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2001)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을 계몽되지 못한 신화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한 ‘이성(理性)의 힘이 왜 오늘날 도리어 야만상태로 인류를 몰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정리한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M.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어렵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한 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던한 난해함과는 다른 성격의 어려움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읽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첫째는 T. W. 아도르노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과 싸워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문장 하나를 읽은 뒤 요구되는 사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어려움은 첨단 유행을 따지는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트렌드)와 싸우고, 두 번째는 한 차례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띄엄띄엄 되새김질하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전으로 인정받는 대개의 책들이 그러하듯 『계몽의 변증법』 역시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읽기에 따라 사전지식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다. 내 나름대로의 독서체험에 따르면 신화학에 대한 공부가 사전에 어느 정도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이 쓰이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종종 잊기 쉬운 『계몽의 변증법』 읽기의 한 방법이다. 오늘날 아도르노의 생각 혹은 아도르노에 대한 생각이란 점에서 후학들의 평가는 상이한 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2년간 이 책을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읽어야 하는 경험을 했다. 한 번은 신화학적인 입장에서, 다른 한 번은 문화연구(cultural study)적 입장에서, 다시 한 번은 문화경제(cultural economy)적 입장에서(이 책의 2장에 수록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에 대한 견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읽었다.

 

아도르노에 대한 평가의 변화 역시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이는 이제 시대의 조류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 반대로 그의 중요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확실한 건 이렇든 저렇든 그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가이며 특히 문화를 학문적 틀 속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결절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1947년에 쓰인 이 저작이 현재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 이 한 권의 책을 두고도 후대의 학자들 -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문학과지성사, 2002년), 권용선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2003년), 이순예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 계몽의 변증법에서 미학이론까지 아도르노 새롭게 읽기』(풀빛, 2005년) 등 - 은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서들을 펴내고 있으리라. 흔히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나치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펴낸 책이라고들 하는데, 그것이 옳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책의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부분 중 상당수는 그들이 미국 망명 생활 중 경험한,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중과 문화산업에 의한 대중문화에 기인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나치즘 못지않게 위험한 대중선동, 세뇌 장치로 인식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0~1940년대 러시아 혁명 이후 출현한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등 비이성적인 전체주의 세력이 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념적 좌우를 막론한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전체주의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고,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나 좌파적 노동운동은 비이성적 세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노동자계급(대중)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였고, 원자화된 대중사회는 결국 전체주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라는 용어는 마치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문화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위험 때문에, 그것을 대신하는 용어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문화 연구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에 걸쳐 주로 이루어졌는데 오락산업의 융성, 매스미디어의 급속한 발전,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문화조작, 미국에서의 영화산업과 음반 산업의 급속한 발전 등이 당시 문화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포만, 교만, 멸망을 의미하는 말로 코로스(kopos), 휘브리스(hybris), 아데(ate)란 말이 있다. 이 세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코로스는 ‘죄가 많다', 휘브리스는 ’난폭하다', 아데는 ‘파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할 때 저지르게 되는 죄가 휘브리스, 즉 ‘오만'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신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휘브리스를 범하는 자는 항상 가혹한 벌을 받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 개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완전히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이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주체(主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휘브리스(hybris)인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였지만 결국은 신들이 정한 운명에 따른 결과가 되어 버렸다.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따른다고 지나치게 자신하고 있을 때, 신들이 애써 경고한 메시지를 거부할 때, 신들에 의한 운명은 역습을 가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만물의 근원은 신(神)에 의한 것이며, 신들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애니미즘이 사물을 정령화 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고 말한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목표를 추구해왔다. 노아의 홍수라는 자연 혹은 신의 징벌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은 바벨탑을 세우려 했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죽음의 신 타르타로스를 쇠사슬로 묶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혜택을 망각하고, 끊임없이 숲을 개간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사랑(자원과 기술)을 망각하고 욕보였다. 지식의 목표는 ‘방법’,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좀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으로 변질되었다.

 

신성이 깃든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지혜를 얻고, 무리를 지어 기술을 전수했으나 이것은 자연과 더불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사회를 일구고, 자연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계몽의 합리성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인간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부정하는 탈신화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신화는 모든 가르침의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의 원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하늘 아래 더 이상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었던 인간은 자신들의 이성을 통해 이미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으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화한다.(신화의 세계, 자연, 사물을 생명을 지닌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계몽은 자연을 죽은 것으로 취급하여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 대한다.) 나는 아도르노의 이런 문제의식이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entropy)』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지리와의 합일을 도모하여 여기서 얻는 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적인 해방감을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400여 년 전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에 의해 구축된 ‘객관적 지식이 있으면 인간은 자연계를 지배할 수 있다.’세계관(패러다임)을 통해 산업혁명이 가능했고, 끊임없는 성장과  한계 없는 진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리프킨은 문명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것을 제의한다.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 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정치권의 리더나 누구 대단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가한 이성에 대한 비판은, 신화에 대한 계몽이 그 자체로 신화가 되어버린 상황(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계몽에 대한 재계몽의 기획으로서의 비판(이론)이다. 비록 그가 제시한 사유 방식은 어둡기 그지없으나 우리가 그 길을 외면하는 것은 빛(enlightenment)을 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아도르노,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사용하기 시작한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앞서 말했듯 대중문화의 생산 과정을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이전 세대의 연구자들은 문화를, 산업과는 별개의 혹은 산업과는 완전히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고도의 도구적 합리성과 관료제화한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된 물질적 기반을 그들 나름대로 분석하고, 이해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화할 수 없는 것까지 시장 기능에 의해 사물화(reification)한다. 사용가치(소비자가 상품에서 얻는 효율성)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데 기여한다. 당시 출현하기 시작한 라디오와 인쇄매체 등의 매스 미디어와 광고의 결합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태(lifestyle)을 만들어냈고, 결국 자본주의 초기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율성과 주체성은 상실되어 버렸거나 자본주의적(에 적합한) 주체성으로 변질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주장하는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문화의 상품화, 예술이 대량 상품화됨으로써 예술의 탈예술화, 즉 예술만의 고유한 자율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주장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이나 『예술의 비인간화』 등에서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하의 문화산업은 ‘교환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예술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문화산업은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따라 항상 동일한 것을 대량으로 제공한다. 그것은 계획, 통제되고, 예견 가능하며 계산 가능한 상품들만을 생산한다.

 

두 사람은 결국 예술이 문화산업의 메커니즘에 구속당함으로써 관리되는 사회의 총체적인 물화에 빠져든다고 보았다. 문화산업의 메커니즘 속에서 대량생산된 작품 아닌 열등한 상품들은 이전의 고유한 진정성을 지닌 예술 작품들을 모방함(이 과정에서 대량생산에 적합하도록 규격화)으로써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복종을 조장하고, 이를 은폐한다(부자도, 빈민도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는다). 문화산업은 대중들을 사회의 총체성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기만하는 술책이며,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도록 길들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이 현대의 대중문화가 지닌 도구적 합리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자본주의의 허위의식을 주입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게 만든다고 본 비판엔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판이론과 자율예술은 대중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들을 결집시킬 수도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논리는 반대중적 엘리트주의란 비판을 받게 된다. 이들이 바라보는 대중은 근본적으로 조작의 대상일 뿐이지 혁명을 추동할 수 있는 동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를 살다가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발터 벤야민에게서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가 주목했던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 생산된 복제품에 의해 상실된 진정성(authenticity), 아우라(aura)의 상실이 도리어 문화적 민주주의를 부추기는 기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문화산업을 통해 생산된 산출물에는 진정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가 예술작품으로부터 느낀다고 하는 진정성 역시 과거로부터 주어진 것(교육받은 것)이 아닌가? 대중문화에는 자율적인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가? 실제로 도시화와 대중문화로 인해 도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질서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창조되지 않았는가(E.P.톰슨)?

 

대중은 단순히 문화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며 그들 나름의 문화적 해독능력을 갖추고 있고, 우리들의 해독능력 역시 증가하고 있다. 즉, 창과 방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아직까지는 아도르노의 비관과 벤야민의 낙관 사이를 오가며 의지의 낙관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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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월드컵
- 축구는 그냥 축구일 뿐이다. 축구와 월드컵에 대해 쏟아지는 온갖 비판에 대해 익히 알고 공감하면서도 막상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꾸 감정이입이 되는 건 최소한 그들이 쏟아내고 있는 '땀'과 '눈물'은 진실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알리바이(alibi)
-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사하는 이에게 범죄 시각에 범행 이외의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알리바이'라고 한다. 좀더 유식하게 말해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이라고 하는데, 형사소송법상 범죄혐의를 입증하는 책임, 거증책임(擧證責任)은 검사에게 있다. '천안함'침몰사건에 대해 북한에 대고 스스로 혐의를 부인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자신들이 무죄라는 걸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들도 하나의 '국가'인데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국가의 알리바이'를 대라는 꼴이다. 과연 그 시간에 북한은 무얼하고 있었을까?

 

안개에 대하여
- 아침 출근하는데 한강에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 속 다리를 건너며 문득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그에게 있어 안개란 미궁이자 장막이었다. 학살과 약탈, 궁핍과 생존은 그너머에 있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홀로 죽은 친구. 나에게 '안개'란 그런 것이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갸날픈 희망이 완고한 절망에게 포위당한 '세상의 풍경', 희망의 손을 잡아주기에 절망은 지나치게 강하다. 해가 뜨면 안개는 사라지겠지만 그 순간은 인간의 삶이 견뎌내기엔 또 너무 기니까.

 

정보통제
- 범죄자가 주인공인 영화들은 폐쇄적인 구조를 갖기 마련이다. 영화의 사각 프레임이 열어놓은 창을 통해 바라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사회적 모럴(혹은 현실)과 차단된 채 극중 주인공인 범죄자들과 자기동일시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대부>에서 우리는 대체로 앞서의 이유로 말론 브란도나 알 파치노를 정말 나의 패밀리로 혹은 의탁하고 싶은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권력이 정보를 통제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이유도 동일하다. 

 

액션영화의 한 칼
- <글래디에이터>가 성공한 이유는 칼잡이들의 액션에만 있지는 않다. "민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 권력을 손에 넣는 길이다."같은 류의 대사들이 가끔씩 검투사의 칼보다 크게 움찔거리니까...

 

대표팀 감독
- 허정무 감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이것 한 가지는 꼭 기억하고 평가해줘야 할 것 같다. '국내파 최초의 16강 감독'으로가 아닌 국내파 감독 최초로 '월드컵을 즐기자', 패한 뒤에도 '그대들과 함께 해서 행복했다'고 말한 감독으로 말이다. 때로 결과는 모든 것을 증명해주지만, 결과를 모두 지켜본 뒤에 하는 말은 그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에겐 그저 하기 좋은 말에 불과하다.

 

어떤 희망
- "더 나빠질 게 없는 한국, 얼마나 희망적인 사회인가?"라던 김용철(변호사)의 말이 가슴에 확 와 닿는다. 젠장, 부인할 수 없어 희망적이다.

 

프레임 효과
- 인쇄술, 라디오, 복사기, 카세트테이프가 그러했듯 매체의 특성이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릇 안에 담겨지기 위해서는 내용물의 물성이 변해야만 하고, 그 변화는 처음엔 외형으로 오지만 나중엔 근본적인 변화까지 불러온다.

 

일생일업
- 권중달 선생이 지난달 사마광의 "자치통감" 완역본을 출간했다. 사실 출판계나 인문학 분야에서 올해의 10대 사건을 꼽는다면 첫손에 꼽을 만한 업적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원산지인 중국을 제외하면 근대 이후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 번역한 거의 최초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세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권중달 선생의 "자치통감" 완역 작업에 경의를 표한다.

 

* 문제는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에 앞서 갖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지만 너무 비싸다는 것이 첫째 문제고, 둘째는 언제 32권에 이르는 이 책을 언제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그리고 셋째, 나는 송나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사마천은 한 무제 사람이고, 사마광은 송나라 신종 때 사람이므로 남송과 북송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도 읽어볼 만한 책이 마땅치 않다. 흐얼....

 

블랙리스트 1
- 코미디언이자 라디오 시사토크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 중인 김미화 씨가 친정 같이 여기는 KBS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하는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 아니냐는 내용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러자 KBS는 김미화 씨에 대한 법적 조치를 운운하며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부인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총리실에서 민간인을 두 달여 동안 사찰하면서 그가 공무원인 줄 알았던 사회, 80년대 수많은 운동권을 양산했던 금서가 사실 목록조차 없이 주먹구구로 운영되었던 나라, 권력의 비선 라인이라 하는 '영포회'의 회원명부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문서만 없는 거 아니냔 거다. 즉석에서 "쟤는 안돼!", 한 마디가 더 쉬웠을 테니까.

 

KBS는 기자회견까지 자청하며 "블랙리스트 같은 건 없다"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문제는 기자회견이 끝나고 질문도 받지 않고 일어서며 김미화 씨가 알아서 잘 처신할 거라고 말했다는 거다. 어쩐지 천안함 합동조사단 발표 같이 들린다. "오빠 믿지?"하고 말이다. 물론 "오빠 밉다!"

 

블랙리스트 2
- 1947년 11월 24일과 25일에 걸쳐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영화제작자협회 회의에서는 좌파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되던 10명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할리우드에서 영구히 추방하자는 ‘월도프 선언’이 채택되었다. 선언의 일부를 옮겨보면 “우리는 아무런 보상없이 우리가 고용하고 있는 그들을 해고 내지 정직시킬 것이며, 모욕죄에 대한 고소가 취하되거나 무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맹세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재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3
- 최근 KBS의 블랙리스트 파문을 보면서 나는 문득 마르크스의 말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란 말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참 수도 없이, 정말 지겹게 반복된다. 희비극을 떠나서.

 

어른들의 충고
- 나는 '고운(고등학생운동권)' 출신이다. 가끔 고등학생 시위 뉴스를 보면 가슴이 짜안하다. 그때 어른들이 내게 가장 많이 한 충고는 그런 건 어른 되어서 해도 늦지 않단 거였다. 지금 내가 해줄 말은? 그 어른들이 하지 않아서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청소년의 '섹스'
- 아이들이 아이들끼리 하는 건 어찌보면 정상적인 성장과정이다. 물론 적당한 성교육과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지만 청소년들의 '섹스'에 있어 정말 큰 문제는 청소년들끼리의 섹스가 아니라 자꾸만 다큰 어른들이 자꾸만 아이들과 섹스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안하무인
- 한국사회가 얼마나 학연, 지연, 혈연에 연연하는지는 노태우 전 대통령 내외가 잘 보여준다. 추징금 280억은 돈이 없어 낼 수 없어도 전직 대통령의 영부인께서는 자신의 모교에 쾌히 5천만원을 기부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건, 전직이든 현직이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 법이나 국민 앞에서 얼마나 안하무인하는 자들인가 하는 것이다.

 

자이니치
-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방법으로 한국대표나 일본귀화도 있지 않냐는 물음에 대해 "내게 있어 국가대표는 돈이 아니라 신념을 확인하는 무대다”라고 정대세는 답했다. 그 답변이 촌스럽게 들리는 시대이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서재의 풍경
- 나는 김종익 씨(총리실 민간인 사찰 피해자)가 평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책을 많이 읽고, 즐겨읽는 이에게 보내는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존경이다. 그러나 상대가 어떤 책을 읽든 그것이 민간인 사찰의 빌미가 될 수 없다는 건 독서량과 무관한 상식이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평범'한 사람도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어떤 책을 가지고 있고, 읽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평범과 비범은 독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구분된다. 총리실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 씨의 서재에 꽂힌 책들이 민간인 사업가가 읽을 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사람들의 지적에 대해 굳이 한 마디 하자면?

 

"그래서 당신들보고 쇠대가리 꼴 보수라고 부르는 거요."

 

고양이 살해 사건을 통해 본 대한민국
- "고양이 똥을 안 치우면 벌금 30만원,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이면 벌금 20만원" 이거 어느 나라 이야기 같아요? 정답은? 대~한~민~국!

 

하인리히의 법칙
- 1930년대 미국의 보험회사 감독관이었던 하인리히는 노동재해들을 조사해 중상자 1명이 나온 사고는 같은 원인으로 이전에 경상자 29명, 잠재적 상해자 300명이 있었다는 통계법칙을 만들었다. 이 법칙을 집권 3년째를 맞이한 MB정권으로 유추해보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뒤에 있을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두려워진다.

 

심각한 질문
- 누군가 인생을 잘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다시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가 언제냐'고 묻는 것이다. 당신에게 '다시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언제인가?' 무엇을? 왜?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밑도 끝도 없이 묻는다.

 

기업문화
- '삼성'이 알아도 못 고치는 게 있다. '애플'은 팬덤(fandom)을 파는데, '삼성'은 계속 스펙(spec)을 팔고 있다는 거다. 그 점에선 '소니'도 마찬가지였다. 음질은 언제나 애플의 아이팟 보다 소니의 워크맨이 더 좋았으니까. 그래서 문화가 무서운 거다.

 

하드리아누스의 방벽
- 로마제정의 붕괴는 로마제국의 최대판도를 보여주는 상징물인 '하드리아누스의 방벽'부터란 말이 있다. 역사 속의 모든 제국은 외부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는 법이다.

 

기득권의 무서움
- 역사적으로 기득권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보여주는 사례는 백년전쟁 당시 영국의 평민을 기반으로 구성된 궁수대(장궁)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도 프랑스 귀족들이 결코 무거운 중장갑옷을 벗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권력 기반이 봉건기사제도에 있었기에 그들은 평민들을 무장시키고, 훈련하여 전쟁터에 내보낼 바에는 차라리 자신들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학살당하는 길을 선택했다.

 

가장 유명한 질문
- 1947년 11월 ‘의회반미활동위원회(HUAC)’가 연예산업에 대한 일련의 재조사에 착수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위원회에 불려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공산당인가? 아니면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있는가?”

 

교훈과 팩트
- 글쓰기에 있어 독자에게 교훈과 팩트 사이에서 어느 한 가지만을 줄 수밖에 없다면 나는 아무 고민없이 팩트를 고를 것이다. 만약 왜? 고민없이?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주 많이 고민한 다음에도 여전히 팩트를 고를 테니까요라고 답할 것이다. 

 

루저와 엘리트의 차이
- 지그문트 바우만은 노동의 미적가치가 소비자사회에서 계층을 구분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직업과 취미,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의 구분을 지우고 노동 자체를 오락으로 끌어올리는 다시 말해 일중독자들이 가장 성공한 엘리트들이란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새로운 빈곤"에서 제기하는 주장의 핵심 - '노동을 놀이화하는 엘리트들의 태도'는 다른 한 편으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부에게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휴식할 만한 여유를 사라고 충고하는 자본가의 충고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을 무(無)의 가장 큰 효용이 유(有)에 있다는 노자식 해석으로 접근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엘리트들의 한 부류는 바로 '루저(loser)'들이다. 물론 루저들은 반대의 의미에서 그렇게 살도록 강제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마피아의 지혜
- "가끔 바보들로 부터 배울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과 토론은 금물이다, 사랑 보다는 호기심으로 처녀성을 잃는 경우가 더 많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여자를 찾아 가라, 친구는 수 천명도 부족하다. 적은 한 명도 많다"란 명언을 남긴 사람은  '알 카포네'였다. 물론 말하긴 쉽다. 만약 알 카포네가 자신의 말대로 실천했다면 자신의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부잣집 혼사
- 한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점점더 근대유럽의 왕가를 닮아가고 있다. 네트워크 이론가들은 6단계만 거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연결된다고 하지만 한국의 정재계는 그들만의 네트워크로 단단한 피의 결속을 이룬다 이른바 혼맥으로 만들어진 '수구반동혈연복합체의 탄생!' MB의 사돈기업인 효성의 재벌3세들이 회사자금을 유용해 불법적으로 해외에서 부동산을 매입했지만 조중동은 굳게 입을 다문다. 과학전문저널 네이처에서 합조단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놓고 바보 같은 분석이라며, 조작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지만 재벌들이 장악한 언론들은 단단한 침묵의 연대를 유지한다.

 

초고층빌딩의 저주
- 성남시의 모라토리엄 선언을 바라보며, 문득 '세계최고층빌딩의 저주'란 말이 떠올랐다. 국가적 자부심이든 도시의 자존심이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세계최고층빌딩 건설 모뉴먼트 경쟁을 벌이는데, 이처럼 세계최고층빌딩을 짓고 나면 반드시 경제위기를 경험한다는 것이 '세계최고층빌딩의 저주'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거대건축물을 사랑한다. 이것은 '권불십년'에 대한 권력자들의 공포를 반영한다. 시대를 떠나 역사로 남은 건축물의 숨겨진 의미는 공개적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었던 자들의 '거대한 무덤(봉분)'이다. MB는 4대강을 파헤치는 것으로 강바닥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어쩌면 그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다.

 

위험한 논리
- 역사학자 박지향이 <조선일보>에 쓴 칼럼 "진보 교육감, 아이들 대신 세상 살아줄 건가"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1970~80년대 한국문학에서 명작이 쏟아진 이유가 결과적으로 군사독재 덕분이었다는 말과 같다. 이런 논리의 연장에 있는 것이 박정희가 개발독재한 덕분에 경제개발됐다는 것이고, 이런 논리는 필연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독재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그와 같은 논리적 확장의 재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개발이 이루어졌으니 '친일파 만세', 이들을 척결하지 않고 재기용한 '이승만 만세'란 말이 된다.

 

으름장
- 1년 전 정부는 비정규직보호법이 실시되면 해고대란이 빚어질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보호법 실시 1년이 흐른 현재 10명 중 8명은 고용상태라 한다. 기업이 사회복지를 위해 이들을 고용하고 있을까? 이 법안의 처리과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비정규직이 단지 우리 사회가 만든 식민지이자 게토일 뿐이라는 증거다.

 

목숨을 건 선택
- 임신한 뒤 유방암 발병 사실을 알게 된 한 여성 변호사가 태중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아기를 출산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기가 태어난지 10주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런 선택 앞에서는 그 어떤 가치판단이나 이성적 평결 보다도 먼저 마음이 알아서 묵직해지고 숙연해진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식 작명법
-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은 사물의 이름을 지을 때 그와 밀접한 특성, 품성을 연관져 짓는데, 예를 들어 인디언들에게 4월은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이다. 이것을 안상수 신임 당대표의 병역기피의혹에 빗대보면 어떤 이름이 나올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자!

 

세계화의 낙수효과(Trickle Down)
- 신자유주의자들은 일단 감세 정책 등으로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그 과정을 통해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가계에까지 미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낙수효과'가 중소기업이나 가계에까지 미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다소 필요하니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의 지배구조'상 상부구조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배부를 때까지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란 결국 일국 차원의 낙수효과를 세계적 차원으로 변환하는 것인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하되, 노동의 이동은 통제하는 시스템이지만 예외적으로 여성의 '결혼을 통한 이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인 까닭도 어찌보면 이 같은 낙수효과의 결과일지 모른다.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하되, 상대적으로 노동의 이동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우엔 '국제결혼'의 형식을 빌려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그러나 이것을 '결혼=사랑'의 개념이 아니라 '결혼 = 개호노동, 가내노동'의 개념으로 파악해보면, 국제결혼이란 한 측면에서 자국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여성 노동을 해외의 개도국이나 후진국 여성을 수입하는 형태의 다른 말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구매력이 높은 국가의 남성(혹은 가정)이 마치 도시와 농촌의 성비처럼 더 많은 여성(의 노동)을 소비한 결과, 구매력이 낮은 지역에서는 자신들보다 못한 지역(국가)의 여성(노동력)들을 수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베트남 출신의 한 여성이 한국으로 시집온지 일주일만에 남편에게 맞아죽는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물론 한 남성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여성(의 노동)이 '매매혼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폐해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사건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들이 주장하는 '낙수효과를 통한 부의 재분배' 효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증거이다.

 


모토


- 박정희 정부의 모토를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하면 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죽이면 된다', 노태우는 '속이면 된다'쯤으로 정리가능할 것 같은데, 김영삼은 '밀어부치면 된다', 김대중은 '퍼주면 된다', 노무현은 '시장에 맡기면 된다'쯤 될까? 이명박 정부에 대해선 뭐라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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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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