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버스터(トップをねらえ!, GunBuster Top o Nerae!, 1989)
30분 총 6화, 일본OVA,
감독 : 안노 히데아키





오타쿠, 문화의 톱이된 신호탄!

어느 사회든 질적인 전환을 거쳐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보이는 세대도 있기 마련이다. 전후 영국의 앵그리 영맨, 미국의 비트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사고 방식을 보여 기성 세대를 소크라테스 시대 이래로 계속된 고민에 빠뜨린다. "요즘 얘들 문제야!"라는... 우리에게도 한동안 회자되었던 세대 구분법으로 모래시계 세대니, 386세대니 하는 정체성 자체보다는 언론의 편의주의적 작명법이 작용한 아리송한 세대 구분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식의 세대 구분은 세대와 세대간의 정체성을 지나치게 획일화한다는 우를 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처럼 압축적 근대화 내지는 성장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이런 세대론은 대체로 10년 주기로 이루어져 지나치게 세대(대체로 30년을 주기)를 미시적으로 구분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일본 사회에서 주목해볼 세대론 중 하나는 바로 1970년 동경엑스포를 전후한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오타쿠 세대일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일본 문화의 중핵을 이루는 인물들로 성장했고, "건버스터"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와 이 작품에 참여했던 대다수 인물들 역시 그와 함께 오타쿠 세대로 구분된다. "건버스터 - 톱을 노려라(이하 '건버스터)"는 그간 무성한 얘기들을 만들어 왔다. 그것은 어떤 측면으로 보자면 이 애니메이션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가 이 작품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 감독으로 성장하며 전작을 상회하는 인기작들을 만들어내왔기 때문이지만, "건버스터" 자체가 풍성한 이야기 거리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건버스터"가 매우 풍성한 패러디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본래 "패러디(parody)"란 말은 문학용어에서 출발한 단어이다. 유명 작가의 시나 작품의 문체나 운율을 모방하여 이를 풍자하거나 조롱하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유행했던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와 같이 일명 "노가바"를 경험한 이들은 사실 "패러디"란 말 자체는 모를지라도 경험상으로는 이미 체험해본 너무나 익숙한 기법이다.

 

그것이 패러디가 되었든 오마주가 되었든 이 기법의 필수 요소는 그 사회가 경험하여 축적한 양적, 질적으로 풍부하고 풍성한 이전의 문화적 업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러디 기법은 모두가 알만한 것들이어야 보다 많은 재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작품에 대한 패러디는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 말을 기초로 따져보면 "건버스터"의 성공 이면엔 우리 사회에 이미 일본문화(특히 일본 만화, 애니)가 자리잡고 있음을 뜻한다. "건버스터"는 지난 1989년 GAINAX에서 만든 OVA로 안노 히데아키의 실질적 데뷔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가 어린 시절 열광하며 바라보았던 일본 만화, 애니, 특촬물들을 모두 녹여내고 있다. 디즈니의 최신작 "슈렉" 2탄(2004년)이 온갖 영화들을 패러디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최소한 "패러디 애니"로만 국한시킬 때 가이낙스 "건버스터"는 20년 가량 앞선 작품이다. 오타쿠가 출현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것은 소수의 매니아들, 일부 광적인 증세를 보이는 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오타쿠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공간과 결합하면서 더이상 소수 매니아들의 전유물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계층의 문화로 격상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든, 일본이든 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그들이다.

 

건버스터 - 진부한 이야기 구조 속에 빛나는 보물들

"건버스터" DVD는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아니메) DVD를 구입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일본 문화에 깊이 빠져든 이들은 그들대로 DVD를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네들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혹은 다른 루트를 통해 이 아니메를 보았고, 어떤 이들에겐 아이들 장난 같은 "아니메"를 굳이 돈 들여 구입해서 볼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드러낸다. 내가 이 DVD를 구입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양자의 태도는 우리 사회에서 일본 문화를 대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스스로를 진지한 고급 문화 향유자로 규정하는 이들은 일본 아니메가 미국의 디즈니 애니보다 수준 이하로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이 아직도 있고, 일본 문화 내지는 오타쿠 문화를 점유한 이들은 그들의 문화를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런 양자의 태도는 국내적으로는 세계 제일의 애니메이션 제작국(주로 하청업체로서)이면서도 자체적인 캐릭터와 커리어를 축적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오타쿠들은 문화소비자에서 문화생산자의 지위를 획득했으나 우리 사회의 오타쿠들은 아직도 뒷거리를 배회한다. 이 차이가 일본과 우리의 문화생산이란 측면에서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다.

 

나는 여러 매체들(주로, 아니메를 다룬 대중문화서적들이나 인터넷 등을)을 통해 "건버스터" 이야기를 들었고, 이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 요량으로 이 DVD를 구입했다. 전부 3장으로 구성된 이 DVD타이틀은 각각 2화씩을 담고 있다. 처음 1, 2화를 보면서 나는 몹시 실망했음을 고백하겠다. 작화나 그림체 등에서 마치 1960년대말에서 70년대 초반에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 수준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1화의 제목 "충격! 나와 언니가 파일럿!?"이라니... 이건 60년대말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아닌가? 스토리를 보면 21세기를 갓 맞이한 인류는 사상 최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유는 외계에 출현한 괴생물체가 지구함대를 우주에서 간단히 전멸시켜 버린 사태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외계생명체에 의해 전멸당할 누란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런 스토리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보아온 무수히 많은 스토리들에서 익숙한 것이다. 가령, 우리에겐 "날아라 V호"에서도 이미 경험한 이야기인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이런 익숙한 두 개의 스토리 구조와 미소녀물이라는 일본적인 애니의 전형을 아무런 고민(?)없이 한데 버무려 버린다. 지구를 전멸 상황에서 구출할 히로인의 출현과 소녀 스포츠 만화의 구조를 한데 모아논다. 지구의 로봇파일럿 학교를 다니고 있는 "노리코"는 15년 전 아버지가 이끈 지구 함대와 아버지의 전함 "엑세리온"이 우주 괴물에 전멸당한 뒤에 그에 따른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소녀 앞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코치는 그녀를 정예 파일럿으로 덜컥 선발해버린다. 평소 아무런 재능도 없어보이던 노리코가 정예 파일럿으로 선발되자 다른 학생들은 노리코를 이지메한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각고의 노력을 거듭하는 노리코는 점차 보다 강대한 적을 만나며 성장해나간다. 이런 스토리조차 "드래곤 볼" 이래 시리즈로 진행되는 일본 만화의 전형이다. 낯익은, 너무나 익숙한 스토리와 전형적인 인물의 출현의 연속이란 점에서 "건버스터"는 진부함 그 자체이다.

 

건버스터의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런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는 전작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를 통해 애니메이션을 통한 최고의 리얼리즘을 추구했었다. 결과는? 대참패였다. 이때의 실패를 경험삼아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는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를 이 작품 "건버스터"에서 시도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이후 이어지는 그들 작품세계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들은 전체 이야기란 측면에선 이미 여러 성공 사례들이 축적된 기존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들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대신, 부분적인 요소들을 이야기 전체에 복선처럼 풍성하게 깔아 놓는다. "건버스터"를 감상하는 이들은 마치 소풍나와 보물찾기를 하는 심정으로 다음 장면에선 어떤 숨겨진 패러디가 있을까 궁금해 하며 단 한 장면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마치 맛있는 치즈를 깔아 제리를 유혹하는 톰처럼 우리들은 덫이 놓인 다음 장면, 다음 장면을 쫓아간다.

 

"건버스터"는 그렇게 관객의 시선을 패러디에 집중시킨 다음 그들이 설치한 거대한 덫으로 몰아간다. 오타쿠들이 앵그리영맨이나 비트 세대보다 가벼워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네들 역시 출현 당시엔 기성 세대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존재들로 폄하당했었음을 잊어선 안된다. "건버스터"는 제3화 "첫 설레임, 첫 출격"에 이르러 그네들이 가볍기만 한 영상세대, SF미래의 긍정적인 면에만 주목하고 있는 세대가 아님을 날카롭게 증명해보인다. 악전고투 끝에 우주 전함의 로봇 파일럿으로 탑승한 "노리코"는 함내에서 "스미스'를 사귀게 된다. 노리코가 스미스를 만나는 에피소드는 진부한 학원물의 에피소드들처럼 보인다. 담력시험을 치르고, 음료를 나눠마시며 간접키스에 볼이 빨개진다. 그러나 뒤이어 찾아온 괴수들의 습격, 노리코와 스미스는 한 팀을 이뤄 출격하지만 파트너 스미스는 한 순간 흔적도,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우주 공간의 망망대해에 흐르는 것는 오로지 침묵 뿐.... 죽음은 한 순간에 찾아와 노리코의 첫사랑이자 파트너를 제거해버렸다. 노리코의 아버지는 그녀가 8살 때 전사했지만, 그의 죽음은 다만 우주 멀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노리코는 직접 그 죽음을 목격할 수 없었지만, 스미스의 죽음은 바로 그녀 곁에서 그녀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순간에 일어난다.

 

노리코가 지구의 로봇 파일럿 학교부터 따랐던 언니 카즈미 역시 사랑하는 연인을 잃는다. 그들이 잃는 것은 단지 주변의 연인들만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따르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는 물체의 시간은 정지한 관찰자가 느끼는 시간보다 늦게 간다" 광속의 속도로 우주를 비행하며 우주 괴수들과 싸우는 노리코의 시간은 그녀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딘 것이었다. 우주에서 벌어진 며칠 동안의 전투를 마치고 지구에 돌아 와보니 자기는 아직 고등학생인데 친구들은 벌써 그녀보다 10여년은 더 나이들어버린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기성세대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노리코가 우주에서 잠시 머물던 몇년 동안 언니 카즈미마저 성숙한 어른이 되어버린다. 노리코는 홀로 남는다.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이루는 제6화 인류를 구원할 최후의 전투를 마치고 기사회생으로 돌아오는 노리코 앞에 지구의 시간은 그로부터 1만 20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건버스터"가 온갖 가벼운 패러디물들 속에서 명성을 유지하게 된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우리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다. 사회에 나와 한참 적응하느라 고생하다가 문득 옛 친구들을 잊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만난 친구들, 마음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그들은 이미 기성 세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배가 불룩하게 나오고, 머리 숱이 적어져 있다. 이제 만나서 나눌 이야기라곤 나날이 오르는 물가, 재테크, 시시껄렁한 정치 얘기가 전부다. 그제서야 우리는 시 한 편을 기억해낸다.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 질수록
당신을 향한 마음이 희미해 진다면
난 당신을 잊겠습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것이 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러워 말지니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얻으소서
초원의 빛이여
그빛 빛날때 그대 영광 빛을 얻으소서 !

한때 그렇게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젠 영원히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찾을 길 없을 지라도 우리 서러워 말지니
도리어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소서

여태 있었고 또 길이 있을 그 원시의 공감 가운데에서
인간의 고뇌에서 우러나는 그 위로의 생각 가운데에서
죽음을 뚫어 보는 그 믿음 가운데에서
현명한 마음을 부르는 세월 가운데.....

<'초원의 빛' 전문, 워즈워드>

 

"건버스터"와 오타쿠들의 성공에는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우리 인생과 사회에 대한 그들 나름의 성찰과 쓸쓸함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 우주에선 꼭 이런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거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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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 석기용 옮김 | 이마고(2003)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역시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성공적인 수준의 독서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우리는 오랜 군사독재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인지, 한국전쟁이라는 지긋지긋한 체험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탓인지, 오랜 문치 시대의 문약에 젖은 탓인지 몰라도 군사 문제 혹은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경향이 있다. 새 사냥꾼들이 꿩을 잡는데는 꿩의 습성을 이용한다고 한다. 꿩은 갑자기 놀라면 머리를 땅에 박고 고개를 들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처럼 자기 시야를 스스로 가림으로써 공포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는 습성을 이용해 사냥한다는 것이다. 전쟁 혹은 전쟁사에 대한 연구, 전쟁 기술에 대한 연구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우리가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한다 해도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20세기를 대중의 시대라고 말한다. 20세기 대중의 시대는 과연 문화와 문명에만 집중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20세기에 이르러 전쟁은 비로소 대중화되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치른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간에 치러졌던 100년 전쟁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이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치뤄진 전쟁이었다. 이토록 오랜 기간 치른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농민들은 그들의 농토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물론 피해가 없었다는 건 아니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때의 전쟁은 선택된 전사들끼리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서구에서 기사도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프로페셔널한 직업 전사들이었고, 소수 대 소수가 치른 전쟁이었기에 전투 수행에 따른 갖가지 원칙들을 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목숨을 노리기 보다는 포로로 사로잡고, 그에 대한 몸값을 치르도록 하는 등의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점차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전쟁은 소수 특수 집단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전쟁이 되었고, 전쟁은 이제 누구에게나 개방된다. 그리하여 20세기의 인류는 총력전이라는 전무후무한 잔학한 학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중세의 전쟁은 일반인들에게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러하듯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종교전쟁(30년 전쟁과 같이)만이 일반인들의 생명까지 겨냥하고 있었을 뿐이다. 즉, 전면전은 극히 적은 사례였다는 것이다. 저자 어니스트 볼크먼이 궁극적으로 무게를 두어 주장하는 것, 나는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 결정과 전쟁의 수행 방식(무기)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인과 군인, 과학자라 불리는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으며, 일반 시민들의 관리 아래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나의 환상에 사로 잡혀 있었는데, 그것은 과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인 가치이므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의 미망을 깨우친 것은 제3의 불, 바로 핵이었다. 인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전기를 통해 산업혁명을 이루었고, 오늘날의 문명을 성취했다. 기술 진보는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증대시키는데 이바지해왔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 진보의 신화는 로스알라모스에서 오펜하이머가 최초의 원폭 실험에 성공한 뒤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깨지고 만다. 대중문화에서 소위 매드 사이언티스트(mad scientist)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원폭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쇼크의 반응이었다. 이제 과학자들의 합리적 이성, 순수한 과학적 탐구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평화주의자이면서도 본의 아니게 '원자폭탄의 아버지'란 멍에를 쓰게 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제3차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이 어떤 무기로 싸우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어도 제4차세계 대전에서 사용될 무기는 확실히 알수 있다. 바로 돌멩이와 몽둥이다."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은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전쟁을 소수 전문지식과 과학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의 것이라 치부하고 무시하는 동안 인류는 파멸의 시간에 그만큼 앞장 서 다가가는 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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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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