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


이 말은 칼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이를 다시 재정립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해 일대기도 아니고, 평전을 쓴다는 일을 그것도 불과 28세의 나이로 해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이 60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전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자 피할 수 없는 난제는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자용으로 읽기에는 다소 녹록치 않은 난이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같은 해(2001)에 출간된 프랜시스 원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물론 누군가 내게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 내지 그의 평전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우선적으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이 책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2000)』 - 이 책은 책갈피 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동일한 책이다 - 을 추천하겠다. 물론 캘리니코스의 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마르크스의 생애는 부분적으로 다루는 대신 그의 사상을 개관하는데 치중하는 편이고, 프랜시스 원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생애사에 집중한 편이므로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는 편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평전은 연대기와 전기와 명확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평전과 전기, 혹은 연대기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평전은 그 용어 자체가 잘 설명해주듯 작가의 비평(批評)적 관점이 삽입된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당대의 뛰어난 평전 작가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비평가이자 역사가이고 저술가였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평전을 저술했던 아이작 도이처, 마리 앙트와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뛰어난 글을 남겼던(그 외에도 많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바쿠닌에 대한 평전을 저술했던 E.H. 카 등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 역사가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평전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시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음으로써 위대한 두 사상가의 대화에 관찰자이자, 적극적인 독해자로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사상사가(思想史家)라는 저자 이사야 벌린의 위치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를 견주고, 궁리해가며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훨씬 더 유익하고 재미있는 독서 체험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이라는 평가가 지탄받을 무엇이 아니듯, 정당한 까닭으로 보다 ’지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독서가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한 투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부르주아적 취향을 지녔다고 공격당하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데, 어떤 의미에서건 마르크스는 당대의 교양을 두루 습득한 인물이었던 것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당대의 속물적 과시에 연연해하는(이는 또한 마르크스가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적 취향과 혼돈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교양을 부르주아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소적인(좌파 혹은 노동자는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거나 교양을 경시한다는) 착시 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책이 좀 더 대중적인 난이도를 지니지 못한 점, 좀 더 풍성한 내용으로 꾸며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벌린을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 평전은 그가 28세 때 집필한 것이고, 애초에 그가 집필했던 원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고의 분량 보다 많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평전보다 쉬운 글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앨런 라이언은 이사야 벌린의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영어권에서는 이런 종류의 주제에 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고백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그가 사망했을 무렵, 영어권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러시아혁명을 통해 수립된 이른바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보는 마르크스, 세계대전과 헝가리 사태를 겪으며 재발견되기 시작한 인간적(청년) 마르크스, 다시 루이 알튀세르에 의한 구조적 마르크스에 이르는 여러 연구 방향과 해석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의 마르크스가 출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과 관점의 차이,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의 평전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분명 마르크스의 사상 그 자체에서 발견되어야 하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이사야 벌린의 뛰어난 지적 통찰과 한 인물의 사상과 지적인 흐름을 더 이상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계몽주의 산물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제1장 서론에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던 마르크스의 모토에 지극히 합당한 인물평을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선천적으로 강하고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의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으며 쉽게 상처를 받거나 감상에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우둔함은 물론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적인 미사여구와 주정주의도 혐오했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위선적인 데다가 자기 기만적이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데 골몰해서 당대의 특징적인 사회적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평가했고, 지식인은 현실과 동떨어진데다가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데 불과한 잡담이나 일삼는 사람들로 판단했다. <본문 20-21쪽>

 

이사야 벌린의 문장을 읽노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 못지않게 불친절한 사람이면서,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듯 천재적인 발상에 비해 더딘 문장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혼란과 궁극적 붕괴를 향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사회는 반동적이다. 물론 어떤 사회 체제라도 붕괴에 직면하면 구성원들에게 비합리적으로 현체제의 궁극적 안정에 대한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스스로 감추려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체제라도 일단 역사의 판결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구원될 수 없는 데도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거쳐,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에 의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실현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본문 32-33쪽>

 

위의 문장을 읽으며 이사야 벌린이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신랄하고, 핵심으로 곧장 진입해가는(물론 두 사람 모두 불친절하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문장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대해 "(마르크스의)학설은 적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기지의 무기에 대처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적인 공격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사야 벌린이 쓴 글 가운데 우리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우화를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을 고슴도치와 여우로 비교한 글이다. 그는 「고슴도치와 여우」란 에세이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짐승이기에 고슴도치를 기습할 많은 전략들을 무수히 짜낸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습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단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방패삼아 숲 속 한적한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다. 기회를 틈타 여우는 잽싸게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고슴도치는 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송곳 같은 가시를 곤두세운다. 여우는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를 어찌하지 못해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나 어떻게 하면 고슴도치를 공략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전략 세우기에 골몰한다. 여우와 고슴도치의 지혜를 따질 때, 우리는 당연히 여우의 지혜가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번번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고슴도치다.

 

이사야 벌린은 이 우화를 통해 사람들을 두 가지 그룹, 여우와 고슴도치로 나누었는데,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그 복잡한 면면들을 두루 살피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해내기 보다는 모순도 한데 아우르는 편이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상으로 종합해내고 통합해낸다. 그에 따르면 이 고슴도치들이 바로 프로이트(무의식), 다윈(자연도태), 마크르스(계급투쟁) 등이다. 그렇다고 이사야 벌린이 절대적으로 고슴도치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린이 여우에 속하는 인물로 거론하는 이(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 발자크 등)들의 면면이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특히나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을 읽을 때 다뤄지는 인물 못지않게 그를 다루고 있는 인물(저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사야 벌린은 유대계로 구소련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 그곳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경험하고, 11세 무렵 영국으로 망명한다. 유대인에겐 특히나 격동의 시대였을 20세기 초엽의 유럽, 라트비아라는 슬라브 문화의 영향 아래 놓인 지역 출신의 인물이 냉전 시대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물론 당시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과 미국인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성향(탈민족주의적 세계주의)을 그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쟁 기간 중 영국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모스크바에서 수개월간 머물며 당대의 소련 지식인들과 교유했고(그 가운데 안나 아흐마또바와는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전후에는 사상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그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의 삶의 역정이 한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 벌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거나 정치적 좌파로 구분될 수 없음에도 (만약 그런 분류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를 우리 사회에 산재해있는 속류 우파들과 다른 진정한 의미의 ‘리버테리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균형감각과 사상사적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마르크스와의 격조 있는 지적 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 이사야 벌린의 이 책은 1982년 신복룡 선생의 번역으로 평민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다만 이 책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고, 요사이 유행하는 작은 판형(이 책은 110X190)이다 보니 펼쳐놓고 밑줄 쳐가며 읽는 습관이 있거나, 좀 오랫동안 생각하며 읽기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러 오탈자에 신경 쓰며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왕 눈에 띈 오탈자가 몇 개 있어 이야기해보면  57쪽 "유대인 출신인 시인하이네"에서 시인과 하이네는 띄어 써야 하고, 276쪽의 "마르스크"는 "마르크스"로, 451쪽의 사진 캡션에 들어간 "리프크네이트"는 "리프크네히트"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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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 김태희 옮김 | 교양인(2006)

 

예전에 나는 내 개인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person-goebbels.htm)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 파울 요제프 괴벨스, 닥터 괴벨스에 대한 제법 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책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 다루고 있듯 1,000여 쪽에 육박하는 분량은 아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나는 하나의 뿌리를 가진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전쟁이 1648년, 30년간 지속된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거하여 생겨난 유럽의 근대민족국가체제의 종말이자 혹은 지속적인 파국의 시원(始源)이 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중사회의 도래 이후 대중과 정치, 대중과 권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괴벨스를 다루게 되고, 그에 대해 글까지 썼던 이유 역시 그와 같다.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이제 정치가들은 좌우를 막론한 누구든 대중선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기존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대중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동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시대의 대세라고 파악하고 있는 동안, 파시스트들은 대중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깨우치고, 이들을 동원하는 프로파간다 능력을 이용해, 그들이 선전선동에 있어 모범으로 삼았던 좌파를 능가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한 나치 세력 가운데 이 방면에 있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이가 바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디. 우리가 지난 독재정권 아래에서 했던 여러 정치적 경험들 역시 독일의 민중들이 겪었던 선동의 경험과 유사한 측면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과 제5공화국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5공화국이 전형적인 파시즘 국가였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히틀러의 뮌헨 폭동이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합법적 정권 장악의 초석이 되었고, 12.12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박정희 식으로 곧바로 집권 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추는 절차는 거쳤다. 이후 나치가 독일 제국의회 건물 방화사건을 빌미로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5공 역시 5.17 확대계엄조치를 통해 5.18 광주 민중항쟁을 유도하고, 이 과정을 통해 공세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악명을 떨친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조처 등도 매우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라디오 대량 보급과 컬러 TV보급, 프로 축구, 야구, 나치의 분서와 5공의 금서, 국민차 "폴크스바겐""티코", 베를린 올림픽과 서울올림픽, 유대인 탄압과 지역감정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독일 나치 정권의 정책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 혹은 대중 선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유럽 전역에서 출몰하고 있는 네오 나치즘과 파시즘적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 오랫동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내면화하도록 강요받아온 우리 사회의 근저를 흐르는 기류가 그만큼 심상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 사회가 국가주의화 되어가고 있다거나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파시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내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 역시 앞서의 염려만큼이나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서양의 역사적 경험들을 단선적으로 우리에게 대입시켜 해법을 강구해볼 수 없을 만큼, 급속하고 변화무쌍하게 일어나고(어제까지는 산아제한을 관장하던 단체가 오늘은 출산을 독려하는 것처럼) 있으므로 모순 자체를 살피는 시각 자체도 복잡하고,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자녀들인 헬가, 힐데가르르, 헬무트의 모습(1937)이다. 마그다는 괴벨스 못지 않은 히틀러 추종자로 자녀들 이름을 모두 히틀러의 'H'를 따서 지었고, 히틀러와 제3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닥치자 히틀러 없는 세상에서 살 필요가 없다며 자녀들 모두에게 청산가리를 먹인 뒤 괴벨스와 함께 자살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제목 역시 원제인 "괴벨스"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으로 이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읽어내는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분량에 미리부터 진력을 내지만 않는다면 퇴근 후 두어 시간씩 넉넉잡고, 사오일이면 한 차례 정도는 무리없이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는데 무려 2주 가량이 걸렸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주제에 대한 나의 넘치는 흥미와 지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인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의 글이 매끄러운 문장과 번역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이 나오고 한 달쯤 뒤였던가? 우연히 퇴근하는 길에 이 책의 옮긴이인 김태희 선생이 CBS(?)던가 모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말씀도 논리정연하게 잘 하고, 번역 솜씨 역시(독일어는 모르지만 우리말은) 빼어난 편이라 생각이 들었다. 대개 책이 재미있으려면 소박하게는 우선 주제가 관심있는 분야여야 하고, 문장이 좋아야 한다. 물론 장정이나 기타 등등이 좋으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어 높은 점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다만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것은 오로지 저자의 문제이지 옮긴이나 출판사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어렵지 않게 다른 평전 작가들, 예를 들면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이를 연상할 수도 있고, 파시즘과 관련해서는 로버트 O. 팩스턴, 빌헬름 라이히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쉽게 입에 올리긴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아이작 도이처, 이사야 벌린, 요아힘 C. 페스트가 저술한 평전들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를 이들에게 비유하는 것은 크나큰 결례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들과 로이트의 가장 큰 차이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사실 한 인물이 시대와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 그에 대한 평전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앞서 말한 이들이 이뤄냈던 작업들 역시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평전이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한 명의 뛰어난 작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안목과 통찰을 통해 인물을 심도있게 파고 들어가는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이기 때문에 평전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우선 성실성일 것이다. 그 점에서 로이트는 일단 합격점이다. 괴벨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달리 생전에 일기를 남겼고, 이 일기는 나치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괴벨스에 대해서는 제법 풍성한 자료들이 있으나, 문제는 로이트가 새롭게 입수한 자료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그 부분에서 로이트가 지나치게 자료적인 충실함, 작가이기보다는 역사가적인 입장을 관철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자료가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서술에 있어 임팩트한 순간이 모자라고, 그의 새로운 해석을 기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괴벨스에 대한, 그가 살아온 행적, 그가 역사 속에 남겼던 여러 궤적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 쉽지 않다. 앞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괴벨스는 이전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정치인들과 달리 대중을 상대로 정치 선동을 행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행적을 고려했을 때 괴벨스 평전에서 대중과 괴벨스의 상관 관계, 실제 대중의 반응 등 의미있고 생생한 일화들도 충분히 삽입되었을 법한데(전체 페이지 분량를 보자면 더욱더) 그런 내용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앞서의 문제에 대해 로이트는 괴벨스 평전을 아래의 관점(소위 '野史'라고도 하는)보다는 정사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 부족하다는 나의 느낌은 남는다. 분량은 넘치지만 괴벨스의 그런 행적들이 당시 독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다시 인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로이트는 잘 드러내질 못하고 있다. 다소 역부족이란 인상이 든다는 것이고,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날 괴롭혔다. 다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책 속의 사진에 달린 설명(캡션)이 작가의 본 문장보다 도리어 의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끝으로 정리하자면,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에서 나는 "괴벨스"는 필요충분으로 읽을 수 있었지만, "대중선동의 심리학" 영역에 대해서는 다소간 아쉬움을 느꼈고, 그 원인을 작가가 자료들을 적절하게 요리해내는 능력, 통찰력 부족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악하였으므로 그 유능함이 더욱 돋보이는 괴벨스에 대한 책이 우리 말로 이렇듯 훌륭하게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흐뭇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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