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Salvador)
감독 : 올리버 스톤
출연 : 제임스 우즈
제작 : 1986 영국, 미국, 122분

올리버 스톤의 실질적 감독 데뷔작 <살바도르>

올리버 스톤의 감독 데뷔작은 1981년의 공포영화 <악마의 손(The Hand)>이었지만, 그를 할리우드의 이단아, 숨겨진 뇌관으로 만든 데뷔작은 <살바도르>였다.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작업들과 그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문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조망함으로써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자, 미국적이지 않은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현대사의 명암을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런 감독은 아니었다. 그의 데뷔작인 <악마의 손>은 컬트적인 구성이 돋보이긴 했으나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나 인정  받는 작품이었고, 그는 일찍 감독 데뷔를 했으나 이후엔 감독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로 더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감독상을 받기 전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로 먼저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와 <스카페이스>, 마이클 치미노와 <이어 오브 드라곤> 등을 촬영하며 전형적인 장르영화에 충실한 각본을 썼다. 이 무렵 그리고 이후에 다소 약화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인종차별적인 묘사와 지나친 폭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한 때 한국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이들에게 한국적 인권 상황을 생각하게 해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지금은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리버 스톤 자신도
“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국수주의자였으며 총을 숭배했다”며 당시 자신의 문제점을 시인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새로운 감독 데뷔작(?)이 된 <살바도르>는 그런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종군 기자 리처드 보일(제임스 우즈)에 투사해내고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보일은 한때는 그나마 잘 나가던 카메라 기자였고, 영화 <킬링필드>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드니 쉔버그와 함께 캄보디아 취재 기자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냉소와 좌충우돌하는 기질 때문에 그를 고용해주는 통신사 하나 없이 시시껄렁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아내는 넌덜머리나는 결혼 생활을 끝장내버리고, 그는 밀린 아파트 월세에 쪼들리다 못해 통신사에 전화를 해대며 취재거리를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엘살바도르 - 바나나공화국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결국 리처드 보일은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내전이 한창인 엘살바도르에 간다. 이 영화는 엘살바도르 내전(1980-81년) 당시의 종군 기자였던 보일의 자서전적 기록을 재구성한 영화다. DVD에는 그의 실제 회고 일부가 담겨 있지만 아쉽게도 자막이 없다. 영화 초반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된 배경이 되는 엘살바도르는 어떤 나라인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엘살바도르는 1856년 독립하지만,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었던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꿈은 미국과 같은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염려한 영국과 미국, 그리고 나머지 유럽 제국들의 방해, 내부적으로는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지주계급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종속을 강화해나간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약소국들을 일컬어 '
바나나공화국'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유나이티드 프루츠와 같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냉소 섞인 풍자이다. 미국과 이해를 같이하는 소수 지주계급은 부를 축적하여 전국토의 56%를 14개 문벌에서 차지할 정도로 엘살바도르의 빈부 차는 극심했다. 결국 1932년 농민을 이끌고 파라분도 마르티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과는 농민군 3만 명의 참살로 끝나고 만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집단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 출신으로 과거 반란을 주모했던 혁명가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저항, 아니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오랜 역사적 연원을 지니는지 알 수 있다.


-> FMLN(Frente Farabundo Marti de Liberación Nacional)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 해방 전선은 1980년 8월에 4개의 게릴라가 모여 결성한 무장 혁명 조직으로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익 쿠데타세력에 맞섰던 게릴라 저항조직이다. UN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엘살바도르 내전은 18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지난 2009년 FMLN은 항쟁 20년만에 엘살바도르 대선에서 승리하여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전체에 커다란 자극을 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쿠바가 소모사 정권을 전복시키는 혁명에 성공했고, 베트남이 거대한 코끼리인 미국의 밑창에 구멍을 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란에서는 팔레비 정권이 강력한 비밀경찰과 미국의 지원을 물리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런 연이은 혁명의 성공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1970년대부터 엘살바도르 안에서도 군부독재에 대한 좌익 게릴라 조직의 저항이 시작된다. 그리고 1980년 분열되어 있던 게릴라 조직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3월 로메로 대주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엘살바도르 내전은 더욱 극렬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FMLN은 1983년에 이르러서는 엘살바도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세력으로 거듭나지만 그 와중에 엘살바도르 군부는 '
죽음의 군단'이란 퇴역군인과 치안경찰 등 우익 민병대를 조직해 무수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




기자 정신과 보여주
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국 언론

영화는 그런 시대 배경 속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FMLN의 결성과 로메로 주교의 암살, 새로운 람보 - 레이건의 등장이란 극적인 순간의 엘살바도르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우즈는 그의 연기사상 거의 최고의 연기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 자신이 리처드 보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단했다. 영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의 소국 엘살바도르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지배하는가를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대단하단 생각이 들만큼 잘 지적해내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한때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을 하야시킬 만큼 대담한 비판정신과 공정성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의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교묘하게 자본의 검열을 받는가를 살필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군사적 패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내부의 전쟁에서 패한 것, 언론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 고도의 정치전, 심리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군사적인 패배로 생각지 않는 까닭은 미국이 세계 도처의 전쟁에 참전한 이래 거듭되는 그들만의 산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기실 이런 전통은 인디언 헤드 헌터식 산술법이란 지극히 미국적인 산술법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 헤드헌터들의 방식, 인디언 머리 가죽을 벗겨오면 가죽 당 얼마씩 달러를 지불하는 것 말이다.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귀를 잘라 수집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국은 전사자의 시체 수로 전투의 승리를 가늠한다. 미군 전사자보다 많은 베트콩을 죽인 전투라면 그 전투는 승리한 것이고, 이런 식의 전투에서 미국은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보일은 엘살바도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지만, 베트남전 이후 새로운 보도 정책과 검열 방식을 채택한 미국에서는 취재는 가능할지 모르나 이를 보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종군기자들의 사망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이제 미군을 수행하는 종군기자들은 전쟁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되거나 에어컨디셔너에 의해 기온이 조절되는 안락한 브리핑 룸에서 미군 보도통제관이 전해주는 뉴스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매번 최고의 민간인 학살 수치를 갱신하는 미군의 전투 수행 방식을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과학적인 첨단 전쟁으로 인식하게 된다. 미군은 그네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줌으로써 남북전쟁 당시 브로디의 사진처럼 전쟁은 일어났지만 단 한 명의 전사자 시신도 발견할 수 없는 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보일은 미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파티 석상에서 이런 기자들을 한껏 조롱한다. 그러나 보일 자신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우익 지도자에게 밉보여 자신의 친구인 수녀일행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일을 겪는다.


엘살바도르와 광주, 1980년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988년에 보았다. 87년의 후폭풍을 겪고, 88올림픽을 앞둔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된 상징으로 코스타가브라스(Constantin Costa-Gavras)의 영화 <Z>와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를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80년 5.18 광주로부터 8년 뒤에 다시 보는 1980년 엘살바도르의 상황은 광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극장의 어두운 공간에서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광주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은 수녀들의 시체가 어둠 속에서, 흙 속에서 발굴되어 나오는 장면을 보며, 나는 욕지기를 느꼈고, 광주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둔덕 속에 묻혀있을 시신들이 떠올랐었다. 레이건의 등장이 전혀 다른 새로운 미국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 이래 지속되어 온 미국의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1980년의 봄은 그런 미국의 저강도전쟁이란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소리 없는(?) 학살들이었다.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전쟁이고, 학살이었으며, 단지 그 나라 독재정권이 한 짓들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 이래 직접 개입하는 방식 대신 그들의 하수인을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리처드 보일은 엘살바도르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하여 살바도르를 빠져나오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달한 직후 국경감시대에 의해 그 여인은 다시 엘살바도르로 되돌려 보내진다. 그녀를 실고 떠나는 국경감시대 차량을 향해 보일은 외친다.
“너희들은 되돌려 보낸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영화 역시 올리버 스톤의 작품들에 대해 쏟아지는 일반적인(인종 편견적이라거나, 미국 비판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미지의 미국, 인권국가, 자유로운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증대시키는데 이바지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 영화인들 혹은 감상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 우리는 이 영화보다 조금 더 나은 영화를 만들었는가? 만들고 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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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야만 사이의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

『진보와 야만』을 읽기 전에 들었던 두 가지 생각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의 책 『진보와 야만-20세기의 역사』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보와 야만'이란 시선으로 20세기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태적 관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파헤쳤던 『녹색세계사』(2003, 그물코)를 통해 인류의 환경파괴 역사를 진지하게 담아냈던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아마 서유럽과 북미의 잘사는 나라들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일 것”
이라고 예측한다. 뒤이어 그는 “이들과 그 가족들의 경험은 20세기에 세계 대다수 인구가 겪은 전형적인 경험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나라들은 2000년에도 여전히 가장 부유했고(이 집단 안에서 일정한 변동이 있었지만), 최빈국들도 대체로 변함이 없었다. 실제로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부의 격차는 20세기 동안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1900년에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은 주변부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약 3배 더 부유했다. 1990년대 말에 이 격차는 7배로 커졌다. 어떤 경우에 그 격차는 개괄적인 수치가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1990년대에 미국의 1인당 소득은 자이르보다 평균적으로 80배 더 높았다. 많은 나라에서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89개국 사람들이 1980년대 보다 훨씬 더 가난해졌고, 43개국 사람들이 1970년대 보다 더 가난해졌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부의 하락이었다. … <중략> … 20세기 말 세계에서 부의 격차는 막대했다. 세계 인구의 가장 가난한 20%(약 12억 명)는 세계 총소득의 채 1%도 차지하지 못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에서 ‘극빈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충분한 식량과 주택, 음용수도 공급받지 못했다. 세계 어린이의 1/3이 영양결핍을 분류되었고, 그 중에서 1,200만 명의 5세 이하 어린이가 빈곤 관련 질병, 대개는 13펜스의 비용밖에 들지 않는 경구용 수액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본문 155-156쪽>

이 책을 읽는 우리들,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가 상정하고 있는 서구 세계, 중심부의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과는 또 다른 경험들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1900년대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탈출해 중심부에 근접하는 위치까지 올라섰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20세기 전반에 걸쳐 최소한 평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훨씬 더 부유해지는 진보를 이루었지만, 문제는 세계의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세계 인구의 20%가 전 세계 부의 80%를 향유한다는 이 사실이 20세기의 가장 큰 야만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록 IMF 이후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난리를 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는 국민소득 상위 20%에 든다.

진보와 야만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1948년)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였던 최빈국에서 2006년 현재 16,000달러에 육박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문제는 이 같은 통계나 외형적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주변부 국가들보다 잘 살고 있다는 객관적 조건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른 중심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경제위기와 실업을 완화하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이란 정책은 펼쳐보지도 못했다. 우리들 모두는 좀더 많은 소비를 위해 충실한 노동중독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더욱더 각박해졌고, 지금껏 피땀 흘려 누려온 모든 풍요가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우리에게 이 같은 공포와 불안이 더욱 극대화된 까닭은 우리의 성공과 풍요가 불과 최근 2~30년 사이의 일이라는 단기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라는 착취의 먹이사슬에서 우리들 역시 하나의 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주변부에 속한 인류가 채 1%도 안 되는 소득으로 비탈진 삶을 살아가더라도 오늘의 우리는 풍요로운 소비를 만끽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서구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에게도 여전히 진보로 받아들여진다. 이 공포와 불안의 먹이사슬이야말로 20세기의 진보와 야만을 이루는 핵심 고리이다. 우리는 『진보와 야만 -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이 두 가지가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또 21세기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서 언급했던 20세기 초 만연했던 중심부 엘리트들의 낙관주의가 그러하듯, 21세기 초반인 현재 장기적인 예측은 불가능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내리고 있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 동안 세계가 진화해온 길과 세기말의 경제력과 정치력의 분포를 고려할 때, 세계는 다음 수십 년 동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소수에게는 진보로, 압도적 다수에게는 야만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고 전망한다. 이 전망은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나라들이 20세기에 여전히 부유했던 것처럼 21세기에도 여전히 부유할 것이란 전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1992년 미국 과학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협회의 공동보고서는 “현재의 인구성장 예측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고 지구상에서 인간 활동 패턴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기술은 세계의 상당한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가역적인 환경 악화나 계속되는 빈곤을 방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21세기에도 한줌의 소수는 여전히 세상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그 같은 방식으론 더 이상 지구의 자원과 생태계가 지속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5년 미국의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는 미국의 전 지구적 권력과 세계의 모든 일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지구는 매우 작은 행성이 되었다. 우리는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대기권에서든 심지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에서든 지구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본문327쪽>

이제 21세기의 인류, 아니 저자가 이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상정하고 있는 중심부의 교양 있는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억눌린 풍요로운 이 체제의 내부고발자로서, 생존의 가파른 비탈에 서 있는 주변부와 “지구상의 모든 것”, 생명을 가진 것들과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권력과 개입할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출처 : 『환경과생명』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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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브럼 - 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 녹두(2003)

이란, 리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중국,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한국, 이탈리아, 그리스, 과테말라, 볼리비아, 쿠바, 니카라과, 파나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나라들은 고작 19개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다. 우리는 정부기관에서 하는 일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국민을 위해 생산적인 일만 할 것 같은 산업자원부, 한 국가의 산업자원을 총괄하는 부서라고 배웠지만 그 밑에 얼마나 많은 산하기관이 있고, 그네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수자원공사는 단지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공사형태의 기업체로 생각하고, 원자력공사는 원자력의 안전한 관리를 위해 정부가 우리들 세금으로 만든 기업체 형태로 생각해버리고 마는 경향이 있다.(이들 공사가 산자부 직할 기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 미국의 국부 토마스 제퍼슨은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고 말했을까? 왜? 헨리 데이빗 도로우는 이런 그의 말에 동의하여 "시민 불복종"이란 말을 했을까? 수자원공사는 단지 수자원관리만을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댐을 만든다. 그런데 이 기구는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계속해서 많은 예산을 소모하고, 보다 많은 댐을 건설하기 위해 사업을 추진한다. 원자력기구가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계속해서 이에 따른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이유는? 그것이 조직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상비군이 존재하게 된 뒤, 세상이 더 안전해졌는가? 세계 각국은 상비군이 존재하기 전보다 더욱 많은 전비(군비가 아니다, 전비다)를 소모한다. 이유는 군비경쟁이 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키고, 전비 소모는 군산복합체의 수지타산을 맞춰준다. 군산복합체에 근무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아들, 이웃 형제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더라도 이를 영웅적인 죽음으로 추모할 지언정, 자신이 만든 미사일이, 총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에겐 돌봐야 할 가족이 있고,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교생에 의해 일어났던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이 미국 최대 규모의 군산복합체 공장 인근이었다는 것은 무시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렇듯 한 번 만들어진 정부기구는 계속해서 사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미국의 정부기구 중 가장 많은 예산을 소모하면서 그 내용 자체가 금기시되는 정보기관들은 과연 국민들의 합리적인 감시 아래 놓여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윌리엄 브럼은 그런 의문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원래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윌리엄 브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면서 이 꿈을 버리고,  1967년 국무성을 떠나 그 후 워싱턴에서 최초의 대안언론인 「워싱턴 자유언론」의 설립자 겸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현재까지 미국, 유럽, 중남미 지역에서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1969년 이미 CIA와 원수처럼 될만한 일을 저질렀는데, 200명 이상 되는 직원의 이름과 주소가 담긴  
란 책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그가 1986년 지은 것을 다시 개정하여 1994년에 재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희망 죽이기(Killing Hope - U.S. Military and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이다.

우리에게 CIA는 이미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소위 '랭글리'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우는 미 중앙정보부는 한국에도 그 아류를 설립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국정원이란 이름으로 변모한 "중앙정보부"가 그것이다. 중앙정보부를 지칭했던 영문약자가 KCIA였다. 나는 이런 류의 책들 - 첩보의 세계를 다룬 책들에 대해 -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대개 이런 류의 책들은 그 성격상 후일담에 그치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의 비밀 사업들은 대개의 정부에서 비밀문서로 보관해 일정기간 동안 일부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열람 자체가 금지된다. 세계의 많은 역사학자, 사회학자들이 미국의 비밀문서 해제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그 탓이다. 심지어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미모의 첩보원이었던 마타 하리에 대한 정보 역시 2017년에야 비로소 프랑스 정보 당국에 의해 비밀이 유지되도록 규정해두었다고 한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고 하던가? 국민을 속이고 비밀리에 정보기관들은 정보수집은 물론 쿠데타음모, 정적암살을 비롯해 여론 조작, 테러, 매수, 선동공작을 획책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인 무력침략조차 서슴치 않는다. 우리는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그 내용을 유추해볼 뿐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비밀정보기관들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고 활동한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들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의회도서관에서 찾은 자료와 기밀 해제된 각종 문서를 참고하여 19개의 사건을 전개 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책의 내용들은 이미 사건이 일단락된 뒤의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500만명 이상을 죽이거나 죽도록 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쉼없이 정보공작과 직접적인 침략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저자는 조지 오웰과 마이클 파렌티의 매우 인상적인 말로 저자의 말을 마감하고 있다.

과거를 다스리는 자는 미래를 다스리고,

현재를 다스리는 자는 과거를 다스린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언젠가 공산주의가 세계의 대부분을 장악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반공주의가 이미 세계를
장악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 마이클 파렌티, <반공주의의 충격> 중에서


윌리엄 브럼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사실(fact)이다. 그러나 그걸 읽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한 가지는 잘 믿기지 않지만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갑자기 세상 모든 일이 미국과 CIA의 공작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주의하시고, 동시에 이 책의 몇몇 단점을 소개하자면 한 가지는 저자 자신이 때로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녹두 출판사의 책임이겠지만 군데군데 인명이나 지명 표기에서 실수가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을 구입한지는 좀 되었는데, 처음에 읽다가 그런 부분이 보여서 덮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참고로 이 책은 다음의 책과 함께 읽으면 정말 좋을 것이다. 그것은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한길사)란 책이다. 이 책은 다소 두께가 있으므로 그것이 좀 어렵다면, 같은 저자의 <20세기의 문명과 야만>(한길사)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 내용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하지 않는 까닭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중 상당수는 이미 "문망"에서도 다루었거나 앞으로 다룰 내용들과 겹치는 부분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인데, 책을 읽기 전에 한 가지 들려주고 싶은 재미난 이야기는 미국이 그동안 사용해온 국방비는 예수 탄생 이래 매 시간 당 1만 7,000달러 이상이란 것이다. 올해가 2004년이니까, 계산들 잘 해보시길.... 그들은 그 돈으로 2,000만명 이상의 제3세계 민중을 살해했다. 한 사람 죽이는데 드는 돈이 한 사람 살리는데 드는 돈보다 늘 훨씬 많이 지출된다는 것, 그것이 인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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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진보와 보수의 영국사 -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4  / W.A. 스펙 (지은이), 이내주 (옮긴이) / 개마고원/ 2002년 9월 9일

출판사 "개마고원"에서 일련의 시리즈로 번역하고 출간하고 있는 책이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시리즈인데, 이 책(이하 "케임브리지 영국사)은 그중에서 네 번째 권이다. 첫 권이 독일사, 이탈리아사, 프랑스사 그리고 네번째가 영국사인데, 개인적으로 이 4권의 시리즈가 모두 흡족할 만큼 좋은 책이다. 케임브리지와 늘 비교 대상이 되기 좋은 옥스포드대학에서도 영국사를 출판해서 그 책도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데, 그 책은 국내에서는 한울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있다. 옥스포드 영국사의 정가가 24,000원이고, 이 책은 15,000원이다. 액수만 놓고 보자면 당연히 케임브리지 것을 사는 것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영국사를 단 한 권으로 끝내고  싶다면(그닥 권하고 싶지 않지만) 옥스포드 것을 구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케임브리지판은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역사로부터 1970년대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한 대략 300여년의 영국 근현대사에 중점을 두고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옥스포드 영국사는 알프레드 대왕으로부터 시작되는 통사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케임브리지 영국사는 "진보와 보수"라는 관점에서 쓰인 영국근현대사이다.


두 책에는 모두 장단점이 있다. 일단 가격 대비 분량과 도판, 통사라는 측면을 놓고 보자면 옥스포드판을, 진보와 보수의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읽는 재미를 추구한다면 케임브리지판을 권하고 싶다. 옥스포드판이 교과서를 읽는 기분이라면 케임브리지판은 그에 비해 확실히 하나의 관점으로 쓰인 재미난 영국사이다. 영국이 스코틀랜드와 통합 이후 내부적인 결속을 다지고 이후 세계 대제국으로 융성해가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다뤄지는 반면, 글래드스톤의 아일랜드의 분리독립 시도가 좌절된 이후, 식민주의자 고든 수단 총독의 살해 장면에 이르는 과정은 결국 영국이라는 대제국이 제국주의를 스스로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몰락의 과정을 걸어가는 과정 역시 담담한 어조로 기술해가고 있다.

어느 나라 역사든 그 나라 사람이 지은 것을 읽을 때는 저절로 경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은연 중에 그 나라의 부끄러움은 감추려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세계적 관점 - 제국을 경영해 본 국가의 신민이었다는 측면을 두고 보자면 더욱 그러한 - 에서 기술되고 있는 탓에 영국의 부끄러움이라고 해서 애써 축소하지도 않았고, 타국의 입장에서 이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라고 말할 부분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앙드레 모로와 역시 영국사를 기술한 바 있는데, 앙드레 모로와의 프랑스사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영국사가 처지는 기분이 드는 것과는 다르다. 물론 나머지 시리즈도 모두 추천할 만한 신뢰도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소위 명문대학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명문대학을 명문대학답게 만드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 가지는 그 대학의 출판부가 출간하는 책이 갖는 권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 두 대학은 역시 명문대학의 반열에 올릴 만하다. 과연 국내의 명문대학에서 이들만한 권위있는 출판부를 그들 대학 산하에 두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시리즈에 줄 수 있는 평점의 최고치가 별 5개라면(이런 식의 점수 매기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최소 4.5개의 별은 줄 수 있을 것이다. 영국사를 읽을 수 있는 몇 권의 좋은 책은 나중에 개별적으로 한 번 더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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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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