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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15 전기철 - 사격클럽 안내책자 한 귀퉁이에서 안락사한 물고기

사격클럽 안내책자 한 귀퉁이에서 안락사한 물고기


- 전기철

낯선 남자의 아이를 낙태한 후
동네 건달들이 수없이 건드려도 아이를 갖지 못한
누이는 물고기를 키웠다.

남태평양 어디쯤에서 왔다는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를 키우는 누이
먹이를 줄 때마다 귀향을 약속하며 장난감 배를 띄웠다.
지푸라기와 헝겊과 연필로 만든 작은 배

사격클럽에 응모하지만 한 번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어
우울증에 시달리는 누이
어머니가 키우는 고양이만 보면 언젠가는 안락사를 시키겠다고 장담하면서
킬러가 되고 싶어하는 누이
놀이공원에서조차 총을 쏴본 적도 심지어는 만져본 적도 없으면서 탕, 탕, 탕, 실눈을 뜨고서
손가락 총을 쏘는
누이는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제 안에 바다가 있어 늘 썩은 생선 냄새가 나는 누이는
바다를 베고 자기도 하고 토막 내 물고기에게 먹이기도 하고
저녁 무렵 고요한 물고기의 시간에 배를 띄우면서
애기 울음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죽일 기회만 엿본다.

<출처: 전기철, 작가세계, 2008년 겨울호(통권79호)>
- 1988년 <심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등이 있다.


*

개인적으로 시(詩)라는 것은 이미지와 내러티브 그리고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어떤 시는 이미지(image)의 시가 되기도 하고, 내러티브(narrative)의 시가 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시는 존재(being)의 시, 혹은 존재에 대해 말하는 시다. 다만 어느 성향이 좀더 강하냐고 할 때, 전기철의 <사격클럽 안내책자 한 귀퉁이에서 안락사한 물고기>는 내러티브적 성향이 강하다.

불임(不姙).

모든 것이 유전자로 치환되는 시대에 불임은 자신의 근거를 세상 어디에도 남길 수 없다는 허무(虛無)다.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는 것은 둘째고, 묘비명 하나 남기기 어려운 시절에 그는 존재의 흔적을 어느 곳에도 남길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사격클럽이란 그런 존재로 만든 세상에 대한 분노를 실현시킬 유일한 출구이지만, 이곳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남태평양’은 구원의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자기 안에 썩은 바다를 키우는 누이에게. 아무런 구원도 기대할 수 없는 누이는 그래서 아기 울음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안락사 시킬 궁리 중이다. 제가 먼저 죽어가고 있으며 이미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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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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