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


이 말은 칼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이를 다시 재정립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해 일대기도 아니고, 평전을 쓴다는 일을 그것도 불과 28세의 나이로 해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이 60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전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자 피할 수 없는 난제는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자용으로 읽기에는 다소 녹록치 않은 난이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같은 해(2001)에 출간된 프랜시스 원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물론 누군가 내게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 내지 그의 평전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우선적으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이 책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2000)』 - 이 책은 책갈피 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동일한 책이다 - 을 추천하겠다. 물론 캘리니코스의 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마르크스의 생애는 부분적으로 다루는 대신 그의 사상을 개관하는데 치중하는 편이고, 프랜시스 원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생애사에 집중한 편이므로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는 편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평전은 연대기와 전기와 명확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평전과 전기, 혹은 연대기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평전은 그 용어 자체가 잘 설명해주듯 작가의 비평(批評)적 관점이 삽입된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당대의 뛰어난 평전 작가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비평가이자 역사가이고 저술가였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평전을 저술했던 아이작 도이처, 마리 앙트와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뛰어난 글을 남겼던(그 외에도 많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바쿠닌에 대한 평전을 저술했던 E.H. 카 등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 역사가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평전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시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음으로써 위대한 두 사상가의 대화에 관찰자이자, 적극적인 독해자로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사상사가(思想史家)라는 저자 이사야 벌린의 위치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를 견주고, 궁리해가며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훨씬 더 유익하고 재미있는 독서 체험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이라는 평가가 지탄받을 무엇이 아니듯, 정당한 까닭으로 보다 ’지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독서가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한 투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부르주아적 취향을 지녔다고 공격당하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데, 어떤 의미에서건 마르크스는 당대의 교양을 두루 습득한 인물이었던 것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당대의 속물적 과시에 연연해하는(이는 또한 마르크스가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적 취향과 혼돈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교양을 부르주아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소적인(좌파 혹은 노동자는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거나 교양을 경시한다는) 착시 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책이 좀 더 대중적인 난이도를 지니지 못한 점, 좀 더 풍성한 내용으로 꾸며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벌린을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 평전은 그가 28세 때 집필한 것이고, 애초에 그가 집필했던 원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고의 분량 보다 많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평전보다 쉬운 글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앨런 라이언은 이사야 벌린의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영어권에서는 이런 종류의 주제에 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고백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그가 사망했을 무렵, 영어권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러시아혁명을 통해 수립된 이른바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보는 마르크스, 세계대전과 헝가리 사태를 겪으며 재발견되기 시작한 인간적(청년) 마르크스, 다시 루이 알튀세르에 의한 구조적 마르크스에 이르는 여러 연구 방향과 해석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의 마르크스가 출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과 관점의 차이,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의 평전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분명 마르크스의 사상 그 자체에서 발견되어야 하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이사야 벌린의 뛰어난 지적 통찰과 한 인물의 사상과 지적인 흐름을 더 이상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계몽주의 산물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제1장 서론에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던 마르크스의 모토에 지극히 합당한 인물평을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선천적으로 강하고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의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으며 쉽게 상처를 받거나 감상에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우둔함은 물론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적인 미사여구와 주정주의도 혐오했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위선적인 데다가 자기 기만적이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데 골몰해서 당대의 특징적인 사회적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평가했고, 지식인은 현실과 동떨어진데다가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데 불과한 잡담이나 일삼는 사람들로 판단했다. <본문 20-21쪽>

 

이사야 벌린의 문장을 읽노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 못지않게 불친절한 사람이면서,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듯 천재적인 발상에 비해 더딘 문장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혼란과 궁극적 붕괴를 향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사회는 반동적이다. 물론 어떤 사회 체제라도 붕괴에 직면하면 구성원들에게 비합리적으로 현체제의 궁극적 안정에 대한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스스로 감추려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체제라도 일단 역사의 판결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구원될 수 없는 데도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거쳐,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에 의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실현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본문 32-33쪽>

 

위의 문장을 읽으며 이사야 벌린이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신랄하고, 핵심으로 곧장 진입해가는(물론 두 사람 모두 불친절하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문장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대해 "(마르크스의)학설은 적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기지의 무기에 대처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적인 공격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사야 벌린이 쓴 글 가운데 우리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우화를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을 고슴도치와 여우로 비교한 글이다. 그는 「고슴도치와 여우」란 에세이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짐승이기에 고슴도치를 기습할 많은 전략들을 무수히 짜낸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습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단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방패삼아 숲 속 한적한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다. 기회를 틈타 여우는 잽싸게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고슴도치는 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송곳 같은 가시를 곤두세운다. 여우는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를 어찌하지 못해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나 어떻게 하면 고슴도치를 공략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전략 세우기에 골몰한다. 여우와 고슴도치의 지혜를 따질 때, 우리는 당연히 여우의 지혜가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번번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고슴도치다.

 

이사야 벌린은 이 우화를 통해 사람들을 두 가지 그룹, 여우와 고슴도치로 나누었는데,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그 복잡한 면면들을 두루 살피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해내기 보다는 모순도 한데 아우르는 편이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상으로 종합해내고 통합해낸다. 그에 따르면 이 고슴도치들이 바로 프로이트(무의식), 다윈(자연도태), 마크르스(계급투쟁) 등이다. 그렇다고 이사야 벌린이 절대적으로 고슴도치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린이 여우에 속하는 인물로 거론하는 이(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 발자크 등)들의 면면이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특히나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을 읽을 때 다뤄지는 인물 못지않게 그를 다루고 있는 인물(저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사야 벌린은 유대계로 구소련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 그곳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경험하고, 11세 무렵 영국으로 망명한다. 유대인에겐 특히나 격동의 시대였을 20세기 초엽의 유럽, 라트비아라는 슬라브 문화의 영향 아래 놓인 지역 출신의 인물이 냉전 시대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물론 당시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과 미국인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성향(탈민족주의적 세계주의)을 그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쟁 기간 중 영국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모스크바에서 수개월간 머물며 당대의 소련 지식인들과 교유했고(그 가운데 안나 아흐마또바와는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전후에는 사상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그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의 삶의 역정이 한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 벌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거나 정치적 좌파로 구분될 수 없음에도 (만약 그런 분류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를 우리 사회에 산재해있는 속류 우파들과 다른 진정한 의미의 ‘리버테리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균형감각과 사상사적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마르크스와의 격조 있는 지적 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 이사야 벌린의 이 책은 1982년 신복룡 선생의 번역으로 평민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다만 이 책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고, 요사이 유행하는 작은 판형(이 책은 110X190)이다 보니 펼쳐놓고 밑줄 쳐가며 읽는 습관이 있거나, 좀 오랫동안 생각하며 읽기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러 오탈자에 신경 쓰며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왕 눈에 띈 오탈자가 몇 개 있어 이야기해보면  57쪽 "유대인 출신인 시인하이네"에서 시인과 하이네는 띄어 써야 하고, 276쪽의 "마르스크"는 "마르크스"로, 451쪽의 사진 캡션에 들어간 "리프크네이트"는 "리프크네히트"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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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김경연  한정숙 옮김 | 까치글방(1999)




천년제국 : 비잔티움 324-1453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역사 공부를 즐기는 편이다. 그간 역사를 공부하면서 내가 깨우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제국은 스스로의 힘을 파악하지 못할 때 가장 강성하고, 경계를 세우는 순간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종말론적인 기독교에서는 종종 천년왕국의 도래를, 불교의 미륵신앙처럼 이야기한다. "천년왕국""신약성서"의 '요한의 묵시록' 제20장에 적힌 문장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1,000년간 통치한 뒤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해석이다. 신앙으로서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 '천년'이란 시간에 주목해보고 싶은데, 이 책 "비잔티움 제국사"엔 굳이 324년으로부터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시간을 명시해두고 있다. 이 때 내가 놀라고, 의문을 품은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비잔티움 제국이 무려 1,129년간 존속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의 건국을 기점으로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330년 5월 11일을 기점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어째서 324년으로 명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문을 푸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즉,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년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 어째서 저자는 324년을 기점으로 잡고 있으며 그것이 유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이 의도하는 목적 - 즉,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것 - 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고백할 것은 올해 목표로 세웠던 "서양중세사 이해"를 위한 나의 독서 계획에 따라 구한 책이긴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중도에 몇 번이고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은 내게 어려웠다. 사실 이 책의 번역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명사 "비잔티움"은 오랫동안 그저 영어의 형용사적 표현인 "비잔틴"이었다. 여기엔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비잔티움 제국이 우리에겐 '잊혀진 제국'이자, 별관련이 없는 제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알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그저 비잔틴 미술의 몇 가지 양식인 이콘(icon) 성화들, 모자이크 양식이나 독특한 문양, 성상숭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서로마교회(가톨릭)와의 논쟁, 동아시아적인 정치술로 폄하되는 매수와 모략, 암살의 정치,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견뎌내게 했다고 전하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 고구려 철갑기병을 연상케 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주축이 되었던 중기병 카타플락타이(Cataphract), 콘스탄티노플의 일곱겹 성벽과 이를 둘러싸고 이슬람제국의 메메드 2세와 벌였던 사투 등등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서로 연결되어 이해되었던 것이 아니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고,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3부작 중 하나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그나마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조금 덜어주었을 뿐이다.

어떤 한 나라, 그것도 천년의 역사를 가진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만, 나에겐 비잔티움 제국의 일곱 겹 성문을 열어젖히기에 아는 게 너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이 태부족하단 것도 비잔티움 제국에 다가서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령 비잔틴 미술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은 미셀 카플란의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79 "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 와 앞서 말한 시오노 나나미의 책, 그리고 예전에 <한국일보, 타임라이프북스>에서 펴냈던 것을 가람기획에서 재출간하고 있는 "타임라이프세계사" 시리즈 정도가 '비잔틴 미술'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읽은 것들도 저 정도다. 그외에는 서양중세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하고 있는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읽기 쉬울 리 없다. 그나마 이 책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 Ostrogorsky)"가 일반 대중들을 위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한 것이라고 하니 숨이 턱턱 막혀 올 밖에...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이 책은 소중하다.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

내가 던졌던 첫 번째 질문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에 대해 저자인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잔티움 발전의 주된 원인은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다. 이 세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외한다면 비잔티움의 본질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구조물은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라는 종교 그리고 로마의 국가형태가 종합되면서 비로소 성립했다. <본문 9쪽>


석학만이 내릴 수 있는 명쾌한 해석이면서, 이 책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학교 세계사 시간에 나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중세가 시작되고, 동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근대가 시작된다고 배웠다. 어찌되었든 오스트로고르스키식 표현을 빌자면 서양이란 역사적 구조물은 로마제국의 국가제도와 기독교 정신, 그리고 동양으로부터 전해져 온 문명에 의한 것이며 이 중 어느 하나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서유럽인들에 의해 무시당해왔고, 이런 그들의 경향은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서유럽인들의 폄하는 역자 후기에도 있지만 "로마 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영국의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로마사 집필에 매진한 역사가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국과 프랑스가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대였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부르조아지들이 성장하고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가 "로마제국 쇠망사" 전 6권을 발간하던 해에 엠마누엘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발간했고, 루이16세는 삼부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그는 그런 시기의 역사가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가들은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역사연구를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도덕성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불변하는 보편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믿었고, 인간의 진보를 믿었다. 그에 따라 과거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미신, 환상, 종교적 신앙 등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맥락상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게다가 에드워드 기번은 16세 때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했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퇴교당한 경험도 있었다. 물론 그가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서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술한 것을 그런 사적인 이유에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신교적인 보편성에 기대고 있던 로마 제국의 기풍이 기독교화로 말미암아 훼손된 것으로 보았고, 그로인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에 이른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기독교적 믿음이 제국 형성의 기초가 되었던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고, 이런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한 국가의 몰락,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던 대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하는 것은 옳을 것이고, 거기엔 이들 역사가들의 해석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기독교화에서만 찾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기번은 동로마 제국 자체를 서양 중세의 암흑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서양 중세를 계몽주의 시대 역사가들처럼 암흑기로 보지도 않을 뿐더러 근대의 중요한 맹아들을 품고 있던 새로운 시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동로마인들은 스스로를 '비잔티움적인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런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비잔틴'이란 말 자체가 후세인들이 그들을 규정하며 붙인 말이었을 뿐, 그들 스스로는 로마인으로 생각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안정을 찾은 과거의 게르마니아 일대를 차지한 서유럽인들은 스스로를 로마의 후예로 생각하고자 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힘의 상징인 로마군단의 독수히 휘장을 제국의 상징으로 삼았고,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 모두 국가 상징을 독수리로 삼았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인 "루마니아"는 국명 자체가 "Rumania"다. 그네들은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혈통 자체가 로마인들과의 혼혈로 이루어졌고, 라틴인에 가까운 언어와 형질을 지녔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로마제국이 서구 문명에 끼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고, 실제 제국 말엽에 이르렀을 때는 과거의 로마제국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되었음에도 그들은 멸망하던 그 순간까지 로마인으로 살다 죽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천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저자의 표현대로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저자가 앞서 강조한 것과 다른 원인 몇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물론 저자 역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인데,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간적으로 이슬람제국과 서유럽제국의 세력 판도가 최전성기를 맞이하기 전이었다는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이들 두 세력의 완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다른 한 가지는 비잔티움 제국의 탁월한 관료제도인데, 익히 잘 알려진대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마치 로마제국의 말기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종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안위 자체가 지켜진데는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웠을 테지만 관료제도 자체가 튼실했던 탓이다. 비슷한 시기의 서유럽 군대의 엘리트 계급이랄 수 있는 기사들이 사실상 문맹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동로마의 군대의 주축을 이룬 귀족들은 최고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비잔티움 제국이 오랫동안 독점해오다시피 한 동방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경제적 성공도 크다. 동로마는 로마제국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체제 아래에서 희생당한 소규모 농민들들의 예속 상황을 완화시키고 이들을 군사력의 주축으로 삼는 건실한 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부한 만큼 정복 전쟁에 나설 수는 없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주변 국가들의 강성함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토지와 지역에 기반한 농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자기 지역을 떠나 정복전쟁에 나서는 일 자체를 꺼려한 탓도 크다 할 것이다.


324-1453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을 330년 5월 11일로 잡지 않고, 324년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렇다면 324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기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부 황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제국을 재통일했다. 이전까지 비잔티움은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에 불과했다. 나는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30년을 기점으로 하지 않고, 324년을 기점으로 잡은 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로마의 진정한 계승자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오고, 유스티니아누스 때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이클레이오스 황제기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 집권 조직과 기독교, 동방적 색채를 두루 갖춘 전제국가가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빠져 있거나 종종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우리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혹은 "고구려사 왜곡"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도대체 동북공정은 무엇이고, 그로인한 고구려사 왜곡은 무엇인가? 중국의 문화권 안에 있던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에겐 "연호(年號)"란 개념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건원(建元)26년이란 말이 역사서에 실려 있다면 이는 B.C.115년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 연호라는 것은 대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제 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이다. 이전까지는 각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 시기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측은 자신들에게 신속된 나라에게 복종의 의미로 자신들의 이런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지요. 고구려에게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강요하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침략한 역사가 있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 태종 때의 일인 것 같다.)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런 고구려도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중국 화친책을 사용하면서 중국의 연호를 받아 사용하게 되는데, 중국은 향후 남북한의 통일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서 문제가 된 것이죠. 간혹 역사기행을 다니다보면 이름있는 옛 선인들의 비석이나 고승들의 부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네들의 비석이나 부도에 새겨진 연호를 확인해보면 대개 '유당(有唐) 신라(新羅)'나 '유명(有明)조선(朝鮮)'이란 글귀를 볼 수 있다. 이는 '당나라에 속한' 혹은 '명나라에 속한' 이란 뜻이 된다. 그와 상관없이 우리들의 민족 감정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는 중국측의 역사 서술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이화 선생이 신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규정하지 않고, 고려를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로 규정하는 것도 어느 정도 그런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만든 고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식이 강했다. 그런 까닭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서경(지금의 평양)을 개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가 실제로 북방 정벌에 나선 일은 적었다 하더라도 그네들의 국명에 나타나듯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은 매우 중요한 국정 지표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신은 다들 잘 아는 것처럼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 개국에 앞장 섰던 삼봉 정도전의 요동 정벌로 이어졌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역시 우리의 고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로마의 계승자, 혹은 로마 그 자체로 여겼고,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사방의 적들에게 포위당해 국경 경비만으로도 막대한 군비를 지불하면서 끊임없이 제국의 외연을 확장하려 들었던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이런 노력이 훗날 중세 서유럽에 로마의 자산을 전수해줄 수 있었던 토양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의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24년을 기점으로 이 책을 출발시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527-565)는 실제로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대원정군을 이끌고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에스파니아를 공격했고, 일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로마 제국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했다 하더라도 세상은 변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옛 로마의 영화를 회복할 만한 사회경제적 토대가 부족했다. 제국 황제들의 정복 사업은 실패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화는 시들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의 옛 영토엔 새로운 주인들이 차지했고, 비잔티움 제국 자신들도 라틴 문화 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젖어들며 급격히 그리스화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8세기 무렵부터는 동지중해 지역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하게 되니 이들이 이슬람 세력이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수장이었던 카를(샤를마뉴) 대제에 의한 비잔티움 제국의 이념적 권위 상실은 심대한 타격이 되었다. 카를 대제는 바이에른, 작센, 롬바르드 왕국 등을 차지하며 기독교 세계 최고의 강국이자 왕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실패한 것을 성취한 카를 대제에게 로마 교회의 신망이 쏠렸고 그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얻어냈다. 우리는 로마교회의 분리가 단순히 성상숭배에 따른 견해 차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해결되고, 성상숭배에 대한 견해차도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로마 교회는 더이상 과거의 "로마" 교회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로마를 단일한 제국이라 생각했으므로 카를 대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부인한 것이 된다. 당시 유럽의 정신적 세계 질서는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종종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낸 것을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만의 공로로 생각하기 쉽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진출에 대한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그 와중에 이슬람 왕국의 속주만도 못한 지경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큰 의의는 역자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고전고대의 문화를 보존하여 이를 서유럽에 전해준 것과 정교의 정신적 유산을 슬라브 세계에 남겨준 것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우리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무엇이며, 유럽의 시작 - 오늘날 아시아를 비롯해 전세계를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유럽 문명권"으로 보이도록 묶어버린 유럽의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뒤이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역사는 더이상 역사가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종종 과학이 그러했듯 그것을 저술하는 이들에 의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분명 비잔티움 제국이 오늘날의 서유럽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잊혀진 것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계가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고구려사 문제로 시끄럽지만 과거 신라지역 출신의 정치 권력과 남북한이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결과 오늘날의 북한 지역인 고구려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애써 축소해왔던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의 역사에서 역사가의 몫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들라크루아, 콘스탄티노플 함락

같은 유럽이라 할지라도 동방에 가까왔던 비잔티움의 역사를 축소함으로써 유럽의 사가들은 빛이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한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의문을 품어 본다. 물론 이 책이 유럽중심주의 역사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담고 있지 않으며, 나 자신도 앞으로는 아시아 중심주의 역사관으로 무장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비잔티움 제국사를 읽으며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의 일부를 교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보다 전지구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 끝으로 이 책의 역자와 출판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 본다. 왜냐하면...
어느 출판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외국어를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면 그 책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떠올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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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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