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1.15 유하 - 뒤늦은 편지 (2)
  2. 2010.10.19 유하 - 자갈밭을 걸으며
  3. 2010.10.15 유하 - 흐르는 강물처럼
뒤늦은 편지

- 유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개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 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그랬다면 후회가 없었을까? 묻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만약 진정으로 후회가 없고자 했다면 사랑하기 전에 이미 떠났어야 할 일이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뒤엔 '사랑도 감동도' 없다.
오직 '나'만 그렇게 홀로 남겨진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현종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0) 2010.11.19
박정대 - 그녀에게  (1) 2010.11.18
마종기 - 낚시질  (1) 2010.11.17
공광규 - 나를 모셨던 어머니  (3) 2010.11.17
이영광 - 숲  (0) 2010.11.16
유하 - 뒤늦은 편지  (2) 2010.11.15
김선우 - 사골국 끓이는 저녁  (0) 2010.11.15
장영수 - 自己 自身에 쓰는 詩  (1) 2010.11.13
김형영 - 갈매기  (0) 2010.11.12
김해자 - 바람의 경전  (1) 2010.11.11
최금진 - 끝없는 길, 지렁이  (4) 2010.11.10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자갈밭을 걸으며

- 유하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재잘거리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밞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터럭만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나는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 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감
으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

나, 그대가 익숙해졌다.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대의 허접한 육신.
풍성한 유방.
작고 귀여운 유두,
굴곡진 허리.
풍만한 엉덩이.
비너스를 닮은 복부의 계곡.
나는 이기적으로 그대의 몸을 짓밟는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지저귀는 건 참새가 아니라 인간.
내가 그대를 짓밟는 것인지 그대가 나를 짓밟는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해는 이미 저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두려운 것은 낯선 것이 아니다.
낯선 그리하여 날선 세계의 경계가 작두처럼 푸르게 날을 세운.
세운 것이 어디 날 뿐이랴....
날밤을 세우고, 성기를 세우고, 사람들을 줄 세우고

나는 시인의 염치없음. 혹은 그 시를 읽으며 염치없어 하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자갈이 되어주길 꿈꾸었다.
이 시의 맹점은 "서로를 위해"라는 말에 있다.
자갈이 되려거든 혼자 되어라.
아니면 나 그대를 위해 자갈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댈 위해 사뿐히 즈려밟는 꽃이 될 기회를 포기한 이들의 사랑.
현대의 호사스러운 사랑은 더이상 누군가를 위해 일방적인 자갈이 되길
포기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갈이 되길 포기하고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 말한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이 시인이 끝끝내 배반 때리는 순간.
그가 두려운 것은 굳은 살이다.
낯익음.
뻔뻔함.
닳고 닳음.
사랑에 군살이 붙은 것이 결혼일까?
사랑에 굳은 살이 배인 것이 결혼일까?

나 그대를 위해 한 알의 자갈이 되긴 어려워도
나 그대때문에 굳은 살이 배이는 것은 참기 어렵다.
그 굳은 살은 무엇인가?
낯익음, 뻔뻔함, 닳고 닳음.
아니, 그렇지 않다.

그건 철면피하게도 사랑에 대해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다.
시인은 사랑이란 말을 단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긍정의 사랑이 아니다.
자갈과 자갈이 부대끼며 깨지고 닳고 다는 데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며 깨지고 닳고 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극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두터워진다.

견딜 수 있으면 사랑이 아니다.
견딜 수 없어야 사랑이 아닌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흐르는 강물처럼

- 유하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힘만으로
생명의 산소를 만들고 서로의 잎새를 키운다네
친구여, 그대가 혼자 걸었던 날의 흐르는 강물을
부디 잊지 말길 바라네
서로를 주장하지도 다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처럼
그대도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스며드는 곳에서 삶의 심연을 얻을 거라 믿고 있네
그렇게 한 인생의 바다에 당도하리라
나는 믿고 있네


*

내가 믿는 것은 과연 사람.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을 믿는다는 것도, 아니면 인간이 동물이 아닌 어떤 존재라는 사실도 아니다. 단지 그와의 시간과 추억과 공감들을 그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을 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믿음으로 나를 믿을 수 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옛사람들은 말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이 두 가지의 각기 다른 물성을 지닌 개념과 오브제는 하나의 상징으로 만나게 된다. 솔직히 시험 문제가 어려웠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마음 아플 줄 안다. 그외도 많은 어려움들이 우리 주변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다는 자명한 현실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로부터 나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위의 시를 읽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을 찾아주기를 바란다. 세월이 유수와 같은 이유는 그것이 단지 되돌릴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격랑으로, 때로는 거울처럼 투명한 심연의 빛깔로 매양 각기 다른 모양새를 우리를 찾아들기 때문이 또 아닌가?

지금의 난관이 당신의 인생의 든든한 계단이 되어줄 것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고비를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나는 우리가 결국 인생의 망망대해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임을 믿는다.
나는 그대가 잘 해낼 것임을 믿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