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까?


살다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농담 섞인 충고를 많이 받게 됩니다. 저도 간혹 신참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동네 무당에겐 영험이 없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도 있을 겁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한 수많은 기적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에 그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하지만 명성을 얻은 뒤 찾아간 고향 마을 나사렛에서 그는 뜻밖에 냉담한 반응을 겪습니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 사람들은 "저게 누구야? 목수 요셉의 장남 예수가 아닌가?"라며 예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고, 도리어 갖은 모욕과 조롱을 쏟아댑니다. 이런 일을 겪은 뒤, 예수는 “예언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배척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영험이 있다고 소문난 무당이나 나사렛 마을에서 자란 예수 그리고 교회에선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들도 집에 가서는 사모님들에게 타박을 받는다고 하지요. 아마도 같은 맥락이겠죠. 친숙하다는 건 그만큼 흔한 것이어서 귀한 대접을 받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인 듯 싶습니다.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

요즘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부추긴 작가, 러시아 차르 체제에 저항하다가 나중에 친 차르적인 인물로 표변한 작가란 이유로 비판받곤 합니다. 저도 비슷한 입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비판하지만, 반대로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여전히 그를 위대한 작가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 정치적 입장이나 사상에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 영혼의 심연을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파헤쳤던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러시아의 통치자인 차르는 전근대적인 차르의 봉건체제에 저항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시베리아로 유배하거나 사형에 처했습니다. 간혹 자비로운 사면을 베풀기도 했는데, 총살 직전에 차르의 특명으로 사면시켜주는 기만술을 펼쳤다고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그런 방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순간 지식인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명은 끝났지만,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때로 이토록 잔인한 것이겠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만약 사형대 위에서 죽었다면 그 자신은 양심대로 살았겠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록 그는 살아남은 뒤 친(親)차르적인 작가로 거듭나지만 동시에 한 명의 작가로서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이기주의와 폭력성, 기회주의와 자기기만(합리화)에 대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깊이 있게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시인 황인숙은 <나를 믿지 마세요>란 시에서 “믿지 마세요./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아니 사소하게라도 친구나 애인을 배신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사실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그 사람이 배신한,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일 겁니다. 배신자가 배신하는 것은 타인과의 믿음이나 신뢰, 다시 말해 타인과의 ‘관계’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보내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 역시 파괴하게 됩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통해 생(生)의 의지를 다집니다. 예수가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 황야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깃들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 있겠지요. 인간만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망에 기대어 삶을 조직해 나갑니다. 저는 그 과정을 ‘자기합리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든,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든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만행위에 참여해 본 사람은 그 행위로 인해 파괴된 의미망(존재의 의미)을 재구축하기 위해 - 다시 말해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했던 자는 - 다시 한 번 자신을 기만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악명 높은 사상전향공작이 감옥에서 자행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단 한 번만 반성문을 쓰면, 사상전향서를 작성하면 풀려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갖은 고문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품었던 사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키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개똥같은 일상이 당신을 지배한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거나 작은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유는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이상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인 거죠. 과거 80년대 나름대로 양심적인 지식인, 운동가들이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거듭되는 절망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위대한 작가로 기억하는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신을 냉정하게 살폈습니다. 마치 실험대 위에 놓인 개구리처럼 자신을 관찰하고, 관계를 살피고, 그것을 소설로 남겼습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그는 ‘세상을 위해 순교할 수는 있어도 냄새나는 한 인간과 같은 방 안에서 공존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형대 위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명하지 않고 순교하는 일은 가능해도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매순간 '현실 적응'이라는 미명 아래, 사소한 일이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이유로 양심과 신념의 배반을 강요받습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할 때의 ‘개똥’이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사소하고, 흔해빠졌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지만 막상 그 평온한 일상이 깨졌을 때 우리는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행복'이란 그 상태가 지속되길 바라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상의 행복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요? 일상의 행복은 와인 잔보다도 약한 것이라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상황 속에서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손님이 왔을 때 여직원에게 부탁하는 커피 한 잔, 아무도 보지 않는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슬쩍 건드렸을 때, 상사가 업무 외에 부탁하는 지시를 들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같은 일들 말입니다. 그처럼 소소한 부딪침으로 일상은 불편해지곤 합니다. 어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의 누군가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까닭도 그것이겠지요.

하지만 때로 그 평범한 일상이 역사의 한 순간이 되고, 개인의 사소한 선택에 대해 역사가 책임을 묻는 순간이 있습니다. 군대를 경험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경계 활동, 보초 서는 일은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입니다. 예를 들어 베를린 장벽을 지키던 동독 병사에게도 그 하루하루는 지겨운 일상이었을 테죠. 어느 날 동베를린에 살던 한 사람이 갑자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려 들었던 순간이 하필이면 그 병사가 보초를 서던 날만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시민에게 사격을 가해서라도 저지하라는 것이 병사에겐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고, 일상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 탈주자로 인해 병사는 일상의 평온을 방해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야에 독일에서 자행되었던 유대인 박해, 수정의 밤 이후 독일 내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받는 것 역시 일상이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영혼이 없는 공무원 역할을 수행했던 합리적인 제도의 뒷받침을 받아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빼곡하게 들어선 동포들과 함께 다카우와 아우슈비츠로 실려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선별하는 일도 그곳의 병사들에겐 수많은 진부한 일상 가운데 하루였을 겁니다.

악은 진부하지만 일상을 통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난 뒤 한나 아렌트는 “악의 진부함, 악의 평범함에 놀랐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말은 사실 악이 우리 주변에 개똥처럼 흔하게 널려있다는 말입니다. 세계평화와 인권을 노래했던 밥 말리는 거리 콘서트를 앞둔 어느날 밤 괴한의 침입으로 목숨을 위협받았습니다. 다들 그가 공연을 취소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밥 말리는 공연을 강행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공연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밥 말리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번성하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에 대해, 그 진정성이 무엇일까 의심하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도 우리들에겐 필요악일 수 있고, 심심 파적삼아 화제로 올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앞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먼저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문에서, 혹은 방송을 통해 특검에 호출 받아 나가는 중역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 밑에도 역시 부장이 있을 테고, 그보다 많은 과장들이 있을 테고, 또 그들 밑에는 더 많은 대리가, 주임이 평직원이 있겠지. 과연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500만 원 짜리 다섯 뭉치를 묶고 포장하는 일은 누가 했을까? 설마 그날 포토라인 앞에 카메라 세례를 받은 높은 분들이 로비하려고 필요하니 100만원 뭉치 다섯을 종이박스에 넣고 포장하라고 아랫사람에게 시켰을까? 그 같은 허드렛일을 본인이 직접 했을 리는 없고, 누군가 아래 직원을 시켰을 텐데 그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이 들까 하는 그런 상상이 들었습니다. 그 직원은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 고발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종찬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지난 2000년에서 2002년 삼성그룹의 관리대상자 명단에 포함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2000년 여름에는 이 수석이 삼성본관빌딩의 이학수 당시 구조조정본부장 사무실을 방문해 휴가비를 직접 받아갔다는 의혹까지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가 자기만 본 것이 아니라 함께 보았다고 말한 다른 직원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목격한 일이 일절 없다”고 특검에서 진술했다고 합니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모함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이 진술과 관련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입증할 수 있는 방법도, 수단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이번 특검 결과를 지켜보면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특검의 입장이 진실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서글펐습니다.

특검 발표를 보니 이번 수사를 시작하게 만든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거나 증언에 일관성이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했던데 그렇게 강변해야했던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BBK시와 마찬가지로 '김경준' 씨처럼? 자신을 비호하기 위해서? 그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김용철 변호사는 왜 구속될 것도 각오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을 받아가며 나섰던 것일까? 그야말로 튀고 싶은 '또라이'였나? 그것이 아니라면 사실 조준웅 특검 자신이 삼성을 수사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검이 발동하게 된 계기는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삼성이 정관계에 전방위적으로 로비를 해왔다는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측에서 삼성의 로비 대상자로 지목했던 사람 중 단 한 명도 특검은 소환해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장의 진술서를 받은 것으로 특검의 발단이 되었던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모두 무혐의 처리를 내리고, 검찰의 추가수사 가능성 마저 막아선 꼴이 되었습니다. 대신에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시효가 지나 법적으론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도록 합리화시켜주고, 정당화시켜준 결과만 내준 꼴이 되었지요.

정신적 불구를 강요하는 사회 -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같이 마주치게 되는 부당한 지시,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대면하고 항의할 수도 없는, 마치 카프카의 소설 "성(城)"에 나오는 "K"처럼 저항해야 할 상대를 알지도 못한 채 종이박스 100만 원 짜리 다섯 뭉치를 챙겨넣은 것은 아닐까요. 이번 사건은 좀더 윗선의 명령과 의도라는 모호한 배경을 깔고 다가오는 비리의 연쇄사슬 속에서 가장 하부 구조의 피라미처럼 연루되어가는 우리들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내려온 명령과 지시에 불복종하는 일은 과연 사소한 일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의 막대한 임금을 받았으면서 이제 와서 삼성을 배신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묻고 싶더군요. 과연 배신이란 무엇인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 배신인지 아니면 잘못된 관행이나 비리조차도 마치 야쿠자나 조폭의 의리처럼 한 번 보스(boss)로 모셨으니 끝까지 그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을 의리라고 부르자는 말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얼마전 진행된 ㄷ그룹 공채에서 ㅎ(27)씨는 6명이 함께 들어간 면접에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소견을 말하라’는 면접관의 질문을 받고 “회사가 더 발전하려면 김 변호사처럼 발설하고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뒤 더 이상 면접관들로부터 질문을 받지 못했다. ㅎ씨는 “면접이 끝날 무렵 ‘원래 지원부서 말고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네’라고 대답했는데도 결국 떨어졌다”고 말했다.

82만여명이 가입한 인터넷 취업카페 ‘취업뽀개기’(cafe.daum.net/breakjob)에도 “면접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김용철 변호사 옹호했어요. 당연히 떨어지겠죠?”(아이디 제우스호), “삼성 자회사 면접을 봤는데 최근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얘기하래서 김용철 변호사가 생각나 얘기했는데 정적만 흘렀어요. 어쩌죠?”(아이디 힘내자앙) 등의 글이 올라와 있다.

청년실업이 중대한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시대입니다. 취업재수니, 취업고시니 하는 말이 실감나는 이 시대에 대기업은 신입사원 최종면접 시험에서 김용철 변호사에 대해 질문한 뒤 김 변호사를 두둔한 지원자는 모두 탈락시켰다는 증언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를 배신자라고 부른 사람들만을 합격시켰다는 것은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의리를 대신하여 조직의 의리를 우선하는 사람들을 선발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그간 기업들이 주장해왔던 글로벌 스탠더드니, 세계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창의적 인재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기만을 일상적으로 범할 수 있는 ‘정신적 불구’를 원하는 것이 아니냔 의심이 듭니다. 어쩌면 과거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오늘의 젊은이들도 취업전선이란 사형대 위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양심을 기만하라고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삼성 특검 결과 발표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나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당부해 봅니다.

'정신적 불구'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충고를 자주 듣게 되는 모양입니다. 일상은 혁명이 움트는 곳이자 혁명이 소멸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일상을 무엇으로 재구축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삶도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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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깊고 푸른 것이 어디 몸에 물든 멍뿐이겠습니까?
-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보내는 여섯 번째 편지

혹시 내가 하고 있다는 문화망명지에 가보았을 테지. 그곳에 가면 망명신청이라고 회원가입을 위한 게시판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밝혔듯이 난 긴 글이 좋아. 만약 세상이 책이라면 난 세상을 벌써 다 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아주 어렸을 적에 나는 세상을 다 알아버렸어. 건방진 얘기라고 해도 하는 수 없다는 거, 그대가 뭐라 하건 세상의 바닥을 이미 보아버렸다는 내 느낌, 조금도 변함이 없을 거라는 거 그대도 이미 알겠지.

그래서 그래, 긴 글을 원하는 건. 내가 아직 읽지 못한 것이 있다면 당신이니까. 내게 그것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그것이 아니라면 난 이미 다 읽었으니 네가 읽은 걸 나에게 보여달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아마 둘 다일 가능성이 제일 클 거 같네.

나는 '광기' 혹은 '몰입'을 사랑해. 그 감정 자체를 사랑하지. 며칠 전 서재 페이퍼에 한 줄짜리 글을 올린 적이 있었어. 지금은 지워버렸지만, 거기엔 아마 이렇게 쓰여 있었을 거야. “내가 미친 듯이 일에 열중하는 건 잊기 위해서”라고.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이든 그것이 내가 도전하기 힘겨운 일이듯 무언가 미친 듯이 몰입하고 싶어. 아마도 그 까닭은 어린왕자가 도착했던 ‘술주정뱅이의 별’에서 주정뱅이가 술을 마시던 이유와 비슷할 거야.

그 다음 별에는 술꾼이 살고 있었다. 그 방문은 매우 짧았지만 어린 왕자를 깊은 우울에 빠뜨렸다.
"뭘 하고 있어요?" 빈 병 한 무더기와 술이 가득 차 있는 병 한 무더기를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는 술꾼을 보고 그가 말했다.
"술을 마시지" 침울한 표정으로 술꾼이 대꾸했다.
"왜 술을 마셔요?" 어린 왕자가 그에게 물었다.
"잊기 위해서지" 술꾼이 대답했다.
"무엇을 잊기 위해서요?" 측은한 생각이든 어린 왕자가 물었다.
"부끄럽다는걸 잊기 위해서지" 머리를 숙이며 술꾼이 대답했다.
"뭐가 부끄럽다는 거지요?" 그를 돕고 싶은 어린 왕자가 캐물었다.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이렇게 말하고 술꾼은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난처해진 어린 왕자는 길을 떠나 버렸다.
"어른들은 정말 참 이상하군" 하고 어린 왕자는 여행을 하면서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대가 내미는 손길은 술주정뱅이를 돕고 싶었던 어린왕자의 관심 같은 걸지도 몰라. 영화 <라스베거스를 떠나며>에서 창녀 세라는 술꾼 벤을 사랑하지만 그를 술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지. 벤에게 필요한 것이 여자였을까? 벤에게 필요한 건 대화 상대였을 뿐이야. 그런데 이게 재미있어. 벤에게 필요한 건 정말 대화상대일 뿐일까. 처음엔 벤이 세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거든. 그가 영혼의 친구를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건 아니건 간에 벤에게 세라는 영혼의 친구였다는 생각이 들어. 영혼의 친구라고 해서 구세주가 되는 건 아니야. 벤은 이미 세상의 바닥을 보았고, 더 이상 깨어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벤은 세라에게 조건을 내걸지. 자신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지 말 것. 동시에 그도 세라의 몸을 파는 직업에 대해 참견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동종의 거래이거나 대등한 관계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사랑이 뭐지? 사랑이란 지독한 참견이거든. 내가 너의 삶에 개입하고 싶다는 의사표현이란 거지. 그런데 벤은 세라보고 자신이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파괴해 가는 걸 방치하라고 말하는 거지. 반대로 세라가 몸을 파는 것도 참견하지 않겠노라고. 이게 대등한 관계설정일 수 있을까? 벤이 세라를 사랑했을까? 난 대등한 관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사랑했다고는 생각해. 무어라 설명할 순 없지만 난 그걸 너무 잘 알 수 있거든. 어떤 사람들은 반문할 수도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고 말이야. 난 그런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어. 대관절 사랑이 뭔데? 사랑하면 구원받을 수 있어? 사랑하면 인생이 달라지나? 사랑하면 이 지겨운 삶이 갑자기 연분홍빛으로 변하기라도 한데?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란 거야. 어떤 종류의 인간에겐 그런 환상을 더 이상 품을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지독한 경험을 선사하지.

벤이 세라의 곁에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였어. 절대,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말하지 말 것이 아니라 절대, 절대로 사랑하지 말 것이었지. 세라가 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사랑하니까 네 삶에 개입하고 싶다거나 안타깝게 바라보지 않는 한 벤은 세라 곁에 머물 수 있지. 왜냐하면 벤은 인생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세라는 벤을 사랑하고, 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나는 모든 대화란 기본적으로 섹스와 같다고 생각해. 아니 반대로 섹스도 대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야 옳을까. 또 섹스를 한다고 모두 아기를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섹스 한다고 해서 꼭 사랑하는 것도 아니니까. 사랑 없이 어떻게 섹스를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섹스가 곧 사랑인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 그런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사랑을 통해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 가치있는 삶으로의 질적인 변화를 꿈꾼다고 하자고. 그건 대화도 마찬가지지. 어쨌거나 둘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대화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거나,(독서 혹은 정신과 상담처럼) 아니면 상대를 호감의 대상으로 판단한 결과인 거지. 싫어도 억지로 하는 섹스가 강간인 것처럼 싫어하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말을 거는 것도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

벤은 죽기 직전에야 세라와 마지막으로 섹스를 하지만 영화적 장치로서 극적인 장면이긴 해도 그것이 반드시 사랑의 표현이랄 수는 없다고 생각해. 내 입장에서 보자면 벤은 오래전부터 세라를 사랑했으니까. 잔말이 길었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좋았던 이유는 네게 편지를 쓰는 동안엔 내가 괴롭지 않았다는 거야. 나는 해마다 겨울나기가 무척 고통스러워. 왜 그런지, 나 스스로는 잘 알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내게 꼭 필요했던 사람들이 꼭 겨울에 떠났거든. 징크스라고 말하는 게 아냐. 겨울에 안 좋은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있다는 말을 하는 거지.

그대는 나에게 망망대해에 유리병편지를 띄우는 사람이라고 말했지. 그리고 그대의 안부가 반갑냐고도 물었지. 물론이야. 참견하는 걸 병적으로, 지독히 싫어하지만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 난 섹스만큼 좋아해. 둘 중 어느 걸 더 좋아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좋아하지. 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대신, 일하는 걸 무척 좋아해. 만약 이 일이 - 글 쓰고 읽는 것도 - 말하는 것과 같은 것, 최소한 흡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하기가 더 쉽겠지만... 누군가와 대화할 수 없을 때가 많았어. 그 상대(그 상대가 꼭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세상일 수도 있는 거니까)가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았고, 그래서 나는 혼자 글을 쓰고, 남의 글을 읽는 걸 좋아해. 왜냐하면 그 동안엔 날 잊을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어린 왕자가 찾아간 별에서 만난 술꾼 같은 거야. 어느 날 어린 왕자가 날 찾아와서 "뭘 하고 있어요?" 다 읽어서 한쪽으로 쌓아놓은 책 한 무더기와 앞으로 읽어내야 할 책 무더기를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는 나에게 어린왕자가 만약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책을 읽지"라고 침울한 표정으로 대꾸했을 거야. "왜 책을 읽어요?" 어린 왕자가 나에게 묻는다면 물론 "잊기 위해서지"라고 답하겠지. "무엇을 잊기 위해서요?"라고 그가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면 "날 잊기 위해서지"라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을지도 몰라. "뭐가 부끄럽다는 거지요?" 어린 왕자가 날 돕고 싶은 마음에 캐물었다면 "책만 읽는 게 부끄러워!" 라고 답한 뒤엔 입을 닥칠지도 모르겠어. 솔직히 책을 읽는 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 그것만큼 의미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어. 하지만 내가 처음 책을 읽게 되고,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술꾼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어. 일찌감치 부모와 헤어진 뒤 작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얹혀살면서 난 내내 스스로를 기생충처럼 생각했거든.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야. 87년의 기억이 그 뒤에 또 병풍처럼 서 있거든. 그렇다고 이 두 가지만 알게 되면 나에 대해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아니길 바래.

어쨌거나 그걸 잊고 싶어서 책을 읽었고, 책을 읽고 남들 앞에서 내가 읽어낸 지식들을 토해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안엔 내가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어도 내가 존재할 이유가 있고, 어딘가에 속한 자라는 느낌 같은 건 만들어낼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런 자기존재감 같은 건,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 같은 거였지. 책장을 덮거나 글을 쓰다가 중도에서 멈춰버리면 그런 느낌은 어느 사이엔가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곤 했으니까. 그런데 이쯤에서 밝혀두고 싶은 건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묻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해지곤 한다는 거야. 그래서 앞서 먼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란 영화 이야기를 한 거야.

나도 사랑이 구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아니,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소설가 최인훈 선생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던가? 최인훈 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지. "참여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러므로 각자가 인간을 미래로, 열려진 지평으로 인식하느냐 닫혀진 지평 속에서 환상의 초월만이 가능한 존재로 보느냐는 데에 귀착된다. 얼핏 생각에 개체로서의 인간은 한정된 역사적 시간이라는, 갇혀진 지평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인간을 그렇게만 본다면 인간에서 '부정'의 계기를 간과하는 것이며, 인간은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출하려는 존재이며, 그렇지 않다면 물체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부단히 현실을 부정하여 나날이 새롭게 사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만이 구원일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단언할 수 없어. 사랑하기 위해선 또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니까. 내가 세상을 다 보아버렸다거나, 읽어버렸다고 하는 느낌과 인식은 여전해. 하지만 최 선생 말씀대로 그렇다고 해서 내 지평을 부정할 수 있는 계기를 버릴 수도 없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그러하듯, 내가 온전하게 '나'이기 위해서도 나는 부단히 현실을 부정하여 나날이 새롭게 살아갈 방도를 궁리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가끔 나는 내가 이승에 별로 욕심이 없단 생각이 들어. 이승에 맺힌 것, 남긴 것이 별로 없어서일지도 모르지만 그 보다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이 세상에 나 하나 없어도 별로 문제될 게 없다는 걸 안다는 거야. 그 의미를 누가 부여해줄 수 있겠어? 나도 내가 다 아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늘 반문하곤 해. 하지만 난 가끔 날 사랑하는, 혹은 내가 사랑하게 된 이들에게 무척 소홀한 사람이란 이야기를 듣곤 하지. 붙잡을 수 없을 것 같다고도 하고.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게 맞느냐고 번번이 확인하듯 되묻는 말을 들어. 그럴 때마다 난 정말 떠다니는 먼지가 되는 기분이야. 어쨌든 그대가 나를 앞으로 오십년쯤은 사랑해주어도 괜찮을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기분은 좋아지더군.

내가 전에 말했지. 깊고 푸른 것이 어디 몸에 물든 멍뿐이겠느냐고. 사람들은 바다, 깊은 것을 심연(深淵)이라 하지만 그것도 한자풀이로 따져보면 기껏해야 지구라는 별에 놓인 한낱 깊은 연못에 불과하지. 바다가 제 아무리 깊어도 말이야. 글을 쓰는 자가 세상을 다 읽어낸 자는 아닐 거야. 하지만 세상과 끊임없이 겨루고 견주어가며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한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길 위의 여행에 미친 자라 생각해. 신영복 선생이 말한 지남철처럼 그것이 파르르 바늘 끝을 떨고 있는 동안엔 믿어도 괜찮아. 난 어차피 확신을 갖고 살아가기 보단 나 자신조차 도마 위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살펴보는 자니까. 그래서 가장 행복할 때조차 후회하고, 반성하잖아.

한 고비 넘기면 또 한 고비. 삶과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과 많은 말들을 듣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충고를 하고 듣고 살아왔지만 사랑에 대해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곁에서 마지막까지 버텨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비록 제 몸과 마음이 온통 멍투성이, 상처투성이라 할지라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버텨주는 거. 사랑도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하고 많은 감정 중 하나인데 변하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남들 하는 거, 다른 감정들처럼 배신도 하고, 별별 거 다하겠지. 그래도 남는 게 사랑이고, 곁에 남아주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냐고. 울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랬다는 군. 너희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느냐고. 지금도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 어떻게 눈을 감으셨다니? 그러니 오래 버텨줬어야지. 누이가 6학년, 내가 3학년 때 일이야. 그리고 올해 내 나이가 딱 울 아버지 돌아가실 때 나이지. 이만하면 올해 내가 유난히 우울해도 괜찮은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올해만 넘기면 내가 아버지보다는 좀 더 이승에 머문 셈이니까.

이런 편지를 술도 안마시고 쓸 수 있을 만큼 난 냉정해. 그런 인간이니 내가 날 좋아하는 일이라고 쉬울까, 안 그래! 흐흐. 어쨌든 내 결론은 그래. 사랑 같은 거 하지 않아도 좋고, 사랑 같은 거 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저 곁에 오래 머물러 달라고 말하는 건지도.

* 추신 : 내일 읽어보면 지워버릴 것 같아서 지금 그냥 보낸다. 소심한 구석도 있잖아. 내가...아마도 이 편지는 나에 대해 내가 쓴 글 중에 가장 정직한 글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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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오늘(2008. 1.17.) 망명지를 살펴보니 1,634,035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카운터에 기록되어 있더군요. 처음 홈페이지를 만든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제 이야기를 하며 살았습니다. 인터넷 공간에 작으나마 사람들과 소통할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던 건 지난 2000년 8월 1일의 일이었으니까, 햇수로는 올해가 9년, 다가오는 8월이면 만 8주년이 됩니다. 홈페이지 이름이 왜 하필이면 ‘망명지’일까? 때로는 스스로에게 반문합니다.


뭔가 대단한 고민이 있었다기 보다 점점 새로운 해몽을 저의 꿈에 덧대어갔던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꿈보다 해몽이었던 거죠. 아니면 최인훈 선생이 어디선가 들려주었던 말이 오래도록 제 뇌리에 남았던 탓인지도 모릅니다. 오래전 일이라 어쩌면 저 혼자만의 기억이 최인훈 선생을 들먹이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는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지식인들과 달리 망명을 할 수가 없어서 불행하다’는 말이 저는 이 땅의 숨막히는 현실, 분단의 현실, 상상의 한계를 미리 규정지어 버리게 만든 답답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그만해둬. 나는 너의 인형은 아니잖아!

말은 삼천리 화려강산이라지만 반 토막 난 땅에 살다보니 어딜 가나 늘 고추장, 된장에 쌀밥, 김치를 먹고, 다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탓에 몇몇 사투리의 단어 뜻을 몰라서 그렇지 서로 못 알아 듣는 말이 없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근대화 이후 일일생활권이 된 덕분으로 전국 어디든 하루면 왕복할 수 있는 땅에 살고 있습니다. 망명은커녕 숨어서 못된 짓 한 번 하기도 어려운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입니다. 그런 탓인지 가끔 민족애(民族愛)의 발로와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휴전선이 답답하고, 갑갑해지곤 합니다.

기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밑도 끝도 없이 먼 이역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 살다보면 실제로 하기는 어려워도 계획조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실, 휴전선은 땅만 분단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상상 속에도 이미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오곤 합니다. 조국을 떠나기 위해 우리는 섬나라 사람들처럼 배 아니면 비행기를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가도 가도 첩첩산중인 개마고원의 깊은 품에서 쌓인 눈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잔가지 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하얗게 지새워 보고 싶지만 이미 마음으로부터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단일민족의 신화는 구성원들의 실제 혈연적 구성이나 유전적인 측면에선 사실이 아니라도 문화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족은 때때로 남이 보지만 않는다면 가져다 버리고 싶은 족쇄가 되기도 하고, 한 번의 입시로 결정되는 학교라는 이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평생 동안 발목을 잡는 굴레가 됩니다.

혈연, 지연, 학연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사회라는 거대한 매트릭스(네트워크)의 하부 구조 중 하나로 ‘나’라는 존재의 위치를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규정짓는 틀이 되곤 합니다. ‘나’는 문화라는 거대한 매트릭스 속에서 한 번도 나 아닌 다른 존재, 아니 진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고민해볼 틈도 없이 족보에 기록되고, 학적부에 기록되고, 주민등록부에 기록된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문화망명지라는 거창한 이름, 문화와 망명의 개념을 결합시키면서 나는 타락하지 않겠노라. 이곳에서 나의 깃발을 올리고 타협하지 않는 마음으로 홀로 비장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결심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바람구두'라는 익명의 페르소나 뒤에 숨지 않으면 안될 만큼 나약한 한 인간이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쓸쓸함과 변해버린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씁쓸함을 담아 누군가 나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이들에게 보내던 유리병편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넷 공간에 띄어 보냈던 무수한 유리병편지들은 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응답을 받았고, 때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법한 인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제 멋대로 무수한 인연의 가지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세상의 근원을 더듬어가며 우주의 끝으로 갔던 우주비행사가 마지막에 만난 것은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우주를 만들어냈던 컴퓨터와 대면하게 되는 SF만화의 허무한 엔딩 장면처럼 어쩌면 “문화망명지”의 끝은 허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나 스스로가 허무한 걸지도...

20년 전 그날, 20년 후 오늘

당신이 먼 이역으로 떠난다 하니 무심결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망명지를 만들게 된 것은 물론 제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망명지는 네덜란드의 작은 이층집 다락에 아지트를 만들었던 안네 프랑크의 사랑스런 일기장 ‘키티’처럼 제게도 그런 공간 하나가 필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기까지 저는 마치 살아있는 좀비처럼 온몸이 썩어가는 듯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87년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어떤 인연으로 당시 운동과 결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너무 구구한 사연이 될 듯합니다. 다만, 1987년 12월 명동성당이란 시대의 막간극 무대에 저도 잠시 편승했던 적이 있었다는 정도를 밝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역사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50여개 학교, 2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 중 일부만이 기억하는 ‘서고련’의 명동성당 시위였습니다.

일제 치하부터 해방 이후 면면히 이어지던 고등학생 운동은 4.19혁명을 기점으로 역사의 물꼬를 트는 주요한 흐름 중 하나였으나 유신과 전두환 독재 시대에 이르러 사실상 그 맥이 완전히 끊겨 있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치열한 입시교육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 진학과 입신양명을 위한 입시기계로 전락해버렸던 시대였지요. 올해는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만 20년이 되는 시점이라 여러 매체들이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사화했습니다. 저도 몇몇 언론을 통해 그 당사자가 되기도 했지요.

조세희 선생은 1987년 12월 대선의 그 날을 ‘악이 드러내놓고 선을 가장하고, 선이 악에게 패배한 날’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염원했던 민주화 20년의 역사는 처음부터 그렇게 잘못 시작되었습니다. 만 17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당시의 저는 그 날의 충격과 비참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국민의 다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정치인들, 운동세력은 독재의 문민화를 전복시키는데 실패했습니다. 독재의 문민화 전략이 먹혀들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명망 높았던 운동가들은 속속 전향 선언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경력은 제도권에서 자신의 입지를 쌓는 업적으로 변신되었습니다. 지역주의가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과거 독재 권력에 뿌리를 둔 정당에 투신해 새로운 지배 권력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민주화 20년의 역사는 동시에 전향의 역사이고, 패배의 역사였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제게 그 같은 일련의 흐름들은 대단한 충격이었고, 저 자신의 삶마저도 굴절시킬 만큼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거의 10여 년 간 냉소와 자기비하를 최선의 방책으로 삼았습니다.

20년 전, 그 날의 나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 혹은 대학생 운동세력으로 하여금 출세와 성공이라는 일반적인 삶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5.18광주’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테러를 가했던 ‘5.18광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나라 대한민국의 본질과 우리 앞에 민주주의의 얼굴로 미소 짓고 있던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고, ‘5.18광주’의 진실을 접했던 우리들은 시대와 양심의 부름에 호응하는 것이 청년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명동성당 시위를 마무리 짓는 비참한 현장에서 저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째. 진실을 깨우치게 된다고 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과 안위를 떨치고 일어나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거나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닐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제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이 싸움은 내가 평생을 전력투구한다 할지라도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목표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란 깨우침이었습니다. 저는 진보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란 당대의 현실을 고민하고,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보는 언제나 현실을 토대로 미래를 상상하는 겁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지녔던 가장 강한 매력은 계급착취가 없고,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대접받고, 존재하는 인간해방의 평등세상이란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상정했습니다. 그것도 마치 역사의 법칙처럼 부르주아자본주의 생산력이 최고조에 달한 뒤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한다는 엄밀한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었지요.

진실이 지닌 거의 유일한 딜레마는 진실이 진실로 존재할 때, 나머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진실 앞에서 종종 저는 그 같은 딜레마를 경험합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그 원인은 진실이지만 그 진실이 진실로 존재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20세기는 러시아혁명이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체제를 실험하고, 결과적으로 그 실험이 실패함으로써 끝났습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우리 인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면서 이를 극복할 만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떠밀려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는 가능하지만, 그 대안이 사회주의 혹은 좌파적 사유 밖에 없느냔 질문에 우리들은 아직까지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담론의 위기’입니다.

그 대안을 마련하기까지 우리는 매우 오랜 세월, 어쩌면 20세기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이었던 석유가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건국 당시부터 미국이 심어놓은 DNA에 따라 미국이 만들어낸 세계체제에 편승해 지금까지 먹고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국을 애지중지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단순히 과거의 혈맹이기 때문이라는 ‘의리론’에 입각해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에 협조하면서 이득을 얻는 작은 제후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민은 때때로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작게는 대한민국의 보수우경화를 걱정해야 하지만 크게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미래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가 오늘날 진보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품어야 할 고민은 근본적입니다. 너무 거창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좌절이라면 좌절이었을 법한 그 경험 이후 97년까지 10년여를 방황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갔었고, 다시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3년여를 보내다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 무렵의 제가 스스로 대단히 불행하다거나 불운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연애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에 대해 받았던 느낌은 오래도록 민감한 상처로 남았습니다. 버림받은 느낌, 상실감, 배신감에 저는 세상을 향해 실천 없는 냉소만을 보냈습니다.

작업장 마당에서 바라 본 작은 하늘

작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 저는 그날처럼 비참하지는 않았습니다. 20년 전의 고등학생 무렵 여드름이 송송 맺혔던 시절 만났던 친구들을 20년 만에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20년 전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이란 결사체를 만들어 함께 활동하고, 거리를 뛰어다니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함께 했던 마지막 날, 농성해산을 결정하면서 들었던 비참함이 워낙 컸던 탓인지 우리들은 2007년의 대통령 선거를 자못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의 제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할 만큼 ‘그날의 기억'들은 현재까지도 제 삶의 중요한 자양분이자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고 있는 탓이었겠지요.

80년대 초반 어느 운동권 학생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이 말이 지극히 오만한 표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비정규직 법안 때문에 강제 해직당한 뒤 삼성 본관 앞에서 시위를 하던 삼성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썼다는 편지글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학교 운동장에 대기하고 있던 삼성 버스를 타고 공장기숙사로 직행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내딛은 첫 걸음은 그대로 학교의 연장이었습니다.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 통과되고 법률이 실제로 적용되면서  강제 해직당한 이 분은 고교를 졸업한 18살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면서 회사와 집, 집과 회사를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고 말합니다. 김진숙 선생의 『소금꽃나무』란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당신이 일했던 시절엔 숙련공이 아니어도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완장 하나 채워주고 관리자 보조로 다른 노동자를 감독하는 일을 시키면서 노동자 사이에도 벽이 만들어지도록 했다고 합니다.

막 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선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길러내는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진학한 셈입니다. 관리자들은 종종 부모인 양, 교사인 양 마치 학생들 다루듯 이들을 훈육했다고 합니다. 볼 일이 있어도 잔업 때문에, 할당량 때문에 쉴 수가 없었고, 자기 맘대로 하루 쉬었다고 해서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닦도록 하거나 일을 시키지 않고 남들 일하는 기계 앞에서 하루 종일 세워두는 것처럼 부당한 처우와 인격모독을 당할 때도 이들은 스스로 항의해볼 생각을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학교에서부터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체념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실제 직장 속에서 경험하듯 말입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요.

이 분을 무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분의 편지를 읽고 난 뒤 저는 돌아가신 제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던 할머니는 나중에 간신히 한글을 떼셨지만 평생 동안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던 외증조부, 당신의 부모님을 원망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끔 저는 할머니의 하늘이 꼭 저만 하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우물 속 하늘을 보고 있을 테지요. 아마도 18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내 공장에서 살아야 했던 그 분에겐 공장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 당신이 알 수 있는 하늘의 전부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 할머니에게 조국이란 과연 슬퍼할 만한 대상이었을까, 조국을 위해 노여워해야 할 무엇이었을까?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됩니다.

되돌릴 수 없는 민주주의, 그러나 소외된 민주주의

저는 노동자의 노동자 정체성 문제는 나중으로 하고, 민주화 20년 동안 진행된 민주주의로부터도 그들이 얼마나 멀리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언제나 과로 체제에 시달리며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리고 쫓기는 이들이라서 이들이 바보 멍청이라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누린 민주화, 민주주의의 진실한 결과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슬프게도 지난 80년대로부터 시작된 민주화는 아직까지 일상의 차원, 문화의 차원까지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좀더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의 과실을 얻어냈고, 우리들 역시 그 수혜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해외펀드에 투자하고, 융자를 끼고 아파트를 구입했고, CMA통장에 월급을 넣어놓고 어떻게 하면 주식 재테크에 성공하여 보다 나은 중산층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 고민합니다. 모든 투쟁은 그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누구도 대신 싸워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아니지만, 청년 세대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 잔을 받고 있지만,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패러다임은 결국 우리 앞에도 쓴 잔을 내려놓을 겁니다.

선거가 있던 날, 친구들을 만나러 가면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 분이 투표를 했느냐고 묻더군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의 개별적인 사안은 구구절절이 진보적인 대안을 찾고, 진보적인 성향의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결론은 이명박에게 투표했단 것이었습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우리 국민의 절반 이상이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지요. 지금 대한민국이 맞닥뜨리고 있는 이 결과,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은 듯 미소 짓고 있는 이 결과는 결국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예전에 했던 소리를 내가 이 나이 먹고도 또 해야 하나?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아니고, 앵벌이도 아닌데 사람들에게 이 체제가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말하기도 귀찮고, 현재의 내 삶이 그럭저럭 살만하고,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가 아닌데 뭐? 다시 말해 이 일이 내 일이 아닌 걸 하며 안주해온 결과란 말입니다. 더 많은 걸 누릴 기회를 얻었던, 이 말은 위만 올려다보지 말고, 밑도 한 번 내려다보란 말입니다. 민주주의를 일상의 차원,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만들어서 모두가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 수 있도록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되는 단계까지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말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아마 그 해 여름도 올해만큼 더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처음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인터넷이란 망망대해에 띄울 때, 아마도 제가 만든 홈페이지는 익명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모래톱 정도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 나름의 시간이 흘러 태풍과 홍수, 범람과 가뭄의 7년 세월을 보내며 “문화망명지”는 익명의 바다에서 모여든 작은 산호와 모래알과 물고기와 이름 모를 2,500여 씨앗들이 날아와 섬이 되었습니다.

처음 홈페이지를 시작할 무렵의 저는 이제 막 결혼을 했고, 갓 서른이 된 이십대의 젊음과 십대 시절을 통과하며 온몸에 맺혔던 고통의 기억들이 생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곳에서조차 저는 종종 사막 한 복판에서 홀로 모래바람에 맞서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했다는 걸 고백하렵니다. 사람으로 나서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믿음을 배신하도록 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니까,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의 부류에서 크게 달라질 수 없다는 거 너무 잘 아니까. 힘이 드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이런 저의 쓸쓸함은 인간은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신념이 소년의 신기루처럼 허망한 유토피아였다는 깨달음, 80년대의 해방적 기획들 속에서 잠시 형성되었던 공동체의 따뜻함조차 알고 보면 거품처럼 얄팍한 것이었다는 서글픈 기억들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의 나는 너무나 자유로웠고, 행복했으며 무엇보다 따뜻했었다는 일종의 향수병 같은 것에서 연유한 것일지도…. 하지만 그 시절이 아무리 좋았다한들 삶은 좋았던 한 시절의 기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시절의 기억이 과연 깊어가는 겨울밤 어린 아이들에게 군밤을 구워주며 그때는 모두의 인심이 넉넉하고 자유로웠던 태평성대였다고 회고할 수도 없었겠지요.

새로운 절망 없이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없다고 짐짓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누군가와 술 한 잔을 나눌 때, 나는 내 말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나쁜 현재 없이는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미래가 정말 나은 미래일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든 홈페이지의 이름이 “문화망명지”인 까닭은 근대 이후, 신(神)이 없어진 시대 이후,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성의 신, 과학의 신, 역사의 신조차 믿을 수 없게 된 오늘날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현실의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현재의 체제를 극복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거기에 도달할 방도가 저라고 해서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다른 세상을 상상해보는 일 이외에 무엇을 또 할 수 있을까?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사랑하는 일이 분명 허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와 같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었던 시대가 지금이 처음은 아니란 겁니다. 같은 의미에서 서구의 중세 기독교 사회야말로 내부와 외부, 인간의 삶과 죽음까지 모두를 기독교라는 거대한 문명체계가 장악했던 시대입니다. 중세의 인간들은 탄생부터 삶과 죽음 그리고 이후의 세계까지 모두를 기독교라는 거대한 문화체계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 속에서도 인간은 다른 세상을 상상했고, 중세시대의 이단자들은 그와 같은 문화망명을 단행했던 이들이겠죠.

만약 제게 어떤 창조성이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서로 소통을 희망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을 7년 동안 한결같이 지속해온 성실성일 겁니다. 하지만 제게 숨겨진 가장 큰 힘은 아마도 누군가와 더불어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기뻐하고 싶다는 결핍의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이에게 절망하면서도 다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결국 희망을 건다는 의미이겠지요. 그것이 아마도 모든 창조자의 힘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저에겐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희망도, 기대도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짓을 왜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사랑하는 일마저 멈춘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고 시시한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것, 어차피 사람은 그 정도 일밖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랑하라!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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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는 어떻게든 살아가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큰 몫이란 생각을 종종 합니다.

리고 가끔 현재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실천 없는 반성을, 사유 없는 실천을 반성하고  또다시 실천 없는 일상을 되돌아 보며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곤 합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에 대해 의문을 가지곤 합니다. 어째서 나는 흙을 일구고 생명을 기르는 일을 택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아늑한 집을 짓는 일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른 새벽 아직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기 전에 길을 닦고, 청소하는 일을 택하지 않았는지 반문해보곤 합니다. 어째서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책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택했는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제 속살 다 내어 바치는 세상 나무들에게,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받아 챙기는 월급이 오로지 저 혼자 일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세상에 책 한 권 펼쳐내는 일이 제 속살 내어 바치는 세상의 나무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지 항상 되살펴 묻게 됩니다. 이를테면 제가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는 밥값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학을 전공했고, 글쓰기와 책읽기,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을 업으로 삼은 뒤로도 이런 일들을 직업으로 택한 데 대한 많은 회의를 품곤 했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으며 자본주의의 음습한 기운이 전세계를 적시는, 희망이 사라진 세기를 살아가고, 비루한 일상 속에서 전망없는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속에서 문학이란, 글쓰기란,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일이란 얼마나 의미있는 일일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시인 함민복이 <긍정적인 밥>이란 시에서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나의 글쓰기에 대한 마음은 이 시인에 비하면 아직 멀기만 합니다.

울 첼란(Paul Celan)이란 시인이 있습니다.

울 첼란은 소련과 루마니아 접경지역에서 태어나 일평생 독일어를 모국어로 시를 쓴  유태계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모국어의 나라인 독일은 파울 첼란을 죽음이 춤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인간의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고, 사람들을 총살하는 동안 동료 유태인 악단은 흥겨운 춤곡을 연주해야 하는 속에서도 파울 첼란은 시를 썼습니다. 파울 첼란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런 자신의 문학을 파울 첼란은 '유리병편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 받을 것인지, 과연 무사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인지 글을 쓰는 이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이 험난한 파도와 암초 사이를 뚫고, 깊은 심연에 가라앉지 않고 누군가, 어딘가에는 닿으리란 희망을 품고 망망대해에 띄우는 편지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듯 당신의 해변 언저리에 무사히 도착한 '유리병편지'를 집어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Ghetto)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유대인들은 전멸의 위기에 직면하자 생존자들이 마지막 힘을 모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 줄 시인 한 사람을 피신시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유태인들의 마지막 희망을 한 몸에 품은 시인 이작 카체넬존은 자신들의 일을 담은 시들을 깨알같이 베껴 여섯 부를 만들어 파묻어 놓은 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가 끝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중 유리병에 넣어 파묻었던 한 부와 가방 손잡이에 꿰매 숨겨 놓았던 한 부가 기적적으로 구해져서 몇 년 전 출판되었습니다.

런 까닭에 저는 거창하게도 '문학이란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데 당신 한 사람이 저 거대한 체제에 반대한다고 해서, 변화와 변혁을 꿈꾼다고 해서, 혁명을 꿈꾼다고 해서 세상이 변할 수 있겠는가' 같은 패배주의적인 말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시대의 급류를 잘 타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는 좌초하여 혹은 말은 그렇게 냉소적으로 했음에도 역시 괴로워하며 불만 많은 소시민처럼 술잔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운명이나 필연, 숙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탁(神託)에 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사가 매양 1+1은 2의 결과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과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고, 늘 왼쪽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인간에 관한 것입니다. 변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고, 인간을 움직이는, 인간을 움직이고자 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사회과학이고 예술입니다.

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한때 그 자체가 혁명적인 행위였습니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 남의 생각에 귀기울이겠다는 마음가짐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일 중요한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 내가 옳은 일이라고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리는 불행히도 당대에 어떤 성과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해서 고대 사회의 노예들이, 중세의 농노들이, 근대의 시민들이 변화와 혁명을 포기했다면 우리는 현재까지도 귀족이나 양반 계급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불가능하다고 믿어지는 일들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 그것들을 일상에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곳, 그 지점으로부터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에게 지금 이렇게 띄우는 '유리병편지'가 고스란히 잘 전달될 수 있을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러나 누군가에게 어느 순간에는 제 마음이 닿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약하지만 이곳에서 작은 출발을 다짐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룰 수 있습니다.
게바라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리가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꿈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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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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