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1958년 무렵 뉴욕 레고 파크.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열 살인가 열 한 살이었을 때…. 난 하우이, 스티브와 어울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스케이트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야! 얘들아! 기다려.”
“꼴찌다! 꼴찌! 하하하”
“같이 가! 얘들아.”
아버진 마당에서 뭔가를 고치는 중이셨다.
“마침 들어오는구나. 이리 와서 이것 좀 잠깐 잡아주렴.”
“훌쩍, 네?”
“아티, 그런데 너 왜 우는 거니? 나무를 잘 붙들려무나.”
“제가 넘어졌는데요. 친구들이 절두고 가버리잖아요.”
아버진 톱질을 멈추셨다.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1권 본문 5-6쪽>


아트 슈피겔만의 『쥐(Maus)』는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청년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4년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에 머물던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작가는 ‘마우슈비츠’란 익살을 부리기도 하지만) 수용소에서 극적인 생존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과거사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단순한 회상투로만 구성되진 않는다. 우리는 『쥐』를 통해서 작가인 아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 놓인 경험의 차이, 감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쥐』를 통해 일정하게 의도하는 바가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무엇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작품들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 작품이 과거와 현대를 번갈아 가며 대비시키고 있는 구조를 취하는데서 발생한다. 즉,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작가)와 과거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의 현재적 갈등 구조는 끝내 해결되지 않지만, 작가는 『쥐』의 작업을 위해 사이가 결코 좋을 수 없는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앞서 인용하고 있는 『쥐』의 첫 도입부에서 이미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나에게 최초로 각인시켜준 인물은 우리에게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 박사였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음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실제로는 가스처형실을 갖춘 유대인 최종해결시설)에 갇힌 수인들에 대해 외부인들은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수들 사이에 불붙는,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관해 거의 모르고 있으며, 매일 끼니와 자기 자신을 위한, 친구를 위한 무자비한 투쟁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다른 한 명의 희생자가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친구를 희생자 명단에서 지우려고 아우성을 쳤다는 사실 말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결국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 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수인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 넘겼다.


아버지 블라덱이 바로 그런 경험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전후 세대인 아들 아트와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는 이렇게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고, 이 두 사람의 간격을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아트 슈피겔만이 스무 살 때 겪은 어머니 안나(아냐)의 자살이었다. 물론 어머니의 자살이 블라덱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묶어주던 하나의 울타리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 『쥐』가 단순히 히틀러의 만행을 그림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는,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으나 그만큼 그저 그런 교훈적인 유형의 만화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의도
(그런 의도도 있겠지만)로 그려진 것이기 보다는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세대와의 일정한 단절과 소통, 이해를 위해, 다시 말해 스스로의 정리를 위해 그린 작품이란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그는 자신과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는 부모 세대와 대화함으로써 끝끝내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 블라덱을 이해하게 되고, 단절을 경험한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성장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버지 블라덱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살아온 과정이 너무나 각박했던 이들 가운데 블라덱이 거쳐 온 극단적인 체험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와 흡사한 태도를 지닌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당장 우리의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 혹은 앞으로 우리들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와 흡사한 이야기를 할지 모른다.


나 역시 생활보다는 생존을 우선해야 했던 체험이 있었고, 이 무렵 내가 즐겨 입에 담던 경구
“강한 자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란 경구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말이었다. 일단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은 어떤 비굴이나 치욕, 폭력도 감내할 만한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태도만이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자세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는 냉혹함만이 삶의 진정한 자세라고 여기는 동안, 나는 주변에서 순수나 소박한 낭만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얕잡아 보았고 경멸했다. 그들은 삶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 같은 존재들이라 여겼고, 결국엔 삶의 과정에서 도태될 것이라 믿었다. 아버지 블라덱이 어린 아들 아트에게 했던 말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공개할 필요 없을, 어찌 보면 아우슈비츠를 드러내는데 도리어 군더더기 같은 대목들에서 도리어 진실을 보여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의 갈등, 아버지가 청년기에 했던 연애 이야기, 어머니의 자살, 그리고 아버지 블라덱 자신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가스실에 보내질 뻔 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흑인종에 대해 지닌 편견들, 마트에 가서 이미 개봉한 음식물을 바꿔오는 인색함 등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우리는 블라덱과 아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 그들의 이야기가 지난 한 시대의 과거사가 아닌 오늘에도 이어지는 이야기일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잔혹한 시대를 살더라도
“인간의 구원은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빅토르 프랑클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존립하는 것이다.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관조함에 여전히 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을 것이며, 그녀와 나의 정신적 대화는 전과 다름없이 생생했을 것이며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그대의 가슴에 새겨주소서. 그러면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해지리다.” 그는 F. 니체의 말을 인용해 (비록 강제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의 과정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긴 했으나)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 말은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의 도상(途上)에서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대개 “어떻게”가 아닌 “왜”이다.


아버지 블라덱의 냉정하고, 각박한 심성과 삶의 자세를 우리는 『쥐』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여러 조건들 속에서 그의 기대를 배신했거나 믿음을 버림받았던 무수한 경험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 숱한 배신과 희망의 박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을 어찌 과거의 일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임금 노예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채 살아가길 강요당하는 현실에서도 역시 배신과 희생은 반복된다. 그러나 블라덱이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까닭은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아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블라덱의 이런 태도를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의 발현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이 아닌 타인
(가족을 포함해서)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만이 타인의 종이 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은 비록 아우슈비츠가 인류에게 별다른 교훈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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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묵시록 카이지(총 39권) - 후쿠모토 노부유키 | 학산문화사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라고는 결코 할 수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부유키의 그림체는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잔인하게 말하면 싫어하는 그림체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체는 "Arms, 스프리건"의 작가 "료우지 미나가와", "헬싱(Hellsing)""히라노 코우타" 스타일이다. 하지만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작품들이 주는 충격은 이 모든 것을 상회하고도 남는다. 1958년생 개띠인 만화작가 후쿠모토 노부유키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극(極)"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작품 "무뢰전 가이"를 보고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워낙 그의 그림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의 작품을 보고나면 며칠동안 더러워진 기분을 만회하기 힘들기 때문에 "도박묵시록 카이지"도 오며가며 한 번 보긴 봐야 할 텐데 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읽고 나서도 이 작가의 극단적인 묘사와 이야기 진행 방식은 영원히 익숙해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작가의 낯짝이나 보아둘 요량으로 찾아보았는데, 작가는 알게 모르게 자신과 닮은 얼굴을 캐릭터화한다는 만화계의 오랜 격언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카이지와 숙명의 대결을 펼친 리네카와를 합쳐 논 듯한 얼굴이었다. 이쯤 읽고 난 뒤 저 인간이 이번엔 왜이리 엄살이야라고 한다면, 당신은 노부유키의 만화를 한 편도 읽지 않은 사람이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면 이미 한 번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일 것이다. 소설에 문체란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만화에서 그림체가 차지하는 비중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수 있다. 소설가의 문체란 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듯 만연체, 간결체, 건조체 식으로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작품마다 다르고, 작품 내에서 호흡을 긴박하게 끊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소 늘어진다 싶게 유장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뛰어난 이야깃꾼일 수록 호흡과 완급을 조절해가며 독자들과 승부를 벌인다.

 

 

앞서 나는 노부유키의 그림체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런 개인적인 취향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각진 캐릭터와 거칠고 굵은 선, 투박한 배경묘사는 작품의 스토리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이 작품의 스토리로 한 번 들어가보자.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제목에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도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의 독서 행태는 스스로도 잡독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독서행태와 달리 나의 취미는 담백 그 자체에 속한다. "읽고 보고 듣는다"가 내 취미 생활의 전부이고, 이와 약간 다르게 활동적인 취미가 있다면 "찍는다" 정도가 있을 뿐이다. 바둑, 장기는 물론 당구, 볼링도 할 줄 모르고, 술도 거의 안 마신다. 4천만의 유희인 고스톱도 장가들어 친척들이랑 어울리려다보니 간신히 패나 떼는 정도다. 그것도 가끔 왼쪽으로 돌려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돌려야 하는지 몰라서 어른들에게 야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인 사람이다.

 

그러니 도박은 더욱더 젠병인데, 혼자 그런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워낙 나의 투쟁심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는 게 싫은 건지, 지는 게 싫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다못해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도 온라인으로 누군가와 대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혼자 컴퓨터랑 논다. 일단 승부를 겨루는 일 자체가 피곤하다. 그래서 남들이랑 심심풀이로도 내기하는 법이 거의 없다. 게다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도 이기는 법이 없으니 남들 연애담에 등장하는 애인 팔목 때리기 게임에서 애인 팔목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하곤 호호 불어주었다는 이야기는 나에겐 거의 영웅전설에 해당한다. 그런 사람이 온갖 "도박"이 등장하는 만화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결론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재미라고 한정지어 말하기에 미안할 만큼 충격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주인공 카이지는 도시 변두리를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나 하는 변변치 않은 청년이다. 가진 것도 없고, 별로 배운 것도 없는 그저그런 청년인데, 심성이 곱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가진 자들에 대한 공연한 복수심에서 남의 고급차에 못으로 흠집내기를 일삼는다. 그런 어느날 카이지에게 사채업자 엔도가 찾아온다. 친구의 빚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어 그가 평생동안 일해야 간신히 갚을 수 있을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변제해내란 것이다. 엔도는 카이지에게 평생 빚을 갚으며 살던지 아니면 재애그룹에서 운영하는 도박선의 게임에 참가하여 빚도 갚고 일확천금도 얻을 수 있는 길을 택하던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이야기한다. 카이지는 고심 끝에 게임에 참가하기로 한다.

 

만화를 보기 전에 나는 잠시 하다못해 고스톱도 여러 규칙들이 있어 게임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봐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데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선 얼마나 어려운 게임들이 벌어질까 내용을 이해못하면 어떻게 하지란 염려를 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게임(도박)의 규칙은  매우 단순해서 도박을 모르는 이들도 이해하기 쉽다. 이 만화엔 첫번째 도박 "한정 가위바위보"로 시작해서 "용사의 길", "E카드", "제비뽑기", "지하친치로", "빠찡코"에 이르기 까지 모두 6개의 도박이 등장하는데 작가 노부유키는 만화를 보기만하더라도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을 알기 위해선 함께 술을 마셔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함께 도박을 해보는 편이 더 빠를 것 같다. 노부유키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도박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존재 방식과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도박을 아는 이들은 도박을 통해 돈을 따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소위 타짜들이 이야기하는 도박의 십계명 가운데 첫째 "카지노의 규칙은 카지노 업체에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잃는 것은 당연하다."이다. 얼핏 노부유키의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패자에게 쓰레기라는 치욕을 안겨주며 승자가 패자에게 한없는 경멸을 보낸다. 리네카와는 "너희들은 계속 져왔기 때문에 지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빈궁하고... 꾸물꾸물...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기고... 기고 또 기고 기고..., 기고 있는거야...! 왜냐? 그것은 너희들이 오로지 계속 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이기지 못하면 쓰레기.. 이겨야만한다... 이겨야만한다!"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평생직장의 신화가 무너진 뒤 우리 사회는 승자독식의 게임이 펼쳐지고 있다. 종종 한 명의 천재가 100명의 무능한 직장인들을 먹여 살린다는 식의 주장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곳이 현재 우리 사회의 풍속도가 아닌가.

 

"도박묵시록 카이지"엔 숱한 명대사들이 있다. 하지만 그 명대사들은 "카우보이 비밥" 류의 쿨하고 철학적인 그럴 듯한 외피를 뒤집어 쓴 낭만적인 대사

들이 아니다. 이 작품의 주요 명대사들 가운데 대부분은 카이지를 철저하게 경멸하고 자신들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도박을 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규칙과 트릭을 이용하는 리네카와의 입에서 나온다. 그 가운데 압권인 부분을 소개해본다.  리네카와는 도박에 나선 이들의 심리를 패자의 것이라 말한다.

 

보통 치료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심성이 병들어 있어. 그 병이란... 어떤 사태에 이르든 철저히 진검 승부를 하지 못한다는 병이지.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놈들은 너무도 깊이 그 생각에 빠져서, 자신의 공상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바보천치들이야. 언제든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빚을 떼어먹든, 또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 사람을 죽인다 해도 말이야...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용서 받는다. 왜냐하면.. 지금 일어난 이 사태는 어디까지나 '가짜' 고, 진짜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거짓말이 아냐. 그 증거로 지금 이렇게 명백하고 적나라하게... 목숨을 건 승부고, 패배는 죽음이라고 얘기 했는데도, 놈들은 그걸 자기 편리대로 멋대로 왜곡하고있어. ...<중략>... 자기 사정이 나빠지면 도중 하차라니... 뿌리째 썩어 있다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어. 저런 놈들은, 평생 그 '가짜'에서 눈을 뜨지 못해. 우둔하게 자고싶은만큼 자고, 억지로 일어나서, 반쯤 자고있는 듯한 의식으로 매일을 반복하지. 따분한 걸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그 근본원인은 외면하고, 조금 열중하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보잘 것 없는 도박이나, 별 상관도 없는 여자를 쫓아 다닐 때 정도... 왜 그런 욕나오게 재미없는 기분으로 이 인생의 귀중한 하루하루를 소비하고있느냐면... 언제나 어떤때든지 현실은 놈들에게 있어서 '가짜' 이기 때문이야. 즉, 진짜가 아닌 ... 이 현실이... 자신의 진짜 현실일 리가 없다...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따라서, 서른이 되든 마흔이 되든 놈들은 계속 착각을 하는거야. 내 진짜 인생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진짜 나' 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이 정도라고, 질리지도 않고 계속 그렇게 착각하다가 결국은..., 늙고..., 죽는다! 그 순간 싫어도 깨닫게 될꺼야.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것이, 통째로 '진짜' 였다는것을! 사람은 가짜로 살고있지도 않고, 가짜로 죽을 수도 없어.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리셋하듯, 인생을 새롭게 포맷하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봤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들을 지우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욕심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과거에만 사로잡혀 현실을 자기 것으로 깨우치지 못할 때의 위험, 도피 심리를 이보다 적절하게 나무라기도 참 쉽지 않을 성 싶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읽노라면 무한경쟁 시대에 어떤 마음 가짐으로 남들을 짓밟고 올라서며 살아야하는지을 알려주는 "처세술의 보고"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이 작품이 그와 반대로 저들이 짜놓은 무한경쟁의 카지노, 즉 다수의 사람이 패배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카지노의 운영자들인 최상위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게임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깨달을 수 있다. 카이지가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던 리에카와를 넘어서는 순간, 카이지 앞엔 다시 제애그룹의 넘버원 헤이토(효우도)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 순간 리네카와는 거대한 도박장의 희생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 게임의 승자는 리에카와도, 헤이토도 아닌 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카이지는 제애그룹과 헤이토에게 도전하여 승리하기 위해 여러 차례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들은 카이지에게 도움을 얻고서도 그를 돕지 않는다.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한다. 이런 순간 도박판은 우리 사회의 축도가 된다. "도박묵시록 카이지"가 세상에 던지는 비수 같은 한 마디 "타인의 비참함을 보고 돕지 않는점... 죽게 내버려 둔다는 점에서는 다를바 없어... 마찬가지야... 돈을 보내면 구원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야말로 얼마든지 넘치고 있는데도 우리는 보고도 못본체... 결코 돈은 보내지 않아. 결국 자신의 물욕과 쾌락에 돈을 쓰고 있어. 즉, 철저하게 모른체한다. 남이 아무리 굶주리든... 죽든... 괴로워하든... 알바 아니다... ...99.9%... 사람은 남을 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을 구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아프지 않으니까!!"라고 말이다.

 

복권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권을 판매하고 그 수익을 통해 공공사업이나, 공익 사업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첨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복권을 사는 이들은 주로 어떤 계층일까? 대개는 중산층 이하에 속하는 이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렇다면 복권은 빈자의 호주머니에서 빼낸 돈을 이용해 이를 다시 공익사업에 지원한다는 말이 된다. 자본주의는 게으름을 비판하고, 근면성실을 강조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의식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부자가 된 이들은 하나같이 근면성실하게 노력해서 성공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정직하게 노력해서 돈 번 이들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자본가들은 "노동은 신성하다"라는 기독교적 실천 윤리를 강조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하기 위해 사회의 구조적 관계를 은폐하고, 마치 다른 것인양 변환시킴으로써 사회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왜곡 시키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세계에 대한 개인의 진짜 동기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가짜 동기를 상상하게 만들고,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결하도록 부추긴다. 이렇게 미화된 노동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재화를 창출할 수 있을 만큼 생산성이 확대되었지만 노동자의 행복은 실질적으로 증진되지 않았다. 혹시 노동자란 말이 듣기 싫은 분들은 개인의 행복이라고 해두자. 노동자들은 이전과 같은 생활 수준을 누리기 위해 좀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예전엔 아버지만 일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어머니들도 나서서 일해야 한다. 사회는 좀더 좀더 많은 것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선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벌기위해선 더 많이 일해야 하는 노동 중독 증상이 강화된다.

 

노동자들이 창출해낸 재화가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는다면, 이런 현실을 노동자들 스스로의 자각으로 깨뜨리지 못하고, 좀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좀더 많은 노동에 매달리는 동안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왜 노동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없이 진행되는 동안, 패할 수밖에 없는 카지노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즉, 더 많은, 혹은 전혀 쓸모없는 것들을 구입하고,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웰빙하기 위해 돈을 버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다보니, 지방이 축적되고 다시 건강을 위해 돈을 들여 운동을 해야하는 것처럼 또 그만큼 많은 일을 해야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이제 빈곤의 악순환은 어느 정도 벗어났을지 모르나 이보다 더 치명적인 '풍요의 악순환(vicious circle of affluence)' 은 사회 구성원들 누구에게도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다.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라는 이 좋은 글귀는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정문에 붙어 있었다. 이 거대한 도박판,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러시안 룰렛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카이지는 인간 상호간의 연대와 믿음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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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까?


살다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농담 섞인 충고를 많이 받게 됩니다. 저도 간혹 신참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동네 무당에겐 영험이 없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도 있을 겁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한 수많은 기적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에 그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하지만 명성을 얻은 뒤 찾아간 고향 마을 나사렛에서 그는 뜻밖에 냉담한 반응을 겪습니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 사람들은 "저게 누구야? 목수 요셉의 장남 예수가 아닌가?"라며 예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고, 도리어 갖은 모욕과 조롱을 쏟아댑니다. 이런 일을 겪은 뒤, 예수는 “예언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배척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영험이 있다고 소문난 무당이나 나사렛 마을에서 자란 예수 그리고 교회에선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들도 집에 가서는 사모님들에게 타박을 받는다고 하지요. 아마도 같은 맥락이겠죠. 친숙하다는 건 그만큼 흔한 것이어서 귀한 대접을 받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인 듯 싶습니다.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

요즘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부추긴 작가, 러시아 차르 체제에 저항하다가 나중에 친 차르적인 인물로 표변한 작가란 이유로 비판받곤 합니다. 저도 비슷한 입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비판하지만, 반대로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여전히 그를 위대한 작가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 정치적 입장이나 사상에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 영혼의 심연을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파헤쳤던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러시아의 통치자인 차르는 전근대적인 차르의 봉건체제에 저항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시베리아로 유배하거나 사형에 처했습니다. 간혹 자비로운 사면을 베풀기도 했는데, 총살 직전에 차르의 특명으로 사면시켜주는 기만술을 펼쳤다고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그런 방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순간 지식인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명은 끝났지만,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때로 이토록 잔인한 것이겠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만약 사형대 위에서 죽었다면 그 자신은 양심대로 살았겠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록 그는 살아남은 뒤 친(親)차르적인 작가로 거듭나지만 동시에 한 명의 작가로서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이기주의와 폭력성, 기회주의와 자기기만(합리화)에 대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깊이 있게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시인 황인숙은 <나를 믿지 마세요>란 시에서 “믿지 마세요./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아니 사소하게라도 친구나 애인을 배신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사실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그 사람이 배신한,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일 겁니다. 배신자가 배신하는 것은 타인과의 믿음이나 신뢰, 다시 말해 타인과의 ‘관계’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보내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 역시 파괴하게 됩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통해 생(生)의 의지를 다집니다. 예수가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 황야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깃들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 있겠지요. 인간만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망에 기대어 삶을 조직해 나갑니다. 저는 그 과정을 ‘자기합리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든,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든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만행위에 참여해 본 사람은 그 행위로 인해 파괴된 의미망(존재의 의미)을 재구축하기 위해 - 다시 말해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했던 자는 - 다시 한 번 자신을 기만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악명 높은 사상전향공작이 감옥에서 자행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단 한 번만 반성문을 쓰면, 사상전향서를 작성하면 풀려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갖은 고문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품었던 사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키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개똥같은 일상이 당신을 지배한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거나 작은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유는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이상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인 거죠. 과거 80년대 나름대로 양심적인 지식인, 운동가들이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거듭되는 절망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위대한 작가로 기억하는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신을 냉정하게 살폈습니다. 마치 실험대 위에 놓인 개구리처럼 자신을 관찰하고, 관계를 살피고, 그것을 소설로 남겼습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그는 ‘세상을 위해 순교할 수는 있어도 냄새나는 한 인간과 같은 방 안에서 공존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형대 위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명하지 않고 순교하는 일은 가능해도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매순간 '현실 적응'이라는 미명 아래, 사소한 일이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이유로 양심과 신념의 배반을 강요받습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할 때의 ‘개똥’이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사소하고, 흔해빠졌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지만 막상 그 평온한 일상이 깨졌을 때 우리는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행복'이란 그 상태가 지속되길 바라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상의 행복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요? 일상의 행복은 와인 잔보다도 약한 것이라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상황 속에서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손님이 왔을 때 여직원에게 부탁하는 커피 한 잔, 아무도 보지 않는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슬쩍 건드렸을 때, 상사가 업무 외에 부탁하는 지시를 들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같은 일들 말입니다. 그처럼 소소한 부딪침으로 일상은 불편해지곤 합니다. 어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의 누군가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까닭도 그것이겠지요.

하지만 때로 그 평범한 일상이 역사의 한 순간이 되고, 개인의 사소한 선택에 대해 역사가 책임을 묻는 순간이 있습니다. 군대를 경험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경계 활동, 보초 서는 일은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입니다. 예를 들어 베를린 장벽을 지키던 동독 병사에게도 그 하루하루는 지겨운 일상이었을 테죠. 어느 날 동베를린에 살던 한 사람이 갑자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려 들었던 순간이 하필이면 그 병사가 보초를 서던 날만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시민에게 사격을 가해서라도 저지하라는 것이 병사에겐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고, 일상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 탈주자로 인해 병사는 일상의 평온을 방해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야에 독일에서 자행되었던 유대인 박해, 수정의 밤 이후 독일 내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받는 것 역시 일상이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영혼이 없는 공무원 역할을 수행했던 합리적인 제도의 뒷받침을 받아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빼곡하게 들어선 동포들과 함께 다카우와 아우슈비츠로 실려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선별하는 일도 그곳의 병사들에겐 수많은 진부한 일상 가운데 하루였을 겁니다.

악은 진부하지만 일상을 통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난 뒤 한나 아렌트는 “악의 진부함, 악의 평범함에 놀랐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말은 사실 악이 우리 주변에 개똥처럼 흔하게 널려있다는 말입니다. 세계평화와 인권을 노래했던 밥 말리는 거리 콘서트를 앞둔 어느날 밤 괴한의 침입으로 목숨을 위협받았습니다. 다들 그가 공연을 취소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밥 말리는 공연을 강행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공연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밥 말리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번성하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에 대해, 그 진정성이 무엇일까 의심하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도 우리들에겐 필요악일 수 있고, 심심 파적삼아 화제로 올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앞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먼저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문에서, 혹은 방송을 통해 특검에 호출 받아 나가는 중역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 밑에도 역시 부장이 있을 테고, 그보다 많은 과장들이 있을 테고, 또 그들 밑에는 더 많은 대리가, 주임이 평직원이 있겠지. 과연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500만 원 짜리 다섯 뭉치를 묶고 포장하는 일은 누가 했을까? 설마 그날 포토라인 앞에 카메라 세례를 받은 높은 분들이 로비하려고 필요하니 100만원 뭉치 다섯을 종이박스에 넣고 포장하라고 아랫사람에게 시켰을까? 그 같은 허드렛일을 본인이 직접 했을 리는 없고, 누군가 아래 직원을 시켰을 텐데 그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이 들까 하는 그런 상상이 들었습니다. 그 직원은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 고발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종찬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지난 2000년에서 2002년 삼성그룹의 관리대상자 명단에 포함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2000년 여름에는 이 수석이 삼성본관빌딩의 이학수 당시 구조조정본부장 사무실을 방문해 휴가비를 직접 받아갔다는 의혹까지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가 자기만 본 것이 아니라 함께 보았다고 말한 다른 직원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목격한 일이 일절 없다”고 특검에서 진술했다고 합니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모함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이 진술과 관련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입증할 수 있는 방법도, 수단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이번 특검 결과를 지켜보면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특검의 입장이 진실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서글펐습니다.

특검 발표를 보니 이번 수사를 시작하게 만든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거나 증언에 일관성이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했던데 그렇게 강변해야했던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BBK시와 마찬가지로 '김경준' 씨처럼? 자신을 비호하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김용철 변호사는 왜 구속될 것도 각오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을 받아가며 나섰던 것일까? 그야말로 튀고 싶은 '또라이'였나? 그것이 아니라면 사실 조준웅 특검 자신이 삼성을 수사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검이 발동하게 된 계기는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삼성이 정관계에 전방위적으로 로비를 해왔다는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측에서 삼성의 로비 대상자로 지목했던 사람 중 단 한 명도 특검은 소환해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장의 진술서를 받은 것으로 특검의 발단이 되었던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모두 무혐의 처리를 내리고, 검찰의 추가수사 가능성 마저 막아선 꼴이 되었습니다. 대신에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시효가 지나 법적으론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도록 합리화시켜주고, 정당화시켜준 결과만 내준 꼴이 되었지요.

정신적 불구를 강요하는 사회 -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같이 마주치게 되는 부당한 지시,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대면하고 항의할 수도 없는, 마치 카프카의 소설 "성(城)"에 나오는 "K"처럼 저항해야 할 상대를 알지도 못한 채 종이박스 100만 원 짜리 다섯 뭉치를 챙겨넣은 것은 아닐까요. 이번 사건은 좀더 윗선의 명령과 의도라는 모호한 배경을 깔고 다가오는 비리의 연쇄사슬 속에서 가장 하부 구조의 피라미처럼 연루되어가는 우리들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내려온 명령과 지시에 불복종하는 일은 과연 사소한 일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의 막대한 임금을 받았으면서 이제 와서 삼성을 배신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묻고 싶더군요. 과연 배신이란 무엇인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 배신인지 아니면 잘못된 관행이나 비리조차도 마치 야쿠자나 조폭의 의리처럼 한 번 보스(boss)로 모셨으니 끝까지 그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을 의리라고 부르자는 말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얼마전 진행된 ㄷ그룹 공채에서 ㅎ(27)씨는 6명이 함께 들어간 면접에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소견을 말하라’는 면접관의 질문을 받고 “회사가 더 발전하려면 김 변호사처럼 발설하고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뒤 더 이상 면접관들로부터 질문을 받지 못했다. ㅎ씨는 “면접이 끝날 무렵 ‘원래 지원부서 말고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네’라고 대답했는데도 결국 떨어졌다”고 말했다.

82만여명이 가입한 인터넷 취업카페 ‘취업뽀개기’(cafe.daum.net/breakjob)에도 “면접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김용철 변호사 옹호했어요. 당연히 떨어지겠죠?”(아이디 제우스호), “삼성 자회사 면접을 봤는데 최근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얘기하래서 김용철 변호사가 생각나 얘기했는데 정적만 흘렀어요. 어쩌죠?”(아이디 힘내자앙) 등의 글이 올라와 있다.

청년실업이 중대한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시대입니다. 취업재수니, 취업고시니 하는 말이 실감나는 이 시대에 대기업은 신입사원 최종면접 시험에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해 질문한 뒤 김 변호사를 두둔한 지원자는 모두 탈락시켰다는 증언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를 배신자라고 부른 사람들만을 합격시켰다는 것은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의리를 대신하여 조직의 의리를 우선하는 사람들을 선발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그간 기업들이 주장해왔던 글로벌 스탠더드니, 세계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창의적 인재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기만을 일상적으로 범할 수 있는 ‘정신적 불구’를 원하는 것이 아니냔 의심이 듭니다. 어쩌면 과거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오늘의 젊은이들도 취업전선이란 사형대 위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양심을 기만하라고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삼성 특검 결과 발표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나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당부해 봅니다.

'정신적 불구'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충고를 자주 듣게 되는 모양입니다. 일상은 혁명이 움트는 곳이자 혁명이 소멸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일상을 무엇으로 재구축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삶도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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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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