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눈: 비극의 중심에 있지 않은 자의 한계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의 영화 <호랑이와 눈(The Tiger and the Snow, 2005)>이 때늦게 개봉된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뒤를 잇는 두 번째 감동”이란 홍보 문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생은 아름다워>와 닮은 꼴 영화인 <호랑이와 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지난해 모 영화잡지의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의 100대 영화’ 중 18위에 당당히 랭크될 만큼 국내 영화팬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로베르토 베니니는 일부 영화 마니아들에게만 인정받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코미디 영화감독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그에게 기대 이상의 명성과 성공을 가져다주었고, 그 결실이 너무 달콤했던 탓인지 이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영화 <피노키오>가 실패하면서 베니니는 또다시 가장 비참한 기억의 현장에서 휴머니티와 사랑의 달콤함을 환기시키는 영화 <호랑이와 눈>으로 돌아왔다.

<호랑이와 눈>은 요설(饒舌)과 환상, 교묘하게 배치된 우연들이 어우러지는 베니니의 영화  미학이 잘 드러나고 있는 영화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 많은’ 대사에도 불구하고, 베니니의 요설에 질리지 않는 것은 그의 영화가 극적 아이러니들로 포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위장’, ‘은폐’를 뜻하는 ‘에이로네이아 eironeia’란 어원을 가진 아이러니는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난 진술이 실제의 속뜻과 다른 의미를 지니며, 표면과 내면이 서로 괴리돼 긴장을 유발하는 효과를 의미한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극적 아이러니’, ‘비극적 아이러니’라는 것은 배우의 연기나 대사, 때로 극 자체가 표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극중 배우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함으로써 서로 모순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거나 확인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대개의 극작가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상황 자체를 눈치 챌 수 있도록 한다. 베니니의 코미디와 영화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바로 이 같은 비극적 아이러니의 세계다. 때때로 그의 영화들은 텍스트를 넘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가 개봉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광주의 기억이 새롭게 환기됐다. 만약 '1980년 광주'를 코미디로 만들려 한다면 어떤 반응이 일 것인가? 불가능하다고? 그렇다. 현재로서 그건 불가능하다. 학살의 기획자이자 총책임자가 29만 원에 불과한 통장 잔고에도 불구하고 든든한 후원자들을 대동한 채 골프장을 찾는 나라, 현역 정치인들이 철마다 인사를 여쭙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재현되는 '민주공화국'에서 광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니니는 어떻게 역사가 남긴 가장 뼈아픈 기억이자 비극인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를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하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었고, 사회적 의미가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인 조건 외에도 <인생은 아름다워>의 비극적 아이러니가 지닌 힘은 인종학살의 비정한 현실 속에서도 다섯 살 난 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 상황을 즐거운 게임이라 말하는 베니니의 낙관성에서 나온다. 비록 주인공의 아들은 사실을 모르지만 관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의 힘이 홀로코스트란 인류사 최악의 비극을 코미디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게 했다.

<호랑이와 눈>은 우리 시대 또 하나의 비극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주요 배경으로 삼았다. 영화의 도입부는 주인공 아틸리오(로베르토 베니니)가 밤마다 반복하는 꿈속의 결혼 장면으로 시작된다. 베니니의 영화는 때때로 데칼코마니처럼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놓여 이는 우연들이 교묘한 대칭을 이루고 반복되면서 희극과 비극의 가교 구실을 하도록 한다. 마르크스의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결혼식 장면에 등장하는 아름답게 빛나는 로마의 달빛이 있다면, 영화 중반부에서 주인공은 친구 파드(장르노)와 함께 포화가 번뜩이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바그다드의 달빛을 바라본다. 또 두 딸 아이와 함께 서커스단에서 낙타를 타는 즐거운 장면은 사랑하는 여인 비토리아를 위해 약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도 반복된다.




아틸리오는 이라크 출신의 시인 친구와 함께 로마에서의 꿈처럼 낭만적인 바그다드의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두 사람이 같은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생각과 감상도 같은 것이었을까? 아틸리오가 아내 비토리아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친구 파드가 집 정원에서 홀로 목 매달아 자살한 까닭은 무엇일까? 동포들이 숱하게 죽아가는 현장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이라크인)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도 감수하는 그(이탈리아인). 얼핏 한쪽은 무능력하고, 무력해 보이고, 다른 한 편은 낭만적인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도리어 이 부분이 베니니 감독이 그려내는 가장 현실적인 장면(아이러니)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다운 바이 로>(짐 자무시 감독, 1986)에서 함께 출연했던 탐 웨이츠(Tom Waits)가 등장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감미로운 탁성으로 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입부의 결혼식 장면만으로도 <호랑이와 눈>은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다. 니콜라 비오바니와 탐 웨이츠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음악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결혼식에 등장하는 하객들의 면면을 살피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다. 만약 당신이 영화를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 대목에서 웃었다면 그건 하객들 중에서 아르헨티나 환상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이탈리아의 대표 시인 에우제니오 몬탈레(Eugenio Montale), 주세페 웅가레티(Giuseppe Ungaretti),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Marguerite Yourcenar)의 얼굴이 삽입된 것을 알아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베니니의 영화엔 코미디 특유의 우연들이 단순한 우연으로 그치지 않고, 영화를 끌어가는 복선으로 작용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숨은 그림(기호)찾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베니니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선사해온 주제는 분명히 ‘사랑의 기적’이라고 명명할 만한데, 실제로도 그의 아내 사랑은 거의 팔불출 수준이다. 아틸리오가 밤마다 열망하는 신부 비토리아 역을 연기하는 니콜레타 브라스키(Nicoletta Braschi, 베니니와 1991년 결혼했다)는 베니니의 감독 데뷔작 (1983)에 첫 출연한 이래 그의 영화 거의 대부분에서 주요 상대역을 맡고 있다. 아틸리오는 언제나 비토리아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니면서 열렬한 사랑을 바친다.

두 딸의 자상한 아버지이며 기발한 교수법으로 제자들의 사랑을 받는 유능한 교수이자 낭만적인 시인이지만, 현실의 일상에서 그는 자기 차를 주차해둔 곳을 몰라 헤매는 사람이고, 남의 옷을 자기 옷인 줄 알고 바꿔 입고, 변호사에게 매일 독촉당하는 현실부적응자다. 비토리아도 전 남편 아틸리오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의 시(詩)에 나오는 것처럼 ‘로마에서 호랑이가 눈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기 전엔 절대 결혼할 수 없다’며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비토리아가 아틸리오를 사랑하면서도 거부하는 것은 언제나 냉정한 현실 세계보다는 그의 시에서나 등장할 법한 낙관적인 환상의 세계에 머물기를 원하는 아틸리오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반부가 지극히 평온한 일상이지만 두 사람이 사랑의 결합을 이루지 못하는 이탈리아에서의 에피소드라면, 후반부는 비록 치열한 전쟁터에서지만 사랑하는 이를 치유하고 간병하는 아틸리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이라크에서의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베니니는 사랑과 낙관적인 믿음으로 무장한 아틸리오를 통해 사랑의 힘만이 폭력과 증오를 극복하고, 현실의 전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는 사랑의 묘약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계보학적으로 살폈을 때 <호랑이와 눈>이 <인생은 아름다워>의 뒤를 잇는 두 번째 영화인 것은 확실히 맞는 말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잘 짜인 베니니 영화 특유의 장르 미학이 살아있긴 하지만 <호랑이와 눈>이 주는 감동의 힘은 전작에 비해 함량 미달이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이라크침공이 현재 종료된 사건이 아니라 진행 중인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 자체로서 중요한 부분은 그가 비록 이 같은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영화에 반영된 고통 받는 주체의 심정적 거리가 <인생은 아름다워>에 비해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는 한계 때문이다.




전장의 위험 때문에 적십자사의 구호물품이 바그다드로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아틸리오는 직접 적십자사를 찾아 의료물품을 시내로 반입하려다가 자살테러범으로 오해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아틸리오는 목을 놓아 소리친다. "I'm Italian!" 만약 그가 나는 이라크 사람이라고 소리쳤더라도 미군들은 사격하지 않았을까?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고통의 당사자(주체)는 홀로코스트의 직접 피해자였던 유대인 ‘귀도’였고,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와 눈>에서 ‘아틸리오’는 친절한 이라크 의사를 비롯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친구 파드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위기 상황에서도 “I'm Italian!”이라 외치면 구원받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지점, 베니니가 제 아무리 사랑으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그는 피 흘리는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라는 점에서 베니니의 코미디가 지닌 비극적 아이러니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다시 말해 베니니가 말하는 사랑의 기적이 위대하긴 하지만 <호랑이와 눈>이 그려내고 있는 현실은 결국 비극의 현장에서 피 흘리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안도의 표현이란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은 1990년 걸프전 직후부터 2003년 이라크 침공까지 10여년이 넘도록 존재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WMD)를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에 엄청난 경제제재를 가했다. 그 결과 이전까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수준 높은 공공의료체계를 유지했던 이라크의 보건의료체계가 심각하게 붕괴되면서 매달 4,500에서 6,000명에 이르는 5세 미만 어린이가 죽어갔다. 현실이 이토록 찬란한 비극일 때 웃음의 빛깔은 바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FILM2.0 제 353, 354 합본호  (2007.09.18 ~ 200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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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치킨런(Chicken Run, 2000)



존재하지 않는 세계 - 유토피아(Utopia)

   영국의 인문주의자이며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저술하여 유명해진 - 오늘날엔 읽는 사람보다는 인용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은 기이한 고전이 되어가고 있지만 -『유토피아』는 본래 그 유래가 그리스어의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으며 영향을 받아 이 책을 저술했는데, 책의 내용은 당시의 유럽, 특히 16세기 무렵 영국사회의 여러 병리 현상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를 꿈꾼 것이지 전혀 실제 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하기사 공화정제, 전 시민이 교대로 농경에 종사, 노동시간은 6시간, 나머지 여가는 교양시간,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로이 꺼내 쓸 수 있으며 남녀는 혼인하기 전에 미리 서로의 나체를 볼 수 있도록하고,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그의 유토피아가 오늘날의 관점으로도 쉬운 것은 아니다)만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가 고민했던 사회적 모순들은 오늘날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모어가 살던 16세기 영국은 자본주의 생성 초기로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폭력적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양을 사육하기 위해 농민들은 대대적으로 농경지로부터 쫓겨나야 했고, 모어는 이를 가리켜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기이한 세상이라고 했다. 현실은 오늘날에도 대동소이하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대량해고 및 실직 사태에 직면해 있고, 과거와는 형태만 달라진 빈곤이 계속 된다.

  <치킨 런>은 죽음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의 탈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른 애니메이션들이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다. 하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예술작품치고 지옥에 비해 천국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예를 찾긴 매우 어렵다. 천국이란 그 상상의 세계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그에 대해 반대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지는 일종의 대안적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지옥은 현실의 축쇄판이기 때문이다. 누가 애써 비난받을 짓을 저지르겠는가? <치킨 런>에는 조지 오웰식의 <동물농장>이 그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양계장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유사하다는 분석을 할 수는 있다. 거기에 애써 기호학적인 분석 어쩌구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치킨 파이 자동 제조기'를 '대처리즘'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던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바라보던 간에 양계장이 지배와 억압의 세계, 암탉 진저의 탈출 시도가 그에 대한 일탈을 말한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진저가 꿈꾸는 이상세계가 원시적이고 소박하면 소박할수록 사람들은 좀더 친근감을 느끼고 쉽게 동의하게 된다. 이 말은 천국은 모호할수록 좀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논리적 제약을 무시하고 말한다면 유토피아는 그런 까닭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에서 진저와 록키 그리고 그들의 일행은 무사히 닭들의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동화 속 주인공들이 그러했듯이 아들 병아리, 딸 병아리를 낳아 인간들에게 발각되기 전까지 당분간은 행복하게 산다는 타협을 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현실 속의 닭들은 과연 어떻게 사는지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충고이면서 동시에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관적인 현실론의 일단에 자리하고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 약육강식'이란 말이다. 19세기에 등장한 다아윈(Charles Darwin)과 월리스(Alfred Wallace)의 진화론을 사회학에 접목시킨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론이 그것이다.‘적자생존’,'자연도태',‘강자우월론’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사상은 결국 생물학적 다양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비서구 사회들을 결국 서구사회와 같은‘문명화(Civilizing)’된 사회로 강제 진화시킬 필요가 있는 미개한 야만사회로  규정하도록 했다. 나는 서구 합리주의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막다른 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회진화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 자연은 타자화된(정복할) 대상이었으며 자신들의 문명·문화라는 편협한 잣대로 보았을 때 그들과 다른 문명권은 오로지 정복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냉장고

  어두컴컴한 밤. 갈증에 시달리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연다. 마치 SF영화의 한 부분처럼 혹은 공포영화의 살인 장면이 벌어지기 직전처럼 갑자기 열린 냉장고 속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 원시시대였다면 동굴 역할을 했을 법한 냉장고, 그 환한 전구 불빛 속으로 여러 식료품들이 보인다. 그린 자이언트 옥수수 캔, 동원 참치 캔, 플라스틱 밀폐 용기 속에 담긴 방울 토마토, 비닐랩에 싸인 오이, 햄, 소시지, 그리고 달걀. 우리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이야기로부터 참신한 발상의 전환을 증명해주는 '콜럼부스의 달걀'에 이르기 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에 달걀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닭은 인류가 길들인 가장 오래된 가금(家禽)류 중 하나였다. 물론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어린왕자와 여우'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길들인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만약 여기서의 '길들임'이 전자의 길들임이라면 어린왕자는 여우의 고기와 모피를 얻기 위해 여우의 생명을 난도질해야 한다.



  냉장고 속의 달걀이 닭의 살아있는 난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달걀 프라이를 해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기름에 튀겨낸 생선 대가리의 쾡한 눈동자가 마치 나를 쏘아보는 듯해서 섣불리 생선 살에 손을 대지 못했던 기억처럼 말이다. '존재의 응시'란 나 이외의 타자를 나와 동등하게 대우할 때만 가능하다. 냉장고 속의 달걀은 과연 얼마나 그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중 달걀 썩은 냄새를 맡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냉장고 속의 달걀은 한 달 이상 그 싱싱함을 유지시킬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달걀 자체의 생명력이라거나 냉장고의 탁월한 보관력 덕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걀이 그토록 오랜 기간 보존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먹을 거리로 삼고 있는 달걀이란 생명의 유통기한 아니,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부은 항생제 덕분이다.

한 알의 달걀이 닭이 되기까지

  우리가 길들인 닭은 다시 새끼를 얻기 위한 종계와 고기를 얻기 위한 육계, 달걀을 얻기 위한 산란계로 구분된다. 재래(자연방임 상태로 살았던)의 종계들은 보통 1년에 120개에서 140개의 알을 낳는데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며 기온이 내려가면 털갈이를 하면서 알을 낳지 않는다. 현대의 산란계들은 완벽한 공기순환구조와 온도를 유지하는 시스템이 보호(?)하는 계사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닭들은 계절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24시간 켜진 불빛 아래 밤낮없이 알을 낳다가 1년쯤 후 산란율이 떨어지면 폐닭이 되어(산란계들은 몸을 너무 혹사한 나머지 육질이 좋지 않아 프라이드 치킨이나 부위별로 판매될 수가 없어서) 노상의 장작불 구이 신세가 된다. 새끼를 얻기 위한 종계장에서 나온 알들은 인근의 완전자동화된 부화장으로 옮겨져 20여일의 부화 기간을 거쳐 태어난다. 이중에서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병에 걸린 것들은 사료로 쓰이거나 박스째 헐값에 팔려나간다. 내가 국민학생 때 샀던 병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걸러진 병아리들은 수천마리씩 컨베이어 벨트로 쏟아져 나오고 숙련된 인부들이 병아리들의 목덜미를 잡고 여러 가지 백신 주사를 놓는데 시간당 3천 마리까지도 예방접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한 차례 소동을 겪은 병아리들 중 육계로 팔려나가는 닭들은 아직 산란능력도 생기기 전인 생후 30-35일만(이걸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면 10살이 겨우 넘은 나이인 셈인데, 재래종에 비하면 3배나 빠른 성장속도)에 시장에 나가게 된다. 유난히 '영계'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인 까닭도 있고, 우리 육계 농장의 질병 오염도가 너무 높아서 체중을 1.6kg 이상 기르면 그만큼 폐사율(20%)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병아리를 30일만에 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료도 남달라야 한다. 사료에는 주로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첨가되어 있는데,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 따르면 법적으로 사용가능한 항생제만도 3백 50여 종이 넘는다. 걔 중에는 이 엄청난 성장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는 병아리들도 생겨난다. 날개를 펼쳐볼 수도, 마음껏 훼를 칠 수도 없을 만큼 좁디좁은 양계장에서 운동부족과 약물남용의 스트레스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팔려나가는 닭의 90%가 백혈병이나 암 등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거짓은 아닌 셈이다. 



  패스트푸드점의 매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손님회전율이라는 것이 적용된다. 즉, 좀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빨리 먹고, 빨리 나가줘야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메꿔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손님회전율을 높이기 위해서 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 크록(Ray Kroc) 같은 이들은 패스트푸드점의 실내 인테리어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유심히 통제(맥도날드에 들어서는 고객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치밀한 통제 속에 들어가게 된다. 우선 규격화된 메뉴, 제한된 소스 종류, 줄서기 시키는 주문 카운터,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 빨리 먹고 나가야 하는 분위기, 지정된 퇴식구와 쓰레기통 등 고도의 통제 구도 하에서 놓이게 된다)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의 의자가 유난히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보고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빨리 먹고, 빨리 나가달란 뜻이다. 이런 법칙은 양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닭들은 마치 패스트푸드점의 손님처럼 빨리 먹고, 빨리 성장해서 이윤을 남겨줘야 하기 때문에 30일 동안 고도로 농축된 성장호르몬과 항생제가 범벅된 사료를 먹고 도계장으로 실려나간다.


날 수 없는 새와 레드스킨

   닭의 운명은 그들이 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 되었던 시절 혹은 그렇게 길들여지기 시작하면서 결정된 것이었을까? 신은 과연 닭을 인간의 먹을 거리로 삼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인가.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들 사이의 해묵은 논쟁을 이곳에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바람구두는 분명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순전히 식욕이 당기기로 말하자면 서구인들 못지 않게 육류 소비를 즐기는 축에 속한다. 오늘날 육식이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는 것은 담배의 해로움과 마찬가지로 이제 의학적 상식 축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채식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이 채식과 더불어 육식을 하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지난 몇년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광우병 파동처럼 인류는 좀더 풍요로운 사회, 기아 걱정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미명 아래 생명을 가진 생명체이자 지구상의 생명 다양성 중 분명 한 축을 담당하는 가축들을 매우 비자연적,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육한다. 인류의 재앙으로까지 불린 광우병 파동이란 결국 좀더 많은 고기와 우유를 얻고,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완전 채식 짐승인 소에게 단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도태시킨 숫컷 병아리와 소와 양의 내장, 잡고기, 뼈 등을 갈아만든 사료를 먹여 육식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계장으로 실려간 닭들은 커다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싣고 간 닭들을 쏟아낸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옮겨지는 닭들은 일일이 사람들 손에 붙들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쇠꼬챙이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다. 죽음의 사슬에 엮인 닭들은 이렇게 도계장에서 대량으로 도륙되는 닭들은 마치 <치킨 런>의 치킨 파이 자동제조기와 흡사한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60볼트의 전기침 세례와 목 뒤의 경동맥을 자르는 칼날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닭들이 우리가 흔히 어렸을 때 시장통에서 보았던 것처럼 닭의 모가지를 단칼에 딴다거나 잘라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기계가 닭의 머리를 있는 대로 쭉 잡아당겨 끊어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닭의 머리를 끊어내는 이유는 이렇게 하면 식도와 내장기관까지 끌려나와 세 사람 정도의 인력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출된 내장은 닭똥집만 제외하고는 모두 폐기물로 팔려나간다.



  <치킨 런>의 진저와 록키처럼 이런 과정을 모면한 닭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 집 마당에 작은 철망 닭장을 만들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닭들은 밤이 되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알을 낳는 항문 부위에는 신경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밤새 휏대에 올라가 잠들지 않은 닭 중엔 닭장에 침입한 생쥐가 항문 부위를 죄다 파먹어도 모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머리 나쁜 사람들에게 '닭 대가리'라는 오명을 붙여준 것은 이렇게 항문을 파먹혀 피를 질질 흘리고 다니면서도 평화롭게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닭을 바라보는 주인의 기막힌 심정이 녹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엔 닭 도축 작업을 주로 밤에만 했다고 한다(물론 닭서리를 해본 분들은 더 생생하게 기억하겠지만). 어쩌다 도축 컨베이어 벨트의 전기침과 칼날을 피해 살아난 닭들은 공포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레드스킨(Redskins) 현상이 나타나는데 육질이 나빠지는 것은 물론 온몸이 붉어져 팔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날아라 병아리, 중독된 소비 사회를 넘어

   현대의 물질문명은 더 이상 기아에 대한 맬더스의 예측이 옳다고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과학이 이루어낸 농경기술의 발달은 식량 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제 굶주림은 분배의 문제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기아선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아이스크림 메이커 '베스킨 라빈스'의 유산상속자였던 존 로빈스는 "매해 기아로 죽어가는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물의 양이 1,200만 톤인데 이 1,200만 톤은 미국인들이 소고기 소비를 10%만 줄이면 얻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말한다. 육류 소비를 억제하고 그 사회적 비용으로 채식을 한다면 좀더 많은 이들에게 풍족한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다만 고민되는 문제는 그렇게 얻게 된 1,200만톤의 곡류를 과연 굶주린 이들에게 앞장서 전해줄 정부와 사회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나는 우선 우리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소 종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식량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소박한 대안은 당신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라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소비란 인간의 삶과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생활필수품이건, 일반 소비재이건, 기호품이건 간에 결국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지본주의가 구축해놓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체제는 소비를 강요한다.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경기변동을 초래해 때로는 경기 부흥을 위해 소비를 촉진한다. 마치 비만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빅맥을 먹으며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하는 것과 같이 낭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 중독되어 있다. 이제 소비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도구이고, 인간은 소비를 통한 자본축적의 수단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체적 판단과 욕구에 따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프로그램(거대기업의 의도와 광고와 유행 등에서 나타나는 패턴)에 따라 소비한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지구자원의 무한정한 소비와 그에 따른 공해. 그로인해 우리 인류의 생존기반이자 물질생활의 토대인 지구를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물론 그전에 항생제 남용과 축적으로 인한 새로운 전염병의 유행이나 호르몬계 이상 등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욕망의 무한 질주인 자본주의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고민할 일도 더 이상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2/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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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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