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와 유방(전3권)』 - 시바 료타로 | 양억관 옮김 | 달궁(2002)


요시카와 에이지와 시바 료타로


책을 열심히 읽는 이가 아니더라도 재미삼아 "내 인생의 책 10권"을 선정하는 일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책 10권 중 하나는 틀림없이 "삼국지"에 할애해야만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처음 접하는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일어판 번역본이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국내에서 "삼국지"가 여러 차례 다시 번역되거나 평역되어 발간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황석영, 이문열 등 작가의 이름을 내건 삼국지가 있고, 다시 그 판본을 어느 것으로 하느냐에 따라 청년사판, 범우사판 등 출판사마다 삼국지의 저본을 어느 것으로 했으니 자기네 삼국지가 정본 삼국지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삼국지를 발간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삼국지 발간 붐은 요시카와 에이지가 뿌린 요시카와 에이지판 삼국지의 독소를 해독하기 위한 시도인지도 모른다. 일본식 역사 소설의 시작은 요시카와 에이지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완성자라 불리우는 사람은 바로 시바 료타로이다.

이 두 사람을 극명하게 가늠하는 것은 '요시카와 에이지가 책상 위의 원고지와 펜 하나로 소설을 탈고했다면,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트럭 한 대분의 자료가 필요하다.' 는 말이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에는 나관중의 원작엔 어디에도 없는 부분이 과감하게 삽입되어 있곤 한다. 가령, 유비가 낙양의 차를 구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장비의 도움을 받고 부용 낭자를 만나 처음 사랑에 눈뜬다는 식의 에피소드는 원작 삼국지엔 없는 대목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기억나는 분이라면 요시카와 에이지판 삼국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에서 당신이 만약 와츠키 노부히로의  "바람의 검심"이나 히데키 모리의 "묵공" 등을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당신은 본의든 아니든 시바 료타로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종종 일본의 만화가들이 만든 역사만화들을 읽노라면 그들의 치밀한 고증과 역사에 대한 관심에 놀랄 때가 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의 정경과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나는 그 어떤 역사책보다 "바람의 검심"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춘추전국시대의 묻혀진 사상 묵가(墨家)를 상상 속에서 구현해내는데 "묵공"이란 만화의 도움을 얻었다.

일본의 국사(國士), 시바 료타로
- 한국에서 사(士)는 선비를 의미하지만 일본의 사는 사무라이를 의미한다

대관절 일본의 만화가들은 어디에서 그런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것이 어느 한 작가의 공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세계 제1의 출판대국으로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고, 중고도서의 유통망 역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 한 번 출판된 책이 영영 사라지고 없어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출판문화가 많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일본의 출판문화를 따라가기엔 먼 얘기이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 대한 책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일본의 경우엔 외국의 저자가 "도쿄이야기"를 펴낼 만큼 풍부한 자료들을 비축해놓고 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트럭 한 대분의 자료가 필요하다. 설령, 직접 그 책을 소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어딘가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상상해낼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문화 콘텐츠가 비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문화가 형성되어야만 요시카와 에이지도 책상머리에서 펜과 원고지만으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그 길을 연 인물이 바로 '시바 료타로' 라 생각한다. 지난 1996년 시바 료타로가 73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사설을 통해 '국사(國士)가 서거하셨다'라며 그의 위치를 국가적 스승의 위치로 승격시킨 것은 고인에 대한 공치사의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시바 료타로. 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福田定一)'로 1923년 일본 오사카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오사카외대 몽골어과를 졸업하고, 산케이 신문 오사카 지사에 입사한 그는 처음엔 저널리스트의 길을 걸었다. 그의 문장이 건조하면서 힘있는 문체, 특별히 명문장이라 할 수는 없어도 쉽게 이해되고, 이야기 전개에 빨려드는 문체를 지니게 된 것은 그가 처음 문장을 가다듬은 곳이 신문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1955년 "페르시아의 환술사"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5년 뒤인 1960년 "올빼미의 성"으로 나오키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올빼미의 성"은 지난 1999년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일본 전국시대의 효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숙적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사이의 암투를 닌자(忍者)라는 존재를 통해 다룬다.


일본의 역사적 자부심 부흥

우리 역사에서도 정사(正史)가 있는가 하면 야사(野史)가 있듯 일본에서 닌자의 존재는 마치 우리의 '활빈도'와 마찬가지로 매력적이긴 하나 정사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거의 없는 존재들이다. 시바 료타로는 그들을 일본 문화의 한 가운데로 끌어낸다. 이외에도 그가 다루었던 역사 소재들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일본의 검성이라 할 수 있는 "미야모토 무사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여는 최대의 전투였던 "세키가하라 전투" 등등 그는 일본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그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인물상을 발굴해낸다. 시바 료타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966년 발표된 "료마가 간다"일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 역사소설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고, 키쿠지칸 문학상을 수상한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그가 어째서 그토록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는 일본의 최대 격동기였으며, 근대화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유신의 전반기를 살았던 일본의 지사(志士)이자 풍운아였다. 처음엔 존왕양이파로 출발했던 그는 친서양파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암살하기 위해 에도에 갔다가 그의 설득에 감화되어 오히려 가이슈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하신다면, 1894년 김옥균이 상해에서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홍종우가 도리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라. 이렇듯 사카모토 료마는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일본 역사를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들이 상상하고 좋아할 수 있는 인물, 일본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기백(氣魄)이 살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일본인의 정신 속에서 이런 기백을 부흥시킨 존재 셋을 꼽자면, 아마도 교진(巨人)이라 불리는 요미우리(讀賣) 자이언츠 구단과 시바 료타로가 재창조해낸 인물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신이라 불리운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의 아톰. 이렇게 셋을 꼽을 수 있다. 시바 료타로는 그렇게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을 부활시켜 놓았다. 기백(氣魄)! 우리 말로 '넋'이라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을 일본인들은 참 좋아한다. 백(魄)이란 한자에서는 어쩐지 같은 백(白)을 사용하는 박(迫)자의 느낌이 난다. 압도해오는 느낌이랄까. 도검(刀劍)을 숭상하는 민족이라 그럴지도....

앞서 일본의 역사만화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는데, 특히 일본 만화는 결말 부분에 가면 모든 것이 일본으로 환원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어 마지막에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맥빠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가령, 만화 "묵공"에서 주인공은 결국 중국에서 묵가의 정신을 펼치는데 실패하고 일본, 지팡구에 간다. 칭기스칸도 우연히 일본에 와서 한 수 가르침을 익히고, 몽골로 돌아가 천하를 통일한다. 일본만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은 진실을 가장하고 있지만 진실이 아니란 점에서 의사역사(疑似歷史)이고, 이를 부추긴 책임에서 시바 료타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시바 료타로는 일본의 역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대륙의 역사, 중국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다.

일본의 역사관과 동아시아 역사관의 차이
-민중을 어찌 볼 것인가?

"항우와 유방"을 읽으며 - 나를 민중주의자로 구분해야 하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 께름직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엑스 파일"의 주인공들만이 온세상이 외계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바보처럼 행복의 진구렁 속에 있을 때 이들을 구원해야만 하는 소수의 깨어있는 지식인 행세를 하는 것처럼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모두 신랑신부를 장식하기 위한 들러리들에 불과한 것처럼 그려진다. 어쩌면 그것이 일본의 역사적 전통에 해당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제대로 된 민중혁명, 민란을 경험하지 못한 나라 일본의 한계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왜 일본에 민란이 없었는가 하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도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일본 역시 수많은 민란을 거쳐 왔으나 일본 역사에서 민중이 주된 주체로 떠오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에서 민중은 주로 수동적인 존재로서 동원의 대상이 된 반면 우리의 민중이란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통해 주체적으로 무장한 경험이 있다. 즉, 조선시대의 예만 놓고보더라도 민중이 자발적인 무장을 통해 의병을 형성해 지배계급을 구원하는 사례가 많았으므로 그에 따른 문화 전통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일본의 전쟁은 철저히 내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많았던 반면에 우리의 전쟁은 철저히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 민중의 자발적인 동원없이는 지배계급이 지탱할 수 없었던 경험의 차이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인 차이로 작용한다. 그것은 현재 일본의 시민운동과 한국의 시민운동이 보여주는 형태의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 "항우와 유방"에서도 시바 료타로의 철저한 역사고증은 역시 돋보이는 대목이다. 시바 료타로가 중국의 고전들 특히 역사서들을 탐독해왔을 뿐만 아니라 실제 자신의 발로 중국의 역사 현장들을 찾아다닌다.

이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중요한 소재와 배경 중 하나로 등장하는 중국의 식량창고에 대한 묘사 역시 그의 이런 자료 수집 열정을 통한 것이다. 이 책 "항우와 유방"은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같은 의미에서 매우 재미가 없다. 이것을 시바 료타로의 소설의 한계라고 한다면 필부의 식견이라 미안한 이야기겠지만 그의 소설들이 일본의 이야기를 다루는 동안엔 재미있지만, 그의 소설이 일본이란 작은 섬나라를 벗어나 대륙으로 넘어가면 어딘가 한 귀퉁이가 허물어진 듯 느껴지는 까닭 그것은 시바 료타로가 사람의 바다, 즉 인해(人海)로서의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가 일본의 역사소설가 중 최고의 자리에 놓인다면 중국에서는 누구를 손꼽아야 할까? "나관중"을 그 자리에 놓는다고 해서 이견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책 "항우와 유방"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항우와 유방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 기억에 남는 인물들은 거의 없거나 기억에 남는다고 해도, 항우와 유방을 제외하고는 그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이가 없다. 만약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만을 읽은 이라면 중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인 진말한초의 역사가 밍숭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에게 수많은 고사들을 전해준 장자방 장량과 한신, 범증과 번쾌, 소하와 조참, 하우영과 전영 등등 이 시기를 주름잡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저 스쳐가는 풍문처럼 전해지고 만다.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시바 료타로를 나관중의 반열에 놓아도 좋은가? 하고 말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불리한 게임이다. 삼국지는 나관중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정말 맞는가 하는 문제는 셰익스피어가 과연 실존하는 인물이었냐는 질문만큼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앞서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민중의 차이로 이야기한 바 있다. 물론 조선은 전제왕정의 국가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소위 '백성'이라 불린 민중을 제외하고 기술되는 역사소설을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을까? "장길산"이나 "임꺽정"에서 민초들을 배제한 상황에서 이 역사소설들을 읽어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인해(人海)"를 제외하고 기술되는 역사소설이 과연 뚜렷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삼국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삼국지를 일견 세 영웅, 조조와 유비, 손권의 세력 다툼만으로 보는 사람은 삼국지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삼국지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바로 인해이다. 삼국지만큼 민심의 동요와 그에 따른 영웅들의 성쇠를 주도면밀하게 다루고 있는 역사소설도 매우 드물다. 유비가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제갈량과 결의 형제들만의 덕이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민심이었다는 것을 저자 나관중은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살펴보자. "항우와 유방"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주인공은 "유방"이 아니라 "항우"이다. 시바 료타로는 승자가 아닌 패자로서의 항우에 좀더 매력을 느끼고 있는 듯 보인다. 책의 전개 역시 유방이 어떻게 승리했는가하는 것보다는 항우가 어떻게 패배하게 되었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유방은 중국의, 혹은 중국 민중의 표상처럼 묘사되고 있으며, 중국의 민족성을 그대로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유방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마오쩌뚱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1927년의 호남폭동에 실패한 마오쩌뚱은 불과 1천여 명의 패잔군을 이끌고 호남성과 강서성의 접경지역에 있는 정강산으로 퇴각한다. 그는 이른바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면서 마오만의(사실은 이미 유방을 비롯한 중국 왕조 건설의 역사적 전통에 기반한) 농촌혁명전략을 구체화시킨다. 그는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홍군을 조직하고 `혁명 근거지`를 구축하고, 유격전술에 입각하여 지구전을 전개함으로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간다는 농촌혁명전략을 세운다.

인해(人海): 사람의 바다를 이해하지 못한 시바 료타로

사람들은 중국의 인해전술을 단순히 머리수로 밀어부치는, 사람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전술인양 오해하지만 그건 인해전술에 대한 대단한 착각이다. 중국의 인해전술은 단순히 사람의 머리수로 밀어부치는 전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어 사람의 바다에서 물고기처럼 유유히 헤엄치며 승리하는 전술이다. 미국 등 자본주의 제국들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국민당 군대는 결국 사람의 바다에 빠져 익사한 것이다. 이때 마오는 유방이고, 장쩨스는 항우가 된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시바 료타로는 유방보다는 항우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마오보다 장쩨스가 좀더 좋았던 모양이다. 시바 료타로를 읽는 것은 이렇듯 여러모로 재미있는 경험이다.

작가와 두뇌 싸움을 벌이며 어떤 대목에서 작가는 어째서 이런 표현을, 이런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심리적으로 겨뤄가며 읽을 수 있는 체험을 하도록 해주는 이는 오늘날 참 드물다. 분명한 건 나는 황석영의 삼국지보다는 이문열의 삼국지가 재미있고, 이문열의 삼국지보다는 고우영의 삼국지가 보다 더 재미있다. 그러나 내가 동의하는 시각은 이문열도, 고우영도 아닌 황석영의 시각(황석영의 삼국지에 황석영의 것이라 할 만한 시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것이 나로선 앞서 삼국지에 대한 나의 시각이 옳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나관중은 이미 민중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에 새로운 평역은 그에겐 사족일 것이기에)이다.

시바 료타로의 책은 재미있다. 그에게는 그만의 사관이 있고, 그가 펼쳐놓는 여러 장치들, 가령 역사적 고증이나 인물에 대한 그만의 해석 솜씨,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건에 대한 의미 재부여 등을 갖추고 있다. 만약 시바 료타로식 표현법을 빌어 말하자면 그와 나는 적이지만, 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나는 그대의 목을 베어주리라. 한편에서는 시바 료타로를 두고 국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서술에는 일본 중심주의가 두드러진다. 일본 만화들 혹은 문학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것들 중 하나는 선과 악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슬램덩크"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이 만화에 등장하는 그 어떤 악한 캐릭터도 궁극적으로 악하지 않다. "바람의 검심"에 등장하는 악한도 궁극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다. 그들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싸운다. 메이지 유신 당시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막부파의 무사집단 신선조(신센구미) 역시 그들의 명분을 가지고 일본을 위해 싸운 존재가 된다. 료마가 주인공이라도 신선조 역시 나쁜 이들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위해 싸운 것뿐이고, 죽은 료마도, 죽인 신센구미의 무사에게도 죄는 없다. 이것이 일본식이다.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은 모두 피흘린 근대화를 경험한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내전을 경험하며 근대화에 도달한다. 중국은 국공내전을 한국은 한국전쟁을 치뤘다. 그리고 일본 역시 존왕양이파와 막부파 사이에서 내전을 치른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내전과 일본의 내전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중국과 한국의 내전엔 체제 대결, 이념 대결의 요소들이 있는 반면, 일본의 내전엔 그것이 없었다. 이 말을 우리의 개화기에 접목시켜 보면 이렇다. 김홍집 내각은 친일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내각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김홍집을 친일파로 욕하지 않는다. 이때의 친일파라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와는 다른 의미이다. 척사파와 개화파를 두고 우리는 어느 일방을 편들 수 없다. 그들 모두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그들의 방식으로 애국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본과 한국, 중국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를 낳았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일본 역사의 악역은 외부로부터 온다
- 엘리트주의, 국수주의, 냉소주의

일본의 역사에서 악역을 담당해야 할 존재가 없다보니 일본의 역사에서 악역은 주로 외부에서 온 것들이 된다. 앞서 일본의 민란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실제 했던 민란의 주인공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天草四郞)'를 말한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 아마쿠사는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국가 일본이 상상해낼 수 있는 역사적 요수의 이미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는 외국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여 민란을 일으킨다. 기독교의 혁명적 요소들이라 할 수 있는 만민평등은 막부를 무너뜨리는 그들의 이념이 될 수 있었지만, 종교란 기본적으로 혁명의 이념으로 삼기엔 불완전한 것이었다. 결국 아마쿠사의 난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히 짓밟히고 만다. 일본에서 악은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다. 후지타 가츠히로의 만화 "요괴소년 호야"에서 절대적인 악으로 그려지고 있는 "백면인"의 존재도 일본 내부에서가 아닌 외부에서 들어온 악마적 존재를 일본의 소년과 일본의 토착 요괴들이 힘을 합쳐 물리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일본 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역사적인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는 것을 읽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갑갑증의 원천은 사실 '시바 료타로'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적을 가지고 작품 세계를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본 작가들 가운데 일부에게서는 확실히 "반민중적 엘리트주의"와 "국수주의" 그리고 세상 만사를 일종의 파워게임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냉소주의"가 물씬 풍겨난다. 나는 "항우와 유방"에서도 역시 그런 갑갑증을 느꼈다. 그가 죽은 뒤 일본에서는 시바 료타로상을 제정하여 뛰어난 저술을 남긴 작가들에게 이 상을 수여해왔다. 이 상의 1회 수상자가 "다치바나 다카시"였고, 제2회 수상자가 "시오노 나나미", 3회 수상자가 "미야자키 하야오"란 것을 생각해보면 시바 료타로상과 그 상의 실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바 료타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유추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시바 료타로의 진정한 계승자는 바로 "시오노 나나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일본 작가들의 세 가지 요소 "반민중적 엘리트주의", "국수주의", "냉소주의"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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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TAKEHIKO INOUE) | 대원씨아이

1994년의
어느 겨울, 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롯데월드로부터 올림픽공원까지 걸었다. 우리 세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87년 이후 세 사람이 살아간 삶의 방향은 각기 달랐다. 그 무렵 TV에선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고, 갓 발견된 "심은하"라는 앳된 얼굴의 탤런트는 장안의 뭇 남성들을 설레게 했다. 『마지막 승부』가 방영되던 시절. 나와 그 두 친구는 뭔가 쓸쓸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무엇도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나이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치 않은 것 가운데는 오랫동안 신념으로 삼아왔던 무엇이 사라진 뒤에 오는 그런 공황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들은
반드시 그 나이 때에 통과해내지 않으면 평생 동안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10대의 첫사랑과 40대에 경험하는 첫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듯 TV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우리에겐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한 10년쯤 전에) 케이블TV를 통해 재방송되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때는 이 드라마를 왜 그리 열심히 보았는지 의아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마지막 승부』에 열심이었던 시절, 내 동생들은 한참 어떤 만화에 빠져있었다. 『슬램덩크』,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대표작이자 사실상 장편만화 데뷔작이기도 했던 이 만화는 1990년 슈에이사(集英社)의 "소년점프"에 연재되면서 오늘날까지 1억 부 가까운 판매고를 올린 만화다. 물론 우리 집에도 한 질이 있는데 완전판은 아니다(완전판은 만화방에서 보았을 뿐이다). 

완전판과
구판의 가장 큰 차이는 일단 판형과 좀 더 좋아진 지질이다. 그 덕분에 구판에선 확인할 수 없었던 작가의 섬세한 터치와 선들이 제법 잘 드러난다. 물론 이전의 구판에 비해 완전판이란 말이 정확히 어떻게 달라졌고, 무엇이 좋아졌다고 말하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애장판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은 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한 세대 전에 히트했던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와 비교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점, 스포츠 만화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두 작품이 지닌 시간 차이다. 1968년의 『내일의 조』와 1990년의 『슬램덩크』는 그 시간차만큼이나 정확하게, 당대 사회의 변천, 젊은 세대의 의식 변화를 견주어가며 살펴볼 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일본항공(JAL) 요도호 납치사건은 일본 적군파의 최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 시대를 말하는 이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당시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우리는 <내일의 조>다"라고 스스로를 느끼고 표현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내가 읽은 당시 일본의 문화사, 청년운동에 대한 책자마다 한 쪽은 요도호 납치범이, 다른 한 쪽은 와세다 대학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 학생들이 벽에 쓴 낙서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일본 내에서 궁지에 몰린 학생 운동 세력들이 스스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표현으로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를 택한 것이다. 제목엔 ‘내일’의 조였으나 만화 속 주인공에게도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에게도 내일은 없었다. 그에 비해 1990년대의 대표작 『슬램덩크』는 탈이념 시대의 아우라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그 문제를 사회 구조에 빗대어 고민하는 법이 없다. 작가 자신도 그런 문제를 작품 속에 표현하고 있지 않다. 



『슬램덩크』
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정대만"이었다. 물론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윤대협"이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이름을 "대협"이라고 지을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마침 내 성(性)이 "전"가라 그리되면 자식 이름이 "전대협"이 될듯하여 고만 머리에서 지웠다. 윤대협과 정대만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 만화를 즐겁게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슬램덩크』와 『내일의 조』의 차이는 단순히 비장미, 비애감의 차이가 아니라 좀 더 다양다종해진 캐릭터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슬램덩크』는 천재적인 캐릭터에게도 다양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윤대협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천재라면, 정대만은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뒤 천재성보다는 노력하는 인물로 탈바꿈한 수재형 인물이다. 

물론 『슬램덩크』
에도 일본만화 특유의 과장된 어법으로 등장하는 천재들이 있지만, 그 천재들조차 허점을 지닌, 다시 말해 인간적이란 데 그 매력이 있다. 만화의 주인공격인 자칭 '바스켓맨, 농구 천재' 강백호. 그에게는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고 익히는 농구센스라는 재능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재능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와 어설픈 실수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사실 아마추어
야구 못지않게 학원 스포츠로서 농구 역시 꽤 오랜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연세대, 고려대라는 전통적인(재벌에 비견할 학벌이란 점에서 더욱더) 양대 라이벌 사이에서 일종의 마이너리거였던 중앙대, 허재와 강동희를 주축으로 한 중앙대 농구는 현실 속에 나타난 북산고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선한 경험이었던 거다. 이들의 출현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재현되지 못할 충격이었다. 그 무렵, 학교 체육 시간에 레이업슛을 배우는 과정이 있었다. “슬램덩크”에서는 이른바 ‘풋내기 슛’이라고 해서 가장 기초적인 슛 동작을 말하는데, 나는 워낙 운동 신경이 없는 탓인지, 핸드볼조차 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작은 손  때문인지 몰라도 슛 성공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강백호가
농구를 하게 된 시초는 북산고 부동의 센터 채치수의 여동생에 혹한 때문이지만, 실제로 그 자신을 바스켓맨이라고 부르며 농구에 집착하게 만든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호쾌한 슬램덩크에 반한 탓이었다. 농구에 천부적 센스를 보이며, 슬램덩크를 작렬시키는 백호조차 농구 입문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풋내기 슛', 바로 레이업 슛인데, 농구천재를 자청하는 강백호는 비록 엄청난 점프 능력을 가졌음에도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레이업 슛을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무리 멋진 슬램덩크도, 레이업 슛과 마찬가지로 2점에 불과하다. 고난이도 기술인 슬램덩크를 할 줄 아는 그조차도 성공하기 위해선 먼저 기초인 레이업슛부터 연습해야 한다는 작은 교훈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백호는
바로 그 풋내기 슛을 하루에 천 개씩(맞나?) 연습한다. 그러고 보니 일명 슛도사로 불렸던 전성기의 이충희 선수조차 연일 계속되는 경기 시즌 중에도 슛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백 개의 슛을 던졌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백호는 거듭해서 레이업 슛을 연습하며 스스로에게 되풀이 한다.

"왼손은 거들 뿐."

그는
이 평범한 한 가지 깨우침을 얻기 위해 매일 같이 무수한 실패를 경험한다. 사람들은 ‘깨우침’이란 말을 손쉽게 내뱉지만, 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이토록 어려운 말이다. 동양에선 무언가를 배운다고 말할 때 한자로 ‘습(習)’이라 쓴다. 깃우(羽)변에 백로(白鷺)를 의미하는 백자를 쓴 말이다. ‘습’은 백로 새끼가 둥지를 벗어나 비행하기 위해 날갯짓을 연습하는 모양을 뜻하는 한자어다. 만약 백로 새끼가 날갯짓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다면 목숨을 건 최초의 비행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동양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깨우친다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안에 깃들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백호가 평범한 점프 슛을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되새기는 건, 머리로만 알고 몸으로 알지 못하기에 그것이 아직 완전한 배움, 완전한 깨달음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손쉽게 마음을 다스리라고 충고하지만, 그렇게 충고하는 이조차 마음의 평화란 삽시간에 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은 안다는 건 때때로 허망한 일이다. 우리가 반드시 아는 데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종종
글을 쓰고, 공부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현학은 물론, 조금이라도 멋지게 문장을 꾸며보고 싶다는 욕심이야 누구에게나 잠재된 욕망이다. 그것은 마치 탄알을 잰 권총의 팽팽한 방아쇠처럼 당겨져 있다. 나는 학교에서 유도를 배운 적이 있고, 프로 복서였던 친구에게 권투를 배운 적이 있다. 우리가 올림픽에서도 본 적 있는 것처럼 유도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메어꽂는 화려하고 호쾌한 기술들이 있다. 하지만 유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메어꽂는 기술을 배우기 전에 먼저 자신이 메어 꽂히는 걸 배우도록 한다. 그것이 낙법이다. 유도에 입문하는 사람 누가 되었든, 도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 가장 정성스럽게 배우는 것이 바로 낙법이다. 낙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는 남을 메어꽂을 수도, 자신이 메어 꽂힐 때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권투를 배울 때도
1라운드 3분간 쉬지 않고, 풋워크를 하면서 계속 주먹을 뻗을 수 있는 기초 체력부터 다지게 한다. 이때 주먹을 뻗는 것은 남을 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멋진 스트레이트, 속사포 같은 잽, 유도탄처럼 휘어들어가는 훅, 상대의 턱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어퍼컷을 배우는 건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다. 주먹을 계속 내뻗는 것조차 남을 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맞지 않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맞든 안 맞든 내가 맞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헛손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추어는 라운드 당 3분, 3라운드 경기를 뛴다. 링 위에 단 한 번이라도 서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안다. 마치 스키를 처음 배우는 이가 리프트에 오르기 전 밑에서 바라본 입문자 코스용의 완만한 슬로프처럼 링에 오르는 순간, 슬로프는 천애절벽이 되고, 사각의 링은 내가 주먹을 휘두를 땐 태평양 같이 넓고,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올 땐 사방이 막힌 벽 같다. 그런 건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가장 확실한 깨달음은 무용수의 몸처럼 가장 정확한 동작을 몸으로 깨우치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소설가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했던 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 말만큼은 뇌리에 박힌 듯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누구든 희망도, 절망도 없을 리 없다. 왜냐하면 이 말에서 중요한 건 희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감정이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에 있다. 희망도, 절망도 평생을 고민해야 떨쳐낼 수 없는 것들이고, 그런 사념들을 앞에 두고 고민하느라 멈춰있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나아간다. 물론 나 역시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았으니 무어라 할 수는 없으나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있는 법이다. 앞서 간 이들의 궤적이 있기 때문이다.

『슬램덩크』
는 마치 나관중의 삼국지가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에게 각각 오관돌파와 장판파 전투를 보여주듯 주요 인물들 저마다에게 각각의 에피소드를 준비시켜 놓고 있다. 강백호, 서태웅, 송태섭, 채치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온다. 부상 끝에 농구를 포기했다가 다시 농구로 되돌아온 사내 ‘불꽃 남자’ 정대만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그는 북산고를 이끄는 중요한 경기에서 자신의 체력이 바닥나 백업 수비도, 커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결정적인 순간,
대만에게 농구공이 패스된다. 그는 볼을 잡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난 여기 서서 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정대만은
그 자리에서 슛을 날린다. 농구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서서히 하강하고 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정확하게 꽂힌다. 그는 지금 현재 코트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일을 했다. 이런 정대만의 모습은 순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대만은 '불꽃 남자'라는 그의 별칭에 어울릴 만큼 농구에 대한 동경과 증오를 오갔다. 그의 동경이 순수한 만큼 증오도 컸다. 그는 순수했으므로 아름답다. 중학시절 그의 팀이 결승전에서 뒤지고 있을 때 정대만은 공을 잡으려다가 넘어졌다. 그때 그를 주목해서 지켜봐주던 안 선생이 말한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
 



그는 동경과
증오 사이를 방황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슬램덩크”의 여러 주인공들 중 유독 정대만을 좋아하는 이유다. "Dum vita est, spes est.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내가 편지 말미에 종종 서명 대신 쓰는 글이다. 청춘의 어느 시기에 나는 건너야만 했던 강들을 자신 있게 건너지 못한 적이 있다. 그로인해 대신 다른 많은 것을 떠나보낸 경험도 있다. 물론 『내일의 조』와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비장한 대사들이 결코 촌스럽거나 우스워 보이지 않던 시절의 『내일의 조』들은 이제 『슬램덩크』 세대의 코믹하면서 가벼운 자세에 대해 어째서 너는 나처럼 비장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세대가 그대들은 어째서 그리 비장한가를 되물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나온 청춘의 고민을 현재의 청춘들이 똑같이 붙잡고 있다는 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모양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슬램덩크가
걸작인 이유. 그건 삶의 자세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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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최종병기 그녀



다카하시 신을 아는 만화 매니아들이 많을 텐데,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약간 우스운 일이 될까? 가끔 남성성, 여성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남성성은 이렇다, 여성성은 이렇다고 거칠게 규정하거나 규정당할 때 약간 마음이 아파질 때도 있다. 가령,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내가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왕따 당하는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 점에서 페미니즘 역시 선택적 사고라는 것은 일견 불행하면서 다행한 일이다. 가령, 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지만 그 대의에 너무나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넘겨두고라도 남성성, 여성성이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글쎄, 최소한 만화책을 고르는 취향에서만큼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취향 분화가 확실히 되는 분야가 있을까? 물론 그 장벽이 남성과 여성의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변화해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만화계의 장벽은 브리티쉬 오픈에서 여성 골프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큼이나 높다. 어제와 그제 머리맡에 놓고 읽은 두 권의 만화책은 나에게 남성을 위한 순정만화도 존재하는구나 하는 편견 아닌 편견, 스테레오 타입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최종병기 그녀』의 작가 ‘다카하시 신’의 초기 단편집 『좋아하게 될 사람』과 『안녕, 파파』 두 권이었다. 『최종병기 그녀』의 첫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다카하시 신이란 작가가 분명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잠시 후 남자일 거라고 생각을 수정했다(실제로도 '남자'였다). 그런 착각을 했던 까닭은 다카하시 신의 독특한 그림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남성적 문체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분명 만화에 존재하는 남성적 그림체보다 명확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에 있어서 남성적 그림체와 여성적 그림체는 확연히 구분될 만큼 달랐다.

그 차이는 고우영 『삼국지』의 그림체와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캔디』의 그림체가 다른 것처럼 확연한 것이다. 물론 국내의 일부 여성 작가들(『테르미도르』의 김혜린 같이)이 프랑스 혁명 과정을 다루는 만화를 그리거나,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이 그간 남성적 주제로 알려져 왔던 역사 속의 권력 투쟁, 혁명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림체에 있어서만큼 전형적인 그림체를 유지하는 편이다. 가령 얼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눈동자, 치렁치렁하는 머리카락,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 등등 말이다. 물론 다카하시 신의 그림체는 기존의 여성 순정만화체 그림과는 또 다르다. 어딘가 비어 있는 듯 남아있는 여백,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흑백 모노톤과 끝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가늘게 이어지는 선, 스크린 톤은 거의 생략하는 등 적게 표현하여 오히려 상큼하고 신선한 느낌이 인상적인, 어딘가에서 본 듯한 정겨움이 묻어난다. 마치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의 눈길을 피해 공책에 몰래 그린 만화의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의 그림체가 남성적인 느낌은 아니다. 물론 등장하는 여성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나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의 근육은 사라지고, 여성적인 선은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작가가 금방 남성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캐릭터 표현에 있어서 숨길 수 없는 남성적 시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신의 대표작 『최종병기 그녀』를 보자. 제목부터 참 과감하다. "최종병기 + 그녀"라니,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평범한(?) 남자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받은 혹은 엄마 몰래 숨겨둔 용돈을 챙겨 가장 먼저 군것질을 하고 조금 지나서는 건프라를 사거나 마크로스, 밀리터리 플라모델들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고, 형, 누나, 혹은 친구네 집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과월호를 읽거나 거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발견하여 그에 대한 설정자료집을 사거나, 복사하고 인터넷으로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이때의 최종병기란 무릇 거대로봇군단이거나 그도 아니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뉴타입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라니 게다가 그녀는 이런 말이나 지껄여대는 소녀다.

"왜 나는 당신에게 상처만 입히는 걸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여자라서 미안해"

주인공 소녀는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유방을 달고 다니며 유사시엔 앞가슴을 미사일처럼 발사하는 아프로다인이나 비너스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여성주의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게 그려지는 만화체에 비해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고, 개조하여 병기화해가는 과정 자체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고 소외당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교실 뒤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가와서 쪽지 한 장을 놓고 수줍게 교실 뒤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소녀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쟤랑 나랑 같은 반이었어? 하고 되묻고 싶을 만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다. 요새 경제 이야기하면서 다들 성장 동력, 성장 동력하는데, 우리 삶에 있어서의 성장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도 한 때는 뭐뭐 했다"는 식의 대사나 후일담을 늘어놓는 나이가 되어간다. 어떤 사람은 군대 시절 이야기를, 어떤 이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선배 뻘 되는 386 세대들(엄밀히 말하면 나도 그 끄트머리쯤 있는지도 모른다. 70년생, 89학번, 30대)이 이제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다니는 지금, 나의 유년 시절은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나는 요새도 밤마다 누군가에 쫓기는 꿈을 꾼다. 대개 이런 꿈의 할머니 식 해몽은 '키 크느라 그런다'는 것이다. 자, 그대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라. 정말 즐거웠는가? 아니면 고통스러웠는가? 누구나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친구들에게는 내 과거는 이랬었지, 이렇게 화려했거나 이렇게 고통스러웠거나 상관없이 과장하게 된다. 말할 때는 금방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지만 돌아서고 나면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를 잘 기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아름다운 유년만이 존재했을까? 『최종병기 그녀』의 두 남녀 주인공(슈이치와 치세)이 만난 세계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고, 결국 치세는 최종병기로 개조된다. 과연 그녀는 나는 아직도 치세 그대로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다카하시 신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SF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는 듯 보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라 할 만큼 설명하지 않는다. 치세가 어떻게 최종병기가 되었는지 실제로 그녀가 최종병기의 위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부분은 죄다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병기 그녀』에서 <에반게리온>이나 기타 SF물들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종종 이런 부류의 SF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만들어 논 가상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그 설정들을 달달 외우는 것을 취미로 한다. 하지만 『최종병기 그녀』는 그런 류의 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남성들을 위한 순정만화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만화의 여주인공 치세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카하시 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개의 여성 캐릭터들은 종종 남성들보다 강인하지만(특히, 성적 접촉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에게는 유달리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자극적이라는 측면에서) 그 외의 경우엔 무척이나 순종적이고, 다소곳하다. 물론 이 부분에 남성 성 판타지를 자극한다고 한 마디 해놓으면 아주 편하지만, 그건 또 너무 쉬운 접근법이다. 다카하시 신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분명 성(sex)의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어린이"와 "어른"을 가르는 구분 근거는 섹스다. 어른이란 말의 어원이 되는 '어르다'란 말 자체에 이미 '섹스하다, 남녀가 교합하다'는 뜻이 있다. 결혼, 즉 공인된 섹스는 성인식의 최종 단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 동력 혹은 넘어서야 할 고개들 중 하나는 분명 '섹스'다. 『최종병기 그녀』는 일종의 성장소설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성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요소들은 군데군데 적절히 깔려 있다. 아무리 십대 청소년들이 까질 대로 까졌다 한들 벌건 대낮에 러브호텔을 당당하게 들락거리는 어른들의 성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입으로는 숱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녀석들의 태반이 실제로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본 경험들 역시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친구들과 '오줌멀리 누기' 경쟁에서조차 지고 싶지 않은 남성들의 괜한 경쟁 심리가 만들어낸 우스운 결과다. 



난 정말 어렸을 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고,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땐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며 그 뒤론 줄곧 어서 시간이 흘러 자연사하게 되길 바라고 있는 중이다. 어른들의 세계, 그곳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모든 것이 부정해보였고, 부조리했다. 학교도 전쟁터였지만 사회는 그보다 더욱 악랄하고 끈질긴 전쟁터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전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람들이 낙오하고 죽어갔다. 이런 남자 아이에게 최종병기는 누구였을까? 그네들이 매달릴 수 있었던 최종적인 지지대는 누구였을까? 친구들과의 우정 아니면 사랑이다. 우리들에게 사랑은 언제나 지독하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혼란일 수밖에 없다. 치세와 슈이치가 왜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가? 왜 치세의 전투경험이 축적되어갈 수록 그녀의 자아는 붕괴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가? 왜 그녀가 사회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느낄까? 불행하게도 그것이 성장이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비평가들이 지난 1980년대의 호러 무비 혹은 슬로터 무비들을 평할 때 십대의 성적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크림>에 등장하는 호러 무비의 원칙처럼
"첫경험을 한 여자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사랑하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갈망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비참한 결과이지만, 마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매우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참호(우리의 성격갑옷) 밖으로 방심하여 고개를 내밀면 순식간에 저격당하고 만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바보취급 밖에 받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전쟁이란 것을 무시해버린다 하더라도 실제 고교생의 생활이 절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중 누가 있는가? 그들의 상황이 혼란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는가? 몸은 이미 성장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공공연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사회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하다. 사랑하면 상처를 주게 된다. 그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혼란이고, 혼돈이다. 관계를 맺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자아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불완전한 자아로서 결핍된 상태에서 만나 사랑한다.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으나 이런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란 매우 어렵다. 이들의 사랑이 혼돈스럽고, 때로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나는 이 만화책을 도서대여점에서 읽었는데, 실제로 고등학생이 빌려가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는 첫사랑의 열병이 지나갔을 법한 나이의 사람들이 도리어 열광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에겐 이들의 관계를 제법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일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길 위의 인생(life on the road)'인 것을, 어차피 길을 가야하는 사람에겐 터널도, 길의 일부이일 수밖에 없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류는 오로지 방황을 통해서만 치유된다." 좋은 성장 소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섣부르게 회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끝내 백조가 될 수 없는 미운 오리 새끼들도 있기 때문에…. 슬프게도 어른이 된다는 건, 백조가 아니란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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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원래 이 리뷰는 다카하시 신의 단편집 『안녕, 파파』와 『좋아하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인데... 방향을 잘못 잡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냥 『최종병기 그녀』를 중심으로 쓴 다카하시 신의 작품론처럼 되어 버렸다. 어쩜 좋냐? 흐흐, 여러모로 우습게 되었다. ^^ 그럭저럭 수준작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최종병기그녀>는 나에게 대단한 감동을 준 만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도 전권 다 가지게 되었고, OVA 애니메이션 DVD도 소장하고 있는데다가 작가인 다카하시 신의 초기단편집들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인연일지 모르겠다. 치세!(흐흐, 게다가 지금 트위터의 아이콘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종병기 그녀>의 상대역이자 나레이터인 '슈'다. 치세의 사랑을 한껏 받은 덕분에 결국 지구멸망의 날까지 살아남은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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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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