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바이야트 -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 민음사(1997)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은 11세기 중엽 페르시아 동북부 지방 코라싼주의 나이샤푸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출생연대는 정확치 않다. 오마르 카이얌이 살았던 시대는 셀주크 투르크 왕조가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시대였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오마르 카이얌이 언제쯤 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교황 우르바누스2세가 처음 십자군을 일으킨 1096년 이전에 숨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오마르 카이얌의 이름도 정확하게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루바이야트>는 11세기경에 살았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역사학자, 철학자(당시의 지식인이란 존재를 생각해볼 때 이렇듯 다방면으로 재주를 보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였던 이가 오마르 카이얌('카이얌'은 천막제조업자란 뜻)이란 필명을 써서 4행시 "루바이"를 쓴 것이다. 위에 인용된 구절들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의 루바이들은 매우 교훈적이면서도 생의 찰나적 흐름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훈적이라고는 하지만 허무의 냄새가 묻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이슬람 문명권을 통칭해서 아랍이라 말하지만, 아랍은 단지 아라비아 반도의 지리적 호칭이고, 이슬람이나 무슬림은 종교적 명칭이다. 원래 아랍이란 말은 좁게는 아라비아 반도 일대만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아라비아 반도를 세력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마호메트의 지지자들에 의해 사상적, 정치적으로 포섭된 페르시아 지역까지 아랍이라고 통칭했다. 나중엔 그 의미가 점차 확대되었다.

 

"루바이야트"는 4행시의 복수형으로 "4행시집" 이란 뜻이다. 우리의 시조처럼 정형화된 율격이 있지는 않으므로 형식상은 자유시이겠지만, 4행이 한 연을 이루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루바이야트는 모두 101수의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4행이 하나의 연이면서 독립적인 시 한 편이 된다. 각각의 시들은 모두 다른 주제를 노래하면서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일반적인 정서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민중적 현세관을 담고 있다. 그런 현세관과 더불어 오늘에 충실하라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네들의 시가 현세적인 풍요를 추구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 낙타를 타고 사막을 누비던 중개무역상들이 아니었던가?

 

7.
오라, 와서 잔을 채워라, 봄의 열기 속에
회한의 겨울옷일랑 벗어 던져라
세월의 새는 멀리 날 수 없거늘
어느 새 두 날개를 펴고 있구나.

 

일곱번째 루바이에서 시인은 "세월의 새는 멀리 날 수 없거늘/ 어느 새 두 날개를 펴고 있구나"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동양의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과 대등한 시구라 할 수 있다. 사막의 석양은 분명 보기 드물게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해는 또 순식간에 저버리고 밤의 사막은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게 했을 것이다.

 

20.
살아나는 풀잎이 뒤덮은 강둑,
그 위에서 노닐 때에는 조심을 하오.
그 옛날 귀한 이의 입술 위에서
몰래 핀 풀인지 누가 알리요

 

20번째 루바이에서 시인은 풀잎 하나라도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 까닭은 강둑을 무심히 뒤덮은 풀잎 하나조차 과거 영화를 누렸을 어느 인물이 죽은 뒤 흙으로 돌아가 풀로 피어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편들 역시 시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미지들은 비록 화사하고 아름다운 것들일지라도 그 이면엔 역시 현세의 삶에 대해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은 마땅히 즐겨야하는 것이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25.
오늘만을 위해서 사는 이 있고
내일을 지켜보는 사람 있지만
암흑의 탑에서 들려오는 저 목소리
"바보여, 그대의 보답은 어디에도 없으리."

 

25번째 루바이의 마지막은 종종 많은 곳에서 인용된다. "바보여, 그대의 보답은 어디에도 없으리." 오늘을 위해 살든 내일을 위해 살든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유명한 우화 '죽음을 피해 달아난 사내' -  한 사내가 점장이에게 점을 보았다. 점괘에 따르면 오늘밤 안으로 그 사내가 죽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사내는 마치 괴테의 "마왕"처럼 죽음의 사자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시간, 죽음의 사자는 테헤란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사내를 찾고 있었다. 죽음의 사자는 말한다. "이 녀석이 오늘 중으로 테헤란에서 죽기로 되어 있는데 아직 안 보이는군." 죽음의 사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사내는 말을 달려 죽음의 사자 앞을 달려간다. 죽음의 사자는 그를 보고 달려가 목숨을 빼앗아 버린다. 죽음의 운명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죽음은 누구에게도 별다른 보답을 주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은 그저 죽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47번째 루바이를 비롯해 여러 편의 루바이들에서 반복되고 있다.

 

47.
그대와 내가 함께 장막을 지나가도
이 세상은 오래오래 살아 남으리
바닷물에 밀리는 조약돌 인생
머물다 간다 한들 아는 체할 세상인가

 

이렇듯 삶과 죽음에 대한 현실적이고도 냉정한 관찰은 오랫동안 대상 무역에 종사하거나 유목을 위해 사막을 횡단하며 체득한 삶의 방식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양떼를 방목하는 그들로서는 노동력을 발휘할 수 없고 체력이 약한 노인들은 짐이 되기에 어떤 유목민들은 새로운 방목지로 떠나기에 앞서 늙은 부모를 위해 작은 천막을 지어준다고 한다. 20여일치 정도의 식량과 더불어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물품 몇가지를 함께 놓아둔다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손자 삼대가 할아버지를 천막으로 모시고 갔다가 아버지와 아들만 돌아오는 것이다. 

 

35.
행여나 삶의 비결 찾을까 하고
초라한 술항아리 입술을 찾네
입술에 입술 대고 속삭이는 항아리
"마셔라, 살아 생전, 한 번 가면 못오리"

 

우리들 농경민족에게 삶과 죽음은 언제나 고정된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삶과 죽음이란 언제나 낯선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랍 저편으로 사라질 뻔한 "루바이야트"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빅토리아 왕조시대 영국의 상류계급이었던 "에드워드 피츠제랄드"의 공로이다. 그는 취미 삼아 번역을 즐겼는데, 오마르 카이얌의 시 75편을 번역해 주변의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시를 읽고 감동한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는 자신의 친구이자 시인인 스윈번(Charles Swinburne)에게 다시 이 책을 소개했고, 입에서 입으로 퍼져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피츠제랄드는 이런 반응에 힘입어 35편의 루바이를 덧붙이고, 다시 번역하여 모두 101편의 루바이로 묶은 것은 1879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번역은 반역이란 말도 있듯 피츠제랄드의 번역을 두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법 논쟁이 있었다. 그가 오마르 카이얌의 원시에 충실하게 번역한 시들은 불과 49편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고, 심지어 이중 8편 가량은 피츠제랄드가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들을 제 멋대로 덧대거나 생략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오마르 카이얌의 시가 빅토리아 왕조 시대 영국에서 크게 유행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바대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온갖 근엄한 도적과 엄숙하기 그지 없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뒤안에서 상류계층 사람들끼리 온갖 불륜과 부도적한 일들이 벌어졌던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시대에 현세적이면서도 허무한 세계관을 4줄의 짤막한 시행들로 표현하고 있는 루바이들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이면서 동시에 기쁨이었을 것이다.

 

따지고보면 서양에서도 이런 전통은 로마 이래로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이란 구호에 따라 충실하게 진행되어 오지 않았던가. 21세기 새로운 노마드(유목인)들에게도 여전히 "오늘"은 불확실하고, 내일은 확실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을 읽으며 오늘을 즐기는 일도 그다지 나쁘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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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전쟁의 역사』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승영조 (옮긴이) | 책세상(2004)


개정증보판의 의미

이 책은 지난 1995년 두 권으로 분권되어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된 적이 있다. 나는 구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생이 사학과에 진학하는 바람에 큰 맘 먹고 몇 권의 역사 관련 서적들을 동생에게 넘기면서 그 때 이 책도 함께 넘겼다. 예전에도 한 차례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쓴 적이 있었다. 당시엔 너무 짤막하게 썼기 때문에 아쉬움이 있어서 이번에 다시 한 번 리뷰를 쓰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같은 책에 대해 두 번의 리뷰를 하는 셈이다. 어떤 이는 왜 같은 책을 두 번 사는가? 혹은 출판사에서 무엇 때문에 개정증보판을 내는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의 개정증보판은 중복출판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를 출판이란 맥락에서 간략하게 이야기해보자. 모든 책에는 판권이란 것이 있다. 여기에 보면 "판과 쇄"란 말이  나온다. 책을 만드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공을 들인다 하더라도 실수가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작가나 편집자가 수정보완할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열악한 출판환경에서 대개의 책들은 초판 이후를 기약할 수 없는 실정이다. 설령 인기가 좋아 초판이 모두 판매된다 하더라도 초판의 실수를 수정보완해서 다시 책을 만드는 건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쉽사리 이런 작업에 나서지 못한다(성의있는 편집자가 출판되어 나온 책을 다시 교정해두거나 독자들이 읽다가 지적해 준 오식이 있더라도 개정판을 만들기 전엔 수정되지 못한다). 우리나라 출판 사정상 재판이라는 건 모 유명작가들의 장편 소설을 출판사를 바꿔 출판할 때나 하는 일처럼 되어 있다. 출판사에서 수정증보판을 만드는 건 독자들에 대한 일종의 리콜 서비스와 같은 것이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겐 이런 관행이 일반화되어 있지 못하다.

나는 전쟁의 역사 1995년 판 초판본과 개정판 1쇄를 가지고 있다. 개정판이 이전 판본과 다른 점은 일단 분권되었던 책이 하나로 묶여 더욱 두툼해졌다는 것이고, 하드 커버 양장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질이나 기타 도판류들이 보다 많이 추가(일일이 대조는 해보지 않았지만, 이전 도판들보다 확실히 사이즈면에서 커졌다)되었고, 초판본에서 보이던 몇몇 오식들을 바로 잡았다. 그렇다고 개정판에 오식이 전혀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개정판 276쪽의 편집자 주에서 <롤랑의 노래>에 대한 설명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1100년경에 지어진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이자 최고.최대의 무훈시. 롤랑은 샤를마뉴의 이름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롤랑"은 "샤를마뉴 대제"와 별개의 인물이다. "롤랑의 노래"에 등장하는 롤랑은 샤를마뉴 대제가  이슬람교도들과 전쟁할 때 그의 군대에서 활약한 기사 롤랑을 의미한다.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하자면 이슬람교도와의 전쟁 당시 그들과 내통했던 간신 가늘롱이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를 곤경에 빠뜨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가장 위험한 임무인  후위 부대 지휘를 왕의 충성스런 신하 롤랑이 자원한다. 가늘롱은 이교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를 위기에 빠뜨린다. 샤를마뉴는 그에게 뿔피리를 주어 위험에 빠지면 자신을 부르라고 말한다. 하지만 롤랑은 마지막 순간까지 왕을 생각해 뿔피리를 불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대신 뿔피리를 불어 되돌아온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간신은 처벌당하지만 롤랑은 이미 죽었다는 내용이다. 롤랑이 실존인물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샤를마뉴 대제와는 확실히 별개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들은 개정증보판이 지니고 있는 여러 미덕들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무려 1,038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기 때문이다. 거의 금성판 국어대사전 특장판과 맞먹는 두께다. 가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한 번역과 편집자의 무뇌충적인 교정교열 작업으로 망가진 책들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솔직히 우리나라 띄어쓰기, 맞춤법은 국어학 박사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구사하기 어렵다(이 말은 믿어도 된다, 흐흐)는 문제가 있다. 개정판은 이전의 책에서 보다 확실히 오식이 줄었고(이전 책도 오식이 많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인 풍부한 편집자주와 찾아보기, 지도와 도판, 참고문헌들이 충실하게 보강되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전쟁이 벌어졌던 현장의 지도를 부록으로 뒤에 좀더 큼지막한 그림으로 삽입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하여튼 나는 "책세상"이란 출판사와는 개인적으로 독자 이상의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지만 "책세상"이란 출판사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이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니체 전집"과 "까뮈 전집"을 내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세상 문고"라는 문고본을 출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서가들 말고, 애독자들 중 많은 이들이 문고본의 필요성을 느끼며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나 프랑스의 "디스커버리 총서" 시리즈와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부러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문고본은 관리 및 영업의 어려움 등으로 출판사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출판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건 당연하지만 출판이란 동시에 문화적 사명감이 필요한 사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난 책세상 출판사가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좋은 출판사로 생각한다. 게다가 책 값이나 올릴 요량으로 얇팍한 소설책을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개정해 출판하는 곳들이 수두룩한 이 때 진짜배기 개정증보판을 내는 출판사는 또 얼마나 드문가?

이 책의 저자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는 어떤 사람인가?
만약 군대를 컴퓨터 게임 "FIFA2002"에서처럼 심리적 부담감 없이 고를 수 있는 거라면 난 단연 영국군을 내 팀으로 고르고 싶어 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은 독일팀이다. 내가 영국군을 좋아하는 이유는 축구에서 내가 독일 축구를 좋아하는 것과 흡사하다. 얼핏 보면 독일축구엔 브라질 축구처럼 빼어난 기교도, 프랑스나 네덜란드 축구처럼 토탈 사커니, 아트 사커니 하는 수식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네들 축구는 때로 무미건조할 만큼 덤덤하고, 재미없지만 축구의 정석 플레이, 기본에 충실한 축구를 한다. 축구장 전체를 골고루 사용하여 공격하고, 수비할 때도 특별히 허슬플레이를 한다기 보다는 공의 방향, 공격수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봉쇄하는 방식이다. 물론, 전쟁사를 살펴볼 때 영국군이라고 해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혐오스러운 실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크게 보았을 때, 영국군은 모범생이나 천재의 그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모범생이나 천재들을 능가하는 성실함과 인내력으로 승리한다. 전사를 살펴보면 영국이 승리한 전투도 많지만 그네들이 패한 전투도 무척이나 많다. 그럼에도 영국군이 패배한 전쟁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결과를 나는 그런 힘에서 찾는다.


▶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이 지휘하는 아프리카 군단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몽고메리 장군


굳이 몽고메리의 전쟁사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세계사에서 영국군 만큼 보병을 사랑한 군대도 드물 것이다. 그들이 "백년전쟁"에서 우세한 프랑스 기병을 패퇴시킨 것 역시 보병의 힘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 보병들은 우수했다. 군대의 기본이 보병이라면 그에 가장 충실한 군대 역시 영국군이다. 물론 여기엔 그네들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저지른 전쟁 범죄를 논외로 한 표현임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우리에게 "몽고메리 장군"은 소위 "고집 센 몬티"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보인 까닭 중 상당수는 역시 미군을 중심으로 한 할리우드의 전쟁 영화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다. 영화 "패튼대전차 군단"을 보면 패튼과 몽고메리가 시칠리아 점령 과정에서 서로 경쟁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데 역시 미국적 시각에 의한 것이다. 물론 팔레르모를 먼저 점령한 건 패튼이었다. 하지만 롬멜이 지휘하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시칠리아까지 밀어낸 건 몽고메리였고, 그때까지 미군은 아주 멀리 있었다.

장군으로서 몽고메리에게 가장 빛나는 경력은 롬멜의 탁월한 지휘에 압도당해 영국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북아프리카 전선의 승세를 일거에 뒤바꿔버린 엘 알라메인 전투의 승리일 것이다. 그는 1887년 영국 국교회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일평생 성서를 탐독하고 절대적 금주가였다. 철저한 빅토리아풍 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이지만 왕립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서는 학우의 셔츠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 학교 당국의 처벌을 받은 적도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큰 부상을 당해 빈사 상태에 이른 적도 있었다. 39세의 나이로 베티 카버와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 10년 만에 아내가 벌레에 물린 상처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자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몽고메리는 헌신적인 아버지였으나 군인으로 임지에 따라 이동해야 했기에 아들 데이비드를 교장 선생집에 맡겨 그 집에서 따뜻한 가정의 정믈 맛보게 하려 했고, 교장 선생에게도 특별히 그 점을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 롬멜에게 연전연패하며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북아프리카 전선의 영국군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부터 그는 부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기를 엄정하게 다루면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쥘 엘 알라메인 전투에 이를 때까지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그런 그가 북아프리카 전선의 제8군 사령관이 된 것은 1942년 8월 12일이었다. 그는 다혈질이었고, 가시돋친 말을 인정사정없이 내뱉는 수다스런 다변가요, 그 자신은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면서도 부하들에게는 사막 한 복판에서도 엄정한 군기와 군율에 따르도록 했던 장군이었다. 몽고메리는 무슨 일이든 자신이 결심한 대로 밀고 나가는 다부진 장군이었지만, 당시 54세였던 몽고메리로서는 처음으로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는 것이었다. 그가 맡은 영국 제8군은 롬멜에게 1년 동안 연전연패한 만신창이 군대였고,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롬멜이 지휘하는 한 독일군에게 이길 수 없다고 믿었고,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연일 전해지는 패전 소식에 기밀 서류를 불태우고, 피난 보따리를 꾸렸다. 몽고메리는 최전방에 부임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이후 제8군은 진지를 1m라도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각 부대는 현 위치에서 싸운다. 현위치가 당신들의 무덤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매우 엄격했고, 사막 한 복판에서도 참모들은 정시에 시작하는 식사 시간에 언제나 단정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야 했다. 그는 부하들을 다시 훈련시켰고, 용기를 북돋았다. 병사들은 부드럽고 성격 좋은 장군 보다 혹독하게 대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는 장군을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전쟁은 축구가 아니기 때문에 패한 결과로 지불해야 할 것이 자신의 목숨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후방인 런던의 다우닝가 1번지로부터 연일 쏟아지는 반격 독촉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더 많은 휴식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섣부른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초연한 그는 점차 병사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결국 롬멜은 그가 파 놓은 함정으로 끌려들어가 패하고 말았다(물론,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상반된 의견을 내 놓는다). 그는 마치 삼국지의 육손처럼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독일군을 220km나 후퇴하게 만들었고, 결국 퇴니지에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 북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을 끝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내 영국 점령지의 사령관을 거쳐 영국군 참모총장, 나토의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냈고, 참모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러 권의 책을 냈고, 1976년 세상을 떠났다.

전쟁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란 표현은 진부한 만큼 진실이다. 나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사람이란 말은 아마 "인류"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아 인류의 본성도, 늑대나 개의 본성 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그들만의 본능을 지니고 있으리란 믿음이 그것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류란 말에 대해 나는 눈곱만치도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인류가 배움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면 문자 이래로 기록된 그 많은 비참한 죽음들이 번번이 재현될리 없지 않은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200년의 아이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어느 시대나 정치, 실업계, 매스컴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계획하고 가르치고 하나의 방침을 교육해서 그대로 따라오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려고 해왔다. 나치 독일이 그랬고, 내가 열 살 때 전쟁에 질 때까지의 일본도 그랬단다. 그러나 이런 국가는 주변 국가들을 비참하게 만들고는 결국 패망했어.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틀에 박힌 인간과는 다른 홀로 설 줄 알지만 협력할 줄도 아는 진짜 '새로운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한다는 거다. 어떤 '미래'에서나 말이다."

우리나라는 늘상 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온 탓인지  아니면 혹독한 군사독재 시절을 거쳐 온 반발 심리 때문인지 "전쟁사"에 대한 출판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평화에 대한 염원과 필요성이 그 어떤 민족보다 클 것임에도 불구하고 늘상 전쟁의 공포 속에 놓여 있었던 탓에 아니, (군사)국가주의와 (극우)민족주의 아래 놓여 있었던 탓에 "반전평화"운동을 마치 덜 배운 어린 아이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의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전쟁과 평화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음을 알지만, 알고 싶지 않은 아니, 외면하고 싶어 했다. 국내에 존 키건의 『세계전쟁사』를 비롯해 몇 권의 전쟁사가 번역 출판되거나 육사에서 펴낸 책이 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지 않는 것, 간혹 읽더라도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취미 용도 이상이 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는 우리가 구해 읽을 수 있는 전쟁사 관련 도서들 중 가장 대중적이고, 잘 만들어진 책이다. 아마도 그런 장점 때문에 이 책의 개정판까지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석권한 나치 독일로부터 최후까지 저항하여 마침내 승리에 이른 영국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신화는 저물고 있었다. 영국군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몽고메리 장군의 숙적은 롬멜뿐만 아니라 아군 가운데에서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지 패튼 장군이었다. 두 사람은 전쟁 막판까지 자존심을 건 치열한 경쟁으로 전공을 다투었다.

전쟁에 대한 역사서로서 이 책은 고대 전쟁으로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만약 그 뒤의 전쟁 사에 대한 책을 찾는다면 구태여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은 20세기 들어 가장 엄혹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고, 그 이후 벌어진 다른 전쟁들 역시 이들 세계대전의 결과에 기인하거나 그 이전의 체제들로 인해 빚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후의 전쟁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역시 이 책을 미리 읽어두는 것이 좋다. 이 책은 모두 7부 25장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전쟁의 본질"은 전체의 서두 역할을 하고, "제2부 고대 전쟁"부터 "제6부 1815-1945년의 전쟁"까지는 이 책의 본문인 전쟁사에 해당한다. "제7부 불가해한 숙명"은 이 책의 에필로그격이다.

이 책의 어쩔 수 없는 한계 혹은 필자의 한계라 할 수 있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이 책의 전체 분량과 주목한 부분에서 대체로 동양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그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의 저자인 몽고메리가 빅토리아 시대 말엽에 태어나 그가 교육받고 성장하여 보낸 인생의 전성기를 서구제국주의 전성기로부터 몰락기에 해당하는, 다시 말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과 해방 이전 시기를 보낸 인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주어야 한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동양에 대한 서구의 인식은 미미하기 그지 없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를 몽고메리 개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적 한계를 생각해본다면 이 책에서 동양이 아주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쟁사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몽골과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를 중심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은 말이다. 그 나름대로는 중국의 손자나 몽골의 징기스칸, 한국의 이순신 등에 대하여 각별한 존경을 표한 셈이다.

몽고메리는 이 책의 661쪽에서 662쪽에 걸쳐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중략>...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거북선)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뭐 그렇더라도 여전히 불만은 남겠지만 전쟁사에 여러 페이지에 걸겨 많이 기록된다고 썩 좋은 일도 아니지 않나? 흐흐)

솔직히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앞서 언급한 여러 장점들에도 있지만 한 명의 직업 군인이 평생 전장을 거쳐 살아오며 경험하고 느낀 진솔한 전쟁관과 평화관이 이 책 곳곳에 묻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군들이 쓴 전쟁회고록이나 제너럴십에 대해 군사평론가들이 말한 책은 이미 많이 있다. 그러나 많은 책들이 일종의 회고담에 그치거나  출세기, 실증적인 전사 검토에 그치는데 반해 이 책에는 우리가 전쟁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전쟁 그 자체를 효율적으로 좀 더 잘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는 미덕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좋은 책이다.

몽고메리는 "전쟁의 본질"편에서 전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더러는 전쟁이 문명의 소산이라고 말할 테고, 더러는 전쟁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즉 합의를 도출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항상 중재자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내린 판결은 정의보다 힘에 기초한 것이었다. <46쪽>

전쟁이란 경쟁 관계에 있는 정치 집단 간의 장기 무장 충돌을 의미한다. 전쟁에는 반란과 내란이 포함되며, 개인적인 폭동이나 폭력행위는 제외된다.<47쪽>"


그는 전쟁의 승자가 곧 정의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건 영국군도 마찬가지였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우리는 최근 이라크 파병 문제와 관련해 스스로를 오랫동안 자유주의자로 자처하던 어떤 지식인이 국회의원이 된 뒤 "국가이성"에는 도덕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파병을 두둔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서구에서 자유주의가 파탄난 것은 자유주의 덕목 자체가 파탄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너무나 손쉽게 보수화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를 단지 "정치 집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생존 목적을 "국가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불경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는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에 대해 단지 정치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 나온 "헌법의 풍경"이란 책에서 저자 김두식은 이렇게 말한다. 헌법의 기본권 정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에서 출발한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신앙,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어야 한다. 권력자들이 "인정한다, 그러나"라며 필요에 따라 개인의 기본권을 규제하면 국가가 괴물로 돌변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어떤 나라가 괴물이냐'라는 것이 아니다. 국가란 본디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서구 중세를 통틀어 일개 국가의 인력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전투 때는 노예들이 소모품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4세기에 흑사병으로 알려진 일련의 전염병이 돌자, 인력이 귀해져 노예의 경제적 가치가 커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노예는 생명이 보호되어야 했고, 더 이상 소모품으로 사용될 수가 없었다. 현대에 있어서 한 국가가 전쟁을 치를 때 무장 병력 중 사병은 직업 육군이나 해군이나 공군이 아닌 민간인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민간인들은 결코 그러길 원치 않는다. 현대의 사병은 지난날의 노예나 용병들과는 딴판이다. 즉, 그들은 교육을 받았고, 사고할 수 있고, 식별할 수 있으며, 비판할 태세가 되어 있다.... 중략 ..... 현대전은 총력전이다. 또 몇 세기에 걸쳐 대단히 복잡해진 현대전은 한 국가의 활동과 존속 자체를 좌우할 정도여서, 과거와 달리 이제는 국가 전체의 사기가 중요해졌다. 그것은 필수적이다. 징용과 용병의 시대에는 국가적 전쟁에 종사하거나 전투를 하는 사람이 비교적 소수였다." <56-57쪽>


프랑스의 정치가 탈레랑은 "전쟁은 너무 심각한 일이라서 군인들에게 맡겨둘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와 같은 이유로 몽고메리는 "전쟁은 너무 심각한 일이라서 정치가들에게 맡겨둘 수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때의 몽고메리가 말한 것은 군인과 정치가 모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우리는 앞서 몽고메리가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은 너무 심각한 일이기 때문에 군인과 정치가에게만 맡길 수 없다. 더군다나 현대의 전쟁은 총력전이기 때문에 더더욱 시민사회의 감시 아래 놓여야 한다.

몽고메리는 전쟁의 여러 이유 중 하나, 특히나 현대전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빈번한 전쟁에 대한 또 다른 근본적 이유로 집단에 소속하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을 들 수 있다. 한 사회 안에서 충성심이나 집단의 주체의식, 애국심과 같은 것이 발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웃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적대적이게 된다. 라틴어 hostis가 '이방인'과 '적'을 동시에 뜻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상의 다양한 민족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남다른 문화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문화와 군사제도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83쪽>


라틴어로 이방인과 적이 같은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장군을 만나기는 동서양을 모두 통틀어 보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배타적인 마음,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수주의가 바로 타인에 대한 잔학 행위로 나타났었음을 우리가 "전쟁의 역사"에서 교훈으로 얻을 수만 있다면 평화의 발명에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는 25장 "에필로그 - 평화라는 이상"에서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여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모두가 거짓을 행하며,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나 평화가 없도다"라고 말한다. 분명 문명은 진보했고, 지난 2000년 동안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마음속 깊숙이로부터 평화를 갈구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를 경험했다. 우리는 국가간의 전면적인 야만 상태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숱한 시간들을 전장에서 보내고 전쟁을 연구한 학자로서 몽고메리는 말한다.

"진정한 군인은 타인을 적으로 삼지 않고, 인간 내면의 야수를 적으로 삼는다. 한 군인으로서 나는 희망한다. 황금빛 노을이 지고 반목과 싸움을 잠재우는 소등 나팔소리가 울리는 그날이 오기를. 이윽고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며 세계 온 나라의 친선과 평화를 깨우는 기상나팔 울리는 그 시대가 오기를."


아무리 많은 숫자의 군대라 할지라도 항상 승리를 거둘 수 없으며, 국민들의 마음을 영원히 장악할 수도 없다고 말이다. 평화를 애호한 사람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웠다. 자유와 정의가 없으면 겁 많고 노예화된 사람들에게 평화가 주어졌다 한들 그 평화는 지상의 지옥과 같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인간 내면의 야수와 싸워 얻은 평화이며, 만일 그 평화를 쟁취하고 유지한 미덕들이 상실된다면 평화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평화는 실천이라는 미덕과 함께 해야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20세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평화를 발명해내야 하는 도덕적 책무를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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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99주년 세계여성의 날과 KTX 승무원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 99주년입니다. 직원들이 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서 우리 국장님에게 뜬금없이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성인데도 잘 모르시더군요. 제가 “오늘은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했더니 함께 식사하시던 다른 분이 “요즘은 365일이 모두 여성의 날인데, 별도로 여성의 날이 필요하냐?”고 하더군요. 연세 많은 분들이 요즘 대한민국 사회와 여성들을 보고 있노라면 1년 365일이 매일 여성의 날이란 표현이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수도 있단 생각은 저도 합니다.

2004년 9월에는 “성매매방지와 피해자 보호에 대한 법률과 성매매알선 처벌에 대한 법률”이 시행되었고, 지난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 규정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성계의 50년 오랜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가 이루어졌던 같은 해 6월, 여성정책과 가족정책을 총괄 기획하는 정부부처로 여성가족부까지 출범하면서 우리 사회 여성의 지위가 한층 더 강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대중문화가 표상하는 여성의 이미지도 이전과 달리 훨씬 더 건강해지고 당당해졌습니다. 연상녀와 연하남 커플은 물론, 이혼녀에 대한 표현도 어느 때 보다 긍정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요즘 같으면 365일 여성의 날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올해로 99주년을 맞은 세계여성의 날은 지금은 세계 최고의 산업도시이자 문화적으로도 첨단을 달린다는 뉴욕의 섬유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행사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교과서나 다른 책들을 통해 방적기 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의 사진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사진은 루이스 W. 하인(Lewis Wickes Hine)이 1908년 미국의 공장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 속의 소녀는 과연 몇 살이었을까요? 그녀의 어머니는 어째서 이렇게 어린 딸을 공장에 보냈을까요?




1870년대 이후 서구 자본주의는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변화 양상은 마치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의 열풍과 다르면서도 흡사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도시와 농촌간의 인구 비례가 역전되고, 임금 노동자들이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당시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한 자본 축적, 생산의 집적이 대기업, 대자본에 집중되면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계급에게 압력이 가중되어 오늘날 우리가 중산층이라 부를 만한 부르주아지, 도시와 농촌의 중간층이 몰락하여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결과였습니다. 1900년대 접어들어 미국의 노동자는 1,000만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30년 전의 수준과 비교해보면 세 배에 이르는 수치였습니다.

이런 현상 가운데 여성노동자도 함께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됩니다. 1908년 즈음에는 섬유산업 분야에서 남성노동자보다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앞서는 역전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이 같은 일이 빚어진 까닭은 당시 섬유산업이 과당경쟁 상태에 놓이면서 남성노동자 보다 강도 높은 노동을 싼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여성노동자를 다수 고용한 결과였습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여성들을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가정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여성들은 비인간적인 작업장 속에서 하루 12시간 노동, 심지어는 16시간까지 일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에 종사해야 했습니다.(여성들 뿐만 아니라 아동노동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연령 제한조차 없었습니다. 1880년 당시 미국의 공장에는 18만2천 명의 어린이가 일했는데, 이 수치는 산업노동자 총수의 6.7%에 해당합니다. 1895년 독일의 조사에 따르면 14세 이하 어린이 21만 5천 명이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여성들은 장시간 노동과 가정에서 시달리면서 억압과 빈곤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족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남성노동자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지기 시작했으나 여성들은 여전히 선거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이소선 여사가 계시다면, 미국에는 또 한 명, ‘어머니(Mother)’라 불리는 메리 존스(Mary Jones)가 있습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는 1910년 당시 80세였던 메리 존스가 80세의 나이로 밀워키의 한 양조공장에서 일하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상스러운 욕을 퍼부어대는 야수 같은 십장들에게 둘러싸여 신발과 옷은 흠뻑 젖은 채 세척실에서 노예처럼 일하도록 운명지어진 …… 불쌍한 소녀들은 시큼한 맥주의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서 45킬로그램에서 70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술병 상자를 옮기는 일을 한다 ……. 류마티즘은 만성병 중 하나이고 으레 폐병이 뒤따른다……. 십장은 심지어 여자애들의 화장실 사용시간까지 통제한다……. 여자애들 대부분이 집도 없고 부모도 없이 …… 일주일에 3달러로 …… 의식주를 해결해야만 한다.

1908년 미국의 한 블라우스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여성노동자 146명이 불에 타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분노한 만 오천의 여성노동자들이 뉴욕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동조건 개선과 여성참정권 인정 등을 내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이들은 “노조 결성의 자유를 달라!”, “여성에게 참정권을!”, “미성년자의 노동을 금지하라!”, “10시간 노동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무장한 군대와 경찰과 맞섰습니다. 이날의 투쟁은 전 의류노동자의 총파업으로 번졌고 마침내 1910년 ‘의류노동자연합’이라는 조직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0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독일의 사회주의운동가 클라라 제트킨은 이들 여성노동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여성의 날’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였고, 전세계 17개 국가에서 모인 100여 명의 여성들이 만장일치로 제정했습니다.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은 해마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내걸고 시위를 계속해왔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물가안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1917년 이탈리아에서, 1918년 오스트리아에서, 그리고 193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80만 명의 여성들이 모여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진보와 자유”를 외쳤습니다. 1974년에는 베트남에서, 1979년엔 칠레에서, 1981년엔 이란에서 5만 명의 여성들이 부르카 착용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고, 1988년엔 필리핀에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여성들의 촛불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세계여성의 날’도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물론 그 사이 세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77년 유네스코는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선포했고, 1985년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여성대회에서는 20세기말까지 국제사회와 각국의 정부들이 성취해야할 성평등 행동지침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UN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빈곤 인구 12억 중 70%가 여성과 어린이며, 취학연령에 이르러서도 학교에 갈 수 없는 여자 어린이는 8천 5백만 명에 이릅니다. 이 수치는 학교에 갈 수 없는 남자 어린이 4천 5백만 명의 두 배에 이르는 수치입니다. 세계 빈곤인구 중 적절한 음식, 물, 위생, 건강,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남성의 숫자는 4억 명입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엔 그 두 배에 달하는 7억 명에 이르며 성인 여성의 문맹률은 67%입니다. 이것이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작은 별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그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일부 사람들이 여성과 여성운동, 여성주의 일반에 대해 공공연히 말도 안 되는 분노를 내뱉습니다. 사실 여성가족부는 처음 출범 과정부터 많은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여성부가 존재한다면 남성부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부터 여성계 내부에 이르는 우려 섞인 걱정까지 참으로 다양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연말 여성가족부가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남성들에게 회식비를 지급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 역시 황당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라는 명칭이 이미 다양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가족부가 앞장서 출산장려운동을 하는 등 이른바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에 대한 국가주의적 관리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간 여성운동 내부에서 논의되고, 힘써왔던 다양한 가족의 공동체의 복지와 인권 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한 편입니다. 지금과 같은 흐름으로 보았을 때, 여성가족부는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해 있는 운동의 관료화라는 암초를 피해가기 어려울 듯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모 대학의 여성총학생회가 보여준 성급한 문제제기와 미숙한 대응 방식으로 인해 여성계 전체가 매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는 문제점이 여성계라고 빗겨갈리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여성부만을 대상으로 부처 폐지를 거론하고, 그 예산을 국방비로 전용하라고 주장하거나 같은 여성 의원이 여성부가 이 나라 남성들을 모독했다고 나서는 모습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기 까지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지난 해 3월 8일. 어쩌면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세계여성의 날이었던 이 날, KTX 여 승무원 90여 명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습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였던 이들을 직위해제하겠다는 철도공사의 문자메시지였습니다. 이들이 새로운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인지 어느새 만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2월 24일은 술자리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성추행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1심 재판에서 최 의원은 1심 법정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선고와 사회지도층으로서 부적절한 범죄행위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여전히 국회의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사건 발생 5개월 후 국제부로 자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술집 여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는 국회의원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최근 삼성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불법증여사건이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계속 연기되는 것처럼 그 역시 임기를 모두 채우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자라면 일반인들에게는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해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에 속한다고 인정받는 이들입니다만, 그 같은 이들을 생각하는 국회의원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6~70%가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그 가운데 70%가 여성인 현실이 별다르게 느껴질리 없습니다. KTX 여 승무원들이 모 대학에서 헸던 강연을 동영상으로 한참을 다시 보고 들었습니다. 예쁘냐고요? 물론 예뻤습니다. 그들의 얼굴도, 몸매도 참으로 예뻤습니다. 그러나 얼굴이나 몸매 보다 그들의 마음이 예뻤고, 그들의 의연한 태도가 예뻤습니다. 이제 스물 대여섯의 젊은 처자들이었습니다. 다들 제 막내 동생 보다도 어린 친구들이었습니다. 장장 1년여에 걸친 투쟁이었고, 언제 해결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했던 한명숙 전 총리가 다음 대선에서 유력한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명숙 총리는 30여년간 민주화운동과 환경운동, 여성운동을 해온 훌륭한 여성의 표본이었고,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였습니다. 한명숙 총리 지명자는 방송인터뷰를 통해 “여성 총리가 나온다면 정치 발전에 새 지평을 열고, 여성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지명자로 내정되었단 소식이 전해졌을 때, KTX 승무원들은 한명숙 총리 지명자와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들이 한명숙 총리에게 받은 화답은 경찰에 의한 강제연행이었습니다.

한명숙 의원님께 드리는 편지

새벽부터 비가 천막을 내리쳤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비를 머금고 울컥이고 있었습니다. 파업농성 50일째인 4월 19일 우리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주최 비정규직 관련 토론회를 마치고 ‘국무총리 내정자’인 의원님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의원님이 여성민우회 출신이고 여성노동자의 압도적인 지지가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KTX 승무원 문제에 대해 해결의지를 보이셨다고 해서 한편으로 무례할 수도 있지만, 다음날 새로운 자회사인 KTX관광레저의 신규승무원 합격자 발표와 24일 승무사업개시라는 일사천리의 계획 앞에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국무총리실 노동사회수석 비서관이 와서는 철도공사가 합리적인 안을 내놓았는데 왜 승무원들이 그걸 받지 않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며, 대우자동차 파업 때도 300명만 정리해고 하자고 했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노조집행부 때문에 1700여명이 해고돼서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실의 노동사회수석이라는 분이 우리가 왜 이렇게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양보, 잘못된 집행부 운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관광레저가 감사원에서 지분매각하라는 부실 자회사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긴 하나, 근본적인 원인은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은 있지만 그 문제를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당사자가 없는 위탁방침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철도공사의 직접고용을 주장하고 있고,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아무 때나 해고해버리겠다고 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규직을, 그래서 공사의 직접고용 정규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한참을 하니 노동사회수석님의 자세도 조금은 숙연해지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히 좀 전에 자신이 한 얘기는 잘 몰라서 한 것이니 취소하겠고, 자세한 얘기를 좀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도노조를 통해서 초기에 들었던 내용밖에 몰랐고 그 이후에는 우리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 갖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소관이 아니라고? 노동사회수석의 소관이 아니라고요?
노동자의 문제가 소관이 아니라는 노동사회수석님께서는 당장 면담을 잡기는 어려우니 자신과 다시 한 번 만나고 다시 면담을 잡아보자고 했습니다.

한명숙 의원님! 여성노동자의 차별에 누구보다 애쓰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총리로 임명되신 걸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자가, 특히 힘이 약한 여성노동자로서는 총리님을 비롯한 저희 노동자의 문제를 같이 풀어주실 분들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20대 여리고 여린 승무원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것까지 각오하고 국회까지 들어오기란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 노동자들이 왜 자꾸 투사처럼 변해 가는지, 이런 투사를 양산하는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총리로 임명되시면서 바로 이런 어려운 문제를 안겨드려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제발 이 나라의 총리로써 저희를 외면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006년 4월 20일
한명숙 의원님 면담을 요구하다 경찰서로 연행된 80여 명을 면회하러 떠나며 정지선 올림


사진출처 : 전국철도노조

이들을 해고한 철도공사 사장 이철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그래서 KTX 승무원 사건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어떤 이들은 KTX 승무원들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합니다. 바로 위의 편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대우자동차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 전 해고되었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희망자에 한해 전원 복직되었다는 뉴스를 들으셨을 겁니다. 그날 KTX 승무원의 강연 내용을 들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법률적인 절차를 밟아 합법적으로 투쟁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승무원은 자신은 인천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지도 몰랐다. 법대로 하라는데 법대로 하면 3년, 5년, 8년이 걸린다. 어느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무임금으로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겠어요. GM대우의 파업이 5년을 끌었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20명이 1,700명을 복직시킨 겁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많은 수가 다른 곳에 취직을 한 상황이라 실제로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는 아이 젖 달라고 우리가 삭발하고, 점거하고 불사르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승무원은 “다른 작은 노동조합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주니 행복한 편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서 저는 이 분들, KTX 승무원들이 참으로 예쁘다,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380명으로 시작된 KTX 승무원들의 싸움은 1년여가 지나는 동안 100명 정도의 승무원들만 남아서 싸움을 계속 해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 철도공사가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는다며 선전해 고시를 치르듯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아리따운 젊은(현재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모든 미덕을 갖춘)  아가씨들입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학생이 “모두 능력 있는 분들인데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찾아가지 않고 계속 싸우는 이유가 뭐냐?”를 묻자 “그렇게 하면 저 한 사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후배들, 동생들, 이 땅의 8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 다음 세상에 태어날 우리의 아이들은 또다시 우리처럼 불행한 일들을 계속 겪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런 사람들에게 감히 ‘집단이기주의’를 말하는 당신이 바로 이기주의자입니다.

오늘은 99주년을 맞이한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저는 이 날이 투쟁이 아닌 축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해마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뻬빼로데이라는 정체불명의 상업 파티들은 온갖 뉴스와 상업 자본의 호사를 누립니다. 그러나 철모르는 눈발이 펄펄 날리는 대한민국의 봄, 끝나지 않은 엄동설한이 지속되는 한, 이 땅의 여성들은 여전히 비정규직, 이등시민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 투쟁의 현장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1년 365일 중 하루만 여성의 날이 아니라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200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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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벌거벗은 여자 - 데스몬드 모리스 | 이경식 옮김 | 휴먼앤북스(2004)


영국 최초의 미술학과 교수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은 29세에 결혼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당시 관습에 따라 상당 기간의 연애 기간을 거쳐(약혼을 포함해서) 결혼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러스킨은 미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어 고대의 대리석 조각과 회화 등을 통해 여성의 신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성의 벗은 몸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심미적 관점에서 여성의 육체를 즐길 줄 알았다. 러스킨의 아내는 결혼 얼마 뒤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이유는 남편인 러스킨이 섹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 자신과 관계를 갖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관계만 갖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멀리 하려 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결국 러스킨의 아내는 신체검사를 받아 자신이 아직 처녀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결혼을 무효로 만들었다.

>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런던의 부유한 포도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캘빈주의자인 모친의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부친을 따라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여 미술과 문학에 대한 취미를 길렀고 그림을 배웠다. 부친의 넓은 문학적 취미와 낭만파 시인의 작품, 모친의 교육에서 성서를 접하면서 그의 문학적 경향이 굳어져갔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옥스퍼드대학 재학 중에 이 뜻을 버리고, 졸업한 이듬해인 1843년 낭만파의 풍경화가인 J.터너를 변호하기 위하여 쓴 《근대 화가론》(5권, 1843∼1860)의 제1권을 익명으로 내어 예술미의 순수감상을 주장하고 '예술의 기초는 민족 및 개인의 성실성과 도의에 있다'는 자신의 미술원리를 구축해 나갔다.

러스킨은 어째서 아내와 관계를 갖지 않았을까? 사실, 러스킨의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내의 사타구니에 난 털(음모)때문이었다. 고대의 대리석 조각상을 통해 여성의 몸을 심미적으로 관찰해온 러스킨이었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으로는 상류층 남녀는 혼전관계를 맺지 않았고, 그 자신은 여성과의 섹스에 대해 완전한 무지에 가까왔다. 그로서는 사랑스런 아내의 몸, 가장 아름다워야 할 곳에 남자처럼 숭숭 솟아오른 음모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러스킨은 이런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했고 이혼당했다.


<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
영국 체셔 테어스베리에서 성공회 사제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찰스 루트위지 도즈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다. 럭비학교에서 1951년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진학하여 수학, 신학, 문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모교의 수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성직자의 자격을 얻었음에도 내성적인 성격과 말더듬이 때문에 평생 설교단에 서지 않았다. 그의 성격은 괴팍했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엄격한 규칙으로 정한 일상을 고집스럽게 반복했으며 이를 일기에 꼼꼼하게 남겼다. 모든 일상을 기록하여 편지로 주고받았는데 약 9만 9천통의 편지를 보관하였다. 그는 글을 쓰면서 루이스 캐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우리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루이스 캐럴(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세 명의 어린 소녀들을 초대하여 한여름의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인 '앨리스 리델'은 일곱 살이었다. 청년 도지슨은 옥스퍼드의 수학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지슨이 어린 앨리스에게 유아성학대의 범죄를 저질렀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성을 극도로 혐오하던 사람에 속했으므로... 그는 여성에게 키스 이외에는 그 어떤 성적인 접촉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키스했던 여성은 대체로 열두 살이었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지슨은 사춘기 이전의 나이에 있는 어린 소녀들을 편집적으로 사랑했다. 도지슨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도지슨은 상급자의 딸인 앨리스 리델을 사랑했다. 그는 앨리스가 다섯 살에서 열한 살때까지는 늘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이웃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도지슨은 그 소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12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인 앨리스 리델에게 청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고, 일설에는 앨리스의 어머니가 도지슨이 앨리스에게 보낸 모든 편지를 불태우고, 앨리스의 일기장에서도 도지슨과 관련된 모든 페이지를 찾아 찢어냈다고 한다. 이들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어 나보코프가 소설
"롤리타" 를 집필했다는 이야기 역시 이들의 이야기만큼 유명하다. 이것은 여성의 성기 일부를 가리고 있는 음모가 남성들에게 어떤 인상과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간략한 일화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과 같은 엄숙한 금욕주의자(?)에게 여성의 음모가 미친 영향과 거의 같은 이유로 루이스 캐럴에겐 여성의 음모가 영향을 미쳤다.


여성 자신도 자신의 신체에서 2차 성징의 하나로 자라나는 음모에 대해 대부분 혐오의 감정을 갖는다고 한다. 물론, 남성인 나는 잘 알 수 없으나 나와 애 주변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남성 성기 주변에서 음모가 자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흡사한 혐오와 자부심이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성기 주변에 자라나는 음모는 음란한 느낌과 함께 사자의 갈기와 같이 힘과 성장을 의미하는 자부심을 품게 해준다

사춘기에 들어선 영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 따르면, 사춘기 진입 후 소년들과 달리 소녀들은 거미를 싫어하는 비율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음모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14세 쯤에는 이 비율이 더욱 증가해 거미를 싫어하는 소녀의 비율이 소년의 두 배로 껑충 뛴다.

언뜻 보기에 위의 연구 결과가 음모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의아해 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왜 그렇게 거미를 싫어하느냐는 질문에 소녀들이 한결같이 거미가 '역겹고 털로 뒤덮인'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19장 _ 여성의 음모" 중 333쪽>

어찌되었든 독실한 종교인과 진보적 자유주의자 모두 자연 그대로의 여성 음모가 매력적이라 생각한 것처럼, 음모 제거를 찬성하는 부류에도 금욕주의자와 쾌락주의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여성의 신체에 대한 남성들의 그릇된(?) 혹은 본능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즉, 여성의 몸은 아무런 이유없이 오해받고 있으며, 여성의 음모가 생리적으로는 그저 성장의 표징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이유는 의견이 제각각이긴 하지만) 남성들은 때로 각자의 성적 취향에 따라 여성의 음부를 제멋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는 오해받고 있다는 것이 데즈몬드 모리스가 이 책 "벌거벗은 여자"를 집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여자 몸에 대한 연구"이다. 원래의 책에서도 부제가 그리 붙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 책을 읽다보면 부제가 여러 이유로 적당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는 앞서 러스킨과 도지슨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가 여성의 몸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연구가 필요하단 것이고, 둘째는 저 부제가 아무런 꾸밈없이 이 책의 직선적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고지식해보이기 까지 하는 서술 방법에 합당하다는 것이다(데즈몬드 모리스의 이전 책들 가령 "털없는 원숭이"나 "피플 워칭" 과 같은 책들, 특히나 "털없는 원숭이"는 영국식 블랙유머가 적당히 가미된 산문 문체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 책 "벌거벗은 여자"는 상대적으로 건조해 보인다).

이 책 "벌거벗은 여자"는 모두 23장의 부분으로 나뉘어 여성의 신체를 연구한 결과를 담고 있다. 제1장 '진화'로부터 시작해서 제23장 '여자의 발'에 이르기 까지 저자 데즈몬드 모리스는 여성의 신체를 그 특유의 시선으로 샅샅이 훑어간다. 이때 데즈몬드 모리스 특유의 시선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이전의 연구서에서도 그러했듯 그는 인간을 인간이기 이전에 지구상에서 진화해 살아남은 독특한 영장류의 일종으로 연구한 것처럼, 여성을 그런 영장류의 암컷으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편리하게 보이는 이유는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물신화한다는 식의 여성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변명할 여지가 생기는 측면 때문이다. 나쁜 의미로 보자면 이 책이 여자의 몸은 보여줄지 몰라도, 여성의 몸을 보여주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종종 과학이란 말로 혹은 객관화한다는 뜻에서 자신은 어떤 주의나 주장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이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 책이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측면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여성의 신체를 해부학적인 방식으로 시작해서 사회적인 방식, 문화인류학적 방식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연구하고 있다. 데즈몬드 모리스와 이 책의 저자들이 구태여 '여성'이란 표현을 피하고, '여자'라고 표기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특별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제14장 '여자의 가슴' 편이었다.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 16세의 악명높은 비운의 황후 마리 앙트와네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앞서 루이스 캐럴과 지금의 이 일화는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의 유방이 현재까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리 앙트와네트의 유방이 아니라 그녀의 유방에 석고를 대고 본을 떠서 만든 황금잔이 전시되고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18세기 유럽을 뜨겁게 달궜던 것은 계몽주의 철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루소의 영향력은 참으로 막강했는데, 당시 귀족 출신의 부인이라면 누구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직접 젖을 먹여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루소의 "에밀"을 통해 수유는 비로소 귀족사회에서도 수용될 수 있었고, 이 논리를 확장시켜 국가의 아버지, 어머니로 자부한 마리 앙트와네트는 자신의 유방을 본떠 만든 도자기 잔에 우유를 담아 따라주는 행사를 치뤘다. 이런 국가적 의례를 통해 마리 앙트와네트의 유방은 루이16세의 유방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유방, 프랑스 국민의 유방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종종 여성의 유방 혹은 수유 행위는 국가적 관심사가 되곤 한다. 그것은 데즈몬드 모리스가 여성의 신체를 아무리 여자의 신체로 혹은 영장류 중 인간의 암컷으로 객관화시키려 할지라도 사회적인 시각에서 여성의 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신체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관리해야 할 신체, 어머니의 신체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는 종종 이중의 처벌 속에 놓인다. 단적인 사례가 여성의 수유행위이다. 수유행위는 국가 단위에서 미래 국민들의 보건과 건강을 위해 권장되는 사안이면서 사회적으로 엄격한 금기였다. 1975년 미국 여성 세 명이 마이애미의 한 공원에서 가슴을 내놓고 젖을 먹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죄목은 '부적절한 노출'이었다. 여성의 수유행위는 국가적으로 권장되는 일이면서 동시에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이런 체포관행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북미지역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모유 수유가 합법으로 인정받는다. 

데스몬드 모리스의 책들은 분명 우리에게 여성의 신체 혹은 우리들 지구상에 살고 있는 특이한 영장류인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사실은 에드워드 윌슨의 시각을 계승한 듯 보이는). 데스몬드 모리스가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을 쓰면서 여자 몸의 복잡한 원리와 신비를 모두 깨달을 수 있었다"고 자신있게 밝히고 있는 대로 여자 몸에 대한 복잡한 원리와 신비를 모두 깨달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을 최소한 '여자'라고 국한시키더라도 나는 저자의 이런 자신만만함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저자가 인간을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해서 지상을 지배하는 강자로서의 영장류로 인간을 파악하여 보여주는 시선은 분명 새롭고,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해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people이면서 동시에 Human이고, sex로서의 여성이 있으면, gender로서의 여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온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저자의 말대로 여자의 모든 것은 아니며, 더더군다나 여성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음모가, 여성의 유방이 한 가지 의미망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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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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