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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09 김혜순 - 참 오래된 호텔


참 오래된 호텔

- 김혜순

참 오래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밖으로 내던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내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텔.


*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추억에 잠긴다. 시 때문에 생긴 추억이 아니라 시인 때문에 생긴 추억들이 내게는 너무도 많다. 아름답고, 고상하고, 멋있는 그래서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채 마녀의 도가니에 들어가는 약재가 되어도 좋다는 미망에 사로잡혔던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있었는가?


이 시는 굉장히 많은 이미지들로 꾸며져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몇 개의 이미지들이 계속되는 변주를 통해 '참 오래된 호텔'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들을 꾸며내고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이 '참 오래된 호텔'이라는 시가 인간의 영혼이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육신을 노래한 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육신은 다만 '고기'로서의 육신이 아니라 밥 먹고, 섹스하고, 잠자고, 그리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는 영혼이 담긴 육신이다.


내가 살아낸 육신은 1992년과 1993년 사이에서 시인을 아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맛보았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호텔방 인근 방에는 시인의 사랑이 머물기도 하고, 자신의 육신은 영혼을 담기도 하고, 영혼이 육신에 머물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피곤하다. 이 시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시라는 것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것인 만큼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정의 같은 것은 필요 없지 않은가? 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시에 푹 빠져들게 하지 않는다. 시인과 독자는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 거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손을 뻗치면 그 '양모같은 주름이 잡힌 강물'에 손가락을 담글 수 있는 정도의 거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에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있다. 지금 당신은…


이 시는 그렇게 당신에게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읽으며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해되고 저절로 보여지는 시. 그게 바로 마녀. 김혜순의 시이다.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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