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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07 최영미 - 서투른 배우
서투른 배우

- 최영미

술 마시고
내게 등을 보인 남자.
취기를 토해내는 연민에서 끝내야 했는데,
봄날이 길어지며 희망이 피어오르고

연인이었던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별.
엉키고 풀어졌다,
예고된 폭풍이 지나가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너와 나를 잇는 줄이 끊겼다
얼어붙은 원룸에서 햄버거와 입 맞추며
나는 무너졌다 아스라이 멀어지며
나는 너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
우리 영혼의 지도 위에 그려진 슬픈 궤적.

무모한 비행으로 스스로를 탕진하고
해발 2만 미터의 상공에서 눈을 가린 채
나는 폭발했다
흔들리는 가면 뒤에서만
우는 삐에로.

추억의 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들이 부활해
야구경기를 보며, 글자판을 두드린다.
너는 이미 나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만
지금 너의 밤은 다른 별이 밝히겠지만…

<출처> 최영미, 『문학사상』, 2009년 1월호(통권 435호)

*

모든 서정시는 연애시라고 대학의 시창작실습 시간에 그렇게 배웠었다. 연애(戀愛)의 개념은 광대무비(廣大無比)하였다. 사랑할 것이 없어 어느 시인은 병(病)에도 정(情)을 주었다. 서정시가(敍情詩歌)의 원형을 그리스문학에서 따진다면 다시 종류별로 발라드(譚詩)·엘레지(悲歌)·오드(頌歌)로 나뉜다. 최영미의 이 시를 그와 같은 구분으로 나눈다면 ‘발라드’에 속할 것이다.


음악에서 ‘발라드’란 말의 어감은 그 자체가 서정적인 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실제 속마음은 비탄에 젖었다 하더라도 음조나 창법은 담담하게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그에 비해  ‘엘레지’는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엘레지’는 통속(通俗)적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포르투갈 민속요인 파두(Fado)의 음색은 가사의 내용과 상관없이 곡의 형식만으로도 ‘엘레지’로 느껴진다(그런 의미에서 허수경의 옛날 시들은 발라드인데도 엘레지로 들린다. 당시의 허수경은 '이미자'이거나 '심수봉'이었던 셈이다. 흐흐).

‘오드’는 매년 신춘 벽두에 신문 1면을 장식하곤 하는 시들이다. 엘레지와 오드는 음악적으로도 장식음이 많고, 되풀이되는 후렴구가 도드라진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시에서도 이런 부류의 것들은 장식적인 수사가 많고, 되풀이되는 구절들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엘레지와 오드는 서로 다른 방식의 직설적인 화법이다. 최영미의 신작에서 내 마음을 울린 구절은 “지금 너의 밤은 다른 별이 밝히겠지만…”이다. 마지막 한 방을 날리기 위해 전반부의 연주가 그토록 담담(潭潭)했던 거다.

어쨌거나 사랑은 오드로 시작해서, 엘레지로 끝나고, 마지막에 가선 발라드로 남는다. 발라드로 마치면 예술성 점수가 높아지지만 오드로 돌아가면 추해지고, 엘레지에서 멈춰버리면 추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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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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