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 500만년의 역사와 문화
롤랜드 올리버 지음, 배기동 외 옮김 / 북피아(여강) / 2001년 5월


내가 처음 영어사전을 구입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본 단어는
"섹스sex"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중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막내 삼촌이 직접 서점에 데려가 골라 준 사전이 "혼비영영한사전"이었다. 영어공부를 열심히해야 한다는 다짐 끝에 골라준 사전이었다.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범문사에서 나오던 이 사전은 더이상 출간되지 않는 모양이다. "영한사전"도 아닌 "영영한사전"이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하던 나에게 과연 적절한 사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어단어를 영어로 우선 풀이한 뒤, 다시 한국어로 풀이하는 형태의 이 사전은 내게 영어뿐만 아니라 언어에 대해 접근하는 경로를 열어준 첫 열쇠였다. 상식을 넓히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건 사물이든 사건이든, 사람이든 그 대상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걸 의미한다.

호기심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어서 뭔가 새로운 단어 한 가지를 알게 되면 그로부터 무수히 많은 궁금증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백과사전을 클릭해서 하나의 사건을 살피면 최소한 3개 이상의 링크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 파악하는 과정이 단지 그 하나의 대상만으로는 불가능한 것과 같다. 영어사전에서 '블랙black'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대개 '검다'는 의미를 제외하고도, 'black'은 '음산한, 침울한, 화가 난, 험악한, 심사가 고약한, 사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등등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black'은 접두사로 사용되거나 관용적 용례까지 살피더라도 'black'이란 단어가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찾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화이트white' 의 의미는 '희다'는 의미를 제외하고도 '결백한, 순진한, 오점이 없는, 악의가 없는, 정직한, 공정한, 훌륭한' 등의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 같은 이는 "화이트와 블랙은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선(善)과 악(惡), 희망과 절망의 상징이었다."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검은 대륙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피부색이 검고, 우리가 그곳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에서 검다. 우리 말을 우리는 국어라 말한다. 우리 역사를 국사라 말한다. 생각하기에 따라 아무 문제 없는 듯 보이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협소한 세계 인식을 보여주는 한 증빙이다. 우리는 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국사가 아니라 한국사를 배운다. 그리고 그 상대적인 개념으로 외국어, 세계사가 있다고 말해야 옳다. 국어와 국사란 말에는 이미 학문적 객관성을 상실하고 들어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바꿔 미국이란 나라가 자기들 기준으로 태평양을 서해로, 대서양을 동해로 표기하겠다고 나선다면 분명 우리는 코웃음 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도 이스트코스트와 웨스트코스트가 있다. 그리고 태평양도 있고, 대서양도 있다. 동해와 서해, 남해의 개념은 바다를 육지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하는 협소한 개념이다. 우리의 바다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가 바뀌어가는 싸움에 우리가 밀리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는 우리의 세계 인식이 그만큼 협소한 탓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계화를 부르짖은지 햇수로는 어느새 10년여가 넘어간다. 어떤 이들은 그때의 해프닝을 기억할 것이다. 세계화가 국제화, 지구화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받은 당시의 문민정부는 세계화의 영문 표기를 들어 개념도 미처 세우지 못했던 세계화를 다른 개념들과 차별화하려고 시도했었다. 어쨌든 문민정부는 세계화의 개념을 끝끝내 정의하지 못하고 IMF사태를 불러들였다. 오늘날 우리들도 세계화를 국제화나 지구화와는 조금 다른 무엇이지만 하여튼간에 잘 모르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굳이 이 개념들에 차별을 두자면 세계화란 말에는 "우리가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세계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어찌되었든 "세계화"란 단어가 인정투쟁의 과정에서 살아남아 성공리에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해외여행도 자유화되고, 유학생은 물론 단순한 여행목적의 해외방문도 흔해졌다.

그럼에도 아프리카는 아직도 멀고 낯설다. 롤랜드 올리버(Roland Anthony Oliver)의 책 "아프리카"는 부제로 "500만 년의 역사와 문화"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원저서명은 "The African Experience"다. 'experience'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경험(經驗)'이란 말로 체험보다는 간접적, 이지적인 인식의 함축성을 지닌다로 정의되고 있다. 지은이는 런던대학 아프리카사학과 명예교수로 아프리카사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한다. 그의 이력 중 이채로운 것은 그가 1948년 당시로서는 최초로 오리엔트, 아프리카사학과 교수에 임명되었다는 것인데, 이 말만 듣고 생각하기엔 1948년 이전엔 유럽, 영국에서는 아프리카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롤랜드 올리버는 이 책의 서문에서 "아프리카의 경험"은 그가 런던대학 교수에서 은퇴한 뒤 4년 동안 아프리카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사로서 집필한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책 한 권에 아프리카 500만년의 역사를 담는다는 것은 그만큼 쉽게 쓰였다는 걸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쉽게 쓸 수 있다는 건, 대상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아프리카를 많이 공부하고, 많이 알고 있다는데는 동의할 수 있어도 과연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었다. 이 책은 모두 21장의 구성을 갖추고 있다. 그 중 역자 서문에도 등장하고 있듯 제20장의 제목은 '완전노출(full exposure)'이다. 이  책의 기본적 관점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발견해 들어가는 혹은 "아프리카가 서구세계에 등장하는 과정으로서" 의 아프리카사를 재구성한 책이다. 구태여 이런 시각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면서 그네들의 역사 인식 혹은 이 책의 저자인 롤랜드 올리버 교수의 시각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예를 들어 이런 부분만큼은 지적하고 싶다. 저자는 이 책의 '제10장 주인과 노예'편에서 악명높은 노예무역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들거나 책임을 외면하려 드는 인상을 준다.

대서양 해안에서조차 노예무역은 별로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그 무역이 17, 18세기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느냐하는 것에 있다. 이에 대한 짧은 대답은 그것이 아프리카인들 사이의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서양 무역이 절정기에 왔을 때에도 대부분의 노예는 전쟁포로 출신이었으며, 상황을 좌우했던 유럽인은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도처에서 이러한 전쟁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유럽인의 출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전쟁의 원인은 주로 현지 사정이라고 하며, 포로를 이송하는 해양무역이 없었더라도 이러한 전쟁은 역시 발생했을 것이라고 한다. <본문 193쪽>

아프리카에서 팔려나간 혹은 롤랜드 올리버 교수의 표현을 빌어 수출된(?) 노예의 수가 1,100만명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과연 이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연민의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저런 방식의 기술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기술은 '나이지리아 내전(비아프라 전쟁)'에 대한 "무엇보다도 나이지리아 내전은 국가 기반 건설을 위한 사건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나이지리아 전체의 단결이 크게 고양되었기 때문" 이라는 식의 기술에서도 엿보인다. 나이지리아 내전의 원인에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지역에 있던 석유가 서구의 다국적 석유기업들의 이해관계에 크게 좌우되었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된 뒤, 과거 백인정권과의 참회와 화해의 정책에 대해서는 "이 기적의 많은 부분은 넬슨 만델라의 성격에 돌려져야 할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남아연방국민들의, 흑인들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아니라 넬슨 만델라의 리더십도 아니고, 넬슨 만델라의 성격이 원인이라니...

이 책에 대해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대륙에 관한 한 그의 모든 지식들을 이 한 권의 책에 품위 있고 이해하기 쉽게 압축한 것" 이라는 평가는 절반만 맞은 것이다. 원문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문장이 품위(refinement)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품위(dignity)가 있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지난 2일 MBC 백분토론에서 했다는 발언으로 뜨겁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일제시대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었고, 역사청산은 먼저 우리들 자신의 반성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이영훈 교수는 경제학부 교수지만 한국경제사를 연구한 역사학자이다. 그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해 한때 사회적 논쟁의 한 가운데 있었다. 나는 앞서 국사, 국어란 표현이 학문적 객관성과 인식의 문제를 협소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영훈 교수는 지난(2003년)해 8월 21일 임지현 교수 등이 주도하는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이 주최한 ‘국사 해체를 향하여’라는 이름의 공개토론회에서 '국사해체'론을 주장한 바 있다(이 토론회에서 발표된 내용을 담은 책이 "휴머니스트"에서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란 제목으로 지난 2004년 3월에 출간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 "국사라는 이름 아래 닫혀진 다양한 (역사적) 측면들을 보는데 '국사'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이며, 이런 뜻에서 내가 말하는 국사해체는 '역사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는 측면에 동의한 것이다. 재일동포인 이성시(와세다대) 교수는 "우리에게 국사는 은폐이며,억압이며,배제" 라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를 열린 자세로 논의하자는 주장은 합당하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란 것을 거칠게 보자면, 우리의 근대화가 일본에 의해서 수행되었고, 일본의 식민지화 과정을 단순히 착취와 수탈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발전과 응전의 시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역사를 어느 시기이든 패배의 역사로만 바라보려는 시각에는 분명히 반대한다. 예를 들어 식민체험에 대해, 우리의 독립에 대해 어떤 이들은 우리의 독립이 자주적으로 성취되지 못하고, 세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라는 패배적인 역사인식을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 말을 붙이고 싶다. 우리는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였다가, 식민지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저항했고, 그 결과 세계 각국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 이영훈 교수의 주장대로 자본주의의 맹아도 경험했고, 미숙하나마 자체적인 근대화의 추진도 시도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주장대로 학문적인 맥락에서 수긍한다 할지라도 이런 주장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학문적 논의에서의 논리란 것은 주장하는 이의 손을 떠나 논리 그 자체의 추진력을 갖기 때문이다. 만약 이 논리의 어느 일방만을 받아들여 꾸준히 밀고나간다면 그 결과 우리가 경험한 일본 식민지 체험은 앞서 롤랜드 올리버 교수의 말대로 나이지리아 내전이 나이지리아의 국민 통합을 이룩하도록 해줬다는 식의 논리적 귀결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이영훈 교수는 방송에 나와 너무나 손쉽게 "정신대 관련 일본 자료를 보면 (정신대) 범죄행위는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으며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한국업소 주인들이 있고, 그 명단이 있으며 일제 징용 11만명의 한국인들 중에서 다수가 군위안소를 다녀왔는데 이들의 반성은 없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의 경제사적 주장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주장이 일면의 작은 사실에만 주목하여 문제의 본말을 전도시켰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정신대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을 찾아보면 없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실제 정신대피해할머니들 중 상당수의 증언은 초기에 그 진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동안엔 그것이 일본으로 돈벌러 가는 일인 줄 알고 나섰다는 분들도 많이 계셨다. 게다가 11만명이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에 동원된 동안 거기에 끌려나간 조선인 중에서 군위안소를 이용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의 주장대로 그런 일부의 문제로 정신대 문제가 자발적인 참여와 공창이란 식의 인식에 다다르게 되는 것은 분명히 문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그 누구도 처벌할 수가 없다. 5천만 겨레가 모두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벌 줄 수 있겠나? 그의 논리대로라면 5천만이 여의도광장에 모여 총참회 의식이라도 열어야 하지 않는가?

최근 우리 학계 일각에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탈민족주의 문제'에 대해 나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학문의 영역에서 일탈하여 사회적 이슈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을 경계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임지현 교수 등이 주도하는 "우리안의 파시즘" 논의가 '개인의 성찰' 이란 위치에 있을 때는 위험하지 않으나 이를 넘어 '사회의 성찰' 로 전이될 때, 지극히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듯 보이는 이런 논의들이 도리어 수구보수세력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반을 끌어내는 것, 매우 긍정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야 한다. 이는 도덕적 근본주의 자체가 성찰을 타인에게 강제함으로써 파쇼화하고, 지적, 도덕적 폭력으로 진화해가는 내적 동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H.카(Carr)의 고전적 명제 "역사란 무엇인가?"로 돌아가보자. 그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카는 19세기를 지배했던 랑케의 실증사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해석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정의해보자면, 역사란 단순히 현재와 과거의 대화가 아닌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 사실과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란 것이다. 카는 근대역사학의 확립자인 랑케의 주장 "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 를 비판하면서,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 이기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며, 사건은 다만 그 속에서 메아리 칠 따름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오늘날 많은 대학에서 필독서로 손꼽히고 있는 역사학의 고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난 1980년대 초 금서였다. 이 책이 금서였던 까닭은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인 E.H.카가 역사의 진보성을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말하길 "역사가는 과학적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문제를 고뇌하기 위해 역사를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는 생을 살아가는 지도를 구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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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우리 궁궐 이야기 - 홍순민 | 청년사 | 1999


최근 모 계간지(?)에 실린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풍수지리학 혹은 환경심리학의 대가 최창조 선생의 글이 문제가 되었었다. 그 분의 개인적인 견해로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건 말건, 솔직히 내 개인적으로는 행정수도든, 본격적인 천도든 어떤 방향으로 결정되든 아직까지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대목은 아마도 그 글의 일부분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청와대의 터가 좋지 않아서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가 썩 좋지 않았다. 청와대의 시작은 일제 시대 조선총독의 관저로 이용되면서부터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 뒤엔 미 군정 장관 하지의 관사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경무대'로 불리다가 4.19이후 청와대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청와대가 처음 지어진 것은 1927년 제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사이토 마코토 때였다. 그가 조선에 부임해 서울에 도착하던 날 강우규 의사는 그에게 폭탄을 던졌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는 한 차례 더 조선총독을 역임한 뒤 1932년 일본 총리대신의 지위에 오르지만, 1936년 "2.26사건"으로 젊은 일본군 장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조선에 부임해온 일본 총독들의 말로가 썩 좋지 않았고, 그 뒤를 이어 청와대를 차지했던 인물들의 말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인데... 우리에게 풍수지리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철학이기도 하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우습게 볼 일만은 아닐 것이다. 신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서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청와대 부지 선정을 두고 정부가 목하고심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이 머무는 건축물이 어찌 그냥 지어질 수 있을까?

 

최고의 권력이 머무는 최고의 건물? 궁궐....

그렇다면 조선 시대의 최고 권력인 왕이 머물던 궁궐은 어떤 의미를 담아 어떻게 건설되었을까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리라.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쓰고 있는 책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홍순민 선생의 이 책 "우리 궁궐 이야기"가 떠올랐다. 홍순민 선생의 이 책 "우리 궁궐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제1장 "궁궐 멀리서 보기"와 "궁궐 가까이서 보기"가 그것이다. 우리는 주말이면 종종 가족을 대동하고 궁궐을 찾는다. 어찌보면 지엄하신 왕실의 궁궐에 일개 시민 나부랑이들이 유모차를 끌고 카메라를 들쳐메고 놀다 올 수 있는 것, 그것은 공화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궁궐박사이자, 오랜 기간 궁궐만을 연구해온 역사학자 홍순민 선생이 이전에 썼던 논문 '조선왕조 궁궐경영과 양궐 (兩闕) 체제의 변천' 과 그의 "역사기행 서울궁궐"을 하나로 합쳐 새롭게 펴낸 책이다. 우리에게 궁궐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종묘사직이 낯선 곳이듯, 낯선 곳이다.

 

홍순민 선생은 제1장에서 수도 서울의 의미와 궁궐의 역사, 궁궐 답사를 하는 의미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 그가 우리 궁궐에 대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주로 자랑과 안타까움) 많은지는 이 책의 머리말이 다른 일반적인 책들에 비해 훨씬 길다는 사실이 입증해 주고 있다. 그는 '궁궐을 돌아보는 발걸음을 위하여'라는 서문을 통해 이 책이 실제 현장(궁궐답사)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사람들 손에 들려서 함께 궁궐나들이에 이용되길 바라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역사기행 및 문화유적 답사란 말이 더이상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시대이나 정작 1,000만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수도 서울에 대한 문화답사팀이 변변하게 꾸려져 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들 가운데 왕릉을 제외한 대개의 건축물들은 서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물론,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 조선 왕조 최고의 중요성을 지닌 건축물은 왕궁이 아니라 종묘라고 생각한다).

 

혼이 빠진 건물 - 궁궐

나는 종종 사람이 빠져나간 건물은 혼이 빠진 건물이란 생각을 한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듯 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은 아무리 낡아도 쉬이 무너지지 않으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방 부서진다는 말씀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 왕실의 윈저궁이나 버킹검,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로 이용되는 엘리제궁, 러시아의 정치 1번지인 크렘린궁, 일본의 황궁과 달리 우리 궁궐에 사람이 살지 않기에 그곳이 생기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궁리를 해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왕당파란 건 아니다. 중국의 자금성을 방문해본 이들은 자금성의 그 삭막함에 놀라곤 한다. 맨땅이라곤 찾을 수 없고,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우리네 궁궐은 자연 속에 묻혀 있으므로 도심 속의 생태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처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조상님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궁궐을 사랑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이 정도의 이유말고도 더욱 풍성한 근거들을 제시해준다. 그는 ‘지금 죽어있는 궁궐' 을 보면서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이 궁궐들을 사랑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궁궐을 단순한 건물, 도심의 작은 숲으로서의 의미 이상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궁궐을 조선 시대 ‘국왕을 둘러싼 모든 계층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로 보라고 말한다. 즉, 이제는 머물고 있는 국왕도, 그를 시종하는 궁녀들도, 호종하는 무관들도 없지만,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었고, 지금도 역사로서 살고 있다고 상상하며 살펴보라고 말한다. 그는 궁궐에서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래야만 궁궐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에...

 

궁궐의 풍수지리와 청와대의 풍수지리

이 책의 저자는  궁궐의 건축철학, 동양 철학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설을 궁궐의 배치와 건물 배치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 까닭도 역시 그런 철학의 바탕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새롭게 건설될 청와대 부지로는 행정수도 예정지의 중심이면서 금강 부쪽에 자리잡은 원수봉과 전월산 앞자락이 유력한 부지로 떠오르고 있다는데, 이 경우에도 역시 풍수를 감안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앙청 철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중앙청 철거를 역사적 이벤트로 만든 것은 역대 정권, 특히 문민정부들어 문민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을 복원하는 중요한 거사처럼 치뤄졌고, 나는 그것이 그다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청 철거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찬반으로 나뉘어 격론을 나눴고, 모두들 그 나름의 의미와 정당성을 가지고 진행되었던 논의들이었다. 나는 중앙청 철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문화주의,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받아들였고, 기꺼이 반대했다.

 

반대했다고 해서 중앙청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자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중앙청 철거와 관련해 건축계 일각에서 나왔던 주장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중앙청 철거와 관련해 건축계 일각에서 나온 얘기 중 이런 것이 있었다. 중앙청의 하부 토대에 대한 건축 공사를 실시해서 중앙청이 자체 하중에 의해 1,000년(혹은 100년)에 걸쳐 스스로 침강해 들어가도록 하자는 제안이 그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중앙청을 지하로 가라앉히자는 제안이었는데, 건축계 일각의 이런 제안에 대해 당시 중앙청 철거를 주장하던 측 입장에선 많은 비용 등의 문제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으로 묵살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유야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책의 1부에서 서울과 궁궐에 대한 총론 성격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면, 2부에서는 서울의 5대 고궁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을 하나하나 살핀다. 이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의 논문 주제이기도 했던 조선의 양궐 체제인데, 이때 양궐 체제라는 것은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을 의미한다. 

 

법궁이라 함은 정식궁궐을 말하고, 이궁이라는 것은 특수한 경우 머무는 궁을 의미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조선 궁궐의 역사는 곧 조선 왕조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태조 이성계는 법궁으로 경복궁을 건립하였으나 태종은 경복궁을 떠나 창덕궁을 짓는다. 왕자의 난에서 이복 동생들을 죽인 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외에도 광해군이 대비들의 숙소였던 창경궁을 크게 개창한 것은 그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고, 본래 덕수궁의 이름이 본래 경운궁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물러난 고종의 퇴위가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일제에 의해 고종이 머물던 궁의 이름을 태조 이성계의 양위를 상징하는 "덕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궁궐의 전, 각, 문들에 대해 얽힌 수많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복원시킨다. 그는 일제에 의해, 전란에 의해, 복원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된 조선 궁궐의 원 모습을 우리들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복원시키고자 했다. 특히 홍순민 선생은 ‘건물을 볼 때는 내가 건물을 짓는다고 생각하면서 보는 것이 요령'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이 창조적인 시선으로 문화유산 답사를 해주길 소망한다.

 

궁궐, 우리 민족사 500년의 건축물과 중앙청 철거

스페인 바르셀로나 외곽에 지어지고 있는 성가족교회(Temple de la Sagrada Familia)는 가우디가,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인 1882년 3월 19일(성 요셉 축일)에 공사를 시작해 1926년 6월 그가 죽을 때까지 교회의 일부만 완성했고, 현재까지도 계속 작업 중에 있다. 교회 전체가 완성되기까지 앞으로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고 한다. 1882년 시작해서 2004년인 현재까지 완성되지 않았으니 건물을 짓는데만 100년 이상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가우디가 서른 살에 시작했다. 오늘날에야 가우디를 세계적인 건축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인정하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가우디의 명성이 지금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100년이 넘는 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중앙청은 비록 식민지의 잔재라고는 하나 분명히 우리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 중앙청의 침강에 1,000년이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월에 걸쳐 그것의 침몰을 즐길 마음의 여유,  그 건물을 통해 두 번 다시는 일제와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겠노라는 우리 민족의 자신감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급하게도 그 건물을 때려부쉈다. 공화국 대한민국이 앞으로 1,000년 뒤에도 존속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지난 5,000년을 견뎌온 것처럼 앞으로 1,000년 뒤에도 존속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조선총독부의 건물이었던 중앙청의 철거에도 알게 모르게 풍수지리학은 작동했다. 중앙청은 일제가 경북궁과 북한산의 정기를 억눌러 조선의 독립을 막기 위해 세웠으므로 중앙청을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논리엔 모순이 있다. 만약 중앙청이 정말 우리 민족의 정기를 억누르는 것이었고, 그들이 세세만대에 걸쳐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일제의 지배 아래 있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중앙청이 건설되기 이전에 조선은 일제에 병탄되었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 앞 터에 자리잡은 뒤 일본은 패망했다.  우리 민족의 흥망이 어찌 건물 하나, 쇠못 하나에 좌지우지될 수 있을까라고 한다면 지나친 낙관주의일까?

 

신행정수도 건설과 새로운 청와대 건설에 대해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조급하게 서두르기 보다는 1,000년의 먼 미래까지는 아니더라도 100년 후는 내다보고 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하나와 이 가을에 가까운 고궁에 나갈 일이 있다면 이 책 한 권정도는 들고 가 보시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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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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