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

'사랑'의 본령은 짝사랑이다.
나홀로 사랑한다.
설령 서로 똑같이 사랑한다고 해도
사람은 자신만 알 수 있기에
결국 상대의 사랑보다 자신의 사랑에 더 목매단다.
그래서 사랑은 마주보는 것일 수 없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 말해도 사랑은 어긋남이다.
일치하는 시간은 짧고, 어긋나는 시간은 길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해도
결국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이 있는 법이다.
온힘을 다해, 온마음을 다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전하고 싶은 말 한 마디.
'사랑'은 끝끝내 그 한 마디를 목젖 아래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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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사랑이란 게 함께 초코렛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공원 벤치에 누워 밤하늘의 별이나 헤아려 보는 일이었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란 게 함께 백화점에 가서 사주지도 못할 물건이나마 맘껏 구경하다가 지하식품점에서 떡볶이 한 접시 사서 나눠먹고 웃으며 돌아올 수 있는 일이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란 게 영화표 끊어놓고 딴짓하다 영화 시간에 늦어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시간마저 재촉하며 자리로 헐레벌떡 뛰어드는 거라면 참말 좋겠다. 집으로 바래다주는 좁은 골목길, 어슴츠레한 불빛 아래 가쁘게 요동치는 심장소리 들키는 일이었으면 참말 좋겠다. 사랑이 고작 그게 전부라면 참말 좋겠다.

**

하루가 힘들 때는 사랑도 지겹고, 지겹고, 간사하게 매일 변하는 마음이 사랑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건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드러나는 외연에 불과하다.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우리는 만나서 사랑을 시작한다. 어떤 형태로든 만나지 않고서야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가?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모든 인생의 끝이 늘 그러하듯 사랑의 끝 - 완성엔 언제나 이별이 존재한다.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혼이나 이별이 아니라 하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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