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증자가 말하길 “부모의 장례를 정성껏 모시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신종추원(愼終追遠)의 신종이란 부모의 장례에 예를 극진히 하는 것을 말하고, 추원이란 부모의 조상에 이르기까지 오래 되어도 잊지 않고 추모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가까운 사람을 잃고 추모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것이 인정(人情)에 해당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認定)하는 것과 달리 이것이 조상이 아닌 조상신을 받드는 행위로 이해되는 것은 공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억울할 것이다.

공자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가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제사지내는 일조차 인간의 일이지 조상신(귀신)을 받드는 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상상하게 되면서 인류는 비로소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사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다시 청동기로 넘어가는 도구의 혁명보다 더 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인간의 의식이 처음 열리고 자연에 의해 지배당하던 시절의 인류는 자연(우주만물)의 모든 질서를 관장하는 것이 신(神)이라고 여겼다. 신의 존재는 세상 만물에 조화(調和)를 제공하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다시 말해 임금은 임금이오, 신하는 신하이고, 백성은 백성으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질서는 하늘이 내린 것이란 말이다. 따라서 임금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자로서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제례를 봉행함으로써 인민을 단속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영성(靈性)이란 말은 종교 간의 차이를 떠나 인간이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대상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판타지와 신화의 세계에서나 엿볼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 고대에 사람과 신령은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존재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미 소피스트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공자가 제사조차 인간의 도리일 뿐이라고 설파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는 인본주의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이미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았다. BC 722∼BC 481년의 역사를 다룬 『좌전(左傳)』에는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귀신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國將興, 聽於民. 將亡, 聽於神)”고 했다.

공자 역시 몇 차례에 걸쳐 귀신에 대해 말하는데 그의 기본적인 자세는 공경하되 멀리하는(敬而遠之), 실증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면 믿지 않는다(無徵不信), 괴이한 일과 완력에 대한 것,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그리고 귀신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存而不論)는 것이었다.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之義.
번지가 안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가 말씀하길 “인간의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면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편, 20장>

子曰 夏禮, 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 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공자가 말씀하길 “하나라의 예에 대해서는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으니 (그 후예인)기나라의 것은 실증하기에 부족하며 은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후예인)송나라는 그것을 실증하기에 부족하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들이 충분하다면 내가 능히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팔일(八佾)」편, 9장>

子不語怪力亂神
공자는 괴이한 일과 완력에 대한 것,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그리고 귀신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논어』, 「술이(述而)」편, 20장>

이런 공자였으므로 유교적 의미에서의 제례가 조상을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도록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에 가깝다.
그런데 먼 조상까지 추모하여 제사를 지냄으로써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공자 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와 같은 해석은 또 그 만큼 소박한 것이기도 하다. 공자 자신이 효제(孝悌)를 중요한 실천 덕목으로 하도록 가르쳤으므로 조상의 사후에도 공경함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긴 하다. 일단 소박하게나마 살펴보자.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시대의 주(周) 왕실은 이미 이름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주 왕실로부터 분봉(分封)된 제후국들 대부분 - 제(齊)와 송(宋)을 제외하고 - 은 주 왕실과 같은 성씨인 희(嬉)성이었다. 그들은 제후로서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주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을 으뜸으로 치던 전국(全國)시대에 비해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씨족공동체의 유습이 강하게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종법(宗法) 질서는  주 왕실과 공통의 조상을 모시고 있는 각 제후국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중요한 체제였다. 그러므로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은 혈연공동체를 강화하고 주 왕실과 각 제후국들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정치행사였을 것이다. 공자 역시 제례를 중시했으나 다른 제자백가들에 비해 심한 것은 아니었고, 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앞서 말한 것이었다. 공자 역시 제사를 받들 때에는 눈앞에 조상이 있는 듯 하고,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에도 역시 그러한 것처럼 행하라 일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하란 의미였지 그 존재 자체를 믿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공자와 묵자(墨子)는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도덕이 땅에 떨어진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상황으로 보았다. 두 사상가가 현실에 대해 내린 진단은 사실상 거의 동일했지만 이에 대한 해법은 상당히 달랐다. 그 중에서도 귀신의 존재에 대해 공자는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은 태도를 취했으나 묵자는 「명귀(明鬼)」(귀신의 존재를 밝히다)편에서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러워진 까닭은 세상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에 대해 의혹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귀신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의 대행자이기에 존재하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므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주장이다.

비록 『논어』와 마찬가지로 『묵자』 역시 진위(眞僞) 여부
(「겸애」와 「비공」편을 제외하고는 후세의 첨작으로 생각된다)는 물론 이후 30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책으로 추측되고, 이것이 묵자가 반드시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보다는 귀신의 존재를 통해 겸애의 마음을 가다듬는 방편으로 삼으려 한 것이라 이해한다 할지라도 공자의 태도에 비해서는 확실히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이전까지 귀신의 일에 해당하는 제례와 같이 조상을 받드는 일조차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보은지의(報恩之義)로 보았으므로 그 자신이 실제로 원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임금의 권위조차 신에게 부여받은 정통성(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일이 되었다. 겸애와 평화를 주장한 묵자가 후세에 와서는 도리어 현실순응적인 태도로 변화(혹은 상명하복의 전체주의적 강자의 논리화)하는 것을 보면 공자의 합리적인 인본주의적 태도는 도리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기까지 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謨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하길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스스로를 살핀다. 남을 위해 일함에 있어 진실로 성의를 다하였는가? 벗과 사귐에 있어 신의를 다하였는가? 배운 바를 익히지 아니하였는가?"


사마천의 『사기(史記)』 「공자세가」편에는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었는데, 그 중에 육예(六藝)에 통달한 이는 72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본래 육예란 공자가 흠모해 마지않던 주(周)나라 시대에 행해지던 교육과목이었는데,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여섯 가지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기』에서 말하는 육예란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라 하여 사대부의 기초적인 교양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육경(六經)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육예에 통달한 제자가 72명이었다고 하지만 역시 『사기』의 「중니제자열전」편에는 공자로부터 학문을 이어받아 이에 통달한 제자가 77명이라고 한다. 육예에 통달한 제자와 공자의 학문을 이어받은 제자가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공자의 제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료들마다 공자의 주요 제자들을 대략 70명에서 80명 이내였던 것으로 적고 있다. 어쨌든 『논어』에 이름이 나오는 제자는 27명이다. 『논어』 「선진(先進)」편 2장에는 공자가 ‘진채(陳蔡)’(진나라와 채나라)의 들판에서 위난을 당하였을 때 함께 했던 제자들 10명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부른다.

공자는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뛰어나다고 하였다. 또 여기에 나오는 덕행·언어·정사·문학을 사과(四科)라고 한다. 하지만 공문십철에는 공자의 가장 중요한 제자 중 한 명인 증자가 빠져 있고, 또 공자가 평소 덕행을 강조하긴 했지만, 언어, 정사, 문학 등을 그다지 강조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 말이 공자의 말이 아닐 것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증자(曾子, BC 506~BC 436)가 얼마나 중요한 제자였기에 그가 빠졌다고 해서 공문십철(孔門十哲)이 후세의 위작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까? 증자는 공자 만년의 제자로 그와는 나이 차이가 46세에 이르렀다. 이름은 삼(參)이고, 자는 자여(子輿)로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지금의 산둥성(山東省)에서 증점(曾點)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자에 대한 인물평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가 무척이나 신중하고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 중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시장에 따라가려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시장에 다녀온 뒤 돼지를 잡아 삶아주겠노라 약속을 했다. 아내가 거짓으로 약속하는 것을 지켜본 증자는 부모가 자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녀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 하여 실제 약속대로 돼지를 잡아 삶아주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증자가 「학이」편 4장의 ‘충(忠)’이란 말을 실제 생활에서도 실천에 옮겼던 인물이란 반증이기도 하다. 본래 충이란 입(口)과 마음(心)을 하나로 꿰뚫는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다시 말해 ‘속에 있는 마음’과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 꾸밈없이 진실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지닌 본성(本性)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참다운 마음을 뜻한다. 증자는 공자의 사후에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였고, 그를 통해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 『中庸』의 저자라고 알려진 - 에게 이르렀고, 다시 맹자(孟子)에게 전승된다. 훗날 증자는 동양의 5성 중 하나로 높이 받들어진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들 중 비교적 늦게 합류한 편이었지만 공자의 생전에 제자들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나의 도는 하나로써 일관한다(吾道一以貫之)"고 말했는데, 제자들 중 누구도 그 말의 참뜻을 몰라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증자만은 선뜻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뿐’이라고 해설하여 다른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한비자(韓非子)』에 전해진다.

앞서 공문십철이 후세에 더해진 이야기라는 평이 있다고 했는데, 비록 증자가 공자의 중요한 제자였고, 법통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만년의 제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생했던 제자들의 이름 속에 증자가 빠져 있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공자가 언어, 정사, 문학 등을 강조한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은 사실이다. 증자는 공자의 사후 유가의 법통을 잇는 가장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였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자의 다른 제자들과 공자의 법통을 잇기 위한 경쟁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논어』가 집대성된 것이 송(宋)대의 일이고, 실제 『논어』의 편찬자들이 대개는 증자의 법맥을 이은 제자들이라 할 때 증자에 대한 평가가 『논어』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부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봄직하다.

다른 한 편으로 증자가 『효경(孝經)』의 저자라는 설이 유력한데, 증자는 당시 이미 붕괴되고 있던 씨족 중심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봉건제)를 ‘효’라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 저지하고자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학이」 4장의 해석에 있어 앞의 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큰 이견이 없는데 반해 “傳不習乎”의 풀이에서는 ‘傳’의 해석의 차이 때문에 뜻의 차이가 제법 큰 편이다. “傳不習乎”를 ‘배운 바를 익히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해석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라는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논어』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위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를 따르는 것을 고주(古注)라 하고, 주자의 『논어집주』를 따르는 것을 신주(新注)라 하는데 고주에서는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로 해석하고, 신주에서는 ‘배운 바를 익히지 아니하였는가?’로 풀이하고 있다. 다산의 『논어고금주』에서도 주자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한편 퇴계(退溪)는 ‘전하고서 익히지 아니하는가?’로 해석했다고 한다. 『대한화사전』을 편찬한 일본의 모로하시 데쓰지는 고주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