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2.08 정호승 - 내가 사랑하는 사람 (1)
  2. 2010.12.28 정호승 - 마음의 똥
  3. 2010.09.16 정호승 - 벗에게 부탁함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읽을 때 만해도 나는 이 시를 받아들이기가 참 곤란했다. 그만큼 내가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정호승 시인 특유의 낭만적이고 센티멘탈한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늘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늘 내가 책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깡패나 불량배가 되는 편이 좀더 어울릴 사람, 아니 최소한 그렇게 되어도 남들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제법 잘 살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 나의 환상이 깨진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제법 우수한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신학년 신학기의 첫 한 주가 지날 무렵 학생부 선생이 수업시간 중에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별로 자각하지 못할 뻔 했다. 그는 수업 중에 날 불러냈고 복도 끝에 세워놓고 어깨에 짐짓 다정하게 손을 얹고 말했다. "결손가정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자란 것 다 안다. 힘들겠지만 문제 일으키기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도록 하라"고. 말끝에 한 마디 힘주어 오금 박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결론인즉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학교 다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온통 그늘뿐이었으므로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시인의 말이 온전하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시인이 정말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은 두 번째 행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였을 것이다. 나만 그늘이라 생각하고 살았으나 살아보니 인간은 누구나 그늘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마지막 행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라는 시인의 말이 가슴으로 와 닿았고, 누군가의 눈물을 나역시 닦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시를 처음 접하고 냉랭하게 바라보았던 그 시절로부터 이 시를 다시 가슴으로 품을 수 있게 되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아마도 그 세월을 우리는 흔히 성숙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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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마음의 똥

- 정호승


내 어릴 때 소나무 서 있는 들판에서
아버지 같은 눈사람 하나 외롭게 서 있으면
눈사람 옆에 살그머니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똥을 누고 돌아와 곤히 잠들곤 했는데
그날 밤에는 꿈속에서도 유난히 함박눈이 많이 내려
내가 눈 똥이 다 함박눈이 되어 눈부셨는데
이제는 아무 데도 똥 눌 들판이 없어
아버지처럼 외롭고 다정한 눈사람 하나 없어
내 마음의 똥 한 무더기 누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

아버지 없는 손자 녀석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제일 많이 했던 말 중

하나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일어나지”라는 말이었다.
혀를 끌끌 차며 쏟아내던 당신의 무거운 한숨이
이마에 솜털도 가시기 전에 내 어깨를 내리 눌렀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을 내 앞의 삶이 외롭고 쓸쓸할 것이라는 걸,
해가 뜨면 녹아 없어질 아버지 같은 눈사람이라도
살그머니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당신이 있었다면
내 마음속에 지금처럼 켜켜이 쌓아올린 마음의 똥 무더기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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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

개인적으로 정호승의 시가 90년대 들어와서 휠신 더 천연덕스러워졌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위와 같은 말이 그의 진심일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도지는 지도 모르겠다. 에이, 저 꽃 같은 놈! 하긴 꽃도 꽅 나름이라 이 사쿠라 같은 놈이라고 말하면 그건 욕이다. 욕도 이만저만한 욕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쿠라 꽃을 보면서 욕봤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전에 아마 이달의 영화로 '친구'를 추천했다가 그 추천을 얼마 안되어 철회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이 <공화국 망명지>를 들락거린 분들은 아실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이 다른 많은 한국영화들을 잡아먹는다는 비판이 그런 추천 철회의 가장 큰 요인이었고, 그런 비판적인 판단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결국 스스로 뱉어논 말도 있고 해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던 애초의 내 다짐은 지켜졌다. 어제 비디오로 나온 이 영화를 보았다.

보고나서 들었던 나의 심사는 역시 배배꼬인 것일 수밖에 없다. 영화로서는 참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직 국어교사인 친구의 강력한 추천사가 어떤 이유에서 내게 쏟아졌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서는 한발만 엉거주춤하게 들여놓았다면 그리 멀지도 않은 나의 이야기가 될 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변경에서도 다시 변두리에 사는 인간들에게 골목의 악다구니는 어머니의 자장가만큼이나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내가 고개를 갸우뚱한 것은 이 영화에 쏟아진 부산 시민들의 강렬한 지원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영화를 보고서 외쳤다는 그 수많은 아담들의 '의리'라는 것이 역겨웠다. 대관절 친구의 뱃 속에 뭐가 들었길래 30번을 넘게 사시미칼로 회를 뜬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의리라 외치는 조폭이 고작 우정과 의리의 상징이라니.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IMF 이후 생활의 현장에서 감원당하거나 도태되며 가부장의 권위를 급속히 상실해가는 남자들의 우울증과 우리 사회의 의리 결핍에 관한 심각한 진단이 그것이다. 마초(Macho)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자는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친구에게 한 번 하라고 줄 수도 있고, 빠구리(성교)트는 능력이 뛰어나면 자신이 그냥 데리고 살아도 되는 그런 존재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적인 영화 <친구>가 강력하고도 절실하게 외치는 첫번째 목소리 "남자들 세계에서 여자는 제발 좀 빠져!"이다.

남자는 자신을 잃었을 때 정도 이상으로 오바하는 경향이 있다.(그렇게 말하는 나도 그렇다. 생물학적 남자니까.) 이런 자신감 상실은 마치스모 (Machismo) 현상으로 이어져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성 폭력을 일삼거나 여성을 구타해 남자임을 과시하는 행위를 하곤 한다. 30번이나 찌르는 칼질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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