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만난 20th C : 매그넘(MAGNUM) 1947~2006 - 매그넘 (지은이) | 에릭 고두 (글) | 양영란 (옮긴이) | 마티(2007)





20세기 최고의 프리랜서 사진가 집단 “매그넘”


『현장에서 만난 20th C』는 “우리는 그들의 사진으로 세계를 기억한다”는 의미심장한 부제를 달고 있다. 선언적 어투로 쓰인 이 말을 만약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진집단이 했다면 아마 우리는 매우 거만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 “MAGNUM” 사진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 없는 보도 사진가들의 집단이 바로 매그넘이다. 매그넘은 좀체로 넘어서기 어려운 중세의 길드 같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스러운 입교식을 치르지나 않을까 싶을 만큼 신비로운 매력을 선사하는 이들이 바로 매그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라이프> 등 포토저널리즘의 전성기를 경험한 사진작가들은 편집자들의 의도와 요구에 따른 작업 방식에 많은 불만을 품게 되고, 그들이 촬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촬영하고,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게재해주는 매체에 그들의 사진을 제공해주는 방식의 사진작가 에이전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했던 프랑스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무어 등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창립한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집단이 바로 매그넘이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문으로 하여 이후 세계를 대표하는 엘리트 사진 집단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지난 1993년과 2001년, 국내에서도 매그넘의 대규모 사진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에, 또 최근엔 로버트 카파 사진전이 열리기도 해서 국내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나 역시 매그넘에 소속된 사진작가들 가운데 로버트 카파는 물론이고, 베르너 비쇼프, 유진 스미스(한동안 ‘매그넘’에서 활동하다가 탈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엘리어트 어위트, 요제프 쿠델카, 필립 할스만 등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매그넘과 관련된 몇 권의 원서 사진집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지닌 최고 미덕 중 하나는 이전의 다른 책들에서는 보기 힘든 사진들이 제법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건 정말 큰 미덕이다.)

한․불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된 『현장에서 만난 20세기』
- 그러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편집레이아웃

국내에서 지난 2007년 10월에 출간된 『현장에서 만난 20세기』는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로는 프랑스보다도 한 달 정도 먼저 국내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1947년부터 2006년까지 주요 사건들을 매그넘의 사진작품을 통해 바라보고, 에릭 고두(Eric Godeau)의 글이 해설을 다는 형태로 꾸며져 있다. 이미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이 『현장에서 만난 20세기』의 편집과 레이아웃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막상 직접 책을 읽어보니 이들의 지적은 모두 사실이었다. 일단 10년 단위로 내지를 붉은색, 주황, 올리브그린, 노랑, 남보라, 민트그린 등의 테를 둘러 구분하고 있는데, 사진들이 온갖 요란한 색채의 방해를 받는다. 거기에 사진 캡션으로 들어가는 문장들은 그야말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 가뜩이나 요란한 색채들로 인해 저해된 가독성은 더욱 떨어진다.

프랑스판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내심 프랑스판과 거의 동일한 표지와 내지 레이아웃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막상 프랑스판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국내판 책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내지 레이아웃을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를 구하지 못해 내지 편집의 차이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이 싱가포르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실 사진집의 경우 외국에서 인쇄해오는 일이 그렇게 드물진 않다. 작년에 열화당에서 출간된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은 독일에서 인쇄한 것이다. 매그넘에서 제공한 사진의 질이 특별히 카르티에 브레송보다 나빴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현장에서 만난 20세기』의 인쇄 질감이 앞서 언급한 책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용지 선택 문제와 인쇄의 질이 전체적으로 사진의 질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카파가 매그넘을 결성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로버트 카파를 비롯한 “매그넘”의 사진작가들이 독자적인 사진집단, 에이전시를 창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당시 권력집단의 보도통제는 물론, 편집이라는 권력(편집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 나 자신이 한 명의 편집자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편집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대단한 권력자이기도 하다. 지배계급(권력)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계와 일상의 권력을 합리화하고 영속화시키기 위해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 예를 들어 클래식 공연장에서 느끼게 되는 공연한 주눅, 박물관 마다 일정한 방향과 동선을 지시해주는 화살표들과 같이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기존의 세계(지배권력)가 교묘하게 직조한 틀(매트릭스)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의 부제는 “우리는 그들의 사진으로 세계를 기억한다.”이다. 이 말은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꼭 그만큼의 진실은 유보된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들이지만 사진 그 자체는 하나의 스펙타클(spectacle)한 이미지 기호일 뿐이다. 우리에게 그 한 장의 사진이 진정한 의미로 기억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해석(단순하게 말하면 ‘캡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이 존재해야만 한다.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도상성(iconicity)이 지닌 위력을 설명해주는 훌륭한 사례다. 사진은 누가 뭐래도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사진의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고, 우리들에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켜 허구적인 객관성과 신뢰성을 얻어낸다. 그러나 사진은 결코 대상의 객관적인 반영이 아니며,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손쉽게 가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은 도리어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시각기호인 사진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보도사진들의 경우에 우리는 사진 이미지 밑에 가로 놓인 해석(캡션)을 읽고, 이미지를 해독하는 과정을 거친다. 사진 속에서 총을 들고 있는 병사가 광폭한 살인마인지, 전란 속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파견된 병사인지 우리는 사진만으로 해석할 수 없으며, 좀더 복잡하게는 병사가 띄고 있는 정치적 의미, 사회적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롤랑 바르트는 거친 바다 위에 배가 닻을 내려 선체를 고정시키듯, 언어기호는 시각기호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특정한 범위 내로 한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정박(anchorage)’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우리는 이 책에 글을 쓰고 있는 저자(혹은 편집자) 에릭 고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괜찮은 내용의 그런 데로 괜찮은 번역 그러나 몇 가지 결함으로 독자에게 불친절한 책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책을 다 읽고 난 뒤 책의 어디에도, 아니 책의 뒤표지에 적혀있는 몇 줄의 글만으로 저자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발간하게 되었는지 유추해내야 했다. 우리는 그가 선별해낸 300장의 사진과 보도사진가의 전설이라는 ‘매그넘’을 통해 역사를 이미지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자신은 문서보관소에 기록된 수많은 사진들을 일일이 헤집고, 자신이 나름대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1947년부터 2006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 그는 장막 저 편에 서 있다.

나는 이 책의 가장 큰 문제가 가독성을 해치는 편집레이아웃에도 있지만, 이처럼 독자들에게 상세한 정보(예를 들어 저자에 대한 정보, 옮긴이의 말 등)를 제공하지 않는 불친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인터넷 서점 아마존(프랑스)에서 이 책은 23.75유로(38,000원)에 판매되고 있으며, 인터넷상으로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의 이미지들이 보고 싶다면 매그넘의 포토아카이브 사이트를 찾아가면 좋을 것이다. (물론 사진의 크기가 좀더 작고, 화질도 좋은 편은 아니지만)
( http://www.magnumphotos.com/archive/C.aspx?VP=Mod_ViewBoxInsertion.ViewBoxInsertion_VPage&R=2TYRYDK5YSOX&RP=Mod_ViewBox.ViewBoxThumb_VPage&CT=Album&SP=Album )

끝으로 한 마디 더 나는 가끔 사진집단 매그넘의 저런 선언적인 어투에서 삼성의 CF카피 같은 선정성을 느낀다. 그건 매그넘 작가들 탓일까? 아니면 기획사들 탓일까? (어쨌거나 비키니 편에서 '달리다'와 '칼 사강'이란 불어식 번역은 좀 웃겼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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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1863-1928)


자화상 - 아뜰리에, 1905, 베를린국립미술관



독일 화가, 조각가이며 판화가, 바이에른의 테텐바이스 태생. 뮌헨에서 공부하였으며 1893년 뮌헨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1895년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칸딘스키, 클레를 가르쳤다. 슈투크는 또한 베를린, 드레스텐, 스톡홀름, 밀라노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었다. 19세기 말에는 아르 누보, 즉 유겐트슈틸 운동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으며, 뮌헨의 자택을 통해 유겐트슈틸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장식적이고 평평한 색채를 사용해 그림의 분위기를 조절한 것은 어느 정도 후대의 발전을 예시하는 것이다. 슈투크는 지금은 잊혀졌지만 생전에는 높은 명성을 누렸다.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 천국을 지키는 파수꾼, 1889, 250 × 167cm


프란츠 폰 슈투크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상

창세기에는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한번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1:27)이고. 좀 지난 다음에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다. 성서에 대해 음모설을 들이대긴 우습지만 한자 한획도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간혹 이 부분에서 무언가 숨겨진 진실이 있지 않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 죄악(Die Sünde), 1893, Oil on canvas, 945 x 595mm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였을 때, 모든 만물이 짝이 있는데 아담만 홀로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위해 흑을 빚어 여자를 만들어 릴리쓰(Lilith)라고 이름지었다. 하느님이 그녀를 아담에게 데려가자마자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다. 아담이
“나는 너보다 윗 사람이니, 너는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 네가 밑에 누워야 한다”고 말하자 릴리쓰는“네가 밑에 누워야 한다. 우리 모두 평등하게 땅에서 만들어진 존재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자 릴리쓰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아담은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우주의 주인이시여, 당신이 내게 준 여자가 도망간 걸 보소서.” 하느님은 즉시 세 천사를 보내어 릴리쓰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프란츠 폰 슈투크 - 관능(Sensuality), 1891, Collection Abraham Somer, Los Angeles


세 천사는 홍해까지 달려가서 릴리쓰를 붙잡았다. 그들이 그녀를 잡고 말하길“우리와 같이 가겠다면 같이 가자. 그렇지 않겠다면 바다에 빠져 죽으리라.” 릴리쓰는 하느님이 나를 창조한 것은, 오직 궂은 병으로 생후 8일 이후 아기를 괴롭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란 것을 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8일까지는 봐 주고 그 후에 해를 가하겠다. 그러나 여자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는 12일의 유예 기간을 줄 것이다.”라고 저주하며 외쳤다. 천사들은 완강히 저항하는 그녀를 도저히 데려갈 수 없었다.

오늘날 릴리쓰는 페미니스트들과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과거의 예술가들에게도 여성상위를 주장한 릴리쓰는 매우 매력적인 여성으로 비추어졌던 모양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의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여성이 릴리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여성이 인류를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한 이래 여성의 상징 중 하나이자 가장 징그러운 혐오의 대상으로 묘사되는 '뱀 '이 등장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도 죄악과 관능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 - Wounded Amazon, 1903, Oil on canvas, Van Gogh Museum

 

서양회화에서 상당히 많이 그려지는 주제 중 하나가 '아마존의 여전사'들이지만 이들이 멀쩡하게 그려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난 거의 보지 못했다). 이들은 대개 부상당하거나 남성 전사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들이 등장하는 신화 속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 신화 자체가 여성들에 대한 경고였을 것이다. "남성에 대한 저항? 꿈도 꾸지 마라!"는 메시지...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 목욕하는 수잔나, 1913, 56,6 × 17,8 cm


'롯의 두 딸'과 더불어 르네상스 이래 서양화가들이 성서에서 가장 많은 모티브를 따오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목욕하는 수잔나>는 구약성서 다니엘서 13장 1절에서 64절에 나오는 이야기로 부유한 유대인의 아내 수잔나는 정원에서 목욕하는 것을 즐겼다. 이것을 안 두 사람의 늙은 장로가 이것을 몰래 엿보고는 자신들과 관계하지 않으면 그 집의 남자 몸종과 관계했노라고 소문을 내겠다고 협박했다. 물론 결백한 수잔나는 이 협박을 물리쳤고, 장로들은 수잔나가 불륜행위를 했다고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당시 간통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예언자 다니엘은
"당신들은 증거와 심문 없이 이스라엘의 딸을 정죄하였소. 두 장로가 수잔나에게 거짓 증언을 하였소."라고 하였다. 다니엘은 그들에게 "두 증인을 각각 데려오시오. 내가 직접 들으리다"고 했다. 다니엘은 장로들에게 각각 수잔나가 간음한 현장의 나무 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한 장로는 소나무에로 데려갔고, 다른 한 장로는 느릅나무로 데려갔다. 거짓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환호하였다. 두 장로는 모세의 율법대로 처벌받았다.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 목욕하는 수잔나, 1913, Gouache, Papier, 63 × 25 cm



물론 이 이야기는 현명하고 정당한 재판 절차를 통하여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야기이지만 중세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그 같은 '정의'로운 교훈 보다는 아름다운 여인의 나체를 훔쳐보는 두 장로(남성의 시선)와 여인의 나체에 주목했다. 1550년대의 틴토레토(Tintoretto), 반다이크(Van Dyke), 렘브란트에 이르는 많은 화가들이 <목욕하는 수잔나>를 그렸지만 당시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 작품들은 사실상 포르노 취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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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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