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우펜베르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6.28 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2. 2010.10.29 작전명 발키리 (Valkyrie)
  3. 2010.09.13 이제 너의 방은 언제나 비어 있겠구나 - 백장미단

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난제 -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재구성하는 일은 화살 하나로 세 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처럼 어렵다.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어느 신문 기자던가, 평론가가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썼다가 인터넷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스포일러를 유포했다고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 좌석의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자인지, 평론가인지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 덕분에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되었다고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을 힐난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대성(大聖) 공자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데, 뉘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서이든, 원작을 통해서이든 누구나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순간은 있는 법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점에서는 보배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수많은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널리 전파된 이야기란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영화화하거나 드라마로 장르 전이(轉移)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이야기 틀을 바꾸긴 매우 어렵다. 고전이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익숙한 이야기 스타일이 대중에게 이미 숱하게 검증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장편영화인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스릴러물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던 신예감독 브라이언 싱어였지만, 이후 <엑스맨> 1편과 2편, 그리고 <수퍼맨 리턴즈>에서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안주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부터 제2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꿈꿔왔던 브라이언 싱어로서는 선배가 <쉰들러 리스트>로 보여 주었던 길을 따라가고 싶은 의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진해서 영화 <발키리>의 감독을 맡았다. 사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매력적인 인물과 유난히 끌리는 사건, 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깊이 매료되는 시대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억압에 저항했던 숄 남매의 <백장미단>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과 거의 동시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했다.


결과를 빤히 아는 역사영화(EPIC)를 보는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생전에 모두 42차례의 암살 기도(『독재자들』, 교양인, 2009)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인물은 아마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였으리라 싶은데,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현대문학, 2008)에 따르면 모두 60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 6차례의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늑대 무리는 조직적으로 사냥감을 공격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으면 사냥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국가조직의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암살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정치수단 중 하나다.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 했던 가이 포크스(Guy Fawkes)를 비롯해서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이라는 리 하비 오스월드(Lee Harvey Oswald),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을 암살한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irhan Bishara Sirhan)에 이르기까지 정치인을 겨냥한 암살은 성공유무와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이런 사건들이 수많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누군가 한 개인의 죽음이 시대의 향배를 어긋나게 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까닭 역시 그가 범죄와의 전쟁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당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던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위인(偉人)인지, 아니면 평범한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大衆)인지는 역사학의 오래된 논쟁거리로 남겨두자.


어찌되었든 역사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인류의 생애사 속에 포함되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시대를 고민했던 흔적이란 것이고, 두 번째 재미는 과연 나폴레옹이 불면증과 위장장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역사 속 작은 국면들이 차지하는 결과를 되짚어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역사를 우리 한국의 역사에 대입시켜봄으로써 우리가 처해있는 실제 현실의 문제와 한계 등을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영화 <발키리>는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연출했던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극적인 요소가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점들을 감안해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슈타우펜베르크 vs. 김재규

정치적 수장을 제거하는 암살의 상당 부분은 브루투스와 케사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측근에 의해 실행될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최고 권력자는 항상 삼엄한 경호를 받기 때문에 암살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암살의 성공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암살이 암살만으로 정치적 의도까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면 한 개인에 불과한 정치인의 암살을 통해 정치적 의도까지 관철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던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의도는 로마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겨냥해 민주주의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김재규의 의도와 달리 그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는 없었다. 현대적인 국가조직은 ‘관료제’라는 단단한 배후조직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영화 <발키리>에서 암살 음모의 주동자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논의에 답답해했던 이유는 히틀러 암살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될 최고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독일 군부의 뇌리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논의, ‘쿠데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비록 규모나 역사적 의의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차이는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와 김재규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이 두 사람을 닮은꼴이라 비교한다는 것은 본의든 아니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를 비교하게 된다.


일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출발한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좌우 갈등, 분단, 부정부패, 경제난 등으로 최악의 위기 속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이후 형식상으로는 민주선거를 통해 연속해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의 최대 업적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수백 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보릿고개’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3선 개헌에 성공한 뒤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쿠데타를 통해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뒤이어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철권으로 억압하는 독재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저항 속에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에 살해당한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제정을 대신해 출범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무능과 볼셰비즘의 발흥에 위기를 느낀 독일의 일부 민족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과 결합해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을 독일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성장시킨다. 이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과 독일제국의회 방화사건 등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비견할 만한 ‘비상대권’을 차지하고 독일 내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유신체제가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 헌법 개정에 대한 발언만으로 처벌되었던 것처럼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차지한 독일 역시 나치 체제와 총통에 대한 어떤 비방, 비판도 처벌의 대상이었다.


서민적 독재자와 귀족적 민주주의자

내가 아는 한 독일 역사에서 군부에 의한 쿠데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한 빌헬름 제정을 물러나게 한 키일 군항의 반란은 있었지만 그것은 쿠데타라기보다는 혁명이었다. 어떤 이는 독일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을 독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독일에선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일컬어 ‘국가가 군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 이상한 체제’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독일은 국가구조 속에 군대의 전통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는 군부가 민간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고려 무신정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 군대를 통해 습득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통치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이다. 민주공화정의 주인이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동안에도 대통령은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풍경을 즐겨 연출한다. 이런 풍경이 연출되는 까닭은 단순하다. 최고통치자들의 실생활이 서민적이지는 않지만 서민적이라는 인상을 줄수록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윤보선이나 장면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이 두 사람과 달리 서민적인 풍모와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최고통치자였던 히틀러는 그동안 독일을 지배해왔던 기존의 지배엘리트들과 달리 매우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 헤밍 폰 트레스코프(Henning von Tresckow) 대령

히틀러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물론 에빈 폰 비츨레벤 장군, 헤닝 폰 트레스코프, 메르츠 폰 크비르하임, 베르너 폰 헤프텐, 파울 폰 하세,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등 히틀러 암살 음모의 주역들 대다수는 중간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일의 전통적인 귀족(융커)계급 출신이었다. 하사출신이었던 히틀러는 귀족계급이 지배하던 독일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자초한 무능한 무리로 멸시하기 까지 했다. 그가 에르빈 롬멜을 총애했던 까닭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이후 권력수반에 앉을 계획이었던 루드비히 베크 전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칼 프리드리히 괴들러(전 라이프치히 시장) 같은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이후 수립하려 했던 독일은 과거와 같은 지배엘리트들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이 처음부터 히틀러의 반대파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은 히틀러의 지지자들이었고, 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히틀러에게 등을 돌리게 된 까닭에 대해 영화 <발키리>는 유대인학살 등 인류에 대한 범죄, 역사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양심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볼셰비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내 자본가들과 중산층, 영국과 프랑스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이긴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식 교육을 받은 피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청교도적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계급적 뿌리와 이반된 사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접한 귀족적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의 통치로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했던 대다수 독일 서민들은 여전히 히틀러를 지지했다.


쿠데타로 나치지배가 종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이 가장 즐겨하는 질문이자 가장 꺼리는 질문은 “만약에~”란 것이다.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건을 찾아내 인과관계와 그 의미를 찾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거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영화 <발키리>로 우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화 <발키리>는 역사영화로서는 매우 훌륭한 편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역사 영화들이 지닌 문제점의 상당수는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키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진지하다(물론 다큐멘터리도 허구이며 창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나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나치체제에 저항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이런 의도는 톰 크루즈라는 대중적인 스타에 의해 충분히 담보되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발키리>의 장점은 이처럼 진지하다는 데 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왜 진지해져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역사 속의 사건이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관객 모두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히틀러 암살이란 대의에 목숨을 거는 요 인물들의 당위적 결의는 영화 내부에 있지 않고, 관객들의 영화 외부에서 배운 역사에서 나온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영화 서두에 이미 히틀러의 제거를 결심한 사람이었고, 베를린의 히틀러 암살 음모 세력 역시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목숨까지 걸면서 히틀러를 제거하려 하는지에 대해 관객들 보고 스스로 역사에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상 필요한 등장인물 수가 너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발키리>자체가 지닌 극적인 요소에만 천착해버리면 역사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 관객들이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던지게 될 핵심적인 질문이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그 질문은 ‘만약 히틀러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그의 동지들이 계획했던 대로 암살당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였을 것이다. 역사는 정말 달라졌을까?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1944년 6월 6일로부터 44일이 경과한 1944년 7월 20일의 일이었고,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것은 발키리작전으로부터 10개월쯤 뒤인 1945년 5월 8일의 일이었다. 과연 한 명의 정치지도자가 암살당하고, 쿠데타로 나치 정권은 전복될 수 있었을까? 그 결과 독일은 연합국, 소련 등과 휴전을 맺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영화 <발키리>를 통해 역사 앞에 무수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의 총탄이 유신에 종지부를 찍기는 했으나 뒤이어 12.12쿠데타와 5.18광주학살을 불러들인 것처럼 히틀러의 암살이 역사의 냉정한 잔혹성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와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와 같은 질문은 그저 영화를 재미있게 보면 그뿐인 관객의 입장에서 호사스러운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을 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제가 있는 법이다. 설령, 그것이 역사의 잔인한 수레바퀴 앞에서 실패라 불리게 될지라도 목숨을 걸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도 있는 법이다.



영화 <발키리>는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던 아브라함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비록 실패로 끝났고,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이 있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광기에 휩싸인 독일이 역사 앞에서 그래도 우리 속에 이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1980년 5월 광주의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도청으로 진격해오던 날 밤을 어떤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살았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날 죽고자 마음 먹은 시민들의 피를 통해 산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사이기도 했다. 나는 역사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거나 이끌려 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천하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는 법(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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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 작전명 발키리 (Valkyrie)/ 감독 브라이언 싱어/ 출연 톰 크루즈/ 제작 2008 미국, 독일



난제 -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재구성하는 일은 화살 하나로 세 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처럼 어렵다.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어느 신문 기자던가, 평론가가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썼다가 인터넷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스포일러를 유포했다고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 좌석의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자인지, 평론가인지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 덕분에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되었다고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을 힐난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대성(大聖) 공자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데, 뉘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서이든, 원작을 통해서이든 누구나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순간은 있는 법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점에서는 보배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수많은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널리 전파된 이야기란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영화화하거나 드라마로 장르 전이(轉移)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이야기 틀을 바꾸긴 매우 어렵다. 고전이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익숙한 이야기 스타일이 대중에게 이미 숱하게 검증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장편영화인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스릴러물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던 신예감독 브라이언 싱어였지만, 이후 <엑스맨> 1편과 2편, 그리고 <수퍼맨 리턴즈>에서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안주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부터 제2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꿈꿔왔던 브라이언 싱어로서는 선배가 <쉰들러 리스트>로 보여 주었던 길을 따라가고 싶은 의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진해서 영화 <발키리>의 감독을 맡았다. 사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매력적인 인물과 유난히 끌리는 사건, 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깊이 매료되는 시대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억압에 저항했던 숄 남매의 <백장미단>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과 거의 동시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했다.

-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톰 크루즈


결과를 빤히 아는 역사영화(EPIC)를 보는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생전에 모두 42차례의 암살 기도(『독재자들』, 교양인, 2009)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인물은 아마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였으리라 싶은데,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현대문학, 2008)에 따르면 모두 60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 6차례의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늑대 무리는 조직적으로 사냥감을 공격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으면 사냥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국가조직의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암살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정치수단 중 하나다.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 했던 가이 포크스(Guy Fawkes)를 비롯해서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이라는 리 하비 오스월드(Lee Harvey Oswald),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을 암살한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irhan Bishara Sirhan)에 이르기까지 정치인을 겨냥한 암살은 성공유무와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이런 사건들이 수많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누군가 한 개인의 죽음이 시대의 향배를 어긋나게 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까닭 역시 그가 범죄와의 전쟁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당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던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위인(偉人)인지, 아니면 평범한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大衆)인지는 역사학의 오래된 논쟁거리로 남겨두자.

어찌되었든 역사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인류의 생애사 속에 포함되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시대를 고민했던 흔적이란 것이고, 두 번째 재미는 과연 나폴레옹이 불면증과 위장장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역사 속 작은 국면들이 차지하는 결과를 되짚어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역사를 우리 한국의 역사에 대입시켜봄으로써 우리가 처해있는 실제 현실의 문제와 한계 등을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영화 <발키리>는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연출했던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극적인 요소가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점들을 감안해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슈타우펜베르크 vs. 김재규
정치적 수장을 제거하는 암살의 상당 부분은 브루투스와 케사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측근에 의해 실행될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최고 권력자는 항상 삼엄한 경호를 받기 때문에 암살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암살의 성공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암살이 암살만으로 정치적 의도까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면 한 개인에 불과한 정치인의 암살을 통해 정치적 의도까지 관철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던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의도는 로마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겨냥해 민주주의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김재규의 의도와 달리 그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는 없었다. 현대적인 국가조직은 ‘관료제’라는 단단한 배후조직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영화 <발키리>에서 암살 음모의 주동자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논의에 답답해했던 이유는 히틀러 암살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될 최고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독일 군부의 뇌리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논의, ‘쿠데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비록 규모나 역사적 의의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차이는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와 김재규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이 두 사람을 닮은꼴이라 비교한다는 것은 본의든 아니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를 비교하게 된다.

일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출발한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좌우 갈등, 분단, 부정부패, 경제난 등으로 최악의 위기 속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이후 형식상으로는 민주선거를 통해 연속해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의 최대 업적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수백 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보릿고개’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3선 개헌에 성공한 뒤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쿠데타를 통해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뒤이어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철권으로 억압하는 독재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저항 속에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에 살해당한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제정을 대신해 출범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무능과 볼셰비즘의 발흥에 위기를 느낀 독일의 일부 민족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과 결합해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을 독일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성장시킨다. 이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과 독일제국의회 방화사건 등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비견할 만한 ‘비상대권’을 차지하고 독일 내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유신체제가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 헌법 개정에 대한 발언만으로 처벌되었던 것처럼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차지한 독일 역시 나치 체제와 총통에 대한 어떤 비방, 비판도 처벌의 대상이었다.

서민적 독재자와 귀족적 민주주의자

내가 아는 한 독일 역사에서 군부에 의한 쿠데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한 빌헬름 제정을 물러나게 한 키일 군항의 반란은 있었지만 그것은 쿠데타라기보다는 혁명이었다. 어떤 이는 독일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을 독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독일에선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일컬어 ‘국가가 군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 이상한 체제’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독일은 국가구조 속에 군대의 전통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는 군부가 민간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고려 무신정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 군대를 통해 습득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통치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이다. 민주공화정의 주인이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동안에도 대통령은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풍경을 즐겨 연출한다. 이런 풍경이 연출되는 까닭은 단순하다. 최고통치자들의 실생활이 서민적이지는 않지만 서민적이라는 인상을 줄수록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윤보선이나 장면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이 두 사람과 달리 서민적인 풍모와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최고통치자였던 히틀러는 그동안 독일을 지배해왔던 기존의 지배엘리트들과 달리 매우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히틀러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물론 에빈 폰 비츨레벤 장군, 헤닝 폰 트레스코프, 메르츠 폰 크비르하임, 베르너 폰 헤프텐, 파울 폰 하세,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등 히틀러 암살 음모의 주역들 대다수는 중간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일의 전통적인 귀족(융커)계급 출신이었다. 하사출신이었던 히틀러는 귀족계급이 지배하던 독일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자초한 무능한 무리로 멸시하기 까지 했다. 그가 에르빈 롬멜을 총애했던 까닭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이후 권력수반에 앉을 계획이었던 루드비히 베크 전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칼 프리드리히 괴들러(전 라이프치히 시장) 같은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이후 수립하려 했던 독일은 과거와 같은 지배엘리트들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이 처음부터 히틀러의 반대파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은 히틀러의 지지자들이었고, 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히틀러에게 등을 돌리게 된 까닭에 대해 영화 <발키리>는 유대인학살 등 인류에 대한 범죄, 역사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양심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볼셰비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내 자본가들과 중산층, 영국과 프랑스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이긴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식 교육을 받은 피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청교도적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계급적 뿌리와 이반된 사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접한 귀족적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의 통치로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했던 대다수 독일 서민들은 여전히 히틀러를 지지했다.

쿠데타로 나치지배가 종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이 가장 즐겨하는 질문이자 가장 꺼리는 질문은 “만약에~”란 것이다.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건을 찾아내 인과관계와 그 의미를 찾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거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영화 <발키리>로 우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화 <발키리>는 역사영화로서는 매우 훌륭한 편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역사 영화들이 지닌 문제점의 상당수는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키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진지하다(물론 다큐멘터리도 허구이며 창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나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나치체제에 저항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이런 의도는 톰 크루즈라는 대중적인 스타에 의해 충분히 담보되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발키리>의 장점은 이처럼 진지하다는 데 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왜 진지해져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역사 속의 사건이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관객 모두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히틀러 암살이란 대의에 목숨을 거는 요 인물들의 당위적 결의는 영화 내부에 있지 않고, 관객들의 영화 외부에서 배운 역사에서 나온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영화 서두에 이미 히틀러의 제거를 결심한 사람이었고, 베를린의 히틀러 암살 음모 세력 역시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목숨까지 걸면서 히틀러를 제거하려 하는지에 대해 관객들 보고 스스로 역사에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상 필요한 등장인물 수가 너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발키리>자체가 지닌 극적인 요소에만 천착해버리면 역사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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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제 너의 방은 언제나 비어 있겠구나.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중인 독일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의 와중에서 한 어머니가 한 말이다. 어느 사람이든 인생에서 전기(轉機), 혹은 전환점이란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기회란 것도 오래 살아야 가능한 것이다. 어떤 이들에겐 그런 기회가 오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1943년 2월 18일. 화창한 목요일 아침, 백장미 회원들이 대학의 모든 강의실과 복도에 유인물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한스 숄(Hans Scholl)과 소피 숄(Sophie Scholl)은 대담하게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했다. 그들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거리와 대학에서 반나치 유인물과 히틀러를 모욕하는 낙서를 비밀리에 표현하는 데 성공했었다. 그들이 살포하는 유인물이 바람을 타고 눈송이처럼 떨어졌고, 나치의 지방당원인 학교의 급사가 유인물을 발견하자마자 그들이 올라가 있는 건물의 모든 출입구를 잠그고 게슈타포(비밀경찰)에 신고했다.


  몇 분 뒤 게슈타포가 도착하여 그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대학에서 1.6km가량 떨어진 비텔스바흐 궁내의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갔다. 게슈타포는 관련자들의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한스의 방을 수색했고, 인스부르크에서 세 아이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hristoph Probst)가 보내온 편지를 발견하고 그마저 체포했다. 4일간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이 끝나자, 그들 세 명의 대학생은 2월 22일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치는 숄 남매와 프롭스트를 본보기로 내세워 더 이상 정부에 대한 비판할 용기를 발휘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이 없기를 바랬다. 그들은 공개 재판을 통해 이들을 혹독하게 몰아부치려 했고, 나치 정권의 '교수형 재판관'이란 별명으로 불리우는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1945)가 재판을 주관했다. 진홍색 법의를 걸친 프라이슬러는 친위대와 비밀경찰, 그리고 대부분이 이들에게 적대적인 시민들이 들어찬 법정에서 세 명의 어린 대학생들을 가혹하게 몰아부쳤고, 이들에게 <조국에 대한 반역죄와 군대의 전복 및 군수산업의 파괴를 선동한 예비 대역죄>라는 죄명을 붙였다. 프라이슬러는 혼자서 열렬한 어조로 지껄인 후 조용히 그러나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는 피고인들에게 외쳤다. "훌륭한 독일인이라면 어떻게 고소장에 쓰여진 것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다." 이들 세 사람을 대표해 가장 나이어린 소피 숄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누구든 결국 시작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다만 우리처럼 감히 행동에 옮기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들의 훌륭한 자세는 이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조차 감동시켰고, 일순 재판정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재판은 단지 요식행위였을 뿐이었다. 숄 남매의 부모 로베르트와 마그달렌 숄이 울름으로부터 프라이슬러의 판결을 듣기 위해 재판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판결이 내려졌고, 형이 집행되기 직전이었다. 이들 부부는 뮌헨의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사형집행 직전의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죽음을 앞둔 한스는 동생 베르너에게 끝까지 살아남을 것을 당부했고, 이렇게 말했다. "강하게 살아남아라. 한치의 타협도 없이." 어머니 마그달렌이 "이제 너의 방은 언제나 비어 있겠구나"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말을 하자 소피는 "엄마, 1-2년이면 끝날 거예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크리스토프는 자기 가족 중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세 번째 아기이자 첫 딸을 낳은 직후였고, 그녀가 남편의 운명에 대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그는 영원의 나라로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간수들은 다음과 같이 이들의 최후에 대해 증언했다. "그들은 거짓말 같이 꿋꿋하게 처신했다.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모험을 감행해 그들이 처형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모이게 해 주었다. 그것은 단지 몇 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에겐 큰 의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크리스토프는 "나는 죽음이 이렇게 쉬운 건지는 미처 몰랐어. 몇 분 후에 우리는 모두 영원의 나라에서 다시 보겠지." 그리고 나서 그들은 끌려 나갔다. 맨 먼저 소피가 끌려나갔지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태도가 가능한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 집행자는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스는 단두대에 목을 올려 놓기 전에 감옥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자유여, 영원하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잉게 숄 지음/ 박종서 옮김/ 청사/ 1978년. 117쪽에서 >


경제 부흥과 민주주의, 시민권, 자유 수호 사이의 혼란
한스 숄과 소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이 세 명의 젊은이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태어나 짧은 순간을 살다 갔다.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짧은 생애는 그들의 누나인 잉게 숄(Inge Scholl, 1917. 8. 11. - 1998. 11.4.)이 기록한 한 권의 수기『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의해 이역만리 떨어진 한반도, 분단된 반쪽의 독재 치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도록 했다. '백장미(Die Weiβe Rose)그룹'의 짧은 생애를 다룬 이 책을 읽은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프랑스의 포슈(Foch) 원수는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20년간의 휴전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만큼 제1차 세계대전은 불완전한 상태로 종결되고 말았다. 전쟁의 원인은 제거되지 않았고, 패전국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서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겐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 이후 유럽(특히 독일)은 비대해진 군부 세력을 견제할 만한 시민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경우엔 드레퓌스 사건 이후 성장한 시민 세력이 군부를 제어하는 데 성공하여 이후 문민 우위의 전통을 확실하게 했으나 독일과 같은 신흥 국가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유습이 남아 있었다. 패전을 인정할 수 없었던 독일 군부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는데 단 한 명의 대표도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명백히 했고, 패전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패전한 독일군은 마치 승전한 군대처럼 의기양양하게 브란덴부르크 문을 개선했고, 독일의 극우 세력은 공공연하게 독일군은 전선에 용감하게 싸웠으나 후방의 정치인들과 독일의 영광을 시기한 불순한 세력(유태인)이 독일 내부에서 농간을 부림으로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해외의 모든 독일 식민지를 빼앗기고,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해야 했으며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연합국에게 갚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독일군은 징병제 금지, 군함 보유량의 제한, 공군·잠수함의 보유를 금지당했고, 이런 조치들은 독일 국민에겐 치욕이자 실질적인 생활고로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독일인들은 이 조약을 '명령'이라 불렀다.  


패전 이후 독일 사회는 극심한 좌·우혼란이 빚어져 스팔타쿠스단의 봉기가 일어났고, 독일 군부와 자본가 계급은 이 일을 빌미로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 독일의 급진적인 좌파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제거해버린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당시 가장 선진적인 헌법으로 알려진 바이마르 헌법의 합법적인 절차를 걸쳐 독일의 수상이 되었고, 독일의 우파 세력들(자본가, 종교인, 중소 지주들)은 좌파의 발호를 막아줄 대안 세력으로 나치를 지지했다. 한편 독일의 노동자들은 독일의 부흥을 이끌어 줄 지도자로 히틀러를 받아 들였고, 일부 저항 세력은 나치와 합법적인 공권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1933년 2월 27일. 히틀러가 수상이 된지 불과 1개월여 만의 일이었다)을 확대조작하여 그 범인으로 네덜란드 출신으로 정신병력을 가진 마리누스 반 데어 뤼베라는 청년을 현장에서 체포한 뒤 이를 공산당의 파괴 공작으로 몰았다. 나치는 그날 밤 안으로 4,000여명에 달하는 공산당과 그들의 정적을 공범으로 몰아 체포했다. 놀라울만큼 신속한 조치였으며, 수상이 된 히틀러는 국가안보가 위태롭다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겁박하여 '인신보호법'을 무력화시키는 '긴급명령' 법안에 서명토록 했다. 이 날 이후 독일에서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괴테와 베토벤을 사랑한 독일 시민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히틀러의지배 이후 주어진 직장과 힘을 통해 성취되는 독일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처음엔 별다른 이유없이 유태인이 그들 사회에서 제거되는 것을, 다음엔 공산당이, 그리고 그 다음엔 사회당이 제거되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을 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치의 명령을 따르든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거리에서 사라지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한스와 소피, 잉게 숄의 아버지였던 로베르트는 독일 뮌스터에서 동남쪽으로 480km 가량 떨어진 울름에서 세무사로 일하고 있었다. 로베르트와 마그달렌 부부는 뮌헨 대학에 아들과 딸 하나씩을 보내고 있었다. 로베르트 가족은 나치에 대해 그다지 반항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한스는 어렸을 때 히틀러 유겐트의 대원으로 활동해서 17살 때인 1936년 노동절에는 뉘른베르크 경축행사에 기수로 선발될 만큼 열의도 가지고 있었으며, 동생 소피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소녀 연맹의 열성적인 회원이었다. 나중에 이들의 수기를 집필한 잉게는 울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우리는 조국을 사랑합니다. 누구나 느끼고 있는 것처럼 히틀러는 조국에 위대함과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며,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갖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그는 모든 독일인들이 자유롭고 행복해질 때까지 쉬지 않고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당시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가져다 준 놀라운 경제 부흥에 취해 그들에게 드리워진 억압의 사슬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고, 때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1938년 11월 9일 '수정(水晶)의 밤(chrystal nacht)'이라는 다소 로맨틱하게 들릴지도 모를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 밤 독일 전역에서 유태인이 운영하는 7,000여 개의 업소와 유태인 거주지가 습격당했고, 1,000여 개의 유태인 회당 시나고그(synagogue)가 불탔다. 거리마다 깨진 유리창이 달빛을 받아 수정처럼 빛났다고 해서 수정의 밤으로 불리우게 된다. 독일 시민들은 유태인들의 괴로운 처지를 묵살했다. 그러나 불길한 조짐은 단지 유태인들에게만 나타나지 않았다. 히틀러와 나치는 1942년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독일인 중에서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저해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려 했다. 그들은 장애인과 다운증후군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아동들을 격리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1940년 가을 무렵 독일의 지방 신문 독자들은 독일의 외딴 지역의 성(城)과 의료 보호소에 연이어 천편일률적인 사망 기사가 실리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병을 앓고 있는 가족을 요양이나 치료차 보호소에 보낸 가족들은 게슈타포로부터 고인의 유골이 들어있는 작은 종이 상자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고인의 죽음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도 정부에 문의하지 말라는 게슈타포의 엄중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처음 저항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베스트팔렌 지방의 신교 목사였던 보델슈빙 박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정신지체아 보호소인 베텔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40년 여름, 그는 수용소 아이들 몇 명을 당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을 받은 보델슈빙 박사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안락사 계획의 일환이란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힘쓸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를 막아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베를린의 고위층에 있는 친구에게 직접 찾아가 항의했지만, 베스트팔렌으로 돌아오자 그 지역 나치당 베스트팔렌 관구 지도자는 아이들을 인도해줄 것을 재차 명령했다. 보델슈빙 박사는 이를 거부했고, 나치당 관구 지도자는 게슈타포에게 이 목사를 체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0년 9월 18일, 그 보호소는 폭파되었고, 12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죽었다. 하지만 안락사 계획은 계속 되었고, 1941년 5월 독일 뮌스터의 가톨릭 주교인 클레멘스 폰 갈렌 신부는 나치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이 해 여름 갈렌 주교는 교회에서 "여러분이나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여 양심에 충실하려면, 생명과 자유 그리고 가정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것보다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강론했다. 그의 이런 강론은 뮌스터 전역의 주민들로부터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가 다시 강론을 할 때는 엄청난 청중이 몰려들어 성당문을 닫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갈렌 주교는 이 자리에서 나치당이 독일 전역에서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고 있으며 그 희생자 수가 8-1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증언하고, 나치당과 히틀러의 안락사계획을 고발했다. 언제나 온화하고 존경받고 있던 성직자로부터 나오는 열화와 같은 강론은 전독일 국민을 감동시켰고, 갈렌 신부의 강론들은 곧 인쇄되어 독일 전역의 교회와 성당, 그리고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의 우편함에 투입되었다. 1941년 내내 로베르트 숄의 집 우편함에도 갈렌 신부의 강론이 인쇄된 유인물이 꽂혀 있었다. 이런 갈렌 신부의 저항에 베를린 히틀러는 물론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을 비롯한 나치당 고위관료들이 당황하고, 분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괴벨스는 갈렌 주교를 교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는 문건을 작성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 계획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티칸과 국내 가톨릭 세력의지지를 상실하고,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갈렌 주교를 굳이 순교자로 만들어 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신에 나치당과 히틀러에 반대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줄 피의 본보기가 필요했다.


한편 갈렌 신부의 저항 소식을 접한 한스는 크게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한다. 누군가 드디어 큰 소리로 외칠 용기를 갖게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스는 자신도 히틀러와 나치당에 저항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누이인 소피 모르게 뮌헨에서 등사기를 구입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알렉산더 슈모렐과 함께 1942년 5월경 '백장미'라는 반정부 유인물을 인쇄하여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장미> 첫 호에서 독일 국민들을 "히틀러의 추종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백장미>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널리 퍼졌고, 우연히 한스의 동생 소피의 손에도 들어갔다. 유인물을 읽은 소피는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유인물의 글귀들이 매우 낯익다는 인상을 받았다. 잉게 숄은 아직 그의 부모와 함께 울름에서 살고 있었다. 소피는 흥분하여 이 유인물을 들고 오빠의 방으로 달려갔고, 마침 자리를 비운 오빠의 방 책장에서 자신이 조금 전 읽은 것과 같은 글귀에 밑줄이 그려진 책을 발견했다. 소피는 결국 오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장미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1942년 여름 동안 3편의 <백장미>를 인쇄했고, 거기엔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이 한 인간 이하의 거들먹거리는 자를 위해 피흘리기 전에, 이 같은 하느님을 모르는 전쟁 무기의 운용을 중단하라! 어떠한 국가라도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점점더 활발하고 노골적인 활동에 들어가 어느날 밤에는 <백장미> 유인물을 돌리면서 뮌헨시 거리에 히틀러를 비난하는 낙서를 70여 군데나 새겨 놓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고, 1943년 1월 독일 뮌헨 지구 나치당 관구지도자 파울 기슬러가 연설할 때는 많은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격렬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곧이어 "조국이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로 흔들리고 있다. 30만 독일 청년들이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총통! 우리는 당신에게 감사한다"며 학생 시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동시에 게슈타포로 하여금 '백장미 그룹'에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1943년 2월 18일 결국 체포로 막을 내리게 된다. 게슈타포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한 학생 14명 중 한스와 소피, 크리스토프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나머지 11명은 감옥에 수감시켰다. 나치당은 갈렌 신부와 같이 막대한 배경을 지닌 종교지도자를 손보는 대신에 몇 명의 학생을 손보는 것으로 다시는 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이후로도 수많은 젊은이들과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시민들이 감옥에서, 거리에서 죽어갔다. 백장미 그룹의 저항은 비록 나치 제3제국과 히틀러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치가 지배하는 한 국가와 사회에 돋아난 가장 순수한 가시였음에는 틀림없었다.

백장미 수기가 우리 사회에 던진 의미
한스와 소피의 가족들은 그후 나치에 의해 구금되었고, 나치의 제3제국은 소피의 예언대로 1945년 5월 8일 패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스와 소피의 누이인 잉게 숄은 동생들이 조직한 나치 저항 단체인 `백장미'에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를 냈는데 그중에서 1952년 출간된『백장미(국내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번역)』가 가장 유명하다. 잉게 숄은 1950년 숄 재단을 설립해 동생들과 `백장미'의 저항운동을 기리는 활동과 독일 내 미국 퍼싱(Pershing) Ⅱ 핵미사일 설치 반대 운동 등 다양한 평화운동을 벌이다가 지난 1998년 11월 4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독일과 전쟁 중 독일의 상황을 우리나라에 고스란히 비견하는 일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독재자의 정치적 얼굴은 일견 매우 흡사해보인다. 이들의 삶을 다룬『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우리나라에선 지난 1978년 초판이 발행되었다. 유신정권 치하의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발령된 법안들은 어쩐지 독일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 이후 히틀러와 나치당이 발효한 법령 '긴급명령'과 흡사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제3공화국은 '유신 헌법'을 제정한 뒤 1975년 긴급조치 제9호(① 유언비어·사실왜곡금지,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등에 의한 헌법의 부정·반대·왜곡이나 개정·폐지 주장 등을 금지한다. ② 학생의 집단적 정치활동을 금지한다. ③ 위반자의 대표자 등에 대해서는 행정명령을 취한다. ④본 조치를 비방하는 자에 대해서는 1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한다.)를 통해 그 어떤 비판도 봉쇄했다. 이에 저항하는 수많은 대학생과 양심적인 시민들이 투옥되었고, 고문당했으며 그 와중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한 듯 누리는 이 정도의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 흘린 결과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잉게 숄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현존하는 바벨탑에 약간의 흠을 내는 최소한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한다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 덕에 우리는 오늘날 이만한 자유라도 누리고 있는 것이다.

<200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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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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