자들이라고 그 속사정을 몰라서 한국 작가들의 수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 게다. 무엇이 문제인고 하면 제 집안에 황금송아지가 있어도 이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 문제이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된 것들이 태부족인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70년대부터 정부차원의 국가 이미지 홍보 사업을 벌여왔다. 명칭은 해외공보관, 해외홍보원, 해외문화원 등으로 변경되고, 분화되어 왔지만 그 목적 자체는 같은 것들이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홍보하여 괜찮은 국가의 이미지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도, 애써 격상시킬 필요도 없이 냉정하게(이 말은 또 얼마나 냉정하지 못한가?) 바라보려는 노력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번번이 민족감정에 휩쓸려 세계 속에서 제대로 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시아의 작은 경제 강국, 민주화 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나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이 폴란드,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란 사실을 안다. 칸 영화제가 어느 나라에서 개최되는지도 알고, 영국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연합 왕국이란 사실도 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도 국가이미지 홍보를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명사들을 선정해 국가이미지 홍보대사로 삼거나 각종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미지를 개선하고, 홍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Frankfurt Buch Messe)이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TIBE, 볼로냐, 미국과 함께 세계 4대 도서전시회로 손꼽히는 행사로 오는 10월에 개최되는 이 도서전에서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선정되었다. 우리의 국가이미지, 출판수준과 문화를 알리는데 더할 나위없는 호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이 행사 준비에 여러가지 차질을 빚고 있어 주위의 염려를 사고 있다. 우선 이강숙 조직위원장이 지난 8월 사퇴한 이후 11월까지 수개월여를 공석으로 두었고(다행히 김우창 선생이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그나마 행사 준비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55개 사업을 48개 사업으로 축소, 예산도 265억원에서 237억원으로 축소) 애써 마련된 좋은 기회를 놓칠 위기에 처했다.

 

예경 출판사가 미술 출판이라는 외길을 28년간 걸어왔다는 것은 성과는 나중에 좀더 고민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축하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예경은 외국의 출판물을 번역 출간하는데만 애쓰고 있는 그런 출판사가 아니란 점에서 역시 격려받을 만하다. 예전에 서평을 올린 바 있는 박용숙 선생의 "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가 있고, 강우방의 "미의 순례", 김영나의 "20세기 한국 미술", KOREAN ART BOOK 시리즈로 "금동불"부터 "탑파"에 이르는 우리 미술의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미술 분야의 책을 내는 것은 출판의 다른 분야에서도 매한가지 고충이긴 하지만 특별히 공은 더 많이 들어가고 상대적으로 실속은 적은 편이다. 도판 하나, 사진 한 컷 이용하려 해도 저작권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야 하고, 이미지를 많이 다루는 책의 특성상 일반 인쇄용지말고, 고급지를 사용해야 하며, 책의 판형도 고려해야 하고, 컬러인쇄다 보니 인쇄 감리에도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미술 분야에 대한 독자층이 넓은 것도 아니다 보니 책의 가격 산출에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의 그림여행"의 정가 36,000원인데, "미술출판 28년의 한 길! 예경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특별가로 드립니다"란 명목을 달아 19,800원의 임시특별가로 판매하고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이야 출판사 관계자가 아니니 알 수 없다. 문제는 36,000원이든, 19,800원이든 이 책이 그 값을 하는 책이라면 좋은 평을 들을 만한 것이고, 아무리 값이 싸도라도 제 값을 못하면 좋은 이야기를 듣기 힘들다. 그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 책은 좋을 평을 들을 만하다는 거다. 문제는 이 책의 용도인데, 만약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읽고 싶다면 그와 관련한 좋은 책들은 이미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이 방면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E.H.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거나, "생각의나무"에서 출간한 "라루스 서양미술사" 시리즈를 읽는 것도 좋다.

 

문제는 우리의 독서습관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만원에 가까운 책값을 지불했으니 이 책을 통해 본전을 빼야겠다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책날개에 적힌 글에 따르면 "천년의 그림여행"에 수록된 그림들을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이론서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어찌보면 더더욱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 서양회화 1,000년의 역사를 이해하겠다는 욕심은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이다. 제 아무리 속도가 최상의 덕목으로 칭송받는 시대라 할지라도, "하룻밤에 읽는, 한 권으로 끝장내는" 류의 선정저인 제목 뒤에 따라오는 건 중국사, 미술사, 과학사 어쩌구하는 묵직하기 이를 데 없는 분야들이기 십상이다. 그런 책을 읽고, 그 분야에 대해 '다 알았소' 할 욕심이라면 광고와 상관없이 그것이 도둑놈 심보다. "천년의 그림여행"은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명확한 한계를 이미 노정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한계 속에서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으며, 한계를 보충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우선 이 책은 1,000년이란 시간적 제약을 두고 서양 회화를 살펴본다. 서양미술의 역사가 어찌 1,000년밖에 안되겠는가? 거기에 서양미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조각과 건축, 공예 등을 제외한 회화 분야에만 치중하겠다고 말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서양회화의 역사다. 시간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통사(通史)의 구조를 택하지만, 그 안에 140개의 개별 주제와 화가들을 나눠 담고, 다시 이를 본문페이지 상단에 지역별로 다른 색상을 인쇄해 구분해볼 수 있게 한다. 지역별 구분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저지대국가(벨기에, 네덜란드 등), 중부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영미, 국제적인 흐름(사조)'으로 세분화하고 있다. 거기에 본문을 보조해주는 부록으로 "위도와 경도"라 해서 화가들을 지역과 시대로 구분해 입체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중요한 회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지를 구성해 좀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본문들은 대개 펼친 페이지 형태로 구성해서 한 명의 화가를 소개함에 있어 그 작가의 시대적 위치(사회적 영향이나 예술사적 위치)와 평가, 간략한 작품세계를 알리고, 대개 메인 컷 한 두 개와 서브 컷 서너 개를 삽입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고야와 같이 대가에 속하는 작가들에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예를 들어 본문 51쪽에서 소개하고 있는 "슈테판 로흐너(독일)"에 해당하는 색은 중부유럽과 스칸디나비아를 뜻하는 노란색 마크가 페이지수를 알리는 숫자 상단에 있고, 그의 작품 3컷과 작자 미상의 그림 1컷이 소개된다. 거기에 로흐너 작품의 사인처럼 사용되는 특징인 선명한 파란색이 두드러진 천사의 색채에 숨겨진 비밀을 알려준다(슈테판 로흐너는 선명한 파란색을 내기 위해 당시로선 순금보다 훨씬 비싼 청금석을 염료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보라색이 고귀한 귀족이 입는 의복 천에 주로 사용된 까닭 역시 보라색 염료의 당시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던 것이 한 이유라는 사실을 알면 천사가 순금보다 비싼 물감을 사용하는 건 당연할지도). 물론 이 정도로 이 작가에 대해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되길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로흐너에 대해 이 정도 상식과 교양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간 서양미술사(대개의 미술사 책에는 충분한 도판이 수록되지 않는 편이다)를 통해 이름만 접했거나 처음 이름을 접하게 된 화가들이 대다수이다. 전세계적으로 서양미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시기는 인상주의 시대로, 이 시기를 전후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보의 양 자체가 빈약하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한 서양회화사 입문서 혹은 교양서로서 적당한 난이도와 풍부한 도판을 지닌 책으로 별 다섯을 충분히 줄 만하다. 물론 전체 400쪽에 근접하는 분량의 책이다보니 오탈자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참고로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오탈자를 찾아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으니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에 대해선 논할 자격이 없음을 밝혀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부록이나 찾아보기 등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으나 이 책의 목차가 좀더 성의있게 만들어졌다면 하는 것이다. 이 정도 정성을 들여 만든 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목차가 달랑 4개의 구분 '여행에 앞서, 천년의 그림여행, 화가연표, 찾아보기'으로는 천년의 여행을 즐겁게 시작하는 초입치곤 너무 빈약하다.

 

끝으로 예경출판사의 28년 걸어온 길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앞으로도 좋은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획을 많이 하는 훌륭한 출판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이 책을 잘 읽는 뾰족한 묘수가 있을리 없겠지만 가격대비 효용성이란 측면만 놓고 보자면 일단 한 권 구입해놓고 침대 머리맡에 놓고 잠들기 전 차근차근 그림 중심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괜찮은 서양미술사랑 같이 펼쳐놓고 "천년의 그림여행"이랑 비교해가며 읽는 것도 좋은 여행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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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 - 박용숙, 예경(2003)


가끔 독자를 압도하는 느낌의 책이 있다. 이 책의 전체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현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대가 위치한 지점으로 다가올수록 점점 더 이야기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현재로 다가올수록 비평은 비평이기 이전에 일종의 예언서가 되어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미술사 이야기>의 속편격이다. <한국미술사 이야기>가 선사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는 한국미술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이후부터 당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의 저자 박용숙 교수의 글을 예전에 읽어 본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에겐 낯선 인물이란 것이다. 나는 웬만하면 독후감에 그것도 국내 저자의 학력을 언급하는 것을 꺼려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경우엔 저자에 대해 무척 궁금해졌다. 그는 중앙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동덕여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활동하는 미술평론가이다. 1935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70세이다. 거기까지 알아보고 난 뒤 난 입이 쩌억 벌어졌다. 세상에나.... 나는 저자가 무척이나 젊은 사람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야 나는 이 책이 어째서 날 그토록 압도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책(문학작품을 제외한)은 저자의 말이 매우 중요하고, 그 책의 모든 것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그것은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의도, 그리고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는지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의 말이 목차나, 추천의 글 따위가 주는 것보다 그 책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책 머리에>란 글을 통해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이 책의 중요한 입장들을 설명해주고 있고, 책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동양화 소묘>란 글을 통해 미술비평가로 등단한다. 이후 30여년간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으나 비평집 한 권 없다고 한다. 이 책을 살펴보더라도 그렇고, 인터넷을 통해 박 선생의 그간의 비평 글들을 읽어보니 본인이 말한 것처럼 "무능과 치부"를 드러내 그것을 부끄러워 해야 할 성질의 비평,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겸양일까? 박 선생의 말씀은 이렇다. "우리 미술의 궁핍한 자화상을 드러낸다는 생각에 더욱 곤궁스러울 뿐이었다"는 것이다. 거기엔 우리 현대미술 100년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한 세기 동안 고민하면서 쌓아올린 현대 미술의 열매를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함께 담아내려고 했으니 고민스럽지 않겠는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문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문화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조직이며, 한 인간의 내적 자기에 대한 훈련이고, 한 인간의 인격에 대한 통제이며, 보다 높은 수준의 자각의 획득이다." 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들 자신의 불구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의 얼굴을 하고 서양의 옷을 걸쳐 입은 광대의 어설픈 모사라는 '동양적인 것에 대한 슬픔'에 대해서 말이다. 한국은 중국과는 또다르다. 우리는 한 줄의 비평을 쓰기 위해 한국의 고전은 물론 중국의 고전까지 거슬러가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히도 제대로 공부하자면 그 방법밖에 없다. 저자는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서구 인문학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학자로서의 뼈저린 고백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미술사가가아니라 미술평론가이다. 미술평론은 개별적인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이고, 미술사는 이 개별적인 작가와 작품을 통해 한 시대를 엮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이 작업을 "십자가의 고난"에 비견한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어려운 작업에 대해 이 책의 옷고름을 처음 벗겨내는 순간, 이 책의 저자가 매우 훌륭하게 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모두 열여덟가지의 이야기로 꾸려져 있다. 그중 첫번째 이야기인 '출발을 위한 화두'는 이 책 전체의 구성을 압도할 정도로 잘 쓰인 글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서두 부분인 이 글에서 저자는 우리의 미술과 서양 미술의 본질적인 차이를 밝혀내고 있다. 단원의 그림일지 모르는 맹견도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를 분석하는 이 글에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과 같이 기하학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이도 눈앞에 있는 이 사물을 실감나게 그릴 수가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이 있었던 것이다. ...중략...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단지 개 한 마리를 사진 찍듯이 묘사한 것에 불과한 이 그림은, 그러나 18세기 동양문명권에서는 자연과학과 부국강병의 승리를 의미했으며 어머니의 욕망과 자본주의 문명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였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작자미상의 작품 <맹견도(猛犬圖)>, 국립중앙박물관
- 종이 바탕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작품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엎드려 있는 개의 자세는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다. 짧은 필치와 채색으로 처리된 털은 개의 근육과 관절의 구조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대상의 입체감을 살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건물의 기둥과 마루 바닥 묘사에서 사용된 명암법과 투시법은 서양화의 표현 기법으로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이 책이 성취한 것은 단순히 한국 현대 미술 100년사를 정리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 그 중에서 한국이란 한 사회가 서양의 그림, 미술, 사회를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함께 분석해준다는 것이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그간 한국미술사를 서술하고, 정리해주는 책은 많이 있었으나 그것을 하나의 관점에 따라 서술하고 정리하여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출판된 가장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람시의 말대로 "한 인간의 내적 자기에 대한 훈련이고, 한 인간의 인격에 대한 통제이며, 보다 높은 수준의 자각의 획득"으로서의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시선을 얻었다. 게다가 저자는 90년대 이후 한국 미술에 대한 새로운 저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책 머리에'에 밝히고 있기까지 하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박 선생의 이런 노력에 존경의 마음을 보내며 박용숙 선생이 새로운 저술을 집필할 수 있을 만한 여유와 건강이 허락되길 바란다. 이 글을 얼핏 읽는 사람은 박용숙 선생의 이 책에 대해 지나친 용비어천가를 보낸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책을 들고 읽어보면 이것이 괜한 허언이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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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20세기 - 학고재신서 19/ 이주헌 지음/ 학고재/ 1999년



- 도상학자 파노프스키가 그랬다던가? 그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미술 작품을 보라고... 이 책 "미술로 보는 20세기"의 저자 이주헌 선생은 확실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집필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20세기에 만들어진 미술작품들을 통해 이 100년의 실체를 이해해 보려는 나름의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이 책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역사를 말할 때 간혹 '청사(靑史)'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이 때 청사라는 것은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시기에 대나무를 다듬어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때 기록된 역사는 당연히 문자를 통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파노프스키는 어째서 미술 작품을 보라고 말할까? 그것은 문자가 미처 기록하지 못하는 당시의 정서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의 기능을 미술작품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미술관련 예술서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다루는 인문학 서적이다. 저자는 미술작품을 통한 역사 접근법을 통해 문자 기록에 의한 사실 나열과 파급효과를 따지는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당대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와 느낌, 그리고 그 반응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긴장이 오로지 지난 100년의 역사적 사건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도리어 지난 100년의 다양한 미술사조와 역사의 긴장 관계를 밝히는 탐색 작업을 통해 그간 난해하게만 받아들여졌던 현대 미술의 흐름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더불어 밝혀주고 있다. 이 책을 읽을 때 특히 주목하게 되고,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술사조나 양식사적인 접근법이 아니라 그 기준을 현실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다양한 현상을 아우르는 역사를 통해 역으로 미술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주헌 선생은 20세기에 제작된 다양한 미술작품들과 함께 지난 100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범주로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관능의 시대, 혁명, 팝문화, 전쟁, 갈등의 시대, 테크노피아, 잃어버린 낙원' 등의 구분 방식을 통해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천사와 현대 사회의 기술력이 미술에 파급시킨 영향과 예술가들이 이에 대해 보인 반응들인 작품을 비교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알기 쉽다고 해서 깊이를 얻지 못한 그런 글이 아니라 문장 하나, 인용된 작품 하나하나가 매우 섬세하게 신경 써서 고른 것들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의 무수한 장점들 중 가장 뛰어난 대개의 요소들은 저자에 의한 것이다. 그는 종종 미술비평가들이 등한히 하기 쉬운 사상의 문제나 이념의 문제, 우리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기술만능, 환경파괴, 제3세계의 문제 등도 빼놓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역사와 미술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처음 <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주목해서 보았는데 단행본으로 나온 것을 읽는 마음도 여전히 설렌다.) 저자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시도를 비교적 성공리에 수행하고 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20세기의 굵직굵직한 테마들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려는 시도 자체가 매우 방대한 요구인데 이를 축약해서 다루려는 시도가 가끔 총망라하겠다는 욕심에 시달린 흔적들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결국 분량의 문제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고, 충족시키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음에도 저자는 이를 매우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지난 1999년에 나온 이 책을 나는 몇 권 사서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 선물해도 괜찮은 책이란 것이 찾아보면 그리 흔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난 1999년을 새로운 천년을 맞는다는 호들갑 속에 보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었음에도 20세기의 유산들은 아직 청산되지 않고 이어져 온다. 지난 세기를 조망해보는 중요성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소중하다. 현재를 조망해보고 미래 문명을 예견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책 역시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한 권 샀다면 한 권 더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권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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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 이석우 지음/ 시공사/ 2002년


이 책에는 "역사학자 이석우의 명화 속 역사 찾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에 걸맞게 책의 시작 역시 원시 시대 라스코 동굴 벽화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과 양차 세계대전, 모더니티와 끝 부분에 부록처럼 이석우 자신의 개인사적인 미술편력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그간 <국민일보>에 연재되던 '이석우의 역사가 있는 미술'에 수록되었던 글을 보충하고 끝에 자신의 에세이를 첨가하는 것으로 한 권의 책이 완결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의 장점부터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역사학자 이석우 선생은 그간 우리 인문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주전공 분야와는 관련없다고도 할 수 있는 미술 분야의 여러 좋은 책들을 상재해두고 있는 분이다. 그는 특히 우리 미술에 대해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가나아트에서 지난 1990년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을 통해 우리 현대 미술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소나무에서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상,하권)"을 통해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그가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곰브리치, 부르크하르트 등도 역시 역사학자인 동시에 화가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인 보들레르가 뛰어난 미술평론가였음을 기억해야 하고, 아도르노가 음악 이론가였음을, 발터 벤야민이 영화에 대해,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아놀드 하우저가 20세기의 예술사에 대한 통사를 기록했었음을 더불어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학문간, 학제간의 상호 교류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무식하다. 인문학이란 것이 결국 인간이란 생물에 대한 학문일진데 연계 학문간의 교류 없는 인문학이란 것이 결국 우리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아닌가? 나는 역사학자 이석우 선생의 이런 시도들이 우리 사회의 인문학자들에게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가르침이고, 더불어 우리 사회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품격높은 축복이 될 것임을 믿는다.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 책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지은이 이석우 선생은 "그림은 곧 역사이고, 모든 그림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처음 출발점이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앞서 이미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 한 권으로 역사의 모든 부분을 말하기 위해 기획된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더라도 이 책은 역사의 몇몇 국면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첫째 이 책이 서양사 중심이라는 것, 둘째는 책 전체에서 분량면으로나, 내용면으로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한 부분은 사실상 거의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석우 선생의 전공이 서양중세사라는 점을 고려하고, 이 책이 역사서라거나 미술사적인 연구서적이라기 보다는 미술작품을 통해 본 역사 에세이적인 입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형평성의 문제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그런 아쉬움들을 뒤로 하고 이 책은 많은 난관을 뚫고 훌륭한 성취를 거두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미술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므로 거기에는 역사가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쓰고 있는 그림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를 담고 있으며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필자는 그들 그림에 얽힌 사연과 그것을 그린 작가의 이야기, 그리고 그 시대 미술의 특징을, 역사와 미술이라는 두 입을 통해 동시에 이야기" 하고자 했던 의도는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나 성공적으로 이룩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역사와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전문 분야를 한데 아울러 어우러지도록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두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더불어 문학적인 감수성이 요구되는 것인데, 이석우 선생은 이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수월하게 봉합해낸다. 앞으로 이런 시도들이 우리 인문학계에서 잦은 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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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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