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 돌베개(2003)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1 .2. 3.

- 인간에 대한 탐구와 사례 연구로서의 열전(列傳)

윌슨은 인문학을 '인간에 대한 생물학' 이라는 식으로 정의한 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열전(列傳)은 한 개별적인 생물에 대한 연구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의 독서가 잡독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나마 비중있게 보는 것은 역시 인문학과 역사, 사회과학, 철학, 문학 분야에 집중되는데, 그 책들을 대상으로 정의해보자면 역시 그 핵심은 '인간을 다룬, 인간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역시 잡독할 수밖에). 윌슨의 정의를 빌자면 내 주된 연구대상은 인간이란 것인데, 그렇다고 거창하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한 인간, 인간마다의 특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편이다. 이런 방식의 독서에서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이 살았던 시대와 그 시대 상황을 이해하고 그 한 인간이 그 시대를 살아가며 처신한 삶의 흔적들을 조용히 되밟아 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인간의 뒤를 밟는 탐정이자, 동시에 우리들의 생태학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기본 탐독서가 된다.
 
우리에게 흔히 "열전(列傳) "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서 "사기(史記)" 중에서도 그 고갱이라 할 수 있는 중국고대사 인물 열전을 상상하게 된다. 그만큼 사마천의 사기 열전은 탁월하다. 그런데 정작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 본 이들 가운데 사마천의 사기에 감동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을 많이 보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사마천의 "사기"가  기전체(紀傳體)로 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기열전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많은 이들이 감동을 표하곤 한다. 사마천은 중국 전통의 사서인 "춘추"의 세계관을 계승하여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몇 가지 사실 중 하나는 사마천이 제후나 왕을 중심으로 기술한 세가(世家) 30편 중 상갓집 개로 불리었던 공자를 집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공자는 변변한 벼슬 한 번 올라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사마천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열전에 별도로 5명의 자객(조말, 전제, 예양, 섭정, 형가)을 다룬 "자객열전(刺客列傳)"을 통해 이들 협객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하고 있으며 역시 정사(正史)에서는 흔히 다루지 않을 인물들을 "유협열전(游俠列傳)"을 통해 다루고 있다. 사마천에게 있어 '협(俠)'이란 '무(武)'를 바탕으로 하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혹은 이해관계에 따르지 않은 의인(義人)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사서로 언급되는 까닭은 필경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한국적 열전의 탄생을 바라보며....

이 책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은 오랫동안 서울대 사학과 교수로 봉직해온 한영우 선생(현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의 정년을 기념하여 그의 동료, 제자 학자 63인이 고조선 시대 이래 우리 역사 속 인물 63인에 대해 저술한 책이다. 종종 정년 퇴임하는 교수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책들은 보기 보다 실속없는 것들이 많은데, 이 책의 경우는 그런 사례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이 책의 머리글에는 "역사 연구는 기본적으로 인물에 관한 연구라 할 수 있다"며 인물사 연구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간 우리 역사학계의 인물사 연구는 열전이라기 보다는 나열식 인물사전, 조선시대 인물들과 같이 사료를 구하기 쉬운 대상, 분단 문제로 인해 고대사 인물이라 할지라도 상대적으로 남한 출신 인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를 알고 있지 못했다. 걔중에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는 위인들도 있었고,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글을 처음 읽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제1권에서는 위만, 대흠무, 김헌창, 송유인(드라마 "무인시대"를 본 사람들은 아마 기억하실 수 있을 듯), 정서, 최해, 조준, 이문건 등이 그렇고, 제2권에서는 유희춘, 한교, 강후진, 신경준, 서명웅, 체제공(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 등장), 홍양호, 서호수, 이서구, 유신환 등이 그렇다. 제3권에서는 김병욱, 박주종, 김백선, 한상룡, 김진구, 손진태, 이종률이 또한 그렇다. 이 중에는 우리 고조선 시대로부터 현대사에 이르는 장대한 인물 열전 계보에 그 이름을 상재시킬 만한 존재인가 의아해지는 인물들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번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기만 되풀이해서 읽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인물 선정에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전혀 없다.

 

다만, 이 책을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비교해볼 때 몇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물론 고대의 제왕은 모두 정치가이자 동시에 정복자, 군인이었으므로 특별히 무인(武人)을 홀대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인물인 송유인과 김방경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 민족의 무장(武將)들이 거의 대부분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엄밀히 말해 송유인의 경우는 무장이라기 보다는 무인정권에 빌붙은 권세지향의 정치가라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단순히 구색맞추기 차원이 아니라도 한 시대를 대표할만한 인물들에 대한 고려가 좀더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사마천이 고대 중국사로 한정되는 인물을 다루기 위해 "사기" 130편 중 70편을 인물열전에 할애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보다 훨씬 긴 시간대의 역사를 다루면서 사기열전보다 적은 인물 열전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우기 앞서 말한 대로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역사 인물들에 대한 도서로는 사실상 최초로 대중의 시야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높아보인다.

 

그간 역사적으로 소외되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이 책의 장점은 더 있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들이 기초자료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학자들이라는 신뢰성에 있다.  더 나아가 이 책이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하여 집필되었음에도 기존의 역사학계 일반의 시각과 다소 다른 관점들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 서평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토정 이지함의 저서로 인정되어 오던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이 아닐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던지, 실학의 선구자로 의미를 재부여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시도들은 이 책이 한영우 선생의 정년을 기념하여 저술되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영우 선생은 "다시 찾는 우리 역사(경세원)" 등을 통해 우리 고대사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고자 노력해온 사학자이며, 그간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폄하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재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그간 고조선을 복속시킨 왕으로만 기억되던 위만을 '고조선을 고대의 정복국가로 중흥시킨 왕'으로 재조명하거나 그간 사대주의자로 인식되던 김부식을 합리성을 중시한 합리주의자로 격상시키고, 송시열에 대한 평가도 다시 내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맥락에서 보자면 싫으나 좋으나 우리 역사이고, 우리의 인물들을 구태여 우리들 자신이 폄하하고 훼손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의미도 되겠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해석 가능한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런 평가는 도전적인 평가이자 동시에 매우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이 지닌 미덕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이 지닌 미덕과 비교적 일치한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패배한 인물의 전기를 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옥균의 열렬한 숭배자였고, 훗날 친일파가 된 김진구, 한상륭 등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다루고 있는데,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등에 대한 글들이 그러하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느낌 소감은 기획서들이 모두 그러하듯 다루고 있는 각 인물의 저자들에 따라 글쓰기 방식이 고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중의 수준을 의식했다는 머리글이 있음에도 일부 글들은 전형적인 논문투 글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경향신문" 조운찬 기자의 평가("사기" 열전에서 보이는 생생한 인물묘사를 찾아볼 수 있는 글은 63편 중 '강홍립'과 '우장춘')처럼 생생한 인물묘사가 돋보이는 몇 편의 글들은 읽는 내내 새로운 감동에 젖어들게 했다.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란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에 따라 역사 속 인물들은  민중 혹은 사림 등과 같은 집단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계급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개인 혹은 영웅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 대상을 어떻게 보던지 우리는 역사가 곧 사람의 이야기임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바라는 것은 역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앞으로도 이런 기획이 계속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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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 溫良恭儉讓鎰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금이 자공에게 묻기를 “부자(공자)께서는 어느 나라에 가시든지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대해 듣게 되는데 이는 스스로 구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준 것입니까?” 자공이 답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겸양함으로써 얻으셨으니, 선생님께서 구한 것은 다른 사람이 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공(子貢, BC 520 ?~BC 456 ?)은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출신의 유학자로 공자가 위나라 망명시절에 문하로 들인 제자라고 추정된다. 그는 공문십철(孔門十哲) - 「학이」편 4장 소개 - 중 한 사람으로 재아(宰我)와 함께 언어에 뛰어난 재질을 지녔다고 한다. 성은 단목(端木)이오, 이름 사(賜)였다. 공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안회나 훗날 공자를 계승했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공자 문하에는 늦게 들어온 증자에 비해 자공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편이다.
그러나 『논어』에 등장하는 제자들 중 자공과 자로(子路, BC 543~BC 480)가 없었다면 『논어』가 지금처럼 생생한 재미를 선사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안회는 너무나 이상적인 제자였기 때문에 스승인 공자조차도
“안회는 내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선진」편, 3장>며 재미없어 했다. 자로는 공자보다 9살 아래로 제자 그룹 중에서도 최고 연장자이며 장자가 아쉬워했을 만큼 두각을 나타낸 협객(俠客)이었지만 자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무뢰한(無賴漢)이었으나 공자의 문하로 들어선 뒤부터는 순진한 양처럼 공자의 훈육을 따랐다. 비록 등장하는 횟수는 자로가 자공에 비해 앞서지만(자공이 35회) 두 사람 중 누군가를 주연급 조연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면 단연 자공이다.

가르칠 때는 좀 힘들지 몰라도 가르치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제자는 스승을 공경하면서도 뭔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제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 역시 늘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공에 대해 때로는 적당하게 야단치고, 때로는 자공의 자부심을 부추겨주기도 하면서 제자로서 자공을 사랑했다. 자공은 늘 공자와 대립각을 형성하지만 평생을 두고 공자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거두지 않았으며 공자의 생전에는 언제나 묻고, 또 물어가며 배움의 갈급함을 채워가는 제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에 자공이 빠진다면 시쳇말로
“공자왈 맹자왈”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엄청 재미없는 책이 될 뻔했다.

「학이」 10장에서 자공에 질문하고 있는 자금(子禽)은 『사기열전』에 공자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공의 제자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열전』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자공의 제자일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도 공자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공자 문하에 남아있던 유학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금은 성은 진(陳)이고 이름은 항(亢)으로 자공에게 묻고 있는 질문의 내용을 보면 성품이 자공 못지않게 외향적이며 도발적이었으리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다만 자공이 공자와 나눈 문답의 내용에 비해 자금의 질문은 질이 좋지 않다.

자공의 제자란 추측이 나오는 까닭도 공자의 직접 제자라면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공자가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그 나라 정사에 대해 지분거렸는데 이건 관직이라도 하나 구해보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투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공이 공자 생전에는 외향적인 성품과 이재(理財)에 밝은 탓에 가끔 공자의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공자 사후 3년간 무덤을 지켰고, 다른 제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3년을 더 남아 여묘했던 인물이라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자금과 자공은 격이 다르다. 자공은 생전에 공자는 허명(虛名)뿐이며 실제로는 제자인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자공은 스승 공자를 받드는 일을 한 번도 등한히 해본 적이 없었다.

“자공은 중니(仲尼, 공자)보다 낫다”고 숙손무숙(淑孫武淑)이 이야기하자 자공은 “궁실의 담장에 비유하면 나의 담장은 어깨에 미치므로 집안의 좋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장은 여러 길이므로 그 문을 열어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자가 적으니 그 사람의 말이 또한 당연하지 아니한가?”<「자장」, 23장>

「자장」편에는 숙손무숙이 두 차례, 「학이」 10장에 등장하는 자금(子禽)까지 등장해서
 '솔직히 말해보라며 자공 그대가 실은 공자보다 낫지 않느냐' 고 도합 세 번을 묻는 장면이 있다. 마치 예수가 체포된 직후 베드로가 첫 닭이 울기 전까지 세 차례 예수를 부인할 것이란 『성서』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인데, 자공은 단 한 번도 공자를 부정하거나 자기보다 낮춰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공은 도리어 성을 내며 “공자는 해와 달과 같아서 헐뜯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다”, “선생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계단을 놓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자공은 공자의 문하에 들어설 당시에도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젊을 적을 말고는 별도의 직업(관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요즘 같으면 스승이 제자를 기르는 일도 직업이 될 수 있었으나 춘추시대엔 가르치는 것만을 전담하는 직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지배계급에 속하는 귀족들만의 몫이었고, 귀족들은 실제 통치자였기 때문에 자기 자식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가르칠 여력도, 이유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공자는 최초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자공의 재력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자는
“사(賜)는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재화를 늘렸다. 예측하면 잘 맞았기 때문이다.”<「선진」편, 18장>라고 자공의 재산증식 능력을 평했다. 자공은 뛰어난 상인으로 공자의 유세를 후원했다. 공자가 열국(列國)을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위나라를 중심으로 놓고 그 주변을 순회했다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자공의 경제적 도움이 얼마나 중요했을지 추측해볼 수 있다.

“자공은 사두마차에 올라 기마행렬까지 어마어마하게 이끌게 했다. 비단 꾸러미를 예물로 가지고 다녔으므로 여러 제후들로부터 초빙되었으며 또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가 방문하는 나라의 왕자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대등한 예의를 그에게 베풀어야 했다.”

위에 나오는 내용은 『사기』의 기록이다. 자공은 공자가 열국(列國)을 유세할 때 공자의 물질적 후원자가 되었으며 제후들에게 선물과 같은 선심공세를 펼쳐 스승의 유세를 도왔다. 그렇다고 자공이 단순히 이재에만 밝은 인물은 아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노나라가 제나라로부터 침공의 위기를 겪을 때 자공의 다섯 나라를 돌며 유세한 결과에 대해 기록하고, 자공이 쌓은 부에 대해서는 별도로 「화식열전」에서 다룰 지경이었다.

“자공이 한번 유세를 떠나니, 노나라는 사직을 보존하고(魯國存), 제나라는 엉망되고(齊國亂), 오나라는 멸망하고(吳國亡), 진나라는 강성해지고(晉國强), 월나라는 패자되었다(越國覇).”


공자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은 자공이었다. 만약 공자가 자공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사후 공자 교단이 존속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질문은 반대로 공자의 존재가 없었다면 과연 자공이 기억될 수 있었을까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엄격한 사회였다. 비록 송(宋)대에 이르러 중국의 상인 계급이 급성장하기는 했지만 중국의 지배계급은 상인계급의 성장을 적절하게(?)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도리어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구와 달리 근대화, 자본주의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방해한 것이긴 하지만 봉건질서의 입장에서는 매우 성공적인 통제였다. 

춘추시대가 봉록과 정전제라는 경제 질서의 파괴로 인해 출현한 것이지만 여전히 상인의 지위는 귀족들의 지위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춘추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좌전』에는 이 시대 상인들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는데 귀족과 상인 사이의 맹세의 내용이다.
‘너는 나를 배반하지 말고, 나는 너의 물건을 강제로 사지(강탈하지) 않겠고, 구걸하거나 강탈하지 않겠고, 네가 장사에서 이문을 남겼거나 값진 보화를 소유하더라도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얼핏 보기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을 맹세로 남길 정도라면 실제 상인들의 처지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앞서 공자는 자신만의 학설을 가르치지 않고, 많은 것(六藝)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공자는 단순히 여러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것뿐만 아니라 누구나 차별 없이 가르친(有敎無類)<「위령공」, 38장> 스승이기도 했다. 공자는 스승에 대한 속수(束脩, 육포 열 개를 묶은 것)의 예(禮)만 나타낸다면 위로는 사마우(司馬牛) 같은 대부 출신부터 아래로는 세간의 낮은 평가를 받는 사람까지 가르쳤다. 자공 역시 상인 출신으로 공자가 아니었다면 학문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며, 훗날 제후들과 교류하며 유세가로서 『사기』에 기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공이 공자의 덕을 높이 흠모한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자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다시 다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쯤에서 간단하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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