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 그녀



다카하시 신을 아는 만화 매니아들이 많을 텐데,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약간 우스운 일이 될까? 가끔 남성성, 여성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남성성은 이렇다, 여성성은 이렇다고 거칠게 규정하거나 규정당할 때 약간 마음이 아파질 때도 있다. 가령,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내가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왕따 당하는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 점에서 페미니즘 역시 선택적 사고라는 것은 일견 불행하면서 다행한 일이다. 가령, 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지만 그 대의에 너무나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넘겨두고라도 남성성, 여성성이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글쎄, 최소한 만화책을 고르는 취향에서만큼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취향 분화가 확실히 되는 분야가 있을까? 물론 그 장벽이 남성과 여성의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변화해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만화계의 장벽은 브리티쉬 오픈에서 여성 골프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큼이나 높다. 어제와 그제 머리맡에 놓고 읽은 두 권의 만화책은 나에게 남성을 위한 순정만화도 존재하는구나 하는 편견 아닌 편견, 스테레오 타입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최종병기 그녀』의 작가 ‘다카하시 신’의 초기 단편집 『좋아하게 될 사람』과 『안녕, 파파』 두 권이었다. 『최종병기 그녀』의 첫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다카하시 신이란 작가가 분명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잠시 후 남자일 거라고 생각을 수정했다(실제로도 '남자'였다). 그런 착각을 했던 까닭은 다카하시 신의 독특한 그림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남성적 문체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분명 만화에 존재하는 남성적 그림체보다 명확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에 있어서 남성적 그림체와 여성적 그림체는 확연히 구분될 만큼 달랐다.

그 차이는 고우영 『삼국지』의 그림체와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캔디』의 그림체가 다른 것처럼 확연한 것이다. 물론 국내의 일부 여성 작가들(『테르미도르』의 김혜린 같이)이 프랑스 혁명 과정을 다루는 만화를 그리거나,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이 그간 남성적 주제로 알려져 왔던 역사 속의 권력 투쟁, 혁명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림체에 있어서만큼 전형적인 그림체를 유지하는 편이다. 가령 얼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눈동자, 치렁치렁하는 머리카락,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 등등 말이다. 물론 다카하시 신의 그림체는 기존의 여성 순정만화체 그림과는 또 다르다. 어딘가 비어 있는 듯 남아있는 여백,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흑백 모노톤과 끝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가늘게 이어지는 선, 스크린 톤은 거의 생략하는 등 적게 표현하여 오히려 상큼하고 신선한 느낌이 인상적인, 어딘가에서 본 듯한 정겨움이 묻어난다. 마치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의 눈길을 피해 공책에 몰래 그린 만화의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의 그림체가 남성적인 느낌은 아니다. 물론 등장하는 여성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나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의 근육은 사라지고, 여성적인 선은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작가가 금방 남성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캐릭터 표현에 있어서 숨길 수 없는 남성적 시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신의 대표작 『최종병기 그녀』를 보자. 제목부터 참 과감하다. "최종병기 + 그녀"라니,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평범한(?) 남자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받은 혹은 엄마 몰래 숨겨둔 용돈을 챙겨 가장 먼저 군것질을 하고 조금 지나서는 건프라를 사거나 마크로스, 밀리터리 플라모델들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고, 형, 누나, 혹은 친구네 집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과월호를 읽거나 거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발견하여 그에 대한 설정자료집을 사거나, 복사하고 인터넷으로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이때의 최종병기란 무릇 거대로봇군단이거나 그도 아니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뉴타입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라니 게다가 그녀는 이런 말이나 지껄여대는 소녀다.

"왜 나는 당신에게 상처만 입히는 걸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여자라서 미안해"

주인공 소녀는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유방을 달고 다니며 유사시엔 앞가슴을 미사일처럼 발사하는 아프로다인이나 비너스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여성주의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게 그려지는 만화체에 비해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고, 개조하여 병기화해가는 과정 자체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고 소외당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교실 뒤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가와서 쪽지 한 장을 놓고 수줍게 교실 뒤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소녀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쟤랑 나랑 같은 반이었어? 하고 되묻고 싶을 만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다. 요새 경제 이야기하면서 다들 성장 동력, 성장 동력하는데, 우리 삶에 있어서의 성장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도 한 때는 뭐뭐 했다"는 식의 대사나 후일담을 늘어놓는 나이가 되어간다. 어떤 사람은 군대 시절 이야기를, 어떤 이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선배 뻘 되는 386 세대들(엄밀히 말하면 나도 그 끄트머리쯤 있는지도 모른다. 70년생, 89학번, 30대)이 이제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다니는 지금, 나의 유년 시절은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나는 요새도 밤마다 누군가에 쫓기는 꿈을 꾼다. 대개 이런 꿈의 할머니 식 해몽은 '키 크느라 그런다'는 것이다. 자, 그대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라. 정말 즐거웠는가? 아니면 고통스러웠는가? 누구나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친구들에게는 내 과거는 이랬었지, 이렇게 화려했거나 이렇게 고통스러웠거나 상관없이 과장하게 된다. 말할 때는 금방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지만 돌아서고 나면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를 잘 기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아름다운 유년만이 존재했을까? 『최종병기 그녀』의 두 남녀 주인공(슈이치와 치세)이 만난 세계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고, 결국 치세는 최종병기로 개조된다. 과연 그녀는 나는 아직도 치세 그대로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다카하시 신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SF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는 듯 보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라 할 만큼 설명하지 않는다. 치세가 어떻게 최종병기가 되었는지 실제로 그녀가 최종병기의 위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부분은 죄다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병기 그녀』에서 <에반게리온>이나 기타 SF물들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종종 이런 부류의 SF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만들어 논 가상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그 설정들을 달달 외우는 것을 취미로 한다. 하지만 『최종병기 그녀』는 그런 류의 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남성들을 위한 순정만화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만화의 여주인공 치세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카하시 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개의 여성 캐릭터들은 종종 남성들보다 강인하지만(특히, 성적 접촉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에게는 유달리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자극적이라는 측면에서) 그 외의 경우엔 무척이나 순종적이고, 다소곳하다. 물론 이 부분에 남성 성 판타지를 자극한다고 한 마디 해놓으면 아주 편하지만, 그건 또 너무 쉬운 접근법이다. 다카하시 신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분명 성(sex)의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어린이"와 "어른"을 가르는 구분 근거는 섹스다. 어른이란 말의 어원이 되는 '어르다'란 말 자체에 이미 '섹스하다, 남녀가 교합하다'는 뜻이 있다. 결혼, 즉 공인된 섹스는 성인식의 최종 단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 동력 혹은 넘어서야 할 고개들 중 하나는 분명 '섹스'다. 『최종병기 그녀』는 일종의 성장소설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성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요소들은 군데군데 적절히 깔려 있다. 아무리 십대 청소년들이 까질 대로 까졌다 한들 벌건 대낮에 러브호텔을 당당하게 들락거리는 어른들의 성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입으로는 숱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녀석들의 태반이 실제로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본 경험들 역시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친구들과 '오줌멀리 누기' 경쟁에서조차 지고 싶지 않은 남성들의 괜한 경쟁 심리가 만들어낸 우스운 결과다. 



난 정말 어렸을 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고,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땐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며 그 뒤론 줄곧 어서 시간이 흘러 자연사하게 되길 바라고 있는 중이다. 어른들의 세계, 그곳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모든 것이 부정해보였고, 부조리했다. 학교도 전쟁터였지만 사회는 그보다 더욱 악랄하고 끈질긴 전쟁터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전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람들이 낙오하고 죽어갔다. 이런 남자 아이에게 최종병기는 누구였을까? 그네들이 매달릴 수 있었던 최종적인 지지대는 누구였을까? 친구들과의 우정 아니면 사랑이다. 우리들에게 사랑은 언제나 지독하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혼란일 수밖에 없다. 치세와 슈이치가 왜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가? 왜 치세의 전투경험이 축적되어갈 수록 그녀의 자아는 붕괴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가? 왜 그녀가 사회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느낄까? 불행하게도 그것이 성장이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비평가들이 지난 1980년대의 호러 무비 혹은 슬로터 무비들을 평할 때 십대의 성적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크림>에 등장하는 호러 무비의 원칙처럼
"첫경험을 한 여자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사랑하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갈망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비참한 결과이지만, 마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매우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참호(우리의 성격갑옷) 밖으로 방심하여 고개를 내밀면 순식간에 저격당하고 만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바보취급 밖에 받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전쟁이란 것을 무시해버린다 하더라도 실제 고교생의 생활이 절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중 누가 있는가? 그들의 상황이 혼란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는가? 몸은 이미 성장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공공연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사회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하다. 사랑하면 상처를 주게 된다. 그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혼란이고, 혼돈이다. 관계를 맺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자아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불완전한 자아로서 결핍된 상태에서 만나 사랑한다.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으나 이런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란 매우 어렵다. 이들의 사랑이 혼돈스럽고, 때로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나는 이 만화책을 도서대여점에서 읽었는데, 실제로 고등학생이 빌려가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는 첫사랑의 열병이 지나갔을 법한 나이의 사람들이 도리어 열광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에겐 이들의 관계를 제법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일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길 위의 인생(life on the road)'인 것을, 어차피 길을 가야하는 사람에겐 터널도, 길의 일부이일 수밖에 없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류는 오로지 방황을 통해서만 치유된다." 좋은 성장 소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섣부르게 회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끝내 백조가 될 수 없는 미운 오리 새끼들도 있기 때문에…. 슬프게도 어른이 된다는 건, 백조가 아니란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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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원래 이 리뷰는 다카하시 신의 단편집 『안녕, 파파』와 『좋아하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인데... 방향을 잘못 잡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냥 『최종병기 그녀』를 중심으로 쓴 다카하시 신의 작품론처럼 되어 버렸다. 어쩜 좋냐? 흐흐, 여러모로 우습게 되었다. ^^ 그럭저럭 수준작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최종병기그녀>는 나에게 대단한 감동을 준 만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도 전권 다 가지게 되었고, OVA 애니메이션 DVD도 소장하고 있는데다가 작가인 다카하시 신의 초기단편집들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인연일지 모르겠다. 치세!(흐흐, 게다가 지금 트위터의 아이콘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종병기 그녀>의 상대역이자 나레이터인 '슈'다. 치세의 사랑을 한껏 받은 덕분에 결국 지구멸망의 날까지 살아남은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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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편력기 / 홍디자인 / 1999년

가끔 TV식, 비디오식 영화작명 법을 보면 유명 배우의 이름을 앞에 들이대면서 "누구누구의 어쩌구"하는 제목의 작품들이 있는데, 이런 제목의 영화는 십중팔구는 개판이었다. 오죽 내용에 자신이 없으면 그런 식의 작명법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 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편력기>는 그런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의혹으로부터 행복한 경계 긋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 책은 제목으로부터 책 내용에 대한 절반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명석"이라는 한 개인의 만화읽기에 관한 책이며,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세계최대의 만화왕국 일본의 만화에 대한 것이다. 이제 이 책을 읽는 내내 독자가 유쾌하기만 하다면 이 만화는 제목 그대로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필자의 이름이 들어간 것처럼 이 책은 이명석이라는 한 개인의 캐릭터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전반적인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 저자. 이명석은 누구인가?


알라딘의 저자 소개를 살펴보니 나랑 동갑인 1970년생인데다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이건 아주 중요한 약력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다니... 흐흐)했고,  <이매진> 기자, 웹진 <스폰지> 편집장을 역임, 현재 웹사이트 <마나마나>를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그의 사이트를 가본 적이 있었던 듯도 싶다. 게다가 이 책의 부제라고 할 수 있는 "만화 칼럼니스트 이명석이 파헤친 현대 일본 만화의 50가지 스펙트럼"이란 말도 과장 많은 아닌 듯 싶다. 평론가가 넘쳐나는 시대에 굳이 만화 칼럼니스트라는 겸양을 보인 것도 흡족하거니와 50가지 스펙트럼이란 말이 약간 과장이 섞이기는 했으나 "애생낙소투활사인환사초(사랑, 삶, 즐거움, 웃음, 싸움, 모험, 역사, 인간, 환상, 대재앙, 초월)"라는 11가지의 주제 속에 각기 다른 50편의 만화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을 두고 보자면 과장만은 아닌 것이다.

"이명석의"라는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이명석 개인의 - 따지고 보면 어느 책은 또한 개인의 그것이 아니던가 - 지적이고 자유로운 만화 편력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책 표지로부터 맘 편하게 먹고 첫장을 열면 될 터이다. 그런데 첫장부터 범상치 않다. 우선 중구난방식 소개가 아니라 11가지의 주제 구분이 그럴듯하고, 처음 소개하고 있는 것이 한때 우리나라 소녀들을 울고 웃기던 만화 <캔디캔디>의 소개가 아닌가.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이 책이 단순히 만화에 대한 소개나 정보 제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각 아래 개인의 시각을 차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보편적인 시각과 기준 속에서 엄선된 것들임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저자 이명석이 펼쳐놓은 유쾌한 편력을 따라 걷다보면 일본만화의 다양한 내용, 뛰어난 기법, 고유의 미학 등을 함께 분석해 갈 수 있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부분적으로 지적인 갈증을 느끼기 쉽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접근법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부분을 상당 부분 보완해주는 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미약하나마 "시간의 스펙트럼"과 "테마의 스펙트럼"이라는 부록 성격의 연대기를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한 권으로 일본 만화 역사 50년을 꿰뚫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은 그 50년 역사를 꿰뚫기 위해 시도한 어떤 책보다 튼실하다. 그것은 아마도 이명석이란 한 개인의 역량에 기대고 있는 바가 또한 커보인다. 그런 탓에 이 책의 제목에 저자의 이름이 박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나는 이명석을 따라 일본만화를 편력했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에 본 것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미처 읽지 못했던 것들도 그가 추천해주는 권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들에게 일독을 권유하고 싶다. 굳이 만화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읽어두면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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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18禁의 세계
김봉석, 김의찬 지음 / 씨엔씨미디어 / 2000년 3월



이 책에 대해 리뷰를 한 번 써보리라 마음 먹은 건 상당히 오래전 일인데, 생각보다 책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의 제목을 "13금의 세계"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어제 저녁에도 다시 붙잡고 읽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에도 이 책을 검색할 때 "13금의 세계"로 했으니 쉽사리 찾아질리가 없다. 어쩌면 은연 중에 나는 "18금"을 좀더 낮춰 13금만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싶은 건 아닐까?

TV를 시청하다보면 종종 나이제한 표시들을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시청대상이나 관람대상을 제한하는 방식의 나이별 등급이 있는데,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보호하려는 이유에서라고들 한다. 이 책은 그러니까 보호되는 청소년들이 넘보지 말았으면 하는 측의 시선이 쌓아올린 그 벽 너머의 세계를 말하고자 하는 책이다. 그 세계가 담고 있는 주된 내용은 이 책의 부제인 "일본의 에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이다. 하지만 저자인 김봉석, 김의찬은 단순히 국적의 차원에서 일본의 에로 만화와 애니, 게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한국의 소위 성인문화와 일본의 성인문화를 비교/분석함으로써 분명히 존재하지만 금지된 우리 사회의 성과 문화에 대한 이중적인 자세를 비판한다.

이것이 내가 읽고 파악한 이 책의 주된 내용과 지향점인데, 다른 이들의 평을 보니 설득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8禁의 세계"는 대중문화론으로 분류되는데, 뭉뚱그려 대중문화라고 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사용한다. 그것은 mass culture와 popular culture인데, 이 둘은 모두 대중문화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전자는 대중문화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긍정적인 측면까진 아니라도 최소한 중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중문화의 역할, 그것도 금지된 성인문화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 - 최소한 그 효용성을 인정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이 문화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거이다.

우리 말로 성인을 가리키는 단어인 "어른"은 "어르다"란 옛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 "어르다"란 말은 "혼인하다, 교합하다"란 말인데, 즉 성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인,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성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을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가능한, 수태를 시킬 수 있는"으로 본다면 간단하지만, 이를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면 여러 양태들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교(sex)에 대한 의식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묵시적인 제약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르다"란 말을 사전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첫 구절이 다름아닌 "혼인하다"란 말로 규정된 것과 같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혼인하지 않은 성인은 섹스를 할 수 없으며, 혼인이란 정식절차에 의하지 않은 모든 성 관계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당한다.


그런 점에서 성인문화는 성인이되 별도의 성인인증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처녀총각이 성인문화를 즐기는 것은 어딘가 부도덕한 것이지만, 혼인한 부부가 부부관계의 자극을 더하기 위해 성인문화를 즐기는 것(간단히 이 때의 성인문화를 포르노 무비 혹은 에로티시즘을 담은 핑크무비라고 해두자)은 묵인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화두는 누가 뭐래도 성(性)이다. 그것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가운데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성에 대한 발화자체가 곧 남성의 성적 욕망에 고스란히 연결되는 맹점을 지닌다. 성인 문화는 그 긍정성을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그 자체로 남성적인 문화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은 책으로써의 "18禁의 세계"가 지닌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가야 할 문제이며, 성인문화만의 문제는 역시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한국이든, 일본이든 성인문화엔 미래가 없다.

흔히 성인문화라고 하면 성과 폭력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인문화의 핵심은 누가뭐래도 성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폭력에 대해 특히 관대한 편이고, 심지어 이것을 남성성의 핵심으로 부추기는 측면마저 있다. 이런 태도는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폭력적인 장면보다 더 많은 검열과정을 거치게 되어있는 것이 바로 성적인 암시, 관능성, 에로티시즘이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의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신화, 관습, 종교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에로티시즘이 인간의 본원적 욕망에 자리하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세를 거치며 수그러들었다가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에로티시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에로티시즘은 점차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표현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예술 사조상 낭만주의와도 함께 했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도 에로티시즘은 포르노그라피와 구분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지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에로티시즘으로 볼 것인지, 포르노그라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 사회의 "18禁의 세계"가 지닌 한계치이기도 하다.

그런 한계치의 문제를 한 권의 책이 모두 해결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냐만 시대의 금서들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신에 저자들은 성인문화의 가능성을 성인만화의 가능성에 찾고자 한다. 과연 성인만화가 우리 사회의 18금 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너무 쉽게 단언하는 경향이 있다. "18禁의 세계"는 크게 두 장으로 구분되는데 "1장 18금이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들은 성인만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실 한국의 성인은 불쌍하다. 흔히 천민자본주의라고 하지만, 그 천민성에 억눌려 스스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본문20쪽> 이렇게 단언하고는 있지만 이 부분의 마지막에 가면 대체 성인문화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산업적으로는 왜 중요한가? 란 식의 질문만 던져놓고, 바로 이어지는 글에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며 움츠러들고 만다.


앞서 큼지막하게 주장한 이야기가 서글퍼질 결말이다. 성인문화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 제시된 건 진짜 성인문화가 존재한다면 청소년 보호도 오히려 쉬울 거란 말이다. 그렇게 간단한 이유라면 앞서의 천민자본주의와 그 천민성에 억눌린 채 타락해가는 성인들까지 들먹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실 이 책의 저자들이 추구하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일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부분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 듣고 싶은 것이다. 성인문화의 존재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강조된 부분은 일본의 헨타이 만화를 비롯한 여러 성인 매체와 장르들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저자들이 일본 성인 만화의 애독자이고, 전문가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성인문화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그 통로가 어째서 성인만화를 시작으로 해야하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는 것이다.

끝의 대안으로 주장되고 있는 "한국 성인 만화의 가능성" 부분이 그 내용의 가치판단을 떠나 맥없고, 공허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부분부분들에서 보이는 내용들은 무척 재미있고,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로도 종종 다시 읽어보곤 한다. 에로와 포르노의 차이를 말하는 것만큼 미묘한 문제가 또 어디에 있겠나? 그건 정상과 변태의 차이만큼이나 복잡해지는 문제가 아닌가.

* 참고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우로츠키 도지(우로츠키 동자)"는 지금껏 내가 본 일본 아니메 중 가장 뛰어난 것들 속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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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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