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10.24 이문재 - 마흔 살
  2. 2011.07.11 이문재 - 푸른 곰팡이
  3. 2010.12.21 이문재 - 물의 결가부좌

마흔 살

-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나이를 먹으면 옛날일은 바로 어제 일 같이 생생한데
어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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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곰팡이


-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혹은 '템푸스(Tempus)'로 구분될 수 있다. 크로노스는 객관, 물리적 의미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주관, 감정적 의미의 시간, 다시 말해 시간을 감지하는 자신이 의미를 느끼는 절대적 시간이다.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족들은 사사(sasa)와 자마니(zamani)라는 독특한 시간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죽은 이를 기억하는 한, 죽은 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사'의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이들마저 모두 죽어서 더이상 기억해줄 사람이 없을 때 망자는 비로소 영원한 침묵의 시간, 즉 자마니로 떠나게 된다.


이처럼 '크로노스의 시간'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지만 '카이로스(템푸스)의 시간'은 죽음마저도 초월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인 이문재의 표현을 빌자면 그건 아마도 '발효의 시간'일 것이다. 추억도 초고속으로 팔아먹는 세상을 경고하는 데 '빨간색 우체통'만한 것도 없으리라. 빠르게 살아서 빠르게 잊혀지던지 느리게 살아서 오래도록 기억되던지 그건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시간이다. 오래도록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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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유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없느냐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연근이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잉어가 부레를 크게 하는 소리, 진흙이 뿌리를 받아들이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는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 ―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 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 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 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자리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 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 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 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문장웹진 6월호>


*

이문재 시인의 <물의 결가부좌>에 감상을 적는 건 어렵고, 해설을 다는 건 쉽다. 말이 끊어진 곳에서 감상(感想)이 열리기 때문이다. 해설 다는 건 쉽다고 앞서 말했지만 그건 이미 물과 연못과 연에 대해 수많은 말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말문에 한 마디 더 보태는 것이 무엇이 어려울까. 나는 이 시가 법문(法問) 같다. 그러나 노 선사의 추상같은 ‘할’ 고함이 아니라 어린 동자승을 무릎에 앉혀놓고 까까머리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연못을 함께 바라봐주는 노 선사의 말없는 법문 같다. 가뜩이나 말 많은 세상에 이 좋은 시를 그저 말없음표로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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