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강 / 1997년 3월


"죽음이란 생을 낭만화하는 원리이다. 생에 로맨틱(낭만적) 차원을 주는 원리이다" - 노발리스


 

희랍어 "아포리아"는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하는 말로 막다른 길이란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논리를 아포리아 상태에 빠뜨리는, 무지의 자각이란 교육법으로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대화에서 로고스의 전개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난관을 일컬어 아포리아라고 말한다. 아포리아란 철학의 막다른 길은 아니지만 말이 끊기는 곳에서 사유가 꽃핀다는 점에서 가장 "끊을 절 + 입구 = 철학"적이다. 


내가 위치한 지점(혹은 입장)을 어느 순간부터 자각하게 되었는가? 그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그것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망명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반도, 이론상으로는 대륙으로도 해양으로도 원하는 어느 방향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음에도 내가 살고 있는 남한, 대한민국은 대륙의, 그리고 해양의 섬이다. 바다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곳에도 이를 수 없다. 그로부터 내 막연한 답답함과 로망이 시작되었다.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대구, 대전, 천안을 거쳐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열차를 터고, 개성, 평양, 신의주 그리고 다시 블라디보스톡과 사할린을 따라 모스크바나 키에프를 거쳐 폴란드 크라코프와 바르샤바를 지나 베를린에 이르는 대륙횡단열차를 타보고 싶다는 열망 말이다. 내가 갇힌 것이 아니라 대륙의 한 끝에 살고 있으며 내 사유의 연장이 휴전선 철책이나 현해탄을 건너야만 다른 세상으로 건네지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분출과 두 발로 디디며 갈 수 있는 무한대의 경험을 나는 꿈꾸었다. 소박하게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막힘없이 한반도를 건너 대륙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통하는 대륙횡단철도를 이용해보는 것이고, 크게는 그 막연한 답답함의 뿌리인 분단과 냉전의 잔재와 금기들로부터 자유롭게 내 사고를 맘껏 풀어버려도 상관없는 시대를 살아보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조선인 가운데 디아스포라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망명을 경험한 이는 과연 누구인가? 작가, 철학자가 자신의 모국어를 버리는 경험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 한 명의 사람이 있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났으나 젊은 시절 모국어인 루마니아말을 버리고 평생을 미혼으로 살아가면서 파리의 어느 다락방에서 짤막하지만 깊숙한 사유를 이어간 사람. 에밀 시오랑. 내가 그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작가세계"를 통해서였다. 작가세계는 국내 작가 1인과 외국 작가 1인을 지정해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기획을 특장점으로 하는 계간지였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에밀 시오랑이었다. 나는 그 잡지를 통해 에밀 시오랑을 처음 접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을 경험했었다.


그리고 때마침 출간된 에밀 시오랑의 이 책 "절망의 끝에서"를 구해 읽을 수 있었다.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철학자? 수필가? 그의 글을 특징짓는 형태는 아포리즘(aphorism)이다. 우리에겐 그저 짤막한 경구 정도로 이해되는 아포리즘은 격언이나 명언, 명구와는 다른 것이다. 이들 사이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작가의 창작 유무이다. 에밀 시오랑은 아포리즘 형태를 빌어 그가 사유한 모든 것들을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옮겨 두었다. 일설에는 지난 세기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한 문장가였다고 하는데, 프랑스와 루마니아는 그리 가까운 나라라 할 수 없다. 모국어를 버린 망명자의 글을 사랑한 프랑스인들과 모국어를 스스럼없이 버린 에밀 시오랑.


그는 1911년 4월8일 루마니아의 라시나리에서 태어나 199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늘 절망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자살을 말했지만 오래 살았다. 그에겐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절망의 시작이자, 그를 절망의 꼭대기로 올리는 일이었다. 부카레스트와 베를린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베르그송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구실로 26세에 파리로 건너간다. 그러나 에밀 시오랑은 논문을 완성하지 않았다. 33세 되던 어느날 에밀 시오랑은 노르망디 해안 도시 디에프의 한 여관 방에서 말라르메의 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모국어에 절망한다.


유럽이란 세계 문화의 수도에서 살았으나 그는 변방인이었다. 그는 늘 철학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글을 썼으나 철학자로 대접받지 못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그의 직업란엔 언제나 대학원생 혹은 번역가, 출판사의 객원편집자로 적혀 있었다. 그의 절망은 짤막한 신음처럼 잠언으로 터져나왔다. 그의 문장들은 푸른 빛이 어린 날카롭고 예리한 비수였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문장은 무엇보다 인생의 비의에 대해 논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절망의 소크라테스였다. 에밀 시오랑은 젊은이들에게 인생에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철학이란 번민과 괴로움을 위장하는 기술"이다. 그것은 번민과 괴로움 속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어쩌면 움이 튼다는 것은 생명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그릇된 생각일지 모른다. 삶이 죽음보다 아름다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만, 나는 살아간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청춘의 어느 연대기에 삶과 죽음이란 극명하게 갈리는 인생의 순간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에밀 시오랑은 인터넷 모 자살사이트처럼 죽음을 포장하거나 도피처로 권하진 않는다.  에밀 시오랑은 ‘죽음이 없다면 생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이 자살을 권장하진 않는다. "절망의 끝에서" 중에서 자살의 의미를 논한 그의 글을 보자.



"자살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느낌은 일시적인 변덕이 아니라 몸서리쳐지는 내적 비극에서 온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삶의 긍정이라고 그래도 우기겠는가? 더욱이 자살의 서열을 정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유의 숭고함이나 천박함에 따라 자살을 분류하고자 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유를 따지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제거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충격적이지 않은가?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을 비웃는 사람들을 나는 아주 경멸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실현될 수 없는 사랑이란 자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욕구는 존재의 분열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내가 경탄해 마지 않는 인간들의 범주는 둘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미칠 수 있는 사람들과 매순간 자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그중에 두 번째 범주의 사람들만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는데, 그들만이 강한 정열과 큰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만족하면서, 순간순간의 확신 속에서 긍정적인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할 수밖에 없다. 이면의 현실과 끊임없는 접촉을 유지하는 사람들만이 내게 진실로 감동을 준다.


왜 나는 자살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내게는 삶만큼 죽음도 혐오스러우니까. 나는 내가 왜 이 지상에 존재하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지금 우주를 놀라게 할 울부짖음을 토하고 싶은 절박한 욕구를 느낀다. 전에 없던 포효가 내 안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그 포효가 터져나와 세상을 뒤덮어버리지 않고, 나를 무 속에 삼켜버리지 않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이 역사 속에 존재했던 가장 끔찍한 존재, 불꽃과 어둠으로 가득 차 넘치는 참담한 짐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한히 수축하고 팽창하며, 죽으면서 동시에 성장하고, 무에 대한 희망과 모든 것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흥분하며, 향기와 독약을 들이켜고, 사랑과 증오로 불타오르며, 빛과 암흑으로 압살된, 그로테스크한 미소를 짓는 야수다. 나를 상징하는 것은 빛의 죽음이며 죽음의 불꽃이다. 내 속의 짧은 번득임은 꺼져 천둥과 번개로 다시 태어난다. 내게서 타오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끝에서』중 '자살의 의미'>


그가 절망의 꼭대기에서 자발적인 추락의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자살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언제라도 자발적인 선택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막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자살은 그에게 열린 가능성(동시에 죽음 역시 혐오스러운 것이었으므로)이었고, 그의 생을 연장시켜 주었다.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므로 살아간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서른의 나이에 프랑스로 귀화한 이 사람은 죽음에 대한 어떤 철학적. 종교적 설명도, 위안도 믿지 않았다. 죽음에는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삶이란 그저 죽음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 있는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장애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생생한 육체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허무를 약속할 따름이다. 말하자면 죽음은 끝이다.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이 치명적인 진실을 뿌리치지 않고 대면하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신이든, 악마든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해낸 뒤 이를 대면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에밀 시오랑을 그런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자살"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있었다. 철 나기 훨씬 전의 일이긴 하지만 나고, 살고, 죽고의 문제를 존재의 문제로 치환해서 고민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체질적으로 그런 류의 고민에는 취약한 의식구조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살을 생각했던 것은 87년을 경험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조차 죽으려는 시도를 절박하게 궁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아주 일찌감치 깨우쳤으므로, 현세의 삶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그냥 이 길의 끝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죽을 것을 미리 앞당길 필요는 없겠단 편리한 생각 덕이다. 죽는 문제가 내게 중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내게는 언제나 사는 문제가 사무쳤기 때문이다.


에밀 시오랑은 있는 그대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의 글들은 비극적이지만, 그와 같은 이유로 희극적이다. 그의 글들이 뿜어내는 염세주의와 허무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당신이 늙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설령 늙었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한 몸이 되어 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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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희망은 길이다 - 루쉰 | 이철수(그림) | 이욱연 옮김 | 예문(2003)

나는 "루쉰" 선생을 존경한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지만 존경한다는 건, 다른 말로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어요"란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음속으로 존경만 하고 그의 삶을 본받지 않는다면 존경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란 뜻에서 한 말이었다. 문제는 정작 말만 그렇게 하고 나 역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일 게다. "희망은 길이다"란 책을 나는 지금까지 근 10여 권 넘게 구입했다. 내가 이 책을 그렇게 많이 구입한 것은 내가 한 권을 읽고 난 뒤 나만 읽지 않고 좀더 많은 이들에게 루쉰의 글을 읽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 그리한 것인데, 오늘 살펴보니 그간 이 책을 선물 받은 이들이 죄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이 책에 대한 간략한 리뷰 한 줄 없는 것이 안타까와 올려본다.


영미권 고전 가운데 90%는 재번역이 필요하다는 최근의 기사도 있지만, 루쉰에 관련한 꽤 많은 종의 책들이 있지만 번역 상태가 좋은 책들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이 책을 번역한 이욱연 선생은 소장파 중국학자로 이 책의 번역 상태는 내 나름으로는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번역이 가장 좋은 책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고 들었다).


"희망은 길이다"
"루쉰 아포리즘"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 루쉰 자신이 아포리즘으로 따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이욱연 선생이 루쉰이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하고 있는 글들 가운데 엄선해 편역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얼마전 리뷰했던 생텍쥐페리의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와 같은 형식의 책인 셈이다. 하지만 유혜자 편역의 그 책과 결정적인 차이는 판화가 이철수 선생의 판화작품들을 컬러 도판으로 삽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까지 감안해보면 책값을 비싸다고 할 수 있을까. 루쉰 선생의 글에, 이철수의 판화, 이욱연의 번역이라면 불경하옵게 자본주의 상품으로 보더라도 진경(眞景)에 속한다.


사실 국내 시인, 작가들의 이름으로 나온 아포리즘들 가운데 읽을 만한 것을 그리 많이 발견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에밀 시오랑의 아포리즘들을 좋아하고,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준 감동을 잊을 수 없는 나로서는 뭔가 태부족이거나 아쉬움이 남았는데,  그것은 이전의 생텍쥐페리의 글에서 따온 아포리즘을 읽었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문제는 아포리즘이 문학적 글쓰기 행위의 일부란 것을 철저하게 느끼지 못한 이들의 책임도 따를 것이다. 아포리즘에 대한 인식이 책을 읽다가 그저 좋은 구절에 밑줄 긋고, 이를 옮기는 것이거나, 시인들이 시상을 떠올렸으되 이를 시로 옮기지 못한 시작 메모를 책으로 엮어도 좋을 그런 만만한 행위로 느낀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이 책 "희망은 길이다" 역시 본질적으론 그런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루쉰의 글이란 것이다. 루쉰은
"피로 쓴 문장은 없으리라. 글은 어차피 먹으로 쓴다. 피로 쓴 것은 핏자국일 뿐이다. 핏자국은 물론 글보다 격정적이고, 직접적이며 분명하다. 하지만 쉽게 변색되고 지워지기 쉽다. 문학의 힘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루쉰은 20세기 중국문학의 핵심이었다. 마오쩌뚱은 루쉰을 일컬어 "위대한 문학인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라고 평한다. 물론 루쉰의 문학적 정수들은 그의 소설들에서 표출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루쉰을 루쉰으로 만든 것은 우리가 흔히 잡문(雜文)이라 치부하는 컬럼, 기고문, 편지와 같은 것들에서 등푸른 생선의 지느러미처럼, 숫돌에서 것 벼려낸 칼날처럼 시리게 날 선 짤막한 문장들이었다. 루쉰의 글들은 피로 쓴 문장보다 더 짙은 향기와 생명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한동안 루쉰의 글들, 산문들(소설은 제외)은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었다. 이 책의 제목이
"희망은 길이다" 이기도 하지만, 그는 유독 희망과 절망을 대비시켜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도 나오지만 중국적인 혹은 동양적인 사유 체계 안에는 이렇듯 대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


"나그네의 뜻은 편지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즉 앞길에 무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기어이 가는 것, 바로 절망에 대한 반항이다. 절망하지만 반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희망으로 인해 전투를 벌이는 사람보다 훨씬 용감하고 비장하다고 본다."


"정치는 현상을 유지시키고 통일시키려 하고, 문학 예술은 사회 발전을 촉진시키고 점차 사회를 분열시킨다. 문학과 예술이 사회를 분열시키지만 사회는 그래야만 발전한다. 문학과 예술은 정치가들에게는 눈엣가시가 되고,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루쉰의 글들 가운데는 지금의 관점에서 읽노라면 분명 논쟁이 될만한 것들도 적지 않다. 가령, 중국 책은 읽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거두절미하고 실려 있는 걸 보면, 대관절 무슨 이야기인지 어리둥절할 수도 있지만 당시 루쉰이 살아가던 무렵의 중국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그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루쉰에게 접근하는 최초의 책으로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의미가 있다. 좀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희망을 품고자 하는 이들에겐 희망으로,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겐 그 나름의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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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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