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계급론 - 토르스타인 베블런 |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2005)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2005년 초판을 손에 쥐고 있는 감흥은 약간 남다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나온 것은 지난 1978년 “정수용”이 옮기고, “광민사”에서 펴낸 것이었다. 출간되고 얼마 뒤 이 책은 금서(禁書)가 되었고, 1987년 해금되기까지 법적으로는 읽는 것이 금지 당했다. 오늘날엔 경제학 전공자들보다는 인문 ․ 사회학 전공자들에게 더 많이 읽히는 고전이 금서가 될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었다. 내가 너무 둔하여 혹시 이 책에서 금지될 만한 어떤 사유(思惟)들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존 K. 갤브레이스는 『갤브레이스가 들려 주는 경제학의 역사』(2002년)에서 베블런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노르웨이 이민 가정의 후손이었던 베블런은 부유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유한계급론』에서 그가 유한계급(leisure class)에 대해 보이고 있는 냉소적인 독설과 상관없이 나름대로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다만 그의 부친인 토마스 베블런은 매우 검소한 사람으로 자식을 이웃한 칼턴 칼리지에 입학시키는데, 이것은 자식의 하숙비를 절약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한다. 베블런이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과시적 여가” 활동에 대해 보이는 냉소적인 태도는 이런 그의 경험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한계급론』2005년판은 1980년판에 실렸던 존 K. 갤브레이스의 서문이 빠진 대신, 앨런 울프의 “『유한계급론』의 현대적 의미”가 새롭게 수록되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 계급을 타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혁명적이기 보다는 훨씬 냉소적이었던 베블런은 부자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파하고자 했다. 적어도 19세기부터 부자들은 자신들을 가치 있는 계급으로 믿기 시작했고 또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은 - 가난한 자들은 소유하지 못했다고 믿은 어떤 - 대단한 가치는 근검절약이었다. <앨런 울프, 본문 8쪽>

 

위와 같은 이야기는 베블런과 동시대를 살았던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오직 경건한 신앙심만으로 신의 영광을 추구했던 프로테스탄트들이 자본주의 혁명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음을 묘파한 이래 지속된 이데올로기였다. 베블런과 베버 보다 앞선 세대였던 고전파 경제학자 로버트 맬더스(Robert Malthus)는 그의 대표작인『인구론』에서 “빈민에게는 청결함을 권고하지 말고 그 반대의 습관을 기르도록 장려해야 한다. 도시의 거리는 좀 더 좁게 만들고 집집마다 더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게 하고 전염병이 잘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베버의 관점을 맬더스의 그것과 일치시킬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자본가 계급이 자신들이 누리는 부의 원천을 신의 은총과 동일시하고, 빈민 계급을 선천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구제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계급으로 취급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자본가 계급, 그의 용어를 빌자면 풍요로운 소비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유한계급”의 이런 근거 없는 도덕적 자부심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블런은 경제학자로 분류되지만 경제학자 계보 가운데 특정 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특이한 인물이다. 『유한계급론』에서도 역시 경제학적 방법론 보다는 사회학적인 연구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 경제학 전공자들보다 사회학 전공자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찾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베블런은 종종 마르크스주의자로 오인되곤 했는데, 그 까닭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유한계급제도는 봉건시대 유럽이나 일본처럼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발달했던 야만문화에서 가장 잘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는 계급간의 구별이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러한 계급적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요인이었다. <본문 23쪽>

 

문화의 진화과정에서 유한계급제도와 소유권제도의 발생시점은 일치한다. 이 두 제도는 경제력이 동일한 상황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발생시점 역시 필연적으로 일치될 수밖에 없다. <본문 43쪽>

 

『유한계급론』은 제1장 「유한계급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해 제14장 「금력과시문화를 표현하는 고등학문」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당대 유한계급의 기원과 현시적 소비태도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유한계급을 분석하기 위해 주변의 여러 학문들 - 인류학·역사학·심리학 - 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론을 불러들이고 있는데, 이는 현재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방법론과 매우 흡사하다. 어떤 의미에서든 베블런을 문화연구의 선구자로 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이 부분에 더해 베블런이 노동계급과 여성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막 여성 참정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이었던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가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에 대한 소유권은 좀더 원시적인 야만문화에서 여성 포로나 노예를 강탈하면서 생겨난 것이 확실하다. 여자를 강탈하여 전유하게 된 최초의 이유는 여자들이 전리품으로 유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리품인 여자를 적으로부터 강탈하는 관행은 소유와 결혼을 동일시하는 관례를 낳았고, 그로부터 남성이 가부장 역할을 하는 가부장적인 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여자들을 비롯한 다른 포로들이나 하층민들까지 노예화되는 과정, 그리고 적으로부터 강탈해온 여자들 이외의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까지 소유 - 결혼 관례가 확대되는 과정을 동반했다. <본문 44쪽>

 

베블런은 유한계급을 분석하면서 이들의 행동 양식이 본질적으로는 과거 야만 시대의 약탈문화로부터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더 이상 공동체의 일상적인 삶이 약탈 활동에 의존하지 않게 된 뒤로도 축적된 금전이 약탈 활동의 명예와 우월함, 성공을 대표하는 인습적인 지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어떤 위치에 서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일정한 부를 축적해야 하며, 명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를 획득하고 축적한 것 못지않은 소비가 필요해진다. 베블런은 이를 "금력과시문화(pecuniary culture)"라 불렀다. 그러나 재화를 개인의 단독 소유물로 인정하는 모든 사회에서 한 개인이 정신적 안정감,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친숙한 부류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약탈과 사냥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이 인습적인 지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약탈이 아닌 생산 활동, 육체노동은 상대적으로 비천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되었고, 여성과 여성의 활동 역시 마찬가지 취급을 받게 된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서준식의 생각』에서 “일찍부터 땀 흘리며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깨우치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던 영세한 가내공장 직공들은 거의가 내일에 대한 희망도 인생설계도 없는 떠돌이들이었다. 그들은 월급을 받으면 그것을 며칠 사이에 술과 오입질에 탕진해 버렸고 월초의 일손 부족은 늘 악몽처럼 아버지를 괴롭혔다. 뼈가 다 굵은 아들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애절한 눈길을 외면하지 못했던 나는 언제나 알아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지만 형이나 아우는 잽싸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한나절을 보낸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정말 고마워하시고 따뜻한 치하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진짜 기대는, 고된 육체노동을 묵묵히 견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쳐 버린 아들들에게 있다는 것을 어슴푸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육’이 ‘입’이나 ‘잔머리’에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 ‘근육’을 단련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고 주변으로 내몰리는 사회에 대한 회의를 떨쳐내지도 못한 채 나는 고등학교 1학년말부터 근육단련 대신 지성 쌓기를 시도했다. 왠지 올바른 길을 포기하고 나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것만 같았던 그때의 쓴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서준식(2003년), 「운동가의 글쓰기를 생각하며」, 『서준식의 생각』, 야간비행> 중에서

 

베블런은 남자들(유한계급)이 존경을 얻고 유지하려면 단순히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를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 낭비에 가까운 풍요로운 소비는 우아하고 고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베블런이 주장하는 유한계급의 여가는 단순한 게으름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無爲)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비생산적인 용도로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물질적 소비를 동반한 과시적인 소비를 통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훌륭한 예의범절은 인간의 탁월함, 가치 있는 영혼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방편에서 전도되어 허례허식으로 흐를수록 더욱 높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누리는 유한계급의 상징이 된다.

 

『유한계급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IMF한파가 채 가시기 전이었던 2000년 2월 18일자 <한국일보>는 대우경제연구소의 「소득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소비의 왜곡현상」란 보고서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고소득층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소비를 하며, 중산층은 이들을 「모방」하고 저소득층은 아예 「자포자기」심정으로 과소비 대열에 끼어든다.”고 보도하고 있다. 베블런은 필요(need)와 욕구(want)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를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보석이다. 보석이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그것이 결국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는 드비어스(De Beers)의 광고는 단지 투명하고 반짝이는 돌멩이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가장 로맨틱한 사랑의 상징(혼인 예물)으로 만들었다. 다이아몬드는 과시적 낭비라는 명예로운 목적에 이바지함으로써 아름다운 물건(명품)이란 명성을 획득한다.

 

이는 다시 명품(名品) 소위 “럭셔리 신드롬(luxury syndrome)”으로 이어진다. 베블런은 제5장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금력」에서 현대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육체적 안락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과시적 소비에 지출하는 비용을 늘리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아니라 인습적인 체면치레의 기준에 맞추어 소비하는 재화의 양과 질을 높이려는 욕망에 있다.”고 말한다. 공동체가 인정하는 명예롭고 품위 있는 생활양식의 일반적인 수준이 최상류계급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명품 소비 열풍은 이렇듯 자기 자신을 - 실제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지위의 인간으로 -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다. 개념미술가(conceptual art) 제니 홀저는 과시적 소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인 도시의 한 전광판에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줘)”란 문구를 내보내는 실험적 작품을 전시한다. 홀저는 베블런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삶, 그 핵심에 놓인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필요(need)’가 아닌 ‘욕망(want)’이라고 생각했다. 베블런은 “습관적으로 비싼 물건을 찾게 되고 아름다움과 명성을 습관적으로 동일시할수록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게 평가되지 않기에 이른다.”고 말한다. 압구정동의 모 백화점에서 가격을 올리자 물건이 좀더 잘 팔리더라는 일화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경제학자들,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리카도와 같은 고전학파나 시카고학파 같은 신고전학파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합리적인 이기주의자로 간주하고, 이런 원리에 따라 소비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베블런은 고전적 경제학자들의 가정에 반하는 논리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의 원인은 단시 필요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과시하여 현대 대중사회에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자랑하고 싶은 이들에 의해 과시적으로 일어난다. 그들은 소비,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시간이든 낭비를 일삼는데, 이런 과시적 소비는 유한계급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다시금 모방된다. 이런 현상을 오늘날 우리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 - “값이 비쌀수록 호사품의 가치는 커진다.”- 라 부른다. 즉,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합리적인 소비 행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20세기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분명 사회주의 체제의 출현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20세기를 러시아 10월 혁명과 함께 출발해 지난 1991년 무렵 구소 연방의 해체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으로 지난 18세기 무렵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동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며 이것을 가능하도록 한 토대엔 인간의 욕망이 잠재해 있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안락함의 기억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그 기억에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적 가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인류는 이미 단일 종파, 단일 종교로 통합되었는데,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물신(物神)”이다.

 

베블런은 인간의 소비 혹은 욕망을 합리적인 것으로 단정한 고전학파나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에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제이론을 완전히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블런의 비판이 날카롭긴 했으나 그가 경제학에 새로운 체계를 세운 것은 아니었고, 마크르스처럼 유한(자본가)계급에 대해 혁명을 주창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가 베블런의 공적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가 유한계급에 대해 던졌던 냉소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니까 말이다. 베블런의 지적들은 이후 정치적인 측면에서 C.W.밀즈(『파워엘리트』), 사회학적인 측면에선 피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선 제임스 트위첼(『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럭셔리 신드롬』)에 의해 오늘날 좀더 세부적인 측면으로 분화되어 풍요롭게 계승되고 있다.

 

『유한계급론』의 2005년판 역자는 베블런의 비판을 “슬픈 냉소”라 말한다. 나는 지난 한 학기 동안 “문화”를 공부하면서 “문화연구”란 학문이 현실 사회를 변화시킬 대안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계몽의 기획)을 모색하는 학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어야 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물론, 본질적으로는 변화가 없다손 치더라도) 변하는데, 학문하는 자의 발걸음은 이리도 느리기만 한 현실 자체가 사회와 시대가 우리에게 보내는 냉소는 아닐까 라는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친구여! 바로 보마!”란 다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느려터진 한 인간의 세상사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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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깃발 없는 자들의 고독한 촛불을 넘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시위와 집회가 다시 출현하리란 예상은 누구나 했지만 100일도 안 된 시점에서 이처럼 거대한 촛불의 물결이 만들어지리라고는 누구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서울 시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수차가 뿜어대는 최루액에 범벅이 되어 도망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전경 방패에 내리 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헌법 제1조”를 노래하고 컨테이너 장벽을 ‘명박산성’이라 조소하지만 만리장성 같은 장벽, 체제권력을 넘지 못하고 돌아서는 무기력을 반복하는 두려움이었을까. 촛불의 의미는, 촛불 그 이후엔 무엇이 있을까.

대중지성, 촛불시위는 웹2.0의 돌연한 사건인가
“위대한 피플 파워”란 국제앰네스티 조사관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촛불시위에 대한 찬사는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촛불시위 이후 대중은 다중, 대중지성 등 수많은 방식으로 호명된다. 촛불시위가 최고조에 달할 무렵 여러 매체들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앞세워 ‘촛불정국’을 분석하며 “이제 한국 사회의 시대 구분은 촛불 시위 이전과 이후로 나눠 봐야 한다”거나 “현재의 큰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대중들조차 엄청난 역사적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쇠고기 사태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말한다. 인터넷 공간의 웹2.0 민주화 세대란 뉴미디어 담론과 중․고등학생들의 시위참여에 주목해 또 하나의 신세대 담론이 등장한다. 이른바 새로운 주체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현재의 촛불 시위를 과거와 다른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은 본의 아니게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다. 그것은 이명박 정부를 이전의 정부와는 다른 정부, 6․10항쟁 이후 지속되어온 87년 체제와 다른 정부로 본다는 점에서 보수세력이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 이른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환상을 대중에게 심어준다. 실제로 달라진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손쉬운 단절을 통해 촛불시위 이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환상 속에서 다시 5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것, 인터넷을 통해 시위가 조직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쌓인 컨테이너 장벽 역시 지난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 APEC 정상회의 장소였던 부산 벡스코 회의장 앞에 어청수 당시 부산경찰청장이 설치했던 전례가 있었다. 또한 경찰의 강경진압을 넘어 군대까지 동원되었던 평택 사태가 이미 있었다. 심지어 브레히트의 시를 빌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체하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라”라는 언론의 비판1)까지도, 지난 정권에 대해 이미 나왔던 비판2)의 반복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부터 한미FTA에 이르는 MB노믹스는 새로울 게 없다. 우리가 ‘세계화’라는 말을 듣기 전부터 정권을 바꿔가며 줄기차게 추진되었던 정책들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이었던 셈이다. 87년 6월 항쟁은 결과적으로 체제의 근본을 흔들지 못한 불완전한 타협의 소산이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사회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사회적 권력이 아무 탈 없이 보존”되고, “다른 계급들을 계속 착취할 수 있고 소유”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빠뜨린 결과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보수화 흐름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87년 이후 계속된 현상이다. 87년 이후 대중이 보수와 개량에 동의했건, 그렇지 않든 시민권력이 회복해 국가권력에 위임했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위축되었다. 노무현 정부에 와서는 모든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대통령이 고백해야할 만큼 “정치적 무권리 상태”3)가 극도로 심화되었다. 이 같은 인식 없이 촛불시위대를 갑작스럽게 출현한 새로운 시민으로 규정하는 것은 ‘기억 속의 민주화’에만 집착하면서 퇴행의 길을 밟아온 지식인, 시민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 없이 정권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졌다고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

‘순수한’ 시민을 넘어 ‘정치적’ 시민으로
이번 촛불시위의 긍정적인 특징은 이른바 ‘깃발 없는 자’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라 할 만한 다양한 시위주체들의 자율성과 문화적 이벤트, 자유로운 토론이라는 카니발적 속성에 있었다. 지배 권력과 보수언론들은 촛불시위의 정치적 배후설을 주장하다가 시민들의 분노에 직면한 뒤부터는 도리어 시민들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보수언론들의 이런 규정과 달리 촛불시위는 애초부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치적인 시민들의 시위였다. 그것이 애초부터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권력의 환수 요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탈정치적인 시위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배권력과 보수언론은 ‘순수한 시민’을 끝없이 강조함으로써 시위 주체들의 정치적 지향과 언어를 이간했고, 궁극적으로는 자기조직화를 통해 사회공동체와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시민직접행동이란 가장 정치적인 행위의 한 가운데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은 ‘순수한’ 시민이란 거대한 강박에 사지가 묶여버렸다.

사회운동은 유동적인 사회현상이다. 그래서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어렵고 동원국면이 지나면 와해된다. 사회운동은 특수한 과제가 있는 조직으로 바뀌거나 기존 정당에 흡수된다. 그럴 경우, 뒤를 잇는 조직이나 정당이 원래 운동의 가치와 목표에서 나온 선택되고 변화된 자극을 넘겨받을 경우에만 ‘효과’가 나타난다. 사회운동은 조직으로 가는 문지방을 넘어서지 않으면, 복잡하게 얽힌 소집단이나 하부문화적인 생활 방식 혹은 특수한 세대의 기억공동체 속으로 용해된다.4)


어떤 이들은 촛불시위를 서구의 68혁명에 비유한다. 일부에서 대통령 탄핵 같은 구호가 등장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검역주권 수호를 통한 국익사수, 경찰에 대한 시민보호, 행정고시 절차 준수 같은 법질서, 기존 패러다임의 준수를 요구한 측면이 더욱 강했다. 세계화라는 국가를 초월한 패러다임 전환의 충격에 장기간 노출되었던 대중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변화된 패러다임은 국가권력이 초국가적 자본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주었다. 초국가적 자본의 공세에 직면한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은 국가권력과 재벌이라는 국내자본의 위기 혹은 호응을 바라보며 혼미를 거듭했다. 거듭되는 혼돈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펼쳐놓은 사적 욕망의 회오리는 민주화운동기를 통해 구축되었던 개인의 사회적 연대망을 파괴했고, 시민들 스스로를 자가 발전하는 펀드매니저로 재사회화(resocialization)해 나갔다. ‘금모으기 운동’ 이후 대중이 자발 혹은 동원의 형태로 등장한 사건들 -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등 - 은 외환위기를 통해 확인된 국가(권력)의 취약함에 대한 반동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드러난 것은 ‘지식정보사회강국’이든, ‘동북아중심국가’이든 초국가적 자본의 상위를 점하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대중의 위기의식이었다. 중산층의 씨가 마르는 상황에서 이른바 ‘대박’, ‘부자되기’를 통해 삶의 수준을 유지하고 싶은 중산층 서민들의 욕망이 그 배후에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정치적 발언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대신 대중을 사적 욕망의 실현이라는 개별화된 그물망에 가둔다. 신자유주의의 변화된 패러다임은 자본이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 대신 사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노동을 수행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강박을 심어준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대중으로 하여금 극도의 긴장 속에서 소비적 욕망의 추구를 자아실현 욕구로, 자본이 강요하는 업무능력강화를 자기계발로 착각하면서 자신과 무한경쟁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이처럼 더욱 촘촘하고 정교해진 사회적 그물망은 시청 앞 광장을 카니발 광장으로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가두리 양식장으로 만든다.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서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다던 대통령이 초등학생까지 닭장차에 가둬버릴 만큼 소통두절 상황이란 사실이 확인되면서 인터넷에는 촛불시위에 대한 비관적 예측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발언의 자유를 허용하는 대신, 국가권력은 시민들이 체제의 패러다임을 감히 전환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으로 촛불은 끝난 것일까. 사제단이 승리를 선언한 뒤, 광우병대책회의가 주최하는 촛불문화제 현장에는 이제 문화제는 그만하고, 새로운 투쟁에 나서자며 격앙된 목소리로 항의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비록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대중의 숫자는 크게 줄었지만 이것으로 촛불이 꺼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립이 아닌 소통과 연대의 촛불
촛불시위의 승리와 패배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촛불시위는 다소간의 역기능이 있다 할지라도 인터넷이란 소통의 광장이 대중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정부수립 60주년이 되는 오늘, 대의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이란 시스템 안에서 국가권력과 시민권력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정치적 광장들이 존재하는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커다란 의문을 남겼다. 시민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촛불의 행렬을 만들어냈고, 시위가 계속될수록 민주화 이후 20년의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제도정치의 한계가 노출되었다. 국가권력과 제도정치의 실상이 대중의 투쟁에 의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지고, 대중의 통찰이 놀라운 모습으로 표출되면서 시민의 축제, 새로운 문화로 찬미되었던 촛불시위는 갖가지 방식으로 규탄 받는다. 그사이 정치는 국회의사당 안으로 슬그머니 환수되었다.

지배계급은 대중이 보수적일 때 그들의 우둔함을 두려워하고, 대중이 혁명적일 때는 그들이 보여주는 통찰력을 두려워한다. 시민대중은 거리에서 직접행동을 통해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고, 경계를 넘어 확장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배질서가 교묘히 직조해둔 ‘욕망의 배치’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대중 역시 체제의 외부를 상상할 수 있는 통찰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현실정치는 우리가 무엇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따라 달리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순수한’ 시민이란 허구 속에 갇혀있는 한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적 제도에 머무를 뿐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촛불을 들었지만, 그 촛불은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 사회적인 개인의 것, 고립이 아닌 소통과 연대의 촛불이다. 깃발 없는 자들의 고독한 촛불을 넘어 지금 우리는 새로운 깃발을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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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형철, 「브레히트가 대통령에게」, <한겨레21>, 2008.06.12.(제714호)
http://h21.hani.co.kr/section-021158000/2008/06/021158000200806120714039.html

2) 강양구, 「유시민 의원, 차라리 국민을 '새로' 뽑지 그래! 」, <프레시안>, (2007. 07. 13)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0713155430&s_menu=정치

3) 그들 자신의 이해가 자신들에게 자기 통치라는 위험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 국내에 안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부르주아 의회가 조용해져야 한다는 것, 자신들의 사회적 권력이 아무 탈 없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 부르주아 개개인은, 자기 계급이 다른 계급들과 나란히 매한가지의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빠져 있어야만 다른 계급들을 계속 착취할 수 있고 소유와 가족과 종교와 질서를 별 탈 없이 계속 만끽할 수 있다는 것; 자신들의 머리에서 왕관이 벗겨져야만, 또 자신들을 지켜줄 칼이 동시에 다모클레스의 칼이 되어 자신들 자신의 머리 위에 있어야만 자신들의 돈주머니가 구출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 칼 마르크스, 김태호 옮김(2002).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2』, 332쪽.

4) 잉그리트 길혀 홀타이, 정대성 옮김(2006), 『68운동』, 들녘, 175-176쪽


출처 : <실천문학> 2008년 가을호(통권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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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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