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1

-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일번지 포카라에 들어서는 초입에서 바라본 마나슬루 


탈출인가, 출장인가?
11월 18일(금) 아침에 네팔 카트만두로 떠나 11월 26일(토)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7박9일 일정의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은 새얼문화재단이 기획하고 있는 힌두·불교문화권 탐방 시리즈의 사실상 두 번째 일정이다. 인도는 이미 한 차례 다녀왔고, 아마도 다음 기행의 목적지는 티베트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인도 기행은 재단의 다른 분이 수행하고 다녀왔는데 어쩌다보니 이번 네팔 기행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가 수행하게 되었다.


2011년은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한 해였다. 2009년 8월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매월 혹은 격월로 「현대일상의 지배자들」이란 연재를 시작했다. 기업문화 혹은 기업을 중심으로 한 변화와 혁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고,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에 대해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내용인데 매월 100매에서 120매가 되는 글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올 연초에는 피로가 겹친 탓에 면역력이 떨어져 그만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며칠씩 회사를 결근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연평도 포격 사건까지 벌어져서 마약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를 먹으며 연평도 주민 돕기 운동을 위해 연평도 현지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가정적으로는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한 노력에도 쉬이 들어서지 않던 아이가 태어나 첫 돌을 지내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상황이었던 터라 직장과 가정, 거기에 부수적으로 연재하던 원고까지 겹치면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져 있었다. 그런 일들이야 남들도 살면서 겪어내는 수고로움이었을 터이니 나만의 괴로움이라 말할 순 없어도 거기에 더해 내 자신이 자초한 괴로움들마저 있어 올해는 청소년기를 제외하고 내 생애에서 살아내기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이런저런 피곤함과 삶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에 굳이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11월 18일 출국하기 전 날까지도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계간 『황해문화』의 최종 마감 원고를 붙들고 있었는데 편집장으로서 떠나기 전 최종본까지 살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출발 12시간 전에야 부랴부랴 여행용 가방을 꺼내 옷가지를 넣었다 빼다를 반복하며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그런 부산함 덕분에 어딘가 떠나기 전의 여행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여행의 설렘은 내겐 대단한 사치였고, 당장 네팔의 현지 기후가 어떤지 제대로 알아볼 시간마저  없어 트위터에 11월 현재 네팔 기후가 어떤지 대놓고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네팔에 다녀온 어떤 이가 네팔의 11월은 한국의 초가을 날씨라 다니다보면 도리어 더울 수 있고, 일정 중에 포함된 룸비니 같은 곳은 초여름 날씨에 가까우니 여름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얻었다. 만약 그 조언이 없었더라면 7박 9일의 일정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을지…. 부랴부랴 여름옷 한 벌을 챙겨 넣을 수 있었다.


새얼문화재단은 1년에 한 차례씩 국내 역사기행과 해외 문화기행을 떠나는데 국내 역사기행은 대략 100여명 안팎의 대규모 인원이 2박 3일의 일정으로 함께 먹고 자며 이동하면서 국내의 여러 역사 유적들을 찾아간다. 이에 비해 해외 문화기행은 경비와 일정 문제 등으로 국내 역사기행에 비해서 비교적 소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행사이긴 하지만 참가인원은 여행지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서도 유동적이다. 그러나 이번 네팔·히말라야 기행은 처음부터 30명 이내로 인원 제한을 두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처럼 인원 제한을 두게 된 것은 네팔 현지 사정이 그 이상의 인원이 함께 여행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을 만큼 불편한 탓이 컸다. 결국 나와 한국 가이드, 현지 가이드 포함해 모두 26명의 인원이 이번 문화기행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게 되었다.

 


부대끼는 마음을 뒤로 하고 9시 45분에 출발하는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였다. 일행들을 먼저 나와 영접한다고 내 딴엔 일찍 출발해 도착했는데도 공항 장기주차장에 주차한 뒤 3층 출국장 만남의 장소를 찾지 못해 약간 헤맨 탓에 약속장소에 가보니 이미 많은 분들이 도착해 있었다. 네팔로 출국하기 전 휴대폰 로밍에 대해 문의하고,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며칠 전 구입한 네팔 안내 책자를 펼쳐들었다. 내가 구입한 책은 한국의 랜덤하우스가 일본의 다이아몬드 빅사와 출판계약을 맺어 한국판으로 펴낸 <세계를 간다> 시리즈의 네팔 편이었는데, 원래 여행안내서로 가장 유명한 론리플래닛 시리즈의 네팔 편을 구입하려고 찾아보다가 론리플래닛 시리즈가 편집이나 내용 구성이 매뉴얼스러운데 비해 종합적으로 보아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내게는 좀더 적합할 듯 싶어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운 편이었는데 <세계를 간다>가 한국이나 일본의 여행자 스타일을 좀더 고려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네팔, 히말라야 그리고 마나슬루
나에게 네팔이란 나라는 아버지의 꿈이 서린 곳이다. 처음 네팔이란 나라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꼭 한 달 간격으로 잇따라 세상을 떠난 1979년 겨울부터 이듬해 1980년 연초까지 그 해 우리 집안은 사실상 풍비박산이 나있었다. 당시엔 아직 철없던 어린 시절이라 앞으로 닥쳐올 내 앞의 삶이 지닌 무게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었다. 그 무렵 내 눈에 띈 것은 책꽂이 한 구석에 꽂혀 있던 김정섭이 지은 『집념의 마나슬루』란 책이었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마나슬루(8,163m)가 히말라야 14좌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고, 8,000m급 이상 봉우리 중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된 산은 안나푸르나였다.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게 제2위의 높이를 자랑하는 K2는 난공불락의 어려움으로 인해 악명을 떨친 탓에 유명하고, 낭가파르바트는 목숨을 건 산악인들의 도전이 빛나는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가장 많은 산악인들을 집어 삼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마나슬루는 그렇게 주목받을 만한 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슬루는 한국과 일본의 산악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산이다. 다만 한국의 산악인들에겐 집념과 도전의 산으로, 일본의 산악인들에겐 영광의 산으로 기억된다.




마나슬루(Manaslu)는 산스크리트어로 ‘영혼’이란 뜻을 지닌 마나사(Manasa)에서 나온 말로 ‘영혼의 땅’, ‘영혼의 산’이란 의미를 지닌다. 마나슬루가 처음 산악인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네팔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950년 영국의 W.틸만(H.W.Tilman) 등반대가 마나슬루 일대를 정찰하면서부터였다. 네팔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뒤 서구의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코트 원정대가 펼쳤던 극지원정 경쟁, 올림픽을 통한 스포츠 경쟁이 그렇듯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히말라야 초등 경쟁은 각국의 산악인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벌이는 치열한 레이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경제적인 여유를 갖춘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알피니즘이란 말 자체가 애초에 서구에서 출현한 용어인 것처럼 그들은 알프스, 힌두쿠시, 알래스카 등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며 세계 알피니즘의 역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14봉 등반 경쟁에서도 역시 그들이 앞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영광을 상실한 영국은 특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독일은 낭가파르바트(8,125m)에 줄기차게 도전했다. 독일이 낭가파르바트에 집착한 것은 아마도 세계 최초로 아이거북벽을 정복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경험과 역사가 배어나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티벳에서 보낸 7년>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높은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산악인 힐러리 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1953년 5월 29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존 헌트 경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초모룽가)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남성으로 태어나 현장 언론인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자신의 성정체성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 있음을 깨닫고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된 특이한 이력의 언론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쟌 모리스가 펴낸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여행』에 감격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쟌 모리스는 특파원으로 영국원정대를 동행취재하면서 힐러리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특종 보도하는 영광을 누리며 언론인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된다.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우리 앞의 낡은 박스 위에 앉은 저 두 사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우리 밖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날은 너무나 밝았다. 눈은 그지없이 뽀얗고,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렀다. 대기는 아직도 온통 흥분으로 들끓는 듯 했다. (쟌 모리스, 박유안 옮김,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 여행1-에베레스트부터 성전환까지』, 바람구두, 2011, 22쪽.)



쟌 모리스가 타전한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뉴스가 영국에 도착한 것은 때마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날(1953년 6월 2일)이었다. 영국 전역은 새로운 여왕의 등극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접하며 열렬한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히말라야에 등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처럼 히말라야 등정이란 사건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뉴스라고 생각했기에 국가적인 지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역시 태평양전쟁의 패전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에 성공하면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으로 마이니치(每日)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일본 산악회가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대를 파견했다. 마나슬루에 대한 사전정보가 부족했던 일본원정대는 초기엔 틸만 원정대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만으로 시작해 마나슬루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했고, 등정 가능한 코스를 여러 차례의 사전 원정으로 파악한 뒤 1956년 유코 마키가 이끄는 12명의 대원과 20명의 셰르파로 구성된 등반대가 본격적인 마나슬루 등정에 나서게 된다. 이들 원정대는 같은 해 5월 9일 토시오 이마니시와 셰르파 갈첸 노르부, 두 명이 정상 공격에 나서 마침내 마나슬루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록 우리와는 민족적 감정이 뒤얽혀 있는 일본원정대에 의한 마나슬루 초등이었지만 이것은 서구 산악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히말라야 8,000m급 초등 경쟁에 동양의 산악인들이 뛰어들어 이룩한 최초의 쾌거였다. 이후 중국원정대가 1964년 시샤팡마(8,046m)를 초등(시샤팡마는 네팔이 아니라 티베트, 중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구 원정대가 도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14좌 봉우리 중 두 곳을 일본과 중국이 초등하는데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 원정대의 마나슬루 초등을 도우며 함께 했던 셰르파 갈첸 노르부는 1955년 프랑스 원정대와 함께 마칼루에 오른 데 이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8,000m급 2개봉을 초등한 사람이 되었다. 당연히 일본은 이들의 마나슬루 등정을 범국가적으로 축하했다.




16명의 한국원정대를 집어삼킨 마나슬루

 

일본은 이후에도 마나슬루와 끈질긴 인연을 이어가는데 1971년 마나슬루 북서릉을 오르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고, 1974년엔 동릉을 통해 일본의 여성원정대 대원 3명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하면서 여성 최초의 8,000m 봉우리 등정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는 등 마나슬루는 ‘일본의 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본과 깊은 인연(일본의 등산용 석유버너 중 마나슬루의 이름을 딴 제품까지 있었을 정도)을 맺게 된다. 우리나라가 히말라야 등정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일본보다 뒤처진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울라기리 2봉(7,751m)에 대한 정찰등반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는 사실상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이 완료되어 가던 시점이었는데 이후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마나슬루에 도전하기까지 1971년 한국산악회가 추렌히말(7,371m)에 등반한 것이 우리가 경험한 히말라야 원정의 전부였다.


한국의 마나슬루 제1차 원정 당시 김정섭은 직접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뒷받침하면서 실질적으로 원정대를 꾸린 당사자였다. 그러나 제1차 마나슬루 원정대는 김정섭의 동생으로 원정대에 참여한 산악인 김기섭을 불의의 사고로 읽은 뒤 철수하고 만다. 김기섭은 한국인 최초의 히말라야 희생자였다. 『집념의 마나슬루』는 자신이 빠진 채 진행되었던 제1차 마나슬루 원정에서 동생 을 잃은 슬픔과 비탄 속에서 동생의 시신을 찾아 고국으로 가져오고 제2차 마나슬루 도전에 나선 제2차 원정대의 기록이다. 그러나 제2차 원정마저 1972년 4월 10일에 일어난 눈사태로 인해 김호섭, 송준형, 오세근, 박창희와 함께 참여했던 일본 산악인 야스히사를 비롯해 셰르파들까지 모두 15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1937년 세계9위봉인 낭가파르바트(NangaParbat, 8,125m)에서 독일 원정대원 1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이래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 규모의 대형 참사였다.


그는 1차 원정에서 동생까지 잃은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며 2차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 등반하며 겪어야 했던 일들, 그리고 다시 조난과 실패, 철수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심정이야 피를 토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런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만든 힘, 그 힘을 집념이라고 표현한 것이리라. 『집념의 마나슬루』에는 그가 준비한 또 한 차례의 원정, 제3차 원정계획서를 책 말미에 게재했는데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생 시절엔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란 말도 흔히 들을 수 없던 시절이었던 터라 그의 3차 원정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단지 등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애와 네팔의 현지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어서 그 내용에 빠져 읽었을 뿐이었다. 이후 김정섭은 1972년 2차 원정과 1976년의 3차 원정에 직접 대장으로 참여해 당시 7차례 꾸려진 히말라야 원정 중 5차례 원정에 관여한 국내 히말라야 원정의 실질적인 개척자로 활동했다. 김기섭, 김호섭, 김예섭, 세 동생을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묻은 맏형 김정섭은 1974년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될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마나슬루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악천후로 인해 6,800m에서 통한의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만 했다. 마나슬루는 그를 끝끝내 품어주지 않았다(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김정섭 씨는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가서 현지에서도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정리하는 원고를 집필하며 2002년엔 다시 마나슬루로 가서 동생들의 시신을 찾아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마스떼(당신 안에서 신을 봅니다)’란 네팔의 전통 인사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지만 정작 이 책이 그 시기에 어째서 우리 집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보다 더 세월이 흐른 뒤 돌아가신 아버지의 앨범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이 책이 왜 우리 집에 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남긴 앨범에는 한 가닥 자일에 의존해 산을 타고 있는 당신의 모습, 빙벽을 기어오르는 모습들이 담겨져 있었다. 나중에야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산을 좋아해 대학 산악부에서 활동했고, 김정섭 씨 형제 가운데 어느 분과 친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의 형제들과 함께 산에 다녔고 마나슬루 등반팀에 합류하라는 제안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이 분들과 함께 히말라야에 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물론 할아버지의 만류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1차 원정이 있었던 1971년 무렵은 내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어느덧 비행기는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로드 오브 워 - 앤드류 니콜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외 출연



“전 세계적으로 5억 5천만 정 이상의 화기가 유통되고 있어. 12명 당 한명 꼴이지. 문제는, 나머지 11명을 어떻게 무장시키느냔 거야.”

영화 <로드 오브 워(Lord of War, 2005)>의 첫 장면에서 무기밀매상(Private Gunrunners) 유리 오를로프가 자조적으로 내뱉는 대사다. 그가 딛고 서 있는 아프리카의 대지에는 탄피들이 즐비하고, 007시리즈를 알리는 유명한 오프닝 장면처럼 카메라는 총구가 되어 전투의 현장들을 겨냥한다. 마침내 ‘탕’ 한 방의 총성이 울려 퍼지면서 카메라는 빠른 속도로 달려가 역시 AK-47소총을 들고 있는 아프리카 소년병의 머리를 관통해 버린다. 영화에선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소년의 머리를 과녁 삼아 관통해버린 탄환은 AK소총에서 발사된 탄환일 확률이 가장 높다.

유리 오를로프는 과거의 통계로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전 세계에는 대략 6억정의 소형화기들이 널리 퍼져 있고, 그 가운데 최소한 7,000만 정에서 1억정이 미하일 티모셰예비치 칼라시니코프가 발명한 AK-47과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들이다. 최근에 나는 『인물과 사상』(2009년 8월호)이란 잡지에 <현대의 일상을 창조한 사람들>이란 시리즈를 기획연재물로 싣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인물로 선정한 사람이 칼라시니코프였다. 이 시리즈는 우리의 현대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현상의 근원들을 어떤 한 인물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시스템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나는 AK-47소총이란 가볍고, 반동이 적으며,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자동소총의 탄생이 현대의 일상에 끼친 영향과 그 배후를 함께 다루고자 했다. 영화 <로드 오브 워>는 무기밀매라는 형태로 세계 각지의 분쟁 지역에 널리 퍼진 불법무기 거래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나는 이 영화와 영화에 수록된 다큐멘터리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랜 내전을 치르고 있는 한국은 베트남전 이후부터 ‘자주국방(自主國防)’이라는 슬로건 아래 무기산업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그 결과 신흥공업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생산이 불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던 M-16의 자체 생산에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2위를 다투는 고성능 자주포 K-9을 비롯해 기본훈련기 KT-1, 고등훈련기 T-50 등을 수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98년부터 최근 2007년까지 한국의 무기산업 수출총액은 28억 199만 달러로 연평균 약 2억 8천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중에서 항공 34%, 탄약 23%, 함정 15% 등을 차지하고 있다. MB정부의 출범 이전부터 방위산업을 ‘신성장동력산업’으로 육성하자는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산업이라 할 수 있는 무기 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나 경계는,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미의존도가 높은 군사 분야에서는 역으로 ‘자주국방’과 ‘안보’논리에 밀리고, 이제는 경제성장논리에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뉴질랜드 출신의 앤드류 니콜(Andrew Niccol) 감독은 DNA조작에 의한 미래사회의 계급차별을 다룬 영화 <가타카(Gattaca, 1997, 미국)>의 감독이자 - 이 영화에 대해서는 내 홈페이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http://windshoes.new21.org/film-gattaca01.htm )에서 다룬 바 있다 - <트루먼쇼>의 대본을 쓴 작가로 사회성 짙은 영화예술인(cineaste)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영화 <로드 오브 워>는 그가 대본, 연출을 모두 맡은 영화로 유리 오를로프 역을 맡은 니콜라스 케이지와 <가타카>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은 맞춘 에단 호크가 무기밀매상 오를로프를 뒤쫓는 국가기관의 요원으로 등장해 재미를 더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거래에는 흑막이 있기 마련이지만 무기거래의 내막을 살펴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어려움의 근원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있지만 한눈에 살펴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니콜 감독 역시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미국 비평계로부터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을 만큼 문제작이었지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흥행에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비록 유리 오를로프의 인간적 고뇌를 담은 스토리로 ‘당의정(糖衣錠) 효과’를 얻고자 했으나 <트루먼쇼>와 같은 흡인력과 재미를 동시에 갖춘 휴먼드라마를 기대한 이들은 흡혈귀 무기밀매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한 바탕 시원한 액션 활극을 기대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 복잡하고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영화의 런닝 타임과 동일한 시간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고 해도 무기 밀거래의 흑막과 배경, 원인을 살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니콜 감독은 참으로 무모한 도전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은유를 통한 사회현상의 고발이라는 드라마적 재미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다큐멘터리라면 결코 보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무기거래의 진정한 배후가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영화가 되었고, 그것이 <로드 오브 워>가 지닌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신생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무려 4조원의 재래식 무기가 사라졌다. 이 사건은 20세기 최대의 무기 실종 사건이었지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체포되지 않았다. 미소양국은 물론 냉전 체제 아래 있던 세계 각국에 비축된 재래식 무기는 냉전 기간 동안은 물론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 할지라도 모두 소모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냉전 해체로 필요 없는 재고가 된 재래식 무기들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구 유럽의 보관비용만 늘려가고 있는 실정이었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틈새로 무기밀거래가 독버섯처럼 번졌고, 국가기관 역시 암암리에 개입했다. 결국 이들 국가에서 번져나간 무기들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분쟁지역으로 퍼져나갔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전쟁이 아닌 내전 기간 동안 죽어야 했다. 원제명인 “Lord of War”는 그런 의미였다.




냉전 기간 중 유대인으로 신분을 속인 아버지 덕분에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우크라이나 이민자 가족인 유리 오를로프는 우연히 목격한 러시아 마피아들간의 총격전 장면을 보면서 저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죽지만 누군가는 그 무기를 팔아 이득을 본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유리 자신에게도 낯선 장면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거리에서 햄버거나 핫도그를 팔듯 그렇게 무기를 팔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무기를 판다는 죄책감은 마약을 판다는 죄책감보다 덜한 것이었다. 니콜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여러 무기밀매상들을 인터뷰하고, 널리 알려진 몇몇 사람의 생애를 유리 오를로프라는 가상의 인물에 녹여내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유리 오를로프는 상당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또 한 편으론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록 남동생이지만 형제에 대한 집착은 알 파치노가 주연 했던 <스카페이스>, 훗날 에바 폰테인(브리짓 모나한)에 대해 유리가 어렸을 때부터 보인 집착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 떠오르고, 성공의 정점에서 결국 소중한 가족을 잃는 모습은 얼핏 <아메리칸 갱스터>가 떠오른다. 독창적인 스토리인 듯 보이지만 이처럼 익숙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기밀거래가 영화를 밀고 가는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을 형성하기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그로 인한 혼선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영화적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 내전의 자금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면 - 당신의 결혼반지와 휴대폰엔 아프리카의 피가 묻어 있다 - 앤드류 니콜 감독의 <로드 오브 워>는 실제 서아프리카 내전을 주동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영화적으로 배치하면서 그들이 다이아몬드와 휴대폰의 필수적인 부품재료인 콜탄을 팔아 무엇을 구입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앞서 나는 칼라시니코프에 대해 글을 썼다고 했는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고기 다지는 기계 앞에서 칼라시니코프를 희생양 삼아 그가 이 모든 비극의 배후라고 고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이 기계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볼트나 너트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밀거래상들 역시 그저 기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재료를 공급하거나 기계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윤활유 정도의 기능을 할 뿐이다.



유리 오를로프는 아프리카의 독재자를 비롯해 무기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무기를 공급하고 싶어하는 모든 정부와 친밀한 거래를 주도했고, 그 결과 어릴 적부터 흠모했던 여인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거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니 실제로는 이제까지 소모된 재래식 무기 보다 좀더 무기의 화력과 수준을 높이길 희망하는 무기산업자본의 노력으로 점점 더 입지가 좁아진다.

올초에 개봉한 영화 <인터내셔널>은 어떤 면에선 <로드 오브 워>의 후속편이거나 유리 오를로프를 추적하던 요원 잭(에단 호크)의 시선으로 그려진 무기 거래의 이면을 그린 영화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인터내셔널>에선 재래식 불법무기 거래에서 첨단 무기 거래로 넘어가는 새로운 무기 산업의 양상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의 양극화는 물론 세계의 경제적 양극화 또한 극심해지고 있는 상황인데, 양극화의 가장 극심한 사례가 바로 무기 생산과 소비의 양극화다. 전 세계 무기 공급의 3분지 2는 미국과 러시아가 담당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는 유럽연합 국가들이 책임지고 있다. 2005년 현재 무기 생산업체의 무기 판매액은 2,680억 달러에 달하고, 이 매출액의 절반은 세계의 다국적 자본인 5개 대기업이 독식하고 있다. 물론 이들 다국적 기업들이 생산하는 것이 무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전자레인지, 세탁기를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유리 오를로프는 말한다.

“최후의 순간에 지구를 상속받게 될 자들이 누군지 알아? 바로 무기상들이지.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느라 너무 바쁘거든. 살아남는 비결은? 전쟁을 하지 않는 거야, 특히 자기 자신과는 절대로….”

전 세계가 미국발 금융파생상품의 파산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 배후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며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무기 거래의 진정한 배후는 영원히 흑막 속에 가려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세기라는 20세기 동안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보다 제노사이드(민간인학살)로 죽은 사람의 수가 1억 7천만 명으로 더 많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인양 비춰지는 동안, 어쩌면 당신이 연말 보너스처럼 수익을 기대하며 넣은 해외펀드는 군수산업을 살찌우고, 당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양 팔을 정글도로 잘라내고 얻은 것일지 모른다. 물론 내가 쓰고 있는
삼성 휴대폰에도 아프리카 콩고산 콜탄이 필수 부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스 바이스와 클라우스 베르너의 책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광석의 판매는 콩고 반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삼성 경영자는 이 불순한 거래를 비밀에 부칠 것임을 보장했다. 설령 다음과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 광물은 다시 시장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바로 삼성 자체 수요로 전자업 쪽에서 가공될 겁니다.”

삼성은 원료가 의심스러운 곳에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모른 체 한다. 우리가 이 무서운 불법무기 거래를 차단하고, 더이상 학살을 못 본 체 눈감지 않기 위해서는 오를로프의 말과 반대로 우리 자신과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레드 콤플렉스 - 강준만 외 | 삼인(1997)

우리는 어떤 영화배우나, 감독들에 대해 알고 싶을 때 ‘필모그래피(filmography)’란 것을 살핀다. 필모그래피란 ‘특정 배우감독의 작품 리스트; 영화 관계 문헌’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그라피(graphy)’란 말을 동양의 그것으로 바꿔보면 대략 ‘~지(誌), ~기(記)’의 뜻을 갖는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기록을 일대기(一代記)라고 할 때의 그것과 같은 말이다. 어떤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그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궁금해지고,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영화보기, 영화읽기 하는 것은 오늘날 영화에 취미를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해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만큼 대중적인 시도인데, 종종 어떤 배우들은 그에 대해 처음 받았던 인상과 달리 도대체 이런 영화엔 왜 출연했지 하는 의문이 들만큼 형편없는 영화들에 출연한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이것을 영화배우의 것이 아니라 일반인으로 바꿔 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경력(經歷) 혹은 이력, career, record라고 한다. 이것이 곧 ‘a personal history’이고, 한 개인이 삶으로 증명해낸 자신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배우가 연기는 잘할지 몰라도 시나리오를 볼 줄 모른다거나, 배우로서의 자의식은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필모그래피는 영화배우나 감독들이 남기는 인생의 긴 꼬리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꼬리 혹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강준만 교수에 대한 열혈 팬들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역시 그가 만들었던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의 시도가 우리 사회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영화 <넘버3>에서 최민식이 한석규와 한바탕 주먹질을 한 뒤 떠들어대던 이야기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니….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 저지른 사람이 죄지.” 우리 사회는 종종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책임으로부터 면책되어도 이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용인하는 집단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강준만 교수가 시도한 ‘인물비평’이란 그 성격상 지니고 있는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임이 방기되고 무화되어 버리는 우리 사회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을 긁어주는 효자손이자 인물의 사후에 발행되는 평전(評傳)의 전통조차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인물의 생전에 펼쳐지는 평가란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레드 콤플렉스』는 강준만이 추구하던 인물비평에 대한 시도가 일반 출판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것이 지난 1997년의 일이니 과거를 쉽게 잊는 우리네 관행에 따르면 잊힐 법도 하다. 물론 거기엔 인물비평보다는 다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침잠해 있는 듯 보이는 강준만의 발언들이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지 못하는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는 질기고 오래간다. 『레드 콤플렉스』, 일명 적색공포증이라 할 수 있는 이 질긴 광증(狂症)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이다. 그 공포의 핵심은? 이것을 외부적 요인이라 해야 할지, 내부적 요인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북한의 존재’이란 실체적 그림자 혹은 유령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에 의한 적화통일 야욕’이다. 탈북이 홍수를 이뤄 우리 정부도, 이를 부추기거나(?) 돌보고 있는 NGO들조차 뒷감당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자신이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문제를 두고,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잠시 후 대법원에서 이례적인 언사로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강하게 주문하고 나섰다. 이 책은 노무현 정권의 출현 이전에 나온 책이다. 그런 까닭에 손석춘은 이 책의 총론격인 「왜 레드 콤플렉스가 문제인가-적색 공포증 조장에 앞장선 한국 언론」 이란 글을 통해 『레드 콤플렉스』의 질긴 뿌리의 한쪽이 착근해 있는 곳, 이를 다시 널리 유포시키고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제의하고, 대미공조보다 민족공조가 우선할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어떤 의미에서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런 거침없는 언사는 역시 ‘YS’니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그가 이런 언사들을 해준 덕으로 뒤이은 DJ 정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조차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언론에 의한 조문 파동을 겪으며 전면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책이 나온 뒤 우리는 몇 차례에 걸쳐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룩하고 있다.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말하고 이제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확실한 민주주의 체제를 떠올렸다. 매우 더디게 진행되긴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출범 이후 언론개혁의 진전은 최소한 방송사에서만큼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비록 안티조선 운동이 <조선일보>의 수적인 우세를 잠재우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일반인들에게 <조선일보>가 지닌 어떤 폐해(?)들, 그들의 정체성을 실감하게는 해주었다. 물론, 언론에 의한 레드 콤플렉스 유포는 현재에도 여전하며, 그들의 국가안보상업주의 역시 더욱 공고해지면 했지, 덜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현상 하나를 발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가 사실은 얼마나 깊은 뿌리를 지녔고, 깊이 은폐되어 있었는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신시절 유신헌법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변호사시험에 통과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매우 정치적인 수사법이면서 동시에 작금의 상황을 미리 예견한 듯한 언급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나온 지난 1997년은 우리나라 법조계 초유의 법조비리로 몸살을 앓았던 해이기도 하다. 지난 1997년 의정부 법조인들과 1998년 대전 법조인들의 비리와 부패가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이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란 사실을 실감했고, 반대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진일보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5.16 군사쿠테타 이후 군부독재정권은 삼권 분립을 약화시키고, 법조인들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기 위해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철퇴로,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승진을 비롯한 각종 혜택으로 길들여 왔다. 그 결과 1997년 이전까지 우리는 비록 법조계가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더라도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 그것은 정통성 없는 정부가 법조인들의 비리와 부패를 사실상 통제하지 않고 방치한 결과물이었다.

지난 97년 법조비리 사건 이후 우리 사법계는 자정노력과 더불어 구조개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헌법정신을 수호하는 법조계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검찰을 통해 제기된 구속영장이 전직 판사라는 이유로 기각되는 일이 잇따르며 사법계 내부에 온존하고 있는 뿌리 깊은 특권의식이 여전함이 드러났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이라는 반인권적, 반헌법적 법률을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등, 시대정신과 우리 헌법 정신을 과연 온당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책 『레드 콤플렉스』에서는 박홍(전 서강대 총장), 이문열(소설가), 김영삼(전 대통령), 한완상(통일부 총리), 김대중(전 대통령), 리영희(교수), 조정래(소설가), 윤이상(작곡가), 서준식(인권운동가) 등 아홉 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때로 가해자로 혹은 때로 피해자로 이 책에 의해 호명된 이들이다.

작가 조정래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두 통의 유서를 작성했다. 동료작가가 작품 발표를 위해 두 통의 유서를 쓰는 동안 다른 한 명의 작가는 200만부 판매기록을 남기는 대베스트셀러 작가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그런 그가 바뀐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최근 이런 글을 남겼다.

“레비스트로스는 백인도 인디오도 서로에게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상대를 짐승으로 의심했던 쪽보다는 신이 아닌가 의심했던 쪽이 더 인간답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와 같은 태도다. 우리가 빠져 있는 대립과 갈등이 어떠한 것이건,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을 길러보자.”

그는 현재 우리 사회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상호간의 몰이해와 불화 속에 갈등국면을 고조시켜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나는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지난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저런 글을 썼다면 그를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 존경했을 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이들”에 대해 서로 존중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하자는 말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국가정보부의 남산 지하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던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이들”에 대해 그간 이문열이란 작가가 보였던 모습이나, 안전기획부에서 용공조작과 고문으로 심신을 상해 끝내 유명을 달리 해버린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처했던 현실에 비해 지금 과거사 규명과 청산 작업이 결코 더 잔인할 수는 없다. 그때 그들에게 보장되어야만 했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은 바로 그때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누리는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라는 합법적인 힘의 균형 장치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 역시 바로 그러한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런 시기엔 권력의 시녀, 권력의 시종장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영화배우들조차 과거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의 이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정치인, 법관, 학자, 시인이든 현재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과거 그의 걸음걸이를 살피는 일 역시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삼권분립의 보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역시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당신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은 웬일일까. 언젠가 “그 시절, 국보법 폐지를 반대한 법관들”이라는 제명으로 당신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다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눈 덮인 들녘을 지나 갈 때에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지 말라. 오늘 남긴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나는 언젠가 이 책 『레드 콤플렉스』가 더 이상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길 소망해본다. 그러나 오늘 다시 이 책을 펼쳐 읽으며 새삼 마음이 아픈 것은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