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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27 최금진 - 웃는 사람들
  2. 2010.11.10 최금진 - 끝없는 길, 지렁이 (4)
웃는 사람들

- 최금진

웃음은 활력 넘치는 사람들 속에 장치되어 있다가
폭발물처럼 불시에 터진다
웃음은 무섭다
자신만만하고 거리낌없는
남자다운 웃음은 배워두면 좋지만
아무리 따라해도 쉽게 안 되는 것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난다
계층재생산,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려져 있는 어색한 웃음은 보나마나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것
자신의 표정을 능가하는 어떤 표정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웃다가 제풀에 지쳤을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처럼
모두가 골고루 나눠갖지 않는 웃음은 배가 고프다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들을 뚝뚝 떼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낯짝에 공평하게 붙여주면 안될까
술만 먹으면 취해서 울던 뻐드렁니
가난한 아버지의 더러운 입냄새와 땀냄새와
꼭 어린애 같은 부끄러움을 코에 귀에 달아주면
누구나 행복할까
대책없이 거리에서 크게 웃는 사람들이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우르르 몰려다는 웃음들이 있다
그런 웃음은 너무 폭력적이다, 함께 밥도 먹고 싶지 않다
계통이 훌륭한 웃음일수록,
말없이 고개숙이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질만 해야 하는
깨진 알전구의 저녁식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웃음엔 민주주의가 없다

최금진, 『실천문학』, 2008년 겨울호(통권92호)

*

시인 최금진이 제1회 오장환문학상을 받았다.
“병든 서울”을 노래했던 시인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의 첫 수상자로 최금진이라면 그럴 듯하다. 그의 첫 시집 『새들의 역사』를 읽고 그의 시가 좋았던 까닭에 부랴부랴 청탁서를 넣었던 나의 안목에 부응하는 결과다. 그러나 내가 그의 시가 좋았던 까닭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어진다. 그의 시 세계가 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당연히 좋은 시에 대한 독자로서의 반응이겠으나 한편으론 궁기(窮氣)서린 자의 안목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제1회 오장환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며 『실천문학』에 재수록된 ‘수상자 자선 대표작’ 4편 중 첫 번째 시가 <웃는 사람들>인데,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또 그만 ‘썩소’를 날리고 말았다. ‘썩소’ 이른바 ‘썩은 미소’란 말을 네티즌들이 줄여놓은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을 1992년에 처음 들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자 소설가와 가슴 설레는 초대면(初對面) 이후 그가 나를 되돌려 보낸 뒤, 당신의 자식이자 나의 대학 동기이자 당시만 하더라도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했던 나에 대한 평이었다. 그 친구는 불행히도 입이 싼 편에 속했기에 나는 알맹이 그대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칭찬도 있었으나 칭찬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대신 그 말만큼은 가슴에 뼈저리게 자리 잡았다.

남자다운 웃음은 배워두면 좋지만
아무리 따라해도 쉽게 안 되는 것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난다

지금껏 살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인물평은 ‘자신감이 넘치는’이란 말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인물평을 뒤로 하고 ‘씨익~’ 악마처럼 웃는다. 하나는 속으로 ‘빙신들’하고 웃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 ‘속였구나’하며 스스로를 향해 보내는 미소다. 시인의 말처럼 “아무리 따라해도 쉽게 안 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내가 세상을 향해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것”이란 시인의 표현은 주눅들어본 사람이 아니면, 그리고 시적 훈련의 결과이든, 성숙의 결과이든 그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데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지금도 나는 은행, 관공서에 가면 공연히 주눅이 든다. “Mama don't go, Daddy come home”한 환경(다른 말로 '니미씨팔 가정환경 좇도'한 환경)에서 살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계통이 훌륭한 웃음” 앞에서 공연히 자신만만한 척 앉아 있지만 결국 속으로는 주눅 들어 비위 맞추는 웃음이나 실실 흘릴 수밖에 없었던 나를 바라보면서 “웃음엔 민주주의가 없다”는 최금진의 한 마디가 뒤통수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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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끝없는 길 - 지렁이


- 최금진


꿈틀거리는 의지로

어둠속 터널을 뚫는다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 믿으며
흙을 씹는다
눈뜨지 않아도 몸을 거쳐 가는 시간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인데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나올까
무너진 길의 처음을 다시 만나기라도 할까
잘린 손목의 신경 같은 본능만 남아
벌겋게 어둠을 쥐었다 놓는다, 놓는다
돌아보면 캄캄하게 막장 무너져 내리는 소리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다
누군가 파묻은 탯줄처럼 삭은
노끈 한 조각이 되어
다 동여매지 못한 어느 끝에 제 몸을 이어보려는 듯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
어둠에 血이 돈다.

최금진, 『새들의 역사』, 창비, 2007


*

내일모레 내 나이 마흔. 사회적인 까닭이겠지만 남자의 마흔은 최승자가 노래한 여자의 서른과 흡사하리라. 순수한 의미에서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봤다. 일 년 열두 달 일이 아닌 다른 이유로 놀러가는 일을 해본 기억이 없다. 내 나이 스물여섯에 시작한 직장생활이 서른아홉고개에 다다르는 동안 나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폐허다.

최금진의 시로는 첫 대면인데 나쁘지 않다.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라는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갑내기 시인의 비루한 인생행로가 느껴진 탓이라고 해두자. 공(空)하고, 허(虛)하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지렁이의 행보는 앞을 보면 장벽이요, 되돌아보면 제 몸으로 씹어 삼킨 흙들이 뚫어낸 빈 구멍만 남으니 허허로울 수밖에 없는 몸짓이지 않은가. 암중모색(暗●中●摸●索)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
이다. 지금 내 삶은 고스란히 내가 만든 것이다. 안성맞춤으로. 아니 갈 수도, 되돌아 갈 수도 없으니 그것이 삶이다. 그러므로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다”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

어둠에 血이 돈다.


마지막이 그럴듯하다. 명구(名句)다. 지렁이가 간다. 암흑 속으로, 어둠 속으로, 흙바닥 속으로, 삶 속으로, 꿈속으로, 마음속으로. 삶이 왜 부조리하겠는가? 시지프스는 왜? 다시 굴러 떨어질 돌을 올리는 일을 반복하겠는가? 그것이 삶이다. 멈추면 제 한 몸 뉘일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자리. 지렁이가 꿈틀하는 순간, 지렁이가 토해낸 흙으로 먹고 사는 인간들은 몰라도 지구는 함께 부르르 떨지 않을까. 어둠에 전해진 지렁이의 붉은 몸이, 붉은 길이 지구의 혈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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