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권력의 달콤한 유혹



초콜릿 전쟁 - 청소년 문학선 10 | 원제 The Chocolate War (1974)
로버트 코마이어 (지은이), 안인희 (옮긴이) | 비룡소


전교조 문제로 뜨겁던 여름이 지나간 1989년의 어느 가을 나는 모교의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후배가 수업 시간 중 교사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기 몇 명과 병원을 찾았다. 선배랍시고 찾아간 우리들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들고 간 꽃다발을 병에 꽂아주고, 음료수를 권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들은 만약 네가 원한다면 이 문제를 민주동문회 차원에서 다루도록 애써 보겠다는 말을 해주었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후배는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며 어머니를 불렀고, 우리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 안에서 후배의 울부짖는 고함이 들려왔다. “선배, 절 이용하지 마세요.”

성장소설의 전형을 탈피한 성장소설, 『초콜릿전쟁』

사적인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한 것은 로버트 코마이어의 『초콜릿전쟁』이 내게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어 몇 번이나 책을 덮도록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영감을 아들 필립이 학교에서 전통적으로 실시하는 초콜릿 판매를 거부한데서 얻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이 작품이 오늘날 미국의 청소년 소설을 대표하는 지위에 올랐으나, 처음 출판되기까지 그리고 출판된 이후에도 적지 않은 논란을 겪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출판되기까지 주요 출판사 일곱 군데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했고, 출판된 이후에는 학교와 도서관에서 강독 금지와 대출 금지 같은 검열과 투쟁해야 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그들이 그를 죽였다”로, 마지막 문장은 “아치와 오비는 아무 말도 없이 그곳에 잠시 더 있었다. 그런 다음 어둠 속에서 그 장소를 떠났다”로 마무리된다. 앞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읽고 중간 부분을 유추해보면 마치 1930년대 유행했던 대쉴 해미트나 레이먼드 챈들러 풍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들이 떠오른다. 그 만큼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우며, 청소년 소설은 밝고 명랑한 것이라는, 최소한 희망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기존의 청소년 문학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성세대의 희망이다. 기성세대들은 청소년 문학을 통해 미처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성장소설(Bildungsroman)에서 성장(bildung)이란 한 인간의 자아가 갈등을 겪으며 성장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콜릿전쟁』은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범주에 들기 어려워 보인다. 이 소설은 자아 형성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한 인간의 자아가 망가지는가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성장소설에서 주인공은 세상과의 갈등을 통해 성장하고, 사회와의 화해를 모색하며 어른이 되어 간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제리 르노'와 그를 괴롭히는 '아치 코스텔로'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각각의 이유로 끝끝내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다. 주인공 제리는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생활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그는 학창시절 동안 풋볼팀에서 뛰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을 품고 있으나 학교의 전통 행사인 초콜릿판매를 거부하면서 그의 소망은 철저히 망가진다. 야경대의 우두머리인 아치는 매우 냉소적인 인물이다. 그는 교사의 권위조차 비웃을 만큼 영악한 존재이면서 타인을 제 마음대로 부리고, 골리는 권력을 즐긴다. 아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모든 아이들을 장악한다는 즐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제리는 타의에 의해서, 아치는 자의(?)로 세상과 화해할 수 없었다.

내 감히 우주를 어지럽히랴

국가가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듯, 교육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사회의 통제와 폭력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학교란 공간에는 두 개의 권력, 공식적 권력인 교사들과 학생들 사이에 존재하는 비공식적 권력(폭력)이 존재한다. 트리니티엔 레온 선생과 교사들이 묵인해온 비밀 서클 야경대가 그런 비공식적인 권력이다. 야경대의 우두머리 아치는 폭력을 사용하는 대신 비밀 과제를 내주고 강제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통제해왔다. 그의 권위는 야경대 비밀 과제를 수행해 본 아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제리가 처음 초콜릿 판매를 거부했을 때 같은 반 급우들은 누구나 이것이 그에게 내려진 야경대의 과제라는 것을 알아챘다.

차기 교장 자리를 노리는 레온 선생은 평소보다 무리한 초콜릿 판매를 강제하기 위해 야경대를 동원한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치는 평범한 신입생에 불과한 제리가 자신의 의지로 초콜릿 판매를 거부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장난스럽게 과제를 주었다. 그러나 제리가 자신의 의지로 야경대가 지시한 기간이 지나서까지 초콜릿판매를 거부하면서 그들이 장악한 작은 우주인 학교의 권력 질서에 균열이 일어난다. 권력은 겉으로는 매우 견고한 듯 보이지만 단 한 명의 어린 학생이 용기 있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순간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 그런 점에서 제리의 사물함에 붙어있는 포스터“내 감히 우주를 어지럽히랴?”라는 구절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렇듯 학교를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 내지 축도로 읽을 수 있기에 교육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작품만으로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이 있고, 특히 황석영의 단편 『아우를 위하여』는 갈등 구조와 사건의 전개 과정이 『초콜릿전쟁』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아우를 위하여』의 주인공 “나”는 주먹대장 영래 패의 전횡에 맞서 반 아이들과 합세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순간 승리를 거둔다. 제리의 저항을 바라보면서 학생들은 잠시 자신들에게 떠안겨진 부당한 요구를,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이런 기분은 전교 400여 학생들 사이로 전파되고, 초콜릿 판매는 부진을 면치 못한다. 자신의 야심을 위해 초콜릿판매를 포기할 수 없는 레온 선생은 아치에게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도록 요구하고, 제리의 거부는 아치와 야경대의 지위마저 흔든다.

그러나 제리는 승리하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을 다룬 두 작품에서 그가 승리할 수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큰 차이는 『아우를 위하여』에서의 영래패는 단순한 폭력집단인데 비해, 야경대는 대중의 심리를 조작할 정도의 영악함을 지닌 상대였기 때문이다. 야경대는 대중을 공범으로 삼을 만큼 교활했다. 제리의 거부에 마음이 쏠렸던 학생들은 야경대가 조작해낸 영웅놀이에 휩싸여 초콜릿판매를 학교의 이념에 대해 개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용기와 헌신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대목은『초콜릿전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알레고리 구조를 가진 소설이란 것을 반증해준다. 작가는 주인공을 정면에 배치시켜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대상화시켜 소외하지도 않는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다. 마치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시선처럼 파편화된 여러 학생들을 소개하며, 각 개개인들을 인터뷰하듯 다룬다. 각자 인격과 개성을 갖춘 이들은 아치와 야경대의 선동과 조작을 통해 제리를 소외시키는 몰개성의 집단으로 변모한다.

제리는 갑자기 “완전히 투명한 유령”처럼 취급된다. 『아우를 위하여』와 『초콜릿전쟁』에서 두 주인공이 상대해야 하는 대상의 차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교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레온 선생은 그가 가진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마치 나치 선전상 괴벨스처럼 학생들의 심리를 왜곡시킨다. 학생들은 부당한 대우를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인생이 부패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진정으로 이 세상에 영웅은 없으며,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조차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에 비해 황석영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교사는 “애써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무서워만 하면 비굴한 사람이 된다”고 일깨워준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리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초콜릿판매는 성공리에 마무리된다. 교활한 아치는 제리를 본보기 삼아 다시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가 생길 수 없도록 하고 싶었다. 진저를 내세워 제리를 호모라 욕하고, 린치를 가했던 아치는 교활한 제안을 한다. 제리에게 명예를 회복하고, 복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권투시합을 주선한 것이다. 평범한 소년으로, 개인적인 원칙을 고수하고 싶었을 뿐인 제리는 함정에 빠진 검투사처럼 보다 많은 피와 폭력을 요구하는 군중(학생)의 아우성에 파묻히고 만다. 『초콜릿전쟁』을 읽으며 제리를 응원하고, 해피 엔딩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맞닥뜨릴 사회는 과연 학교의 현실보다 덜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우리는 과연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양심의 원칙들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는『초콜릿전쟁』을 통해 개인의 사소한 일탈행위를 처벌하는 국가주의와 집단의 광기,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원리와 작동방식을 떠올릴 수 있다.

청소년 소설로서는 너무 암울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냔 의문에 대해 작가는 “물론 슬픈 일입니다. 현실과 마주한다는 것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버랜드에 살게 될 뿐입니다. 그곳은 성장도 승리의 가능성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최근 내가 알게 된 사실 한 가지, 후배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선생님은 아직도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뼈아프지만 그것이 우리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초콜릿전쟁』은 분명 해피엔딩이 아니다. 권투시합 끝에 쓰러진 제리는 친구 구버에게 “속임수야. 우주의 질서를 방해하지마라, 구버, 포스터가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라고 충고한다. 제리에게 세상은 속임수였고,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제리의 목소리에서 1989년 후배의 고함을 느꼈다. 세상은 평범한 소년에게 조그만 통로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이 작품은 불행한 결말을 통해 현실이 비록 절망일 뿐이라도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절망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은 채 남이 시키는 대로만 살면 인생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출처 : 창비어린이 7호(200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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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레드 콤플렉스 - 강준만 외 | 삼인(1997)

우리는 어떤 영화배우나, 감독들에 대해 알고 싶을 때 ‘필모그래피(filmography)’란 것을 살핀다. 필모그래피란 ‘특정 배우감독의 작품 리스트; 영화 관계 문헌’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그라피(graphy)’란 말을 동양의 그것으로 바꿔보면 대략 ‘~지(誌), ~기(記)’의 뜻을 갖는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기록을 일대기(一代記)라고 할 때의 그것과 같은 말이다. 어떤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그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궁금해지고,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영화보기, 영화읽기 하는 것은 오늘날 영화에 취미를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해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만큼 대중적인 시도인데, 종종 어떤 배우들은 그에 대해 처음 받았던 인상과 달리 도대체 이런 영화엔 왜 출연했지 하는 의문이 들만큼 형편없는 영화들에 출연한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이것을 영화배우의 것이 아니라 일반인으로 바꿔 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경력(經歷) 혹은 이력, career, record라고 한다. 이것이 곧 ‘a personal history’이고, 한 개인이 삶으로 증명해낸 자신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배우가 연기는 잘할지 몰라도 시나리오를 볼 줄 모른다거나, 배우로서의 자의식은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필모그래피는 영화배우나 감독들이 남기는 인생의 긴 꼬리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꼬리 혹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강준만 교수에 대한 열혈 팬들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역시 그가 만들었던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의 시도가 우리 사회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영화 <넘버3>에서 최민식이 한석규와 한바탕 주먹질을 한 뒤 떠들어대던 이야기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니….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 저지른 사람이 죄지.” 우리 사회는 종종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책임으로부터 면책되어도 이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용인하는 집단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강준만 교수가 시도한 ‘인물비평’이란 그 성격상 지니고 있는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임이 방기되고 무화되어 버리는 우리 사회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을 긁어주는 효자손이자 인물의 사후에 발행되는 평전(評傳)의 전통조차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인물의 생전에 펼쳐지는 평가란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레드 콤플렉스』는 강준만이 추구하던 인물비평에 대한 시도가 일반 출판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것이 지난 1997년의 일이니 과거를 쉽게 잊는 우리네 관행에 따르면 잊힐 법도 하다. 물론 거기엔 인물비평보다는 다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침잠해 있는 듯 보이는 강준만의 발언들이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지 못하는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는 질기고 오래간다. 『레드 콤플렉스』, 일명 적색공포증이라 할 수 있는 이 질긴 광증(狂症)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이다. 그 공포의 핵심은? 이것을 외부적 요인이라 해야 할지, 내부적 요인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북한의 존재’이란 실체적 그림자 혹은 유령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에 의한 적화통일 야욕’이다. 탈북이 홍수를 이뤄 우리 정부도, 이를 부추기거나(?) 돌보고 있는 NGO들조차 뒷감당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자신이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문제를 두고,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잠시 후 대법원에서 이례적인 언사로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강하게 주문하고 나섰다. 이 책은 노무현 정권의 출현 이전에 나온 책이다. 그런 까닭에 손석춘은 이 책의 총론격인 「왜 레드 콤플렉스가 문제인가-적색 공포증 조장에 앞장선 한국 언론」 이란 글을 통해 『레드 콤플렉스』의 질긴 뿌리의 한쪽이 착근해 있는 곳, 이를 다시 널리 유포시키고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제의하고, 대미공조보다 민족공조가 우선할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어떤 의미에서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런 거침없는 언사는 역시 ‘YS’니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그가 이런 언사들을 해준 덕으로 뒤이은 DJ 정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조차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언론에 의한 조문 파동을 겪으며 전면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책이 나온 뒤 우리는 몇 차례에 걸쳐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룩하고 있다.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말하고 이제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확실한 민주주의 체제를 떠올렸다. 매우 더디게 진행되긴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출범 이후 언론개혁의 진전은 최소한 방송사에서만큼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비록 안티조선 운동이 <조선일보>의 수적인 우세를 잠재우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일반인들에게 <조선일보>가 지닌 어떤 폐해(?)들, 그들의 정체성을 실감하게는 해주었다. 물론, 언론에 의한 레드 콤플렉스 유포는 현재에도 여전하며, 그들의 국가안보상업주의 역시 더욱 공고해지면 했지, 덜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현상 하나를 발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가 사실은 얼마나 깊은 뿌리를 지녔고, 깊이 은폐되어 있었는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신시절 유신헌법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변호사시험에 통과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매우 정치적인 수사법이면서 동시에 작금의 상황을 미리 예견한 듯한 언급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나온 지난 1997년은 우리나라 법조계 초유의 법조비리로 몸살을 앓았던 해이기도 하다. 지난 1997년 의정부 법조인들과 1998년 대전 법조인들의 비리와 부패가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이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란 사실을 실감했고, 반대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진일보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5.16 군사쿠테타 이후 군부독재정권은 삼권 분립을 약화시키고, 법조인들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기 위해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철퇴로,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승진을 비롯한 각종 혜택으로 길들여 왔다. 그 결과 1997년 이전까지 우리는 비록 법조계가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더라도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 그것은 정통성 없는 정부가 법조인들의 비리와 부패를 사실상 통제하지 않고 방치한 결과물이었다.

지난 97년 법조비리 사건 이후 우리 사법계는 자정노력과 더불어 구조개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헌법정신을 수호하는 법조계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검찰을 통해 제기된 구속영장이 전직 판사라는 이유로 기각되는 일이 잇따르며 사법계 내부에 온존하고 있는 뿌리 깊은 특권의식이 여전함이 드러났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이라는 반인권적, 반헌법적 법률을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등, 시대정신과 우리 헌법 정신을 과연 온당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책 『레드 콤플렉스』에서는 박홍(전 서강대 총장), 이문열(소설가), 김영삼(전 대통령), 한완상(통일부 총리), 김대중(전 대통령), 리영희(교수), 조정래(소설가), 윤이상(작곡가), 서준식(인권운동가) 등 아홉 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때로 가해자로 혹은 때로 피해자로 이 책에 의해 호명된 이들이다.

작가 조정래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두 통의 유서를 작성했다. 동료작가가 작품 발표를 위해 두 통의 유서를 쓰는 동안 다른 한 명의 작가는 200만부 판매기록을 남기는 대베스트셀러 작가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그런 그가 바뀐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최근 이런 글을 남겼다.

“레비스트로스는 백인도 인디오도 서로에게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상대를 짐승으로 의심했던 쪽보다는 신이 아닌가 의심했던 쪽이 더 인간답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와 같은 태도다. 우리가 빠져 있는 대립과 갈등이 어떠한 것이건,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을 길러보자.”

그는 현재 우리 사회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상호간의 몰이해와 불화 속에 갈등국면을 고조시켜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나는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지난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저런 글을 썼다면 그를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 존경했을 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이들”에 대해 서로 존중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하자는 말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국가정보부의 남산 지하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던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이들”에 대해 그간 이문열이란 작가가 보였던 모습이나, 안전기획부에서 용공조작과 고문으로 심신을 상해 끝내 유명을 달리 해버린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처했던 현실에 비해 지금 과거사 규명과 청산 작업이 결코 더 잔인할 수는 없다. 그때 그들에게 보장되어야만 했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은 바로 그때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누리는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라는 합법적인 힘의 균형 장치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 역시 바로 그러한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런 시기엔 권력의 시녀, 권력의 시종장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영화배우들조차 과거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의 이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정치인, 법관, 학자, 시인이든 현재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과거 그의 걸음걸이를 살피는 일 역시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삼권분립의 보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역시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당신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은 웬일일까. 언젠가 “그 시절, 국보법 폐지를 반대한 법관들”이라는 제명으로 당신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다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눈 덮인 들녘을 지나 갈 때에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지 말라. 오늘 남긴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나는 언젠가 이 책 『레드 콤플렉스』가 더 이상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길 소망해본다. 그러나 오늘 다시 이 책을 펼쳐 읽으며 새삼 마음이 아픈 것은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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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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