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3. 마이티네팔과 네팔의 고속도로 휴게소

▶ 하이얏트리젠시 내부에서 전통악기를 이용해 공연을 펼치고 있는 네팔 음악인들


박영석 대장과 빌라 에베레스트
카트만두 시내에서 약간 외곽에 있는 스와얌부나트에서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하이야트 리젠시로 가기 전 이제는 고인이 된 박영석 대장과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원정의 동반자였던 앙 도르지 셰르파(Ang Dorjee Sherpa)가 함께 운영하던 카트만두 시내의 빌라 에베레스트(http://www.villaeverest.co.kr)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마도 네팔에서 먹게 될 처음이자 마지막 한식 식사일 텐데 저녁 메뉴는 한국식 삼겹살이다. 네팔을 찾는 트레커들이나 관광객들이라면 한 번쯤 거치게 되는 쇼핑 거리, 한국에 이태원이 있다면 네팔에는 타멜 거리가 있다. 언젠가 내게 그럴 만한 여유가 이곳 타멜 어딘가에 허름한 방 하나를 구해 며칠씩 머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기도 하다(난 왜 이리 인간이 구질구질할까). 그 타멜 거리에서 우측으로 살짝 빠지면 주머니가 얄팍한 여행자들을 유혹하는 숙소들이 밀집해 있는데 그곳에 빌라 에베레스트가 있다. 빌라 에베레스트는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네팔을 찾는 한국 원정대는 물론 한국인 관광객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거치게 되는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 직전에 세상을 떠난 고(故) 박영석 대장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여행길에서 계속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의 인연 역시 이번 문화기행과 겹친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위에 소개해둔 빌라 에베레스트의 웹 사이트를 보면 되겠지만 이곳에 소개되고 있는 기사 중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배(고동률)가 쓴 기사도 있어 반가웠다.


오늘날 셰르파(sherpa)란 히말라야 등반이나 전문적인 트레킹 가이드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네팔 고산 부족의 명칭이다. 앙 도르지 셰르파의 이름에 셰르파가 붙은 것은 그가 실제 산악가이드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부족명이 성씨(姓氏)처럼 사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앙 도르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삼부토건이 네팔에 건설하는 댐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1978년 한국 트레킹 팀과 함께 일했던 그의 친구가 찾아와 트레킹 팀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받으면서부터였다. 그는 건설현장에서 한국에서 파견 나온 주방 아주머니들로부터 한국 음식 만드는 법과 한국어를 배웠다. 1983년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산악인들의 뒷바라지를 시작한 앙 도르지는 1990년 한국에 나와 한국어 공부를 했고,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를 따라 다시 네팔로 들어왔다가 1991년 6월부터 빌라 에베레스트를 인수해 네팔을 찾는 한국 원정대와 트레킹 팀을 돌보고 있다.


▶ 카트만두에서 치트완 가는 길에 만난 소년들(카트만두 시내 저 때만 해도 엉덩이가 그렇게 시달리게 될 줄 미처 몰랐다. ㅠ.ㅠ)


이제 고인이 된 박영석 대장은 지구의 3극점,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에 모두 오른 사람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와 같은 기록을 가진 사람은 인류를 통틀어 그가 유일했다. 이것을 일컬어 산악의 그랜드 슬램이라고 한다는데 이처럼 엄청난 기록을 가진 그는 어째서 또다시 안나푸르나에 갔던 것일까? 그 대답은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고작 트레킹 제1캠프까지 가본 것이 고작인 사람에겐 말이다. 다만 그를 아는 사람들, 그와 원정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말이 쉽지 원정대를 꾸리고 산을 함께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선 함께 여행을 하라고 했던가? 보통의 평범한 여행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나의 진면목을 들키고 만다. 그런데 숨을 할딱이며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고통스러운 여정에서야 오죽할까? 남에게 베풀 만한 친절 같은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많은 원정대가 팀워크 문제로 정상 등정을 포기하게 되기도 한다. 설령 정상 등정에 성공했더라도 지상에 내려와서는 서로 남남처럼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박영석 대장팀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산 아래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했고 언제든 박영석 대장의 "가자" 그 한 마디면 아무 말 없이 그 산으로 따라나섰다고 한다. 네팔 현지에서도 박영석 대장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제법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나 박영석이란 이름 석자 뒤에 언제나 ‘대장’이란 호칭을 붙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도 그 말이 흘러나왔다. 박영석 대장.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닙니다. 탐험하지 않는 탐험가는 탐험가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는 산악인은 산악인이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 신대륙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게 탐험이고 도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 같은 탐험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팔 카트만두의 빌라 에베레스트. 이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박영석 대장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이얏트 리젠시에서 네팔의 현재를 보다


▶ 하이얏트리젠시 호텔 현관 모습. 나중에 따로 설명할 일이 있겠지만 네팔의 건축 양식은 사원의 건축 양식을 많이 본뜨고 있는데 지붕 꼭대기에 첨탑 형식의 작은 표식이 있는데 이것을 '가쥬르'라 하고(사진엔 나오지 않았지만), 처마 끝에 가로로 길게 연이어 세워져 있는 나뭇살을 '툰다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많은 문양과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들어가는 문 위에 반원형 형태로 되어 있는 장식은 '토라나'라고 해서 모시고 있는 신을 새겨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빌라 에베레스트에서 삼겹살에 에베레스트 맥주를 마시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하이얏트 리젠시로 향했다. 스와얌부나트에서 빌라 에베레스트까지 가는 20분 거리라고 하는데 카트만두 특유의 교통난 때문에 좁은 길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버스 안에 갇힌 채 거의 2시간을 보냈는데 저녁 식사를 하고 거리로 나오니 출퇴근시간이 지난 탓인지 20분도 안 되어 저녁 8시 반쯤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장거리 비행에, 버스 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며 시달린 탓에 숙소에 도착하는 데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당장 내일은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는 데로 로열치트완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이얏트 리젠시 호텔에 도착해 일행의 숙소를 체크하고 방 배정을 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오늘 아침 우리가 도착할 때 공항이 다소 붐빈다고 했더니 그것이 오늘 출국해야 하는 비행기들까지 연착시켜 호텔에 머물던 승객들 중에 체크 아웃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뒤늦게 승객들을 빼고 부랴부랴 객실 청소를 하는 중이라 숙소에 체크인을 할 수 없다니 기가 막혔다. 네팔인 호텔리어는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한 편으론 두 팔을 좌우로 벌리며 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나와 한국인 가이드, 현지 가이드까지 붙어서 항의해봤지만 항의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니 일단 연세가 많은 분들부터 우선 방 배정을 했다. 아마도 이것이 인도·네팔 문화권 특유의 현상이기도 할 터였다. 현지 가이드에게 말해서 일류 호텔이라는 하이얏트 호텔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 호텔 매니저를 통해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 않으면 클레임을 걸겠노라 엄포를 했다. 그렇게까지 말한 이유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다시 이곳에서 2박 3일간 머물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여행의 기획자라 주최한 입장이나 마찬가지이니 가장 늦게 숙소로 들어갔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된 탓도 있고, 여행의 설렘이 뒤늦게 나타난 탓인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1층 숙소라 객실 문을 열면 곧바로 정원과 연결이 되어 있어 아침 산책을 했다. 호텔은 인도에 지어진 영국식 건물 스타일에 카트만두 특유의 네와르 식 건축 스타일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처마 끝에 비둘기 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내가 나서자 후두둑하는 날갯짓과 함께 떼를 지어 날아올랐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네팔 최고급 호텔이란 명성에 걸맞게 정원이나 수영장, 테니스 장 등 부대시설이 훌륭하다. 꽃피는 계절에 왔다면 무척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 앞에서 만난 호텔리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운 뒤 숙소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호텔 조식 뷔페로 먹었다. 사실 호텔이란 공간만큼 세계화되어 있는 곳도 없기에 어딜 가든 호텔 식사는 거의 표준화되어 있다. 호텔을 일컬어 어떤 이는 ‘세계의 창’이라고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호텔이란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쇼윈도이지 그곳 현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은 아니다. 이곳에서 제공된 아침식사도 다분히 서구화되어 있었지만 그 기본만큼은 네팔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치트완국립공원으로 우리를 실어 나를 버스에 오르니 호텔 매니저가 찾아와 정식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이 일은 그렇게 마무리 짓기로 했다.


카트만두에서 로열치트완 국립공원(Royal Chitwan National Park)에 이르는 여정
로열치트완 국립공원은 카트만두에서 서남쪽으로 약 160㎞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만약 한국식 거리 개념이라면 길 막히는 걸 고려하더라도 넉넉잡고 2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네팔이고, 네팔의 시간은 네팔의 방식대로 흘러간다. 현지 가이드인 아눕은 아예 처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란 뉘앙스로 주의를 준다. 혹시 치트완에 가다가 볼 일을 보고 싶은 분들이 있으면 언제라도 이야기를 해 달라, 다만 화장실이 있어서 차를 세우는 게 아니라 길가에서 볼 일을 봐야 한다는 거다. 일행 중에는 인도를 다녀온 이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이라며 농담을 건넨다. 아눕이 어떻게 아셨느냐며 맞장구를 치니 일행이 까르르 웃는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버스에서 내려 일 보는 건 좋은데 조용히 숨어서 볼 일을 보고 싶다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분은 주의하란다. 왜냐하면 언제 폭탄을 밟을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네팔이 내전을 치렀다고 하더니 길가에 무슨 지뢰라도 있는 모양이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폭탄이란 다름 아닌 인분이다. 실제로도 일행 중 한 사람이 밟고 들어와 일행은 물론 버스 기사의 조수를 애 먹인 적이 있지만 길가에서 볼 일을 볼 필요는 사실 없었다. 다행히 중간 중간 허름하지만 칸막이가 있는 화장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인도보다 나은 편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네팔의 공공 교통에는 빠짐없이 조수가 타고 있는데 이들은 차 안에서 먹고 자면서 버스 내부 청소부터 궂은일은 모두 도맡아 처리하게 되어 있다. 지금 이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기사 역시 전에는 조수로 잔뼈가 굵었을 것이다. 운전 기술을 그렇게 해서 배운다는 것이다.


▶ 워낙 노면상태가 거칠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촬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그나마 건진 한 컷. 사진에 모두 나와있진 않지만 만약 버스가 절벽에서 구른다면 대략 100여 미터는 굴러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가파른 낭떠러지이다.


네팔은 인도 대륙 북부와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 사이에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 나라인데 동 네팔과 서 네팔을 잇는 도로는 실질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도로는 해발고도 2~3,000m가 넘는 고산지대를 끼고 건설되어 잘해야 2차선이고, 그나마도 포장이 잘 되어 있지 못하다. 포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인도 국경에서 온갖 물건을 과적한 상태에서 트럭과 버스들이 오가다 보니 도로의 여기저기가 파여 울퉁불퉁하다. 어렸을 적 보았던 이브 몽땅 주연의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 The Wages Of Fear)>란 영화에 나왔던 길은 차라리 안전하다고 말해야할 듯 싶다. 도로 폭은 좁고 차량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데 자칫 사고라도 나면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칠 것 같다. 그런데도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네팔의 공공 시외버스에는 사람들이 문 밖에 매달려 있거나 지붕에서 한가롭게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마이티 네팔과 고속도로 휴게소
카트만두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버스가 카트만두를 둘러싸고 있는 산지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야 비로소 네팔이란 나라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산은 한국의 산지처럼 야트막한 경사를 그리며 완만하게 솟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치솟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산이었다. 그런데 그 산 중턱까지 계단식 논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이 올라가 있다. 이런 풍경은 네팔의 어딜 가든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마을에 도로가 들어오면 잔치를 벌인다고 한다. 우리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날 무렵 버스가 멈추고, 조수가 뛰어내린다. 아눕은 길 한 편에 서 있는 두 개의 초소 같은 건물을 가리키며 저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하나는 네팔 고속도로 비용을 거두는 톨게이트이고, 하나는 올 여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네팔의 인권운동가 아누라다 코이랄라가 설립한 ‘마이티 네팔’의 감시초소라고 한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수여하는 ‘제15회 만해대상’을 받은 '마이티 네팔'은 평범한 네팔의 어머니이자 주부였던 코이랄라 대표가 어느 날 인도로 팔려가는 네팔 여성들의 비참한 처지를 알게 되어 지난 1993년부터 여성의 인신매매에 반대하고 감시하는 기구로 설립한 기구이다. 본래는 초등학교 영어 교사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마련한 작은 방 한 칸으로 시작해 가정폭력과 인신매매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돕기 시작했고, 구걸하는 여성들에게 밥을 제공했다. 마이티네팔은 현재 29개 국내 지부와 세계적인 후원 네트워크를 갖춘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런 공로가 서서히 알려지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고, 할리우드의 배우들 중에도 데미 무어는 마이티 네팔을 지원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진행을 맡기도 했었다. '마이티 네팔(http://www.maitinepal.org)'이란 말의 뜻은 우리가 영어로 생각하기 쉬운데 ‘힘센(mighty) 네팔'이 아니라 ’친정 어머니(maiti)의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 마이티 네팔 초소 앞에 세워져 있는 경고판이다. 가난한 네팔 여성들에게 돈과 직업, 결혼을 빌미로 접근해(요즘은 여성들이 중개상으로 많이 나서는 추세라고 한다) 위장결혼시킨 뒤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가면 남성이 성매매 업소에 인신을 팔아넘긴다고 쓰여 있다(사진은 룸비니 국경 근처의 바이라하와(Bhairahawa)에 세워져 있는 마이티 네팔 초소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곳이 인신매매의 중심이라고 한다).


실제로 코이랄라 대표는 '네팔의 어머니'란 별명으로 불리운다. 마이티 네팔은 인도 등지로 성노예로 팔려가는 네팔 여성 1만 2천여 명을 구출했고, 사회의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자활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네팔 여성을 유혹해 인신매매하는 방식이 주로 시골 여성들에게 접근해 사기 결혼이나 일자리 등을 주선하여 데려가는데 주로 인도 등지로 팔려간다고 한다. 톨게이트 앞을 지나는 차 안에 혹시 젊은 여성이 타고 있으면 마이티 네팔 요원들(이들 역시 ‘마이티 네팔’에 의해 구조된 여성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차를 세우고 여성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봐 수상쩍다 싶으면 젊은 여성을 맡아 보호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단다.


카트만두를 벗어나 두 시간쯤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뒷좌석에 앉아 공중부양에 온갖 재주를 부리며 달렸을까? 자기들 말로는 네팔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가자며 차를 세운다. 한국이 세계에 내세울 만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 여행을 많이 다녀본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커피 믹스와 고속도로 휴게소를 말하곤 하는데 네팔의 고속도로(?) 변에 있는 휴게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실 괜찮았다고 말할 정도로 훌륭한 시설은 아니었지만 한적한 길가 언덕을 따라 나무 그늘이 있고, 맛있는 밀크티(이곳 네팔 말로는 ‘찌아’, 인도 말로는 ‘짜이’라고 하는)를 마실 수 있었다. 거친 도로를 달리느라 혹사당한 엉덩이도 쉬게 할 겸 해서 잠시 휴게소에 들러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놓인 자연석 평상에 둘러 앉아 네팔식 밀크티를 마셨다. 인도나 네팔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 밀크티 맛을 잊지 못하는데 한국에서 커피에 절어 있던 나 역시 이곳의 밀크티 맛이 지금까지도 입 속에 아른거리는 기분일 만큼 이곳이 밀크티 맛은 한국에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고, 한국에선 이 맛을 내기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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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1

-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일번지 포카라에 들어서는 초입에서 바라본 마나슬루 


탈출인가, 출장인가?
11월 18일(금) 아침에 네팔 카트만두로 떠나 11월 26일(토)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7박9일 일정의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은 새얼문화재단이 기획하고 있는 힌두·불교문화권 탐방 시리즈의 사실상 두 번째 일정이다. 인도는 이미 한 차례 다녀왔고, 아마도 다음 기행의 목적지는 티베트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인도 기행은 재단의 다른 분이 수행하고 다녀왔는데 어쩌다보니 이번 네팔 기행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가 수행하게 되었다.


2011년은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한 해였다. 2009년 8월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매월 혹은 격월로 「현대일상의 지배자들」이란 연재를 시작했다. 기업문화 혹은 기업을 중심으로 한 변화와 혁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고,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에 대해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내용인데 매월 100매에서 120매가 되는 글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올 연초에는 피로가 겹친 탓에 면역력이 떨어져 그만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며칠씩 회사를 결근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연평도 포격 사건까지 벌어져서 마약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를 먹으며 연평도 주민 돕기 운동을 위해 연평도 현지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가정적으로는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한 노력에도 쉬이 들어서지 않던 아이가 태어나 첫 돌을 지내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상황이었던 터라 직장과 가정, 거기에 부수적으로 연재하던 원고까지 겹치면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져 있었다. 그런 일들이야 남들도 살면서 겪어내는 수고로움이었을 터이니 나만의 괴로움이라 말할 순 없어도 거기에 더해 내 자신이 자초한 괴로움들마저 있어 올해는 청소년기를 제외하고 내 생애에서 살아내기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이런저런 피곤함과 삶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에 굳이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11월 18일 출국하기 전 날까지도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계간 『황해문화』의 최종 마감 원고를 붙들고 있었는데 편집장으로서 떠나기 전 최종본까지 살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출발 12시간 전에야 부랴부랴 여행용 가방을 꺼내 옷가지를 넣었다 빼다를 반복하며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그런 부산함 덕분에 어딘가 떠나기 전의 여행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여행의 설렘은 내겐 대단한 사치였고, 당장 네팔의 현지 기후가 어떤지 제대로 알아볼 시간마저  없어 트위터에 11월 현재 네팔 기후가 어떤지 대놓고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네팔에 다녀온 어떤 이가 네팔의 11월은 한국의 초가을 날씨라 다니다보면 도리어 더울 수 있고, 일정 중에 포함된 룸비니 같은 곳은 초여름 날씨에 가까우니 여름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얻었다. 만약 그 조언이 없었더라면 7박 9일의 일정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을지…. 부랴부랴 여름옷 한 벌을 챙겨 넣을 수 있었다.


새얼문화재단은 1년에 한 차례씩 국내 역사기행과 해외 문화기행을 떠나는데 국내 역사기행은 대략 100여명 안팎의 대규모 인원이 2박 3일의 일정으로 함께 먹고 자며 이동하면서 국내의 여러 역사 유적들을 찾아간다. 이에 비해 해외 문화기행은 경비와 일정 문제 등으로 국내 역사기행에 비해서 비교적 소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행사이긴 하지만 참가인원은 여행지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서도 유동적이다. 그러나 이번 네팔·히말라야 기행은 처음부터 30명 이내로 인원 제한을 두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처럼 인원 제한을 두게 된 것은 네팔 현지 사정이 그 이상의 인원이 함께 여행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을 만큼 불편한 탓이 컸다. 결국 나와 한국 가이드, 현지 가이드 포함해 모두 26명의 인원이 이번 문화기행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게 되었다.

 


부대끼는 마음을 뒤로 하고 9시 45분에 출발하는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였다. 일행들을 먼저 나와 영접한다고 내 딴엔 일찍 출발해 도착했는데도 공항 장기주차장에 주차한 뒤 3층 출국장 만남의 장소를 찾지 못해 약간 헤맨 탓에 약속장소에 가보니 이미 많은 분들이 도착해 있었다. 네팔로 출국하기 전 휴대폰 로밍에 대해 문의하고,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며칠 전 구입한 네팔 안내 책자를 펼쳐들었다. 내가 구입한 책은 한국의 랜덤하우스가 일본의 다이아몬드 빅사와 출판계약을 맺어 한국판으로 펴낸 <세계를 간다> 시리즈의 네팔 편이었는데, 원래 여행안내서로 가장 유명한 론리플래닛 시리즈의 네팔 편을 구입하려고 찾아보다가 론리플래닛 시리즈가 편집이나 내용 구성이 매뉴얼스러운데 비해 종합적으로 보아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내게는 좀더 적합할 듯 싶어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운 편이었는데 <세계를 간다>가 한국이나 일본의 여행자 스타일을 좀더 고려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네팔, 히말라야 그리고 마나슬루
나에게 네팔이란 나라는 아버지의 꿈이 서린 곳이다. 처음 네팔이란 나라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꼭 한 달 간격으로 잇따라 세상을 떠난 1979년 겨울부터 이듬해 1980년 연초까지 그 해 우리 집안은 사실상 풍비박산이 나있었다. 당시엔 아직 철없던 어린 시절이라 앞으로 닥쳐올 내 앞의 삶이 지닌 무게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었다. 그 무렵 내 눈에 띈 것은 책꽂이 한 구석에 꽂혀 있던 김정섭이 지은 『집념의 마나슬루』란 책이었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마나슬루(8,163m)가 히말라야 14좌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고, 8,000m급 이상 봉우리 중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된 산은 안나푸르나였다.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게 제2위의 높이를 자랑하는 K2는 난공불락의 어려움으로 인해 악명을 떨친 탓에 유명하고, 낭가파르바트는 목숨을 건 산악인들의 도전이 빛나는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가장 많은 산악인들을 집어 삼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마나슬루는 그렇게 주목받을 만한 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슬루는 한국과 일본의 산악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산이다. 다만 한국의 산악인들에겐 집념과 도전의 산으로, 일본의 산악인들에겐 영광의 산으로 기억된다.




마나슬루(Manaslu)는 산스크리트어로 ‘영혼’이란 뜻을 지닌 마나사(Manasa)에서 나온 말로 ‘영혼의 땅’, ‘영혼의 산’이란 의미를 지닌다. 마나슬루가 처음 산악인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네팔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950년 영국의 W.틸만(H.W.Tilman) 등반대가 마나슬루 일대를 정찰하면서부터였다. 네팔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뒤 서구의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코트 원정대가 펼쳤던 극지원정 경쟁, 올림픽을 통한 스포츠 경쟁이 그렇듯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히말라야 초등 경쟁은 각국의 산악인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벌이는 치열한 레이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경제적인 여유를 갖춘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알피니즘이란 말 자체가 애초에 서구에서 출현한 용어인 것처럼 그들은 알프스, 힌두쿠시, 알래스카 등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며 세계 알피니즘의 역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14봉 등반 경쟁에서도 역시 그들이 앞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영광을 상실한 영국은 특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독일은 낭가파르바트(8,125m)에 줄기차게 도전했다. 독일이 낭가파르바트에 집착한 것은 아마도 세계 최초로 아이거북벽을 정복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경험과 역사가 배어나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티벳에서 보낸 7년>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높은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산악인 힐러리 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1953년 5월 29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존 헌트 경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초모룽가)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남성으로 태어나 현장 언론인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자신의 성정체성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 있음을 깨닫고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된 특이한 이력의 언론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쟌 모리스가 펴낸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여행』에 감격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쟌 모리스는 특파원으로 영국원정대를 동행취재하면서 힐러리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특종 보도하는 영광을 누리며 언론인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된다.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우리 앞의 낡은 박스 위에 앉은 저 두 사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우리 밖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날은 너무나 밝았다. 눈은 그지없이 뽀얗고,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렀다. 대기는 아직도 온통 흥분으로 들끓는 듯 했다. (쟌 모리스, 박유안 옮김,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 여행1-에베레스트부터 성전환까지』, 바람구두, 2011, 22쪽.)



쟌 모리스가 타전한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뉴스가 영국에 도착한 것은 때마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날(1953년 6월 2일)이었다. 영국 전역은 새로운 여왕의 등극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접하며 열렬한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히말라야에 등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처럼 히말라야 등정이란 사건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뉴스라고 생각했기에 국가적인 지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역시 태평양전쟁의 패전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에 성공하면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으로 마이니치(每日)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일본 산악회가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대를 파견했다. 마나슬루에 대한 사전정보가 부족했던 일본원정대는 초기엔 틸만 원정대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만으로 시작해 마나슬루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했고, 등정 가능한 코스를 여러 차례의 사전 원정으로 파악한 뒤 1956년 유코 마키가 이끄는 12명의 대원과 20명의 셰르파로 구성된 등반대가 본격적인 마나슬루 등정에 나서게 된다. 이들 원정대는 같은 해 5월 9일 토시오 이마니시와 셰르파 갈첸 노르부, 두 명이 정상 공격에 나서 마침내 마나슬루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록 우리와는 민족적 감정이 뒤얽혀 있는 일본원정대에 의한 마나슬루 초등이었지만 이것은 서구 산악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히말라야 8,000m급 초등 경쟁에 동양의 산악인들이 뛰어들어 이룩한 최초의 쾌거였다. 이후 중국원정대가 1964년 시샤팡마(8,046m)를 초등(시샤팡마는 네팔이 아니라 티베트, 중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구 원정대가 도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14좌 봉우리 중 두 곳을 일본과 중국이 초등하는데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 원정대의 마나슬루 초등을 도우며 함께 했던 셰르파 갈첸 노르부는 1955년 프랑스 원정대와 함께 마칼루에 오른 데 이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8,000m급 2개봉을 초등한 사람이 되었다. 당연히 일본은 이들의 마나슬루 등정을 범국가적으로 축하했다.




16명의 한국원정대를 집어삼킨 마나슬루

 

일본은 이후에도 마나슬루와 끈질긴 인연을 이어가는데 1971년 마나슬루 북서릉을 오르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고, 1974년엔 동릉을 통해 일본의 여성원정대 대원 3명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하면서 여성 최초의 8,000m 봉우리 등정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는 등 마나슬루는 ‘일본의 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본과 깊은 인연(일본의 등산용 석유버너 중 마나슬루의 이름을 딴 제품까지 있었을 정도)을 맺게 된다. 우리나라가 히말라야 등정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일본보다 뒤처진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울라기리 2봉(7,751m)에 대한 정찰등반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는 사실상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이 완료되어 가던 시점이었는데 이후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마나슬루에 도전하기까지 1971년 한국산악회가 추렌히말(7,371m)에 등반한 것이 우리가 경험한 히말라야 원정의 전부였다.


한국의 마나슬루 제1차 원정 당시 김정섭은 직접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뒷받침하면서 실질적으로 원정대를 꾸린 당사자였다. 그러나 제1차 마나슬루 원정대는 김정섭의 동생으로 원정대에 참여한 산악인 김기섭을 불의의 사고로 읽은 뒤 철수하고 만다. 김기섭은 한국인 최초의 히말라야 희생자였다. 『집념의 마나슬루』는 자신이 빠진 채 진행되었던 제1차 마나슬루 원정에서 동생 을 잃은 슬픔과 비탄 속에서 동생의 시신을 찾아 고국으로 가져오고 제2차 마나슬루 도전에 나선 제2차 원정대의 기록이다. 그러나 제2차 원정마저 1972년 4월 10일에 일어난 눈사태로 인해 김호섭, 송준형, 오세근, 박창희와 함께 참여했던 일본 산악인 야스히사를 비롯해 셰르파들까지 모두 15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1937년 세계9위봉인 낭가파르바트(NangaParbat, 8,125m)에서 독일 원정대원 1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이래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 규모의 대형 참사였다.


그는 1차 원정에서 동생까지 잃은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며 2차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 등반하며 겪어야 했던 일들, 그리고 다시 조난과 실패, 철수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심정이야 피를 토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런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만든 힘, 그 힘을 집념이라고 표현한 것이리라. 『집념의 마나슬루』에는 그가 준비한 또 한 차례의 원정, 제3차 원정계획서를 책 말미에 게재했는데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생 시절엔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란 말도 흔히 들을 수 없던 시절이었던 터라 그의 3차 원정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단지 등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애와 네팔의 현지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어서 그 내용에 빠져 읽었을 뿐이었다. 이후 김정섭은 1972년 2차 원정과 1976년의 3차 원정에 직접 대장으로 참여해 당시 7차례 꾸려진 히말라야 원정 중 5차례 원정에 관여한 국내 히말라야 원정의 실질적인 개척자로 활동했다. 김기섭, 김호섭, 김예섭, 세 동생을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묻은 맏형 김정섭은 1974년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될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마나슬루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악천후로 인해 6,800m에서 통한의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만 했다. 마나슬루는 그를 끝끝내 품어주지 않았다(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김정섭 씨는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가서 현지에서도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정리하는 원고를 집필하며 2002년엔 다시 마나슬루로 가서 동생들의 시신을 찾아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마스떼(당신 안에서 신을 봅니다)’란 네팔의 전통 인사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지만 정작 이 책이 그 시기에 어째서 우리 집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보다 더 세월이 흐른 뒤 돌아가신 아버지의 앨범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이 책이 왜 우리 집에 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남긴 앨범에는 한 가닥 자일에 의존해 산을 타고 있는 당신의 모습, 빙벽을 기어오르는 모습들이 담겨져 있었다. 나중에야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산을 좋아해 대학 산악부에서 활동했고, 김정섭 씨 형제 가운데 어느 분과 친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의 형제들과 함께 산에 다녔고 마나슬루 등반팀에 합류하라는 제안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이 분들과 함께 히말라야에 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물론 할아버지의 만류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1차 원정이 있었던 1971년 무렵은 내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어느덧 비행기는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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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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