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8.01 천양희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2. 2011.05.26 천양희 - 한계 (1)
  3. 2010.12.02 쳔양희 -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은은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스테인레스처럼 녹 하나 슬지 않는 반듯함도 아니고, 크롬도금처럼 윤기와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인위적인 광택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은 오랜 세월이 주는 은은한 광택이다. 은은하다.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아니하고 어슴푸레하며 흐릿하다. 그러나 그 흐릿함이 주는 온기와 정감은 허기진 위장을 채워주는 장국밥, 할머니가 내어주시는 달지 않은 감주, 어머니가 밥을 푸며 먼저 건네주는 말랑말랑한 누룽지 조각이다.

어쩐지 물끄러미.
시인이 길을 가다 멈춰서서 오랫동안 지켜보았을 그 사람들.

'구두 닦는 사람, 창문 닦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부처의 눈엔 부처가 보이고, 보살의 눈엔 보살이 보인다는, 우리도 익히 알아서, 이미 세상의 때가 묻을데로 묻어서 시인의 웬만한 온기쯤 '가비압게' 개구라로 튕겨낼 수 있는 내공의 빈틈을 겨냥한다.


그러나 시인의 어조는 세상은 다 그런 거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라는 사파무공의 신조를 깨뜨리고, 파헤치는 날카로운 비검이 아니라 은은하게 스며드는 달빛 같은 것이다. 섣달 그믐밤길을 걸어본 이들은 안다. 보름달이 휘엉청 떠오른 밤길이 얼마나 환한지... 얼마나 포근한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빛을 내도록 도와주는 깊은 밤 한 줄기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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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한계

-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 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출처 :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비평사, 1994

*

깊은 밤 세상 만물이 모두 잠든 것 같은 시간에 홀로 깨어난다. 곁사람의 고운 숨소리도, 태어난지 이제 막 7개월 된 딸 아이의 뒤척임도 저 멀리 있다. 갑자기 깨어나 부우우하며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는 냉장고, 초침의 재깍이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저 멀리 한길로 밤새워 북으로 달리는 차량 불빛이 서치라이트처럼 희번득하는 밤에 문득 이제 다 살아버린 듯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세상이란 생각이 악마처럼 창가로 유인하는 밤이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차라리 눈보라도 불면 좋으련만. 한 여름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건, 땀인지, 눈물인지...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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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生覺한다는 건
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출처 : 천양희, 오래된 골목, 2003, 창비


*


마지막 행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는 구절에서의 “지독”은 아마도 “至毒”이 아니라 “至獨”일 것이라고 홀로 생각해본다. 글쟁이에겐 친구가 없다. 오늘의 좋은 ‘벗’은 내일의 지독한 ‘숙적’이며, 오늘의 즐거운 ‘나’는 내일의 지겨운 ‘벗’이다.


실천은 함께 하지만 생각은 홀로 하는 것이다. 남과 견줄 수 없는 공간에서 홀로 궁리(窮理)한 끝에 세상에 풀어놓은 생각이 다른 생각을 만나는 순간, 생각은 비로소 홀로 서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글쟁이는 지독(至毒)하게 지독(至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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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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