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오브 워 - 앤드류 니콜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외 출연



“전 세계적으로 5억 5천만 정 이상의 화기가 유통되고 있어. 12명 당 한명 꼴이지. 문제는, 나머지 11명을 어떻게 무장시키느냔 거야.”

영화 <로드 오브 워(Lord of War, 2005)>의 첫 장면에서 무기밀매상(Private Gunrunners) 유리 오를로프가 자조적으로 내뱉는 대사다. 그가 딛고 서 있는 아프리카의 대지에는 탄피들이 즐비하고, 007시리즈를 알리는 유명한 오프닝 장면처럼 카메라는 총구가 되어 전투의 현장들을 겨냥한다. 마침내 ‘탕’ 한 방의 총성이 울려 퍼지면서 카메라는 빠른 속도로 달려가 역시 AK-47소총을 들고 있는 아프리카 소년병의 머리를 관통해 버린다. 영화에선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소년의 머리를 과녁 삼아 관통해버린 탄환은 AK소총에서 발사된 탄환일 확률이 가장 높다.

유리 오를로프는 과거의 통계로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전 세계에는 대략 6억정의 소형화기들이 널리 퍼져 있고, 그 가운데 최소한 7,000만 정에서 1억정이 미하일 티모셰예비치 칼라시니코프가 발명한 AK-47과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들이다. 최근에 나는 『인물과 사상』(2009년 8월호)이란 잡지에 <현대의 일상을 창조한 사람들>이란 시리즈를 기획연재물로 싣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인물로 선정한 사람이 칼라시니코프였다. 이 시리즈는 우리의 현대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현상의 근원들을 어떤 한 인물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시스템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나는 AK-47소총이란 가볍고, 반동이 적으며,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자동소총의 탄생이 현대의 일상에 끼친 영향과 그 배후를 함께 다루고자 했다. 영화 <로드 오브 워>는 무기밀매라는 형태로 세계 각지의 분쟁 지역에 널리 퍼진 불법무기 거래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나는 이 영화와 영화에 수록된 다큐멘터리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랜 내전을 치르고 있는 한국은 베트남전 이후부터 ‘자주국방(自主國防)’이라는 슬로건 아래 무기산업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그 결과 신흥공업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생산이 불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던 M-16의 자체 생산에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2위를 다투는 고성능 자주포 K-9을 비롯해 기본훈련기 KT-1, 고등훈련기 T-50 등을 수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98년부터 최근 2007년까지 한국의 무기산업 수출총액은 28억 199만 달러로 연평균 약 2억 8천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중에서 항공 34%, 탄약 23%, 함정 15% 등을 차지하고 있다. MB정부의 출범 이전부터 방위산업을 ‘신성장동력산업’으로 육성하자는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산업이라 할 수 있는 무기 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나 경계는,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미의존도가 높은 군사 분야에서는 역으로 ‘자주국방’과 ‘안보’논리에 밀리고, 이제는 경제성장논리에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뉴질랜드 출신의 앤드류 니콜(Andrew Niccol) 감독은 DNA조작에 의한 미래사회의 계급차별을 다룬 영화 <가타카(Gattaca, 1997, 미국)>의 감독이자 - 이 영화에 대해서는 내 홈페이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http://windshoes.new21.org/film-gattaca01.htm )에서 다룬 바 있다 - <트루먼쇼>의 대본을 쓴 작가로 사회성 짙은 영화예술인(cineaste)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영화 <로드 오브 워>는 그가 대본, 연출을 모두 맡은 영화로 유리 오를로프 역을 맡은 니콜라스 케이지와 <가타카>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은 맞춘 에단 호크가 무기밀매상 오를로프를 뒤쫓는 국가기관의 요원으로 등장해 재미를 더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거래에는 흑막이 있기 마련이지만 무기거래의 내막을 살펴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어려움의 근원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있지만 한눈에 살펴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니콜 감독 역시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미국 비평계로부터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을 만큼 문제작이었지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흥행에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비록 유리 오를로프의 인간적 고뇌를 담은 스토리로 ‘당의정(糖衣錠) 효과’를 얻고자 했으나 <트루먼쇼>와 같은 흡인력과 재미를 동시에 갖춘 휴먼드라마를 기대한 이들은 흡혈귀 무기밀매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한 바탕 시원한 액션 활극을 기대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 복잡하고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영화의 런닝 타임과 동일한 시간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고 해도 무기 밀거래의 흑막과 배경, 원인을 살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니콜 감독은 참으로 무모한 도전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은유를 통한 사회현상의 고발이라는 드라마적 재미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다큐멘터리라면 결코 보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무기거래의 진정한 배후가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영화가 되었고, 그것이 <로드 오브 워>가 지닌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신생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무려 4조원의 재래식 무기가 사라졌다. 이 사건은 20세기 최대의 무기 실종 사건이었지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체포되지 않았다. 미소양국은 물론 냉전 체제 아래 있던 세계 각국에 비축된 재래식 무기는 냉전 기간 동안은 물론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 할지라도 모두 소모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냉전 해체로 필요 없는 재고가 된 재래식 무기들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구 유럽의 보관비용만 늘려가고 있는 실정이었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틈새로 무기밀거래가 독버섯처럼 번졌고, 국가기관 역시 암암리에 개입했다. 결국 이들 국가에서 번져나간 무기들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분쟁지역으로 퍼져나갔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전쟁이 아닌 내전 기간 동안 죽어야 했다. 원제명인 “Lord of War”는 그런 의미였다.




냉전 기간 중 유대인으로 신분을 속인 아버지 덕분에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우크라이나 이민자 가족인 유리 오를로프는 우연히 목격한 러시아 마피아들간의 총격전 장면을 보면서 저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죽지만 누군가는 그 무기를 팔아 이득을 본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유리 자신에게도 낯선 장면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거리에서 햄버거나 핫도그를 팔듯 그렇게 무기를 팔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무기를 판다는 죄책감은 마약을 판다는 죄책감보다 덜한 것이었다. 니콜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여러 무기밀매상들을 인터뷰하고, 널리 알려진 몇몇 사람의 생애를 유리 오를로프라는 가상의 인물에 녹여내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유리 오를로프는 상당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또 한 편으론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록 남동생이지만 형제에 대한 집착은 알 파치노가 주연 했던 <스카페이스>, 훗날 에바 폰테인(브리짓 모나한)에 대해 유리가 어렸을 때부터 보인 집착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 떠오르고, 성공의 정점에서 결국 소중한 가족을 잃는 모습은 얼핏 <아메리칸 갱스터>가 떠오른다. 독창적인 스토리인 듯 보이지만 이처럼 익숙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기밀거래가 영화를 밀고 가는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을 형성하기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그로 인한 혼선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영화적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 내전의 자금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면 - 당신의 결혼반지와 휴대폰엔 아프리카의 피가 묻어 있다 - 앤드류 니콜 감독의 <로드 오브 워>는 실제 서아프리카 내전을 주동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영화적으로 배치하면서 그들이 다이아몬드와 휴대폰의 필수적인 부품재료인 콜탄을 팔아 무엇을 구입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앞서 나는 칼라시니코프에 대해 글을 썼다고 했는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고기 다지는 기계 앞에서 칼라시니코프를 희생양 삼아 그가 이 모든 비극의 배후라고 고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이 기계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볼트나 너트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밀거래상들 역시 그저 기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재료를 공급하거나 기계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윤활유 정도의 기능을 할 뿐이다.



유리 오를로프는 아프리카의 독재자를 비롯해 무기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무기를 공급하고 싶어하는 모든 정부와 친밀한 거래를 주도했고, 그 결과 어릴 적부터 흠모했던 여인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거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니 실제로는 이제까지 소모된 재래식 무기 보다 좀더 무기의 화력과 수준을 높이길 희망하는 무기산업자본의 노력으로 점점 더 입지가 좁아진다.

올초에 개봉한 영화 <인터내셔널>은 어떤 면에선 <로드 오브 워>의 후속편이거나 유리 오를로프를 추적하던 요원 잭(에단 호크)의 시선으로 그려진 무기 거래의 이면을 그린 영화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인터내셔널>에선 재래식 불법무기 거래에서 첨단 무기 거래로 넘어가는 새로운 무기 산업의 양상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의 양극화는 물론 세계의 경제적 양극화 또한 극심해지고 있는 상황인데, 양극화의 가장 극심한 사례가 바로 무기 생산과 소비의 양극화다. 전 세계 무기 공급의 3분지 2는 미국과 러시아가 담당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는 유럽연합 국가들이 책임지고 있다. 2005년 현재 무기 생산업체의 무기 판매액은 2,680억 달러에 달하고, 이 매출액의 절반은 세계의 다국적 자본인 5개 대기업이 독식하고 있다. 물론 이들 다국적 기업들이 생산하는 것이 무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전자레인지, 세탁기를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유리 오를로프는 말한다.

“최후의 순간에 지구를 상속받게 될 자들이 누군지 알아? 바로 무기상들이지.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느라 너무 바쁘거든. 살아남는 비결은? 전쟁을 하지 않는 거야, 특히 자기 자신과는 절대로….”

전 세계가 미국발 금융파생상품의 파산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 배후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며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무기 거래의 진정한 배후는 영원히 흑막 속에 가려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세기라는 20세기 동안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보다 제노사이드(민간인학살)로 죽은 사람의 수가 1억 7천만 명으로 더 많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인양 비춰지는 동안, 어쩌면 당신이 연말 보너스처럼 수익을 기대하며 넣은 해외펀드는 군수산업을 살찌우고, 당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양 팔을 정글도로 잘라내고 얻은 것일지 모른다. 물론 내가 쓰고 있는
삼성 휴대폰에도 아프리카 콩고산 콜탄이 필수 부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스 바이스와 클라우스 베르너의 책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광석의 판매는 콩고 반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삼성 경영자는 이 불순한 거래를 비밀에 부칠 것임을 보장했다. 설령 다음과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 광물은 다시 시장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바로 삼성 자체 수요로 전자업 쪽에서 가공될 겁니다.”

삼성은 원료가 의심스러운 곳에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모른 체 한다. 우리가 이 무서운 불법무기 거래를 차단하고, 더이상 학살을 못 본 체 눈감지 않기 위해서는 오를로프의 말과 반대로 우리 자신과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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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김경연  한정숙 옮김 | 까치글방(1999)




천년제국 : 비잔티움 324-1453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역사 공부를 즐기는 편이다. 그간 역사를 공부하면서 내가 깨우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제국은 스스로의 힘을 파악하지 못할 때 가장 강성하고, 경계를 세우는 순간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종말론적인 기독교에서는 종종 천년왕국의 도래를, 불교의 미륵신앙처럼 이야기한다. "천년왕국""신약성서"의 '요한의 묵시록' 제20장에 적힌 문장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1,000년간 통치한 뒤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해석이다. 신앙으로서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 '천년'이란 시간에 주목해보고 싶은데, 이 책 "비잔티움 제국사"엔 굳이 324년으로부터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시간을 명시해두고 있다. 이 때 내가 놀라고, 의문을 품은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비잔티움 제국이 무려 1,129년간 존속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의 건국을 기점으로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330년 5월 11일을 기점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어째서 324년으로 명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문을 푸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즉,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년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 어째서 저자는 324년을 기점으로 잡고 있으며 그것이 유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이 의도하는 목적 - 즉,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것 - 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고백할 것은 올해 목표로 세웠던 "서양중세사 이해"를 위한 나의 독서 계획에 따라 구한 책이긴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중도에 몇 번이고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은 내게 어려웠다. 사실 이 책의 번역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명사 "비잔티움"은 오랫동안 그저 영어의 형용사적 표현인 "비잔틴"이었다. 여기엔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비잔티움 제국이 우리에겐 '잊혀진 제국'이자, 별관련이 없는 제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알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그저 비잔틴 미술의 몇 가지 양식인 이콘(icon) 성화들, 모자이크 양식이나 독특한 문양, 성상숭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서로마교회(가톨릭)와의 논쟁, 동아시아적인 정치술로 폄하되는 매수와 모략, 암살의 정치,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견뎌내게 했다고 전하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 고구려 철갑기병을 연상케 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주축이 되었던 중기병 카타플락타이(Cataphract), 콘스탄티노플의 일곱겹 성벽과 이를 둘러싸고 이슬람제국의 메메드 2세와 벌였던 사투 등등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서로 연결되어 이해되었던 것이 아니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고,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3부작 중 하나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그나마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조금 덜어주었을 뿐이다.

어떤 한 나라, 그것도 천년의 역사를 가진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만, 나에겐 비잔티움 제국의 일곱 겹 성문을 열어젖히기에 아는 게 너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이 태부족하단 것도 비잔티움 제국에 다가서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령 비잔틴 미술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은 미셀 카플란의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79 "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 와 앞서 말한 시오노 나나미의 책, 그리고 예전에 <한국일보, 타임라이프북스>에서 펴냈던 것을 가람기획에서 재출간하고 있는 "타임라이프세계사" 시리즈 정도가 '비잔틴 미술'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읽은 것들도 저 정도다. 그외에는 서양중세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하고 있는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읽기 쉬울 리 없다. 그나마 이 책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 Ostrogorsky)"가 일반 대중들을 위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한 것이라고 하니 숨이 턱턱 막혀 올 밖에...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이 책은 소중하다.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

내가 던졌던 첫 번째 질문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에 대해 저자인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잔티움 발전의 주된 원인은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다. 이 세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외한다면 비잔티움의 본질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구조물은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라는 종교 그리고 로마의 국가형태가 종합되면서 비로소 성립했다. <본문 9쪽>


석학만이 내릴 수 있는 명쾌한 해석이면서, 이 책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학교 세계사 시간에 나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중세가 시작되고, 동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근대가 시작된다고 배웠다. 어찌되었든 오스트로고르스키식 표현을 빌자면 서양이란 역사적 구조물은 로마제국의 국가제도와 기독교 정신, 그리고 동양으로부터 전해져 온 문명에 의한 것이며 이 중 어느 하나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서유럽인들에 의해 무시당해왔고, 이런 그들의 경향은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서유럽인들의 폄하는 역자 후기에도 있지만 "로마 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영국의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로마사 집필에 매진한 역사가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국과 프랑스가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대였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부르조아지들이 성장하고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가 "로마제국 쇠망사" 전 6권을 발간하던 해에 엠마누엘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발간했고, 루이16세는 삼부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그는 그런 시기의 역사가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가들은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역사연구를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도덕성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불변하는 보편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믿었고, 인간의 진보를 믿었다. 그에 따라 과거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미신, 환상, 종교적 신앙 등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맥락상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게다가 에드워드 기번은 16세 때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했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퇴교당한 경험도 있었다. 물론 그가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서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술한 것을 그런 사적인 이유에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신교적인 보편성에 기대고 있던 로마 제국의 기풍이 기독교화로 말미암아 훼손된 것으로 보았고, 그로인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에 이른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기독교적 믿음이 제국 형성의 기초가 되었던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고, 이런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한 국가의 몰락,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던 대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하는 것은 옳을 것이고, 거기엔 이들 역사가들의 해석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기독교화에서만 찾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기번은 동로마 제국 자체를 서양 중세의 암흑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서양 중세를 계몽주의 시대 역사가들처럼 암흑기로 보지도 않을 뿐더러 근대의 중요한 맹아들을 품고 있던 새로운 시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동로마인들은 스스로를 '비잔티움적인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런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비잔틴'이란 말 자체가 후세인들이 그들을 규정하며 붙인 말이었을 뿐, 그들 스스로는 로마인으로 생각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안정을 찾은 과거의 게르마니아 일대를 차지한 서유럽인들은 스스로를 로마의 후예로 생각하고자 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힘의 상징인 로마군단의 독수히 휘장을 제국의 상징으로 삼았고,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 모두 국가 상징을 독수리로 삼았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인 "루마니아"는 국명 자체가 "Rumania"다. 그네들은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혈통 자체가 로마인들과의 혼혈로 이루어졌고, 라틴인에 가까운 언어와 형질을 지녔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로마제국이 서구 문명에 끼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고, 실제 제국 말엽에 이르렀을 때는 과거의 로마제국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되었음에도 그들은 멸망하던 그 순간까지 로마인으로 살다 죽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천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저자의 표현대로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저자가 앞서 강조한 것과 다른 원인 몇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물론 저자 역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인데,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간적으로 이슬람제국과 서유럽제국의 세력 판도가 최전성기를 맞이하기 전이었다는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이들 두 세력의 완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다른 한 가지는 비잔티움 제국의 탁월한 관료제도인데, 익히 잘 알려진대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마치 로마제국의 말기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종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안위 자체가 지켜진데는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웠을 테지만 관료제도 자체가 튼실했던 탓이다. 비슷한 시기의 서유럽 군대의 엘리트 계급이랄 수 있는 기사들이 사실상 문맹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동로마의 군대의 주축을 이룬 귀족들은 최고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비잔티움 제국이 오랫동안 독점해오다시피 한 동방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경제적 성공도 크다. 동로마는 로마제국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체제 아래에서 희생당한 소규모 농민들들의 예속 상황을 완화시키고 이들을 군사력의 주축으로 삼는 건실한 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부한 만큼 정복 전쟁에 나설 수는 없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주변 국가들의 강성함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토지와 지역에 기반한 농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자기 지역을 떠나 정복전쟁에 나서는 일 자체를 꺼려한 탓도 크다 할 것이다.


324-1453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을 330년 5월 11일로 잡지 않고, 324년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렇다면 324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기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부 황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제국을 재통일했다. 이전까지 비잔티움은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에 불과했다. 나는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30년을 기점으로 하지 않고, 324년을 기점으로 잡은 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로마의 진정한 계승자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오고, 유스티니아누스 때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이클레이오스 황제기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 집권 조직과 기독교, 동방적 색채를 두루 갖춘 전제국가가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빠져 있거나 종종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우리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혹은 "고구려사 왜곡"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도대체 동북공정은 무엇이고, 그로인한 고구려사 왜곡은 무엇인가? 중국의 문화권 안에 있던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에겐 "연호(年號)"란 개념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건원(建元)26년이란 말이 역사서에 실려 있다면 이는 B.C.115년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 연호라는 것은 대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제 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이다. 이전까지는 각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 시기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측은 자신들에게 신속된 나라에게 복종의 의미로 자신들의 이런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지요. 고구려에게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강요하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침략한 역사가 있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 태종 때의 일인 것 같다.)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런 고구려도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중국 화친책을 사용하면서 중국의 연호를 받아 사용하게 되는데, 중국은 향후 남북한의 통일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서 문제가 된 것이죠. 간혹 역사기행을 다니다보면 이름있는 옛 선인들의 비석이나 고승들의 부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네들의 비석이나 부도에 새겨진 연호를 확인해보면 대개 '유당(有唐) 신라(新羅)'나 '유명(有明)조선(朝鮮)'이란 글귀를 볼 수 있다. 이는 '당나라에 속한' 혹은 '명나라에 속한' 이란 뜻이 된다. 그와 상관없이 우리들의 민족 감정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는 중국측의 역사 서술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이화 선생이 신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규정하지 않고, 고려를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로 규정하는 것도 어느 정도 그런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만든 고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식이 강했다. 그런 까닭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서경(지금의 평양)을 개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가 실제로 북방 정벌에 나선 일은 적었다 하더라도 그네들의 국명에 나타나듯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은 매우 중요한 국정 지표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신은 다들 잘 아는 것처럼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 개국에 앞장 섰던 삼봉 정도전의 요동 정벌로 이어졌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역시 우리의 고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로마의 계승자, 혹은 로마 그 자체로 여겼고,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사방의 적들에게 포위당해 국경 경비만으로도 막대한 군비를 지불하면서 끊임없이 제국의 외연을 확장하려 들었던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이런 노력이 훗날 중세 서유럽에 로마의 자산을 전수해줄 수 있었던 토양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의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24년을 기점으로 이 책을 출발시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527-565)는 실제로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대원정군을 이끌고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에스파니아를 공격했고, 일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로마 제국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했다 하더라도 세상은 변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옛 로마의 영화를 회복할 만한 사회경제적 토대가 부족했다. 제국 황제들의 정복 사업은 실패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화는 시들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의 옛 영토엔 새로운 주인들이 차지했고, 비잔티움 제국 자신들도 라틴 문화 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젖어들며 급격히 그리스화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8세기 무렵부터는 동지중해 지역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하게 되니 이들이 이슬람 세력이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수장이었던 카를(샤를마뉴) 대제에 의한 비잔티움 제국의 이념적 권위 상실은 심대한 타격이 되었다. 카를 대제는 바이에른, 작센, 롬바르드 왕국 등을 차지하며 기독교 세계 최고의 강국이자 왕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실패한 것을 성취한 카를 대제에게 로마 교회의 신망이 쏠렸고 그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얻어냈다. 우리는 로마교회의 분리가 단순히 성상숭배에 따른 견해 차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해결되고, 성상숭배에 대한 견해차도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로마 교회는 더이상 과거의 "로마" 교회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로마를 단일한 제국이라 생각했으므로 카를 대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부인한 것이 된다. 당시 유럽의 정신적 세계 질서는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종종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낸 것을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만의 공로로 생각하기 쉽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진출에 대한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그 와중에 이슬람 왕국의 속주만도 못한 지경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큰 의의는 역자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고전고대의 문화를 보존하여 이를 서유럽에 전해준 것과 정교의 정신적 유산을 슬라브 세계에 남겨준 것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우리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무엇이며, 유럽의 시작 - 오늘날 아시아를 비롯해 전세계를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유럽 문명권"으로 보이도록 묶어버린 유럽의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뒤이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역사는 더이상 역사가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종종 과학이 그러했듯 그것을 저술하는 이들에 의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분명 비잔티움 제국이 오늘날의 서유럽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잊혀진 것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계가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고구려사 문제로 시끄럽지만 과거 신라지역 출신의 정치 권력과 남북한이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결과 오늘날의 북한 지역인 고구려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애써 축소해왔던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의 역사에서 역사가의 몫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들라크루아, 콘스탄티노플 함락

같은 유럽이라 할지라도 동방에 가까왔던 비잔티움의 역사를 축소함으로써 유럽의 사가들은 빛이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한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의문을 품어 본다. 물론 이 책이 유럽중심주의 역사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담고 있지 않으며, 나 자신도 앞으로는 아시아 중심주의 역사관으로 무장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비잔티움 제국사를 읽으며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의 일부를 교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보다 전지구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 끝으로 이 책의 역자와 출판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 본다. 왜냐하면...
어느 출판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외국어를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면 그 책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떠올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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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콘스탄트 가드너(The Constant Gardener)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2006년 개봉




혹시 이 영화의 포스터나 광고용으로 제작된 홍보 필름에 속지 마시길... 나 '저스틴(랄프 파인즈)'은 평범한 영국인이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대개의 영국인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취미로 작은 정원을 가꾸길 즐겨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평범하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일단 나 '저스틴'은 외교관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영국의 시민들은 영국의 외교가 구 시대적이며, 제3세계의 인권이나 빈곤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른다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저 내게 맡겨진 소임을 다할 뿐이다. 외교관이라 하지만 차라리 샐러리맨이란 생각으로 바라봐주면 고맙겠다. 때때로 너무나 평온하기 그지없어 도리어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의 삶 속에 작은 균열이 왔다. 처음엔 그저그런 아주 작은 균열에 불과했으며 나는 그 균열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어느날 대학에서 초청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젊은 아가씨가 매우 도발적으로 나서며 질문을 했다. 아마도 그녀는 나를 그저그런 '속물'이자 외교적 언사만 남발하는 인물로 보았던 모양이다. 반대로 나 역시 그녀를 세상물정에 대해선 도통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주제넘게 나서 입바른 소리나 하는 이상주의자로 생각했다. 




문제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도발적이며, 나서길 좋아하는 게다가 의협심이 넘쳐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 여인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 때때로 사생활이 문란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사랑에는 목숨을 걸 수 있는 여인이었다. 지적이고, 아름다우며 상냥한 그녀와 사랑에 빠지다니 나는 아직 그녀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나는 '테사(레이첼 와이즈)'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우리 두 사람은 결혼해서 함께 케냐 주재의 영국 대사관으로 이주했다. 다행히 그녀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매우 만족했고, 나는 대사관 업무 틈틈이 정원을 가꾸며 그녀와 평온한 시간들을 보낸다. 그 사이 그녀의 몸에는 나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행복하다. 아니, 행복했다. 테사가 아이를 유산하기 전까진...



아이를 유산하고 난 뒤 어느날부터인가 테사의 행동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인권활동가라는 흑인 의사와 어울려 다니며 다국적 제약회사 '쓰리비'가 아프리카에서 의심스러운 신약을 임상실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결혼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 대사관 파티에서도 그녀는 도발적인 말로 파티의 분위기를 망쳐놓는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죽었다. 함께 다니던 흑인 의사와 살해당했다.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는 이처럼 회상으로 시작된다.  저스틴은 아내와 흑인 의사가 살해당한 호숫가에 앉아 그녀를 처음 만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시간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그리고 그녀가 살해당한 뒤 그녀를 살해한 자들의 뒤를 추적하면서 겪었던 시간들을 회상한다. 스파이 소설의 대가 존 르카레 원작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시티 오브 갓>으로 화려한 신고식을 마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연출했다. 영화는 진행되는 내내 너무나 아름다운 아프리카 케냐의 풍경들을 비춰준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검은 살갗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처한 비참한 일상이 함께 대비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저스틴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콘스탄트 가드너', 그는 자신의 정원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성실한 영국인이었다. 오래된 영국 속담 중에 영국인에게 집과 정원은 그의 성(castle)이자 우주라는 말이 있다.


저스틴 역시 아내 '테사'가 살해당하기 전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평범하고 안락하여 때로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 즉 자신이 가꾸는 작은 정원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은 저스틴은 평범한 일상에서 평범하지 않는 진짜 세상을 보여주게 된다. 저스틴은 아내 테사를 사랑했다. 하지만 대개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저스틴이 알고 있는 테사는 진짜 테사의 본모습이었을까? 과연 저스틴은 테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기는 했던 것일까? 저스틴이 그냥 강도단의 소행으로 종결된 수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테사의 행적을 뒤쫓게 된 까닭은 테사가 추적해서 밝히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질투가 있었다.





흑인 의사와 자주 만나는 것을 알고, 때로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했지만, 저스틴은 자신이 속좁은 남자로 아니면 테사에게 결별을 통보받을까 두려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진실을 알고 싶었다. 마음속에 사랑으로 기억되는 테사를 계속해서 간직해도 괜찮은 건지 그는 알고 싶었다. 오로지 진실만이 저스틴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저스틴은 아내의 행적과 아내가 추적하여 밝혀내고자 했던 다국적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에 얽힌 음모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실에 근접해가면 갈수록 저스틴은 테사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고, 자신이 테사를 의심했던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정원에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길 즐겼고, 한 사람은 거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살았다. 저스틴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저 무언가 나눠주고 베풀어 주면 그뿐이라 생각하는 평범한 인도주의자였지만 세상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테사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고 잘못을 바로잡길 원했다. 아마 두 사람이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했더라도 어쩌면 이 두 사람은 평생 서로의 삶과 존재의 방식을 서로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모르모트처럼 이용해 신약을 개발하려는 다국적 제약회사에 대항하는 양심적인 여성 인권운동가의 갈등보다 더 중요한 갈등으로 양심적이고, 타인에게 해를 끼친 바 없는 평범한 시민인 남편과 아내의 갈등을 더욱 중요한 축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것들이 허용되지만 많은 것들이 금지된다. 아프리카에 한 번이라도 우편물을 보내려고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곳에 보내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책이다. 존 르카레의 이 소설도 케냐에선 '금서'다. 이 영화는 실제 케냐에서 촬영되었고, 실제로 케냐 주재 영국대사관의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테사의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우리가 지금 가치있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목숨이 헐값에 팔렸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풍요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얻어진 것이다.



아내 테사가 제약회사의 사주를 받은 끄나플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뒤에야 비로소 저스틴은 아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대가로 그 역시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고 싶어하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조직원들에 의해 아내가 살해당한 바로 그 장소에서 살해당한다. 그의 회상은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그를 살해하기 전까지 잠시 동안 이루어진 것이다. 선진국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희생당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모습은 단순히 영화적인 설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을 소유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늘 다 죽어가는 시늉을 한다. 그것이 자기 양심을 속이고 사는 데 훨씬 더 편한 태도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약 나라면 이미 죽어버린 사랑을 이해하고, 가슴에 품기 위해 내 목숨을 걸 수 있을까? <콘스탄트 가드너>는 사회고발영화지만 동시에 절절한 사랑이야기 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사랑을 위해 함께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랴. 함께 울어줄 사람도 없는데... 그래서 세상은 슬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집이 없어. 내 집은 그녀였으니까."



* 다국적제약회사 등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식들에 대해선 차차 좀더 심화된 리뷰를 다시 한 번 써볼 생각이라 지금은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평을 적는 것으로 가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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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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