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11.03 이병률 - 스미다
  2. 2011.06.23 이병률 - 사랑의 역사
  3. 2011.04.21 이병률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1)


스미다


-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


시를 읽으니 갑자가 울진 바다 냄새가 코끝에 싸하게 스민다.
나도 울진 여자 한 명 알고 있다. 눈이 커서 눈물 많은, 입이 커서 말도 많고, 손이 커서 정도 많고, 발이 커서 가고 싶은 곳도 많은 여자인데 울진을 떠나지 못하는 건 왜 일까?


서러움 가득 출렁이는 허리,
산만한 내 덩치로도 모두 안을 수 없는데 그 큰 눈에 담긴 바다를 모두 퍼올리면 하얀 소금꽃이 뚝뚝 떨어질 울진 여자, 울진 누이. 손 한 번 덥석 잡아주지 못하고 돌아서 내가 우는 그 여자

울창한 푸른 눈물 그득 고여 바다가 되고 포구가 되었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사랑의 역사


- 이병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쳤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출처 :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

그(녀)에게 갔던, 그(녀)에게 향했던 무수한 발 걸음, 말없이 되돌아 서야 했던, 거절당했던 막다른 벽에 버티고 서서 간신히 삶을 추어올리고 되돌아서야 했던 그리하여 말도 못하고 '음' 한 마디로 되돌아서야 했던 소리없이, 존재감도 없이 언제인가 알아주리라 믿었던 세월... 나는 모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이병률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헌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 줄 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 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
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
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어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 보아라

*

누군가는 내게 엉엉 소리내어 당신의 슬픔을 보여주고, 간다. 누군가는 내게 당신의 기쁨에 대해 소리내 웃으며 털어내고, 간다. 누군가는 또 내게 당신과 나만이 간직하길 바라는 비밀을 나직하게 들려주고, 간다. 누군가는, 또 누군가는 내게 당신의 가슴을 짖누르는 무거운 돌 하나 들어서 내게 덜어내고, 간다. 모두 가버린 뒤에 내게 남아있는 건 누군가가 보여준 슬픔, 누군가 털어낸 기쁨, 누군가 들려준 비밀, 또 누군가 올려논 돌덩이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친구 아직도 살아있나? 들여다보고 간다. 꿈틀꿈틀 또아리 튼 슬픔과 기쁨, 비밀이 오래 묵은 술처럼 말 없이 삭혀져 간다. 지독하게 쓰고 달콤한 술 한 잔이 내 가슴에서 익어간다. 간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